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쓰는 사람 2002-03-11 11:32:01 read : 2071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삼상 16:1-13, 행 13:20-23 // 2002.03.03
I. 쓰임 받는 행복
강아지도 고양이도 똑같은 애완동물입니다. 고양이보다는 사람들이 강아지를 더 귀여워하는 것 같습니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요. 고양이란 녀석은 열 번 잘해 주다가 한 번 서운하게 하면 그것만 기억하고 주인을 멀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강아지는 열 번 서운하게 하다가도 한 번 잘해주면 그 한 번을 기억하고 주인을 따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강아지가 고양이보다는 더욱더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사람들은 강아지를 곁에 두기를 더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는 고양이 같은 사람이 있고 강아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열 가지 좋은 일이 있다가 한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하면 그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고양이 같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아지처럼 한 가지 좋은 일이 있으면 그것을 생각하며 찬양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 사랑하고 또 쓰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언제 행복할까요? 미쳐 일할 수 있는 일거리가 있을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 받고 사랑할 수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꿈 꿀 수 있는 소망이 있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진정한 행복을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이 쓰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저는 하나님에게 솔직하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아니면, 다윗에게 하나님의 마음에 들만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하나님이 선택했습니까?'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첫째, 이 두 질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버린 적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아무리 약자라도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 그는 위대하게 쓰임 받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쓰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할 일이 있다고 하는 것, 쓰임 받고 산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일찍이 루소는 말하기를 "이 세상에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한 번은 존재하기 위해 태어나고 또 한 번은 일하기 위해 태어난다. 때문에 사람은 자기 사명을 발견하기까지는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이라고 다 그릇이 아닙니다. 쓰임 받고 사는 그릇이 있고 쓰임 받지 못하는 그릇이 있습니다.
영국 속담에 "왕의 밥그릇도 깨지면 강아지 밥그릇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 전 한국을 다녀간 인도네시아 오바쟈 목사는 'You can be a leader.' 당신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고 그 구호를 들은 교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전에 사로잡혀 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셀교회가 되는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안에는 이 사역자 직분에 대한 한가지 비극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을 하나의 계급으로 생각하고 있는 커다란 착각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직분은 지배하거나 군림하는 계급이 아닙니다. 지배할 수도 없고 군림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사역이 있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잘 섬기기 위해 늘 새롭게 준비하고 훈련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
섬길 수 있는 교회가 있고, 일할 수 있는 일터가 있고, 내가 섬길 사역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역자가 되었다고 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사역은 지식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돈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더구나 이름 주어졌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유능한 사람인데도 버림당한 사람이 있고 무능한 사람인데도 크게 쓰임 받은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버림받은 사람의 대표로 사울을 들고 있고 쓰임 받은 사람의 대표로 다윗을 들고 있습니다.
오랜 후에 있었던 사도 바울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행13:22)
「내가 그를 쓰겠다」- 다윗을 쓰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버리시고 어떤 사람을 들어 쓰십니까?
II. 하나님은 약자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쓰신 첫 번째 이유는 대단히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다윗이 약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들어 쓰십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갑니다. 이새는 일곱 아들과 함께 몸을 성결하게 하고 사무엘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그 일곱 아들이 다 지나가도록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새의 아들 8형제 중 막내로서 아버지도 그에게 별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왕이 될 면접시험에 다윗은 빠져 있습니다.
그때 사무엘이 묻기를 '네 아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의 대답이 사무엘상 16:11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여기 말째라는 말은 단순히 형제 서열상 말째라는 말만은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 약자였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택했습니다. 약자를 택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은 달랐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를 원하십니까? 자기 자신이 말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약한 자,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사울 임금이 버림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몰랐습니다. 왕이라고 제사장이 하는 제사까지 다 집례할 수 있을 줄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멜산에는 자신을 위하여 승전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울 임금을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약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의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 "큰 자"라는 이름을 바꾸어 "작은 자" 즉 바울 이라고 고쳤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고, 성도 중에서도 작은 자라고 말했으며, 죄인 중에서도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큰 자로 남아 있을 때 친히 나타나 대적하셨고 작아 질 때 크게 들어 쓰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쓰십니다. 작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스스로 말째라고 여기는 사람을 첫째로 들어 쓰십니다.
오늘 본문 11절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이 말은 '말째가 하나 있기는 한데 만나 보나마나입니다. 신통한 구석이 없습니다. 그 아이는 아닙니다.' 이런 뜻입니다.
아버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형님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말째야, 우리 형제들 가운데 임금이 나올 모양이다.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를 만나러 갈테니 넌 여기서 양을 치고 있거라."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버지와 형님들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다윗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분명 난 아니야. 난 심부름이나 해야지.'
보십시오. 그의 부모는 그를 부정했습니다.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들도 그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인정했습니다. 12절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그다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바로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No 하고 당신 자신마저도 No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Yes 하시면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사역자, 쓰임 받는 사람이 됩니다. 믿습니까?
