2002년 우리교회 표어는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이 시대에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깨어진 가정들이 회복되어지고, 무너진 기업들이 회복되어야합니다. 그런데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은 구호를 외친다고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결단과 삶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야베스의 기도를 매일 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 매일 이 기도를 드리시고 계시지요? 그러면 우리 다같이 역대상 4:10절에 나와 있는 야베스의 기도를 함께 암송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우리는 지난 시간 복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살았던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갈렙입니다. 갈렙이 어떤 사람입니까?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했던 사람입니다.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비전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비전을 따라 인생을 산 사람입니다. 그러면 갈렙이 가졌던 비전은 무엇입니까? 저 헤브론의 산지를 정복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언제 갈렙이 그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까?
유다 지파를 대표한 정탐군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탐할 때 하나님께서 갈렙의 마음 속에 그 비전을 잉태케하셨습니다. 민13장 14장을 보면 같이 그 땅을 정탐했던 사람들이 이렇게 보고합니다. "그 땅의 사람들은 아낙 자손들로서 얼마나 크든지 그들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더라, 그리고 그 성읍은 견고해서 죽었다 깨어나도 우리는 그 땅을 정복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 땅에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초전에 박살나고 말 것이다." 10명의 정탐군들은 그 땅을 바라보며 패배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아니 그들을 바라보며 두려워 떨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갈렙의 마음 속에는 도리어 이 땅을 정복하고야 말리라! 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헤브론의 산지를 정복하지 않으면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손상을 받을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 헤브론 산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크고 호전적이고 성읍이 견고하다고 해서 이 곳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리 다른 곳을 다 정복했다 할 지라도 이 곳을 정복하지 못하면 주변 나라의 사람들이, 우리의 후손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약속을 해 놓고도 지키지 못하시는 하나님, 힘이 없고 연약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까 더욱 그 땅을 정복하고 말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렙은 도리어 사람들이 헤브론의 산지를 바라보며 패배의식에 사로잡히고 두려워 떨 때에 나는 이 땅을 정복하여 나의 기업으로 삼으리라!는 비전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 땅을 정복하여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주신 말씀을 통해 그 비전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갈렙이 자신의 비전을 확인시켜주신 말씀이 바로 민14:24절입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 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14:24절)
다른 사람은 다 광야에서 죽었도 너는 나를 온전히 따랐기에 너는 죽지 않고 그 땅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갈렙은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품었던 비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땅을 차지하리라!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 때문에 그 비전을 가졌습니다. 갈렙의 비전은 야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 전능하심을 나타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은 우리가 보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전이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 하는 젊은이들에게도 물어보면 비전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 하게되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말씀해 주시는 것으로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물어보면 아직도 기도 중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지요?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통하여 우리 안에 비전을 품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말씀을 전하셨던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도 그런 말씀을 하셨지 않습니까?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직통 계시를 받아서 청소년 사역에 일생을 거는 청소년 사역자가 된 것이 아니라 청소년만 보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지나가는 청소년들만 보아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서 청소년 사역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부담으로 다가오는 그것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누가 훌륭한 부모입니까? 자녀를 똑똑하게 키우기 보다는 분병한 비전을 갖게 만들어주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분명한 비전을 갖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로 하여금 꿈 꾸는 자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내 자녀로 하여금 많은 것을 보게 해야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것을 보게 하십시오. 경험하게 하십시오. 세계를 경험하게 하시고 세계의 유명한 박물관도 보게 하고 유명한 대학도 보게 하고 연구소도 보게 하십시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비전을 품게 되는 일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비전을 가지고 인생을 사는 사람이 성공적인 인생을 삽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
■ 분명한 비전을 가진 사람
■ 좋은 습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갈렙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본 것처럼 인생의 나이를 초월한 삶을 살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의 인생의 나이 85세이면 양로원에 가 있어야 할 나이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그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어떤 지파도 정복하기를 꺼려했던 그 헤브론의 산지를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땅을 정복하여 자기의 기업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자는 인생의 나이를 초월하여 항상 젊게 삽니다. 항상 도전하는 삶을 삽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출신성분을 초월한 삶을 삽니다. 바로 갈렙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는 출신 성분이 별로 좋지 못한 이방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따라 인생을 살았기에 믿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 비전의 사람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동년배의 사람이었고 ,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동일한 공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한 권은 여호수아의 이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의 이름으로 기록된 성경은 없습니다. 성경의 목록 가운데 갈렙의 기록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쯤 되면 기분이 나쁘지 않겠어요. 배가 아프지 않았겠어요. 사사건건 뒤에서 여호수아를 긁어 내리며 깎아 내리지 않겠어요? 요즘 말로 씹지 않겠어요?
