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자의 입술 2002-01-30 13:47:55 read : 2127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전도서10 : 12-15 ( 2001년 7월 15일 )
전 10:12 지혜자의 입의 말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은 자기를 삼키나니
전 10:13 그 입의 말의 시작은 우매요 끝은 광패니라
전 10:14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냐
전 10:15 우매자들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저희는 성읍에 들어갈 줄도 알지 못함이니라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장사꾼이 시장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인생의 비결을 팝니다.! 인생의 비결을 사십시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비결을 사려고 몰려들었습니다. 아우성치며 인생의 비결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이 장사꾼은 글씨가 적힌 종이 한 장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 종이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습니다."인생의 비결을 알기 원하십니까? 당신의 혀를 함부로 사용하지 마십시오. "
사람은 처음부터 말하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든 사람을 보시고는 " 심히 좋았더라 " 라고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아담도 하와를 만나는 순간 포옹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라고 하면 서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은 말로 관계를 맺으며 살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은 단순한 소리의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입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은 그저 내 뱉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말의 배후에는 반드시 영적인 실체가 있다는 말입니다. 단순히 말이 소리의 영역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별소리, 헛소리 잔소리 잡소리' 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말은 소리의 세계가 아니라 영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관계의 영역과 다스림의 영역에 말이 사용될 때 영이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몽롱한 상태에서는 가급적 말을 하지 마십시오. 헛된 말이 자꾸 나오고 그 말로 인해서 인간관계도 깨지고, 공동체도 깨지고, 결국 자기에게도 재앙이 옵니다. 말의 배후에 악한 영의 실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이 생각하는 말은 그 말 자체에 축복이 있고 저주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말을 듣느냐에 따라 축복을 받느냐? 저주를 받느냐가 결정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있어도 자꾸 없다고 하면 그런 사람은 필경 가진 것도 없어지고 맙니다. 알고 모른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알고도 모른다, 모른다 하면 진짜 멍청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데도 " 죽겠다, 죽겠다 " 하는 사람은 지레 죽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실망하는 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났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하는 말을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시고, 하나님은 들은 대로 시행하시기 때문입니다. 축복이건 저주이건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민수기 14 : 2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 아주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말이 꼭 필요한 말, 다른 사람을 살리는 말, 덕이 되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자의 말이 되라.
오늘 본문에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이 되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두 종류의 말을 하고 삽니다. 하나는 지혜자의 말이요, 하나는 우매자의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 지혜자입니까? 하늘로부터 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지혜자요, 그 사람의 말이 곧 지혜자의 말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말씀합니다. " 지혜자의 말은 은혜로우나--"
지혜자의 말은 은혜롭습니다. 그 말을 들으면 힘이 솟습니다.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어집니다. 상한 마음이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됩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긴 것들이 가능하게 여겨집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고 더 듣고 싶어집니다. 왜 그 말이 은혜로우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은혜로운 말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되고, 인격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풍성한 교제를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깊은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말씀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성자는 말할 때 항상 본인에게 세 가지를 묻는다고 하였습니다.
첫째는 이것은 사실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사실은 반드시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말로서 엄청난 죄를 짓는 것이 되고 맙니다. " 해가 되는 말, 덕이 되는 말 "이라는 책을 쓴 캐롤 메이홀 여사는 항상 이렇게 기도합니다. " 주님, 제가 걷지 않은 길에 대해 제 입으로 말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 사실적으로 확실하게 경험한 사건만을 말해야 합니다. 추측, 상상, 예단, 공상, 이런 거 다 사단의 도구들입니다. 거기에 속지 마십시오.
둘 째는 이 말을 해서 저 사람에게 덕이 되는가를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말이 다 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그 말이 무서운 흉기가 될 때도 있습니다. 말을 잘 고르고 선택해야 합니다.
셋째는 이 말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말인가?를 물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만이 하셔야 할 말을 내가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여기에 어마어마한 실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사실에 근거한 말, 남에게 덕이 되는 말, 그리고 내가 경험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를 분별해서 말을 할 때 그 말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자로서 은혜로운 말을 하는 것일까요?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4 : 6절에 "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하였습니다. " 뻣뻣한 배추도 소금을 넣으면 부들부들 해집니다. 소금을 치면 어깨가 뻣뻣하고 목에 힘이 들어간 사람들이 부들부들합니다. 마음이 단단하고 교만한 사람이 소금을 치면 겸손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소금으로 고루게 하라는 말은 마음의 화를 줄이고, 분노를 삼키고, 교만을 없애고, 마음의 평정을 찾아서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이 상처가 되지 않고 축복이 될 수 있게 할까? 하는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라는 말입니다.