III. 하나님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두 번째, 우리를 주목시키는 단어는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이새의 아들 가운데 왕이 나온다면 다윗도 관심을 가지고 쫓아 왔을 법도 한데 다윗은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묵묵히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높은 것도 없고 낮은 것도 없습니다. 귀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습니다. 자신이 맡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축복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옥중에서 모범적인 죄수로 일을 하고 있을 때 부름을 받고 쓰임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은 깊은 밤 성전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을 때
베드로는 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불러 쓰셨습니다.
특별히 '양을 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은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베들레헴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떼를 치다가 천사의 음성을 듣고 아기 예수께 경배했습니다.
다윗이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장차 하나님의 양떼인 이스라엘을 통치하게 될 것이라는 암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이 맡은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식한 사람도 쓰십니다. 무능한 사람도 쓰십니다. 죄가 많은 사람도 쓰십니다. 그러나 책임감이 없는 사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쓰는 법은 없습니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두 어린 양입니다. 때문에 자기라는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날마다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을 경험하므로
*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성실한 자녀가 되어 자신이라는 어린 양을 잘 지켜야 합니다.
* 자신의 믿음을 잘 키켜야 합니다.
* 그리고 내게 맡겨진 사람들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동생을 지키기는 커녕 동생을 해친 가인에게 물었습니다.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때 가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니이까" 가인은 중요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벨은 아버지 어머니나 지키는 자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해쳐도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가인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족, 우리의 셀목장 가족을, 믿음의 가족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사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맡겨진 사역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심판의 기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형님들이 다 떠나간 그 자리에서 혼자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IV.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신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이유가 본문 16:7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오늘 우리 시대는 외모를 날씬하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목숨을 겁니다. 각종 진귀한 화장품, 성형수술, 심지어 심한 부작용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주신 몸을 어느 정도 건강하고 아름답게 지키는 일은 좋은 일이지요. 그러나 중심을 가꾸는 일은 그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됩니다.
이새의 일곱 아들을 다 거절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이 어쨌다는 이야기입니까? 다윗의 중심에 무엇이 있었다는 말입니까?
오늘 본문을 한 장 넘겨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동서고금 남녀노소 모든 사람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멋진 다큐멘타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모두 주눅이 들어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던 차에 소년 다윗이 나타나 사울 임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나 정도의 용맹이면 해 볼만 합니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이 보입니다. 일꾼들의 눈에는 일이 보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교회가 보이게끔 되어 있습니다.
적장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계속해서 그는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다윗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철저한 하나님 중심주의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만 두려워했고 그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능력만 믿었습니다. 그가 무서워한 것은 블레셋의 거인이 아닙니다. 적군의 힘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면 골리앗까지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높이는 다윗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중심을 보셨습니다.
옳습니다. 역대하 16:9에서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어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로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나도 저를 버렸다" (삼상15:23)고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높이실 때 그를 높여 주셨습니다.
이제 결론은 분명합니다. 인본주의 - 자기 중심, 자기 고집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신본주의 - 하나님 중심,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 것이냐 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버리는 사람이 되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크게 쓰는 사람이 되느냐를 결정하는 바로메타가 됩니다.
난잡한 여자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여자들이 결혼하겠다고 덤빕니다. 목사님께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목사님 어떡하면 좋습니까? 그러나 단 - 윤리, 도덕, 하나님 말씀... 그런 말은 빼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동물과 사람의 차이는 윤리, 도덕, 하나님 말씀에 있는 거지요. 그렇다면 당신이 나를 잘못 찾아왔습니다. 동물병원, 수의사를 찾아가 보십시오.”
골리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골리앗이 되고, 다윗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면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사랑을 받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 골리앗 가치관 : 칼, 창, 단창, 큰 키, 외모, 자신의 힘
* 다 윗 가치관 :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을 의지함, 자신의 약함, 하나님의 능력
J. L. 코미스키라는 사람이 전 세계에서 쓰임 받는 셀 교회 리더를 연구해 보니까, 그가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지식을 가지고 있느냐, 은사가 있느냐 하는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얼마만큼 영광스러운 교제를 가지는가? 내게 맡겨준 사람들을 얼마만큼 사랑하는가? 그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겨신 사명과 소명을 위해서 얼마나 헌신하며 살아가는가? 이것만이 쓰임 받는 지도자와 버림 받는 지도자의 바로메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하십시오. 여러분이 하는 일마다 성령님을 요청하십시오. 환영하십시오. 무한대로 여러분의 삶을 열어놓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충만한 만큼 하나님 앞에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V.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쓰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을 쓰십니다.