그런데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갈렙은 여호수아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갈렙이 여호수아 때문에 갈등했다거나 질투했다거나 경쟁의식 때문에 잠을 자지 못했다거나 그를 뒤에서 비난하였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갈렙은 철저하게 여호수아를 보필했습니다. 철저하게 여호수아를 도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비전은 여호수아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갈렙에게 주신 비전은 모세의 후계자가 아니었습니다. 저 헤브론의 산지를 정복하여 그 땅을 자기의 기업으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여호와의 신실하심을 만방에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비전이 분명했기에 여호수아에 대하여 시기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일게 더 귀하게 쓰임받는 것입니다.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지위와 영향력은 비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테레사 수녀를 보십시오. 그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렇게 영향력있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낮은 자리에 있어도 얼마든지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어떤 직분이나 지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대표이사가 되고 장군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려고 합니다. 또 교회 안에서도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 것을 자기의 비전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위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지 못한다면 지위만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비전이 아니라 야망입니다.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었다면 주의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섬기는 일에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구제하는 일에 영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야망을 가진 자는 영향력이나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것보다는 그 지위나 자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가진 자는 지위나 자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주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향력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 주신 서로의 비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의 소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게게 주신 비전과 갈렙에게 주신 비전이 달랐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자녀를 다른 자녀들과 비교하지 마십시오. 비교하는 순간 우리는 교만해지던지 비참해집니다. 비교하는 순간 시기하거나 질투하게 됩니다. 갈렙이 만일 하나님이 주신 분명한 비전을 갖지 못해 늘 자신을 여호수아와 비교했다면 85세가 살지 못하고 화병으로라도 일찍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교하지 마십시오. 부르심의 은혜가 다릅니다. 각 자에게 주신 비전이 다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와 다른 교회를 비교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이 시대에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과 서문교회에 주신 비전이 다릅니다.
오늘 우리 안에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있다고 한다면 그래서 갈등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당신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야망을 꿈 꾸고 있는 사람입니다. 야망은 늘 우리 자신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우리 자식을 비교하게 만듭니다. 야망은 지위나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꿈을 가진 자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자리보다는 영향력을 생각합니다. 지위보다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일에 더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
갈렙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갈렙은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은 갈렙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 본문에도 보면 세 번에 걸쳐서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갈렙 자신이 그렇게 말합니다. 다른 열명의 정탐군들은 그곳 사람들을 보고 두려워하여 그들 보기에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했지만 그러나 나는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말합니다.
9절을 볼까요 "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가로되 네가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은 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영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 이번에는 모세가 갈렙을 향하여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말합니다.
14절을 보겠습니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이번에는 성경이 그렇게 말합니다.
이 밖에도 성경은 갈렙을 언급할 때마다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민14:24,32:12,신1:36) 이것을 보면 갈렙의 신앙은 한 마디로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히브리어 원어에 보면 좇았다는 말은 전치사 '아하레'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이 말의 뜻은 '뒤를'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을 직역하면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뒤를 가득 채웠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러니까 갈렙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약속대로 가나안의 땅이 정복될 것을 확실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을 온전히 좇는 신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온전히 주를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 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민14:24절)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들은 누구를 말합니까? 함께 정탐에 참여했던 열명의 정탐군들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열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차라리 여기에서 죽게 해 달라고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과 달랐다는 말입니까? 마음이 달랐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달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주님을 따랐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만을 보았습니다. 아낙의 자손들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그것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그리고그 약속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민14:8)
If the LORD is pleased with us, he will lead us into that land, a land flowing with milk and honey, and will give it to us.
갈렙의 믿음은 단순히 머리 속으로만 동의하고 인정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행동으로 주님을 따랐던 믿음이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행함으로 주님을 따르는 믿음을 가리켜 온전히 좇았다고 말합니다.
함께 애굽을 출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를 따라 나왔지요. 그런데 그들은 열명의 정탐군들의 보고를 받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차라리 애굽에 그대로 놔 둘 일이지 왜 여기까지 데리고 와서 그들의 손에 죽게 하느냐? 차라리 우리가 여기서 죽었으면 좋겠다' 그들은 믿는 다고 말하면서도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습니다. 간격을 두고 좇는 것이 아니라 초강력접착제처럼 딱 붙어 주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그 약속에 대한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갈렙의 믿음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인정하는 믿음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많은 성도들이 믿습니다. '믿사옵고 믿사오니 믿습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주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행함이 없습니다. 요단강이 갈라질 것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 요단의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습니다. 그래서 야고보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말은 갈렙이 45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간직하며 살아왔음을 의미합니다.