" 소금으로 고루게 하라 " 제어되고 정제된 말을 하라, 길들여진 말을 하라. 그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말이 상대방을 자극하고 화를 나게 하는 것입니까? 생각도 해보기 전에,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무의식중에 나오는 말들은 필경 다른 사람에게 화가 됩니다.
깊이 생각하고, 어떤 말을 받았든지 그것을 다시 긍정적으로 해석을 한 다음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금으로 고루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절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훈련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반드시 중직자가 되려고 하면 이 대화학교를 졸업해야 합니다. 교회가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전부다 이 성도들이 하는 말에 달려 있는데 그 중에서 중직자들의 말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향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 대화학교를 나와야 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본받을 만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50 :4절에 "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 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학자의 혀를 달라고 간구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돕는 말, 살리고 축복하는 말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선택으로 되어집니다. 이사야 선지자 같이 훌륭한 사람도 그것을 위해서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습니까?
동물과 사람의 차이점은 이것입니다. 동물은 반사적으로 살고, 인간은 응답적으로 삽니다. 동물은 reaction으로 살고, 사람은 response로 삽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개를 잘 키웠는데도 어쩌다 그만 나도 모르게 개의 꼬리를 밟았다고 합시다. 개는 반사적으로 ' 깽 ' 짖으면서 덤빕니다. " 내가 너를 얼마나 오래 보살펴왔느냐 ? 그런데 그거 한번 밟았다고 이렇게 나오느냐? " 이렇게 개를 나무랄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개니까요. 개니까 개같이 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동물은 이렇게 반사적으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버스를 탈 때 흔히 목격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누가 내 발을 밟았습니다. 깜짝 놀랄 정도로 아픕니다. 이럴 때에 내가 반사적으로 팩하고 그 사람을 한 대 먹였다고 하면 나는 그 순간 개 같은 존재 밖에 못됩니다. 밟혀서 아프지만 슬쩍 쳐다보니 예쁜 아가씨였습니다. ' 내가 아프다고 짜증내면 이 아가씨가 무한해하고 괴로워하겠지? ' 그래서 꾹 참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가씨 편에서 " 어머 미안합니다. " 하고 얼굴을 붉히기라도 하면 " 아 괜찮아요 " 하고 좋은 낯을 보이게 됩니다. 사실은 기분이 나쁘고 아픈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반응이 아니라 응답입니다.
더군다나 우리 믿는 사람은 응답에 있어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깊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먼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확신이 들 때까지 며칠이고 참을성 있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미진하면 금식도 하고 철야도 해서 깊이 깊이 기도해보고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 하에 천천히 응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늦은 것이 아닙니다.
부산에 어느 교회에 이유는 뭔지 몰라도 어머니와 굉장한 갈등을 겪고 있는 가운데 어머니와 따로 따로 교회를 다니는 한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저 너무너무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똑같이 교회를 다니고,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어머니와 등을 지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저쪽 교회 나가고, 그 분은 이쪽 교회를 나오고 갈라져서 교회를 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그 어머니가 병들었습니다. 이제 돌아가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분이 신앙생활을 깊이 깊이 하면서 말씀을 듣는 가운데, 자신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합니다. 이전에는 어머니로 인해서 자기가 고생한 줄 알았고, 어머니로 인해서 좀더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 못간 줄 알았던 그 원망스러웠던 그 과거가 다시 해석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병상에 있는 어머니를 찾아갑니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가 곧 돌아가신다고 합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제가 마음에 풀 것이 있습니다. 어머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도 울고 자신도 울고... 여러분,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석된 가운데 응답하는 입술입니다. 그 응답의 입술에 용서가 있었고, 용납이 있었고, 긍정적인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응답의 언어요, 지혜자의 입술의 말이요, 은혜로운 말이요, 사람을 살리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힘들어도, 이해가 안가도, 화가 나도 반응 적인 말이, 감정적인 말이 아니라 성숙한 응답의 입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매자의 입술의 말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매 자의 입술의 말이 있습니다. 우매 자의 말은 처음부터 우매하고 끝날 때도 우매합니다. 그래서 남도 다치게 하지만 결국은 자기도 그 한 말로 인하여 멸망하게 됩니다.