본문 마지막절 사무엘상 16:13에 보면 다윗이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 "이 날부터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령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사무엘상 18:10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야료란 이유 없이 생트집을 잡고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귀신에게 붙들리면 귀신의 종이 되고 성령에 감동되면 성령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다윗은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는 기도 가운데 이런 말을 합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 내지 마시고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시51:11) 다윗은 궁궐에서 쫓겨 나는 것보다 주 앞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다윗은 왕관을 거두어 가는 것 보다 성령을 거두어 가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재물과 권세를 빼앗기는 것보다 주의 은혜를 빼앗기는 것이 더 두려운 줄 알고 살았습니다.
VI. 다섯째,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사람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지도자로서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까지 당당히 댓가를 지불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일로 인해 사울 임금의 시기를 받아 쫓겨다녀야만 했던 고통스런 훈련의 시간들을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은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힙니다. 이때 귀신을 쫓아내는 음악가를 찾게 되는데 이때부터 다윗은 왕궁에서 살게 됩니다.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궁에 들어와서 임금이 하는 일을 어릴 때부터 배우도록 하나님이 그를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사울 임금의 미움을 받은 다윗은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 왕이 되기까지 자그마치 15년간을 쫓겨다니는데 때로는 엔게디 굴속으로, 때론 이웃나라 블레셋과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팔레스타인 산지, 평야, 사막 구석구석 사울의 군사를 피하여 도망 다녔지만 그것이 도망 다닌 생활이 아니라 전국의 곳곳, 이웃나라까지 군사적 지리를 몸소 답사하고 익히는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생활 가운데서 성경에 분명하고도 똑똑히 기록되어 우리의 주목을 끄는 단어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더라" (삼상 16:18, 18:28)는 말씀입니다.
인간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구약에서 무려 800번 신약에서 무려 60번씩이나 그와 하나님의 관계를 기록할 만큼 하나님의 관심 안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곧 사울의 질투심을 일으킨 원인이 되었지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는 백성의 노래에 시기심도 생겼고, 아들 요나단에게 왕위를 물려 줘야 할텐데 왕위가 다윗에게 넘어가게 생겼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윗을 죽일 계획을 합니다.
* 거문고 타는 다윗을 벽에 박아버리겠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집니다.
*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자"고 계획하기도 합니다. 미갈을 주어 사위를 삼을 테니 블레셋 사람의 양피 1백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블레셋 사람 200명을 죽이고 양피를 갖다 바칩니다.
* 또 창을 던져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번엔 잠자는 침상체 들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아내 미갈이 다윗을 도망가게 하고 인형 우상을 눕혀둡니다.
* 친구 요나단의 도움으로 살아남이 몇 번이었습니까?
* 그러는 가운데, 어느 날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찾아 나섭니다. 몇날 며칠을 찾다가 한 번은 사울이 변이 마려웠든지 군사들을 밖에 두고 굴속에 들어가 겉옷을 벗어둔 채 볼일을 보는 동안 다윗의 군사들이 임금을 죽여 버리자고 종용합니다. 이때 다윗은 겉옷 자락만 칼로 슬쩍 베고는 뭐라고 합니까?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됨이니라"
* 하나님의 명령은 어떤 일이 있어도 어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입니다.
* 하나님이 하신 일은 어떤 경우에도 파괴할 수 없다는 하나님 중심적 사고 방식입니다.
* 하나님이 세운 사람을 사람이 모독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망령된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 하나님의 행동만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다. 하나님이 행동하신다. 믿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이유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훈련의 기회, 자신이 치루어야 할 고통스런 댓가를 흔쾌히 치루어 갑니다.
리더쉽 훈련가 존 맥스웰은 리더로서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몇 가지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Reality Leadership 중에서)
1.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
-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가 없습니다.
2. 변화는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 하나님은 때로 우리가 가보지 않은 길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이때 찾아오는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코 긴 시간 동안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
3. 변화를 위해 기꺼이 값을 치루기로 작정하라.
- 만약 변화가 당신에게 댓가를 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4. 당신 자신이 변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알아라.
VII.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생을 살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1. 나는 연약하기 때문에 큰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말째를 부르셨습니다.
- 기억하십시오. 세상 모든 사람이다 부정하고 No! 라고 말해도 하나님이 긍정하시고 Yes! 하시면 당신의 생은 긍정이 될 수 있습니다.
2. 당신 자신을 잘 지키십시오.
- 당신에게 주어진 양떼들, 하나님과의 관계, 당신의 영성, 당신의 믿음, 당신에게 맡겨진 사역을 소중히 지키십시오.
3. 하나님은 당신의 중심을 보십니다.
- 이 땅의 가치관, 골리앗의 가치관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늘의 가치관, 다윗 가치관으로 사십시오. 예수님 이름의 권세를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분을 의지하십시오.
4. 성령의 임재와 권능, 그분의 감동하심과 함께 하심을 잃지 마십시오.
- 역사는 그분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그 분의 자원과 능력을 구하십시오.
5. 이 일을 이루기까지, 당신이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 받기까지 치루어야 할 댓가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쓰시겠다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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