갈렙은 45년 동안 하루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나이도 많아지고 오랜 기다림에 지쳐버릴 수도 있지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실 것을 믿고 인내하며 그날을 기다려 왔습니다. 여러분은 몇 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려왔습니까? 어떤 분은 3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포기하는 분도 계십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갈렙은 여호와를 온전히 좇은 사람이었습니다. 환경을 보지 말고 사람을 보지 말고 약속의 말씀을 붙드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에 여러분의 인생을 거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모험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여호와를 온전히 좇는 신앙입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슴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12절)
갈렙은 그의 인생의 나이 85세에도 정복해야 할 산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요 사명이요 삶의 목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정복해야 할 산지가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정복해야 할 산지가 있고 우리 개인에게도 정복해야 할 인생의 고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며 달려가야 할 인생의 푯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이루시고자 원하시는 비전이며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지으시고 가장 먼저 주신 축복이 무엇입니까? 생육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로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정복당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 세상을 정복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문화에 정복당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으로 이 세상의 문화를 정복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 살면서 정복해야 할 산지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비전과 사명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정복해야 할 삶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 안에 죄성이 있고 연약함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내가 정복해야 할 분명한 산지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보고 달려가야할 할 인생의 푯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이고 한번 뿐인 인생인데 아무렇게나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개미의 높이 뛰기
동물 조련사 캐일은 호랑이나 사자등 맹수를 훈련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공 있었습니다. 그는 밀림에서 사로잡은 맹수들을 불과 몇 달 만에 채찍 하나 만으로 마음대로 조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서커스 단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을 벌일 정도였습니다.
케일은 그런 스스로르르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문득 회의가 찾아왔습니다. 이제는 정말 다른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게다가 매일같이 동물들의 으르렁 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신도 싫어졌습니다.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그에게 문득 벼룩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케일이 벼룩을 잡으려고 손을 내 밀자 벼룩은 엄청난 높이로 뛰어 오르며 도망쳤습니다. 그때 그는 소리쳤습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케일은 다음날 맹수 조련을 그만두고 개미를 잡아서 높이뛰기 훈련을 시작했습니다. 개미가 벼룩보다 높이 뛸수만 있다면 이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그래서 개미 조련에 몰두하였습니다. 그런데 맹수 같지 않아서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럴수록 그의 의지는 더욱 확고했습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2년이 흘렀습니다. 그는 자신이 잡은 개미 중에서 가장 우수한 놈을 골라 집중적으로 훈련을 시켰습니다. 그동안 번돈은 모두 날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이 성공을 거두기만 하면 일확천금이 들어올 것이란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개미 조련에 10년이 걸렸습니다. 얼마나 많은 개미가 죽었겠습니까? 그동안 케일의 집은 풍지박산이 났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는지 그중 개미가 일 미터를 뛰어 오르게 되었습니다. 캐일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개미를 상자에 넣고 제일 유명한 서커스단을 찾아갔습니다. 단장을 만나 개미를 꺼내 시범을 보여주며 목이 메어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단장님! 제가 드디어 해 냈습니다. 이 개미가 일 미터도 넘게 높이 뛴단 말입니다."
그러자 단장과 주위의 단원들이 배곱을 잡으며 웃었습니다. 아니 왜 웃으십니까? 이 말에 단장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보게 케일 자네는 쓸데 없는 목표에 너무 세월을 낭비한 것 같구만 개미가 높이 뛰는건 물론 대단히 신기한 일이지 하지만 넓은 서커스 무대에서 그게 눈에 뛰기나 하겠나 그걸 들고 초등학교 앞에 가서 아이들에게나 보여 주게나 아마 좋은 구경거리가 될 걸세...쯔쯪쯧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을 위해 인생을 허송세월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에게 어떤 만족감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방송 프로에 낙시에 미쳐 있는 강태공 할아버지를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3년동안 집에도 들어가지도 않고 봉고차에서 숙식을 하며 낙시질만 했습니다. 그에게는 가족도 자식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금산의 어떤 할아버지는 이북에 계신 부모님이 돌아가셨을것이라고 생각을 해서 48년동안 상복을 입고 사십니다. 갓을 쓰고..다니십니다. .방에 초상화를 걸어 놓고 들어올 때 나갈 때 절을 두 번씩이나 절을 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당신이 정복해야 할 산지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 푯대를 바라보며 달려가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인생의 분명한 목표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겸손히 물으십시오. 바울처럼 "주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오리이까?" 당신이 지금 살아있다는 것은 정복해야 할 산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그 산지를 정복하십시오.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가면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나에게 주신 그 산지를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주님 나에게 이 산지를 주십시오. 내가 이 산지를 취하겠습니다."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는 자에게 그 산지가 정복되어 나의 기업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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