우매자의 특징은 첫째는 말을 많이 합니다.
14절에 말씀하였지요. " 우매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
말은 곧 사람의 인격이요, 그 사람됨을 표현하는 그릇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선생은 말에 실수가 없는 자는 온전한 자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말을 하다보면 실수를 하기도하고, 생각지도 않은 말이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상처를 주기도 하고, 혹은 말 때문에 잘 진행되는 일도 허사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교회에 새 가족이 오셨답니다. 그래서 권사님과 집사님이랑 반가운 마음으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처음 나오신 분이기에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마음이 뜨거웠지요. 사랑스럽고, 귀하고, 무엇이든지 도와드리고 싶고, --모두들 그런 마음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 말 ' 이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는 것입니다. 말들을 할 줄을 모르는 거예요. 찾아가서는 한다는 소리가 " 고향이 어디죠 " " 나이는 얼마나 되었수? " " 자녀는? "“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지요 ?” “ 재수했나요 ?”“ 삼수 했나요?” “ 시집간 딸은 몇이나 되나요? ” “ 결혼은 몇 번이나 했나요?” “ 이혼했나요?” 어쩌고 저쩌고 이렇꿍 저렇꿍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그 새 가족이 하는 말이 “ 꼭 형사 취조 받는 것 같았습니다.”
라고 말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 오히려 교인 잃어버리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대답하는 사람이 대답하면서 기분이 좋게 하고 될 수 있으면 말을 하는 것보다는 들어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제노는 말했습니다. “ 사람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다. ” 많이 듣고 적게 말하라는 뜻입니다. 서양 속담에 “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 ” 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은 말을 많이 해서 실수하느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말일 것입니다. 어찌 침묵이 미덕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합니다. 허물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말은 곧 부정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잠언 10장 19절에 말씀합니다.
“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잠언 17 : 28절을 보시면 “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 바보 멍청이라도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반은 성자가 되는 법입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덕 있는 사람이요, 입 다물고 있으면 군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저 입다물고 있으면 군자가 되었을 것을 입을 여는 바람에 그 미련함이 노출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 지역에 가장 크고 상당히 오래된 교회에 새로 부임해 오신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부임해오시기는 하였지만 사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정족수를 넘어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전통적인 교회, 오래된 교회, 큰 교회요, 제법 똑똑하고, 사회적 신분들이 되는 분들이 많은 교회, 반대하는 분들이 상존해 있는 가운데 리더쉽을 발휘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10년 넘게 목회를 잘하고 계십니다. 알고 보았더니 그 비결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당회를 하면 안건을 내놓고 아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갑갑하니까 목사님의 생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이분의 목회 리더쉽은 침묵이었습니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지혜로우려면 기를 쓸 것도 없고 성자가 되어서 가슴을 칠 것도 없습니다. 입 한 번 다물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절반은 성자가 됩니다. 입이 방정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으까 하노라 ” 라고 읊은 우리네 시도 있습니다. 얼마나 말이 화근이었으면 그렇게 탄식하겠습니까? 말문을 잘 지키고 입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에 관한 연구에 ‘3대1 원칙’ 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세 마디 듣고 한 마디 말하고, 3분 듣고 1분 말하고, 세 가지를 듣고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 대화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십시오.
그런데 상대방의 말을 듣기 전에, 사연을 듣기 전에 끼어 들어 말을 합니다.
잠언 18장 13절에 말씀합니다. “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 충분히 사연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디 말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세 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말하는 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 말하는 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말하는 자에 대해서 인내를 해야 합니다. 당장에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당장에 말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말하기는 더디하고. 들을 때 속히 듣되 깊이 듣고 믿음으로 해석하고 응답하여 사람을 살리는 여러분의 입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매 자의 입술의 또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장담을 합니다.
14절에 “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를 알게 할 자가 누구이랴 ”
우매자는 말을 많이 하다보니까 장담을 곧 잘 합니다. 지키지 못할 말을 하거나, 감당하지 못할 말을 합니다. 믿음에 뿌리를 두지 않은 허황된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가 말을 합니다. “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신후사, 죽음 다음의 일을 알게 할 자가 누구랴?” 하나님 외에 누가 장래 일을 말할 수 있으며, 인생의 생사화복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감당하지 못하고, 책임지지 못할 말, 장래 일에 대해서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장래는 언제나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을 철저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장래 일에 대해서 말을 해놓고 말한 대로 되어질 턱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신용이 없어집니다. 신용이 없어지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해도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예언한답시고, 축복한답시고, 겁을 주면서, 이상하고도 신비적인 말들을 자주 하는 사람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조건적인 축복을 말합니다. 이렇게 헌금을 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축복을 한다고-- 여러분! 아닙니다. 하루, 하루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보장하십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순간, 순간의 삶을 통해서 이룬 인격의 결정체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의 내 마음이 중요하고, 내 심령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비결은 순간, 순간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진실한 것입니다. 그 정직과 진실함 속에 진실한 입술의 열매를 맺어 사람들을 세워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파멸을 가져오는 우매자의 입술의 말
또 한가지 오늘 본문의 전도자는 우매자가 당할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15절에 “우매자의 수고는 제각기 곤하게 할 뿐이라. ” 아무런 소득도, 축복도, 유익도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말을 많이 하고, 장담하고, 허황된 말을 하면 그렇게 말하는 우매자도 망하지만 그 말을 듣는 사람도 곤하게 한다는 말입니다. 나도 망하고 너도 망하고 공동체도 망합니다. 사업하시는 분들이 우리 사업 안됩니다. 그러면 어느새 그 소문이 그 지역에 다 퍼져서 진짜 안됩니다. 좀 안되어도 잘됩니다. 해야 잘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 참 은혜가 넘칩니다. 사랑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진짜 사랑이 가득합니다. 조금만 부정적인 말을 해보세요. 이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가 그 소식을 금방 듣습니다.
우리나라 어려운 때를 지나가고 있는데 다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좀 힘들어도 ‘ 잘 될 것입니다. 나아질 것입니다. 회복이 될 것입니다. 함께 수고하십시다.’ 하면서 이 고비를 헤쳐가야지 좀 배부르면 머리에 띠 두르고 데모하고 그러면 잘 되려고 하다가도 안됩니다. 5공 때, 6공 때 데모 할 때는 동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배불러서 한다고 합니다. 데모한 번 할 때마다 외국의 신용평가기관에서 평가를 절하합니다. 외국의 기업가들이 찾다가도 되돌아가 버립니다. 사람의 말이라는 것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 사람의 말을 커다른 배의 키와 비유했고, 불의 혀에 비유했습니다.
배가 아무리 커도 지극히 작은 키에 의해서 움직이고, 성냥개비 하나에 의해 붙은 작은 불은 나중에 온 산을 다 태울 정도로 퍼집니다. 그렇듯이 사람의 말이라고 하는 영향력이 이처럼 무섭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 (시 143 : 3)
입술의 문을 지켜서 불필요하고, 부정적이고, 허황된 말은 삼가고 대신 사람을 살리고 축복하는 입술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정을 세우고, 교회 공동체를 축복된 공동체로 세워가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한 순간도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벗어나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실수 할 때도 있고, 절망과 낙담에 빠질 때도 있고, 막다른 골목에 들어가 자포자기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느 순간도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두 손을 벌리고 사랑의 품으로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안에 있을 때만 사람을 살리는 생명의 언어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주일날, 두 친구가 미국 뉴저지주의 칼드 웰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다가 술과 싸움으로 밤을 지새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마음이 찜찜해서 서로 말도 않고 걷고 있는데, 마침 눈앞에 교회가 보였습니다. 한 친구가 마음이 괴로우니 예배에 참석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괴로운 마음을 술집에 가서 풀자고 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 각자 원하는 곳으로 갔습니다.
이 때 교회를 택한 청년은 나중에 미국의 22대, 24대 대통령이 되어 훌륭한 업적을 남긴 유명한 클리블랜드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친구는 변호사가 되었는데 그만 범죄와 술에 빠져 형무소 생활을 하다가 인생을 허비하였습니다.
클리브랜드 대통령은 가끔 교회에서 이렇게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염치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찾아가 그 품에 안겨야 합니다. ”
하나님께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그 품안에 안기셔서 그분의 한없는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십시오. 강퍅하고 상처 난 심령이 치유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희망의 언어, 생명의 언어들이 공급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덕일의 가족 여러분! 우리가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른 것처럼, 입술의 언어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살기고 하고 죽기도 합니다. 이제 여러분의 입술에 하나님의 말씀이 충만히 새겨져서 사람을 살리는 언어, 복음을 증거 하는 입술, 교회 공동체를 세워가고, 가정과 이 사회를 맑고 밝게 만드는 축복의 입술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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