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종노릇 하십시오 2002-03-11 10:52:16 read : 1858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갈 5:13-15 // 2002-03-03
오늘은 3.1절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일본의 식민치하에서 민족의 자유를 얻기 위해 봉기한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제목은 이것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있는 것으로 들려지지 않습니까?--"서로 종노릇하십시오." 그런데 본래 이런 역설적 주장을 처음 한 사람은 사도 바울 이었습니다. 본문이 포함되어있는 갈5:1에서 그는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고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은 갈5장을 가르쳐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대헌장'(마그나 칼타)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늘의 본문인 13절에서는 다시 '종노릇 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했을까요? 자유로 육체의 기회가 되지 않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우리가 얻은 자유가 진정한 자유가 되기 위해서 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본문 앞에서 그리고 이 민족의 자유를 추구함을 기념하는 이 주일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성경은 우리에게 왜 종노릇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1.자유함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자유를 얻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죄에서 용서함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선언으로 우리가 다시 죄를 범할 가능성에서까지 자유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지만 언제든지 죄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얻은 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선 새로운 종속이 필요합니다. 이 말의 의미를 얼마 전에 다루었던 엡4:25이하의 말씀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25절에 거짓을 버리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거짓에서 용서를 받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짓말을 중단합니다. 우리는 거짓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말이 우리가 거짓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잠시동안 거짓을 중단하고 있을 뿐 거짓말장이를 완전히 면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언제 거짓말장이를 면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거짓을 중단한 상태만이 아닌 참말을 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거짓말장이가 아닌 참말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참의 노예가 될 때 비로소 거짓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의 종이 안되려면 참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가지만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엡4:28에는 도적질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가르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우리는 온갖 도적질의 범죄에서 용서를 얻습니다. 이제 우리는 도적질을 중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우리가 도적질에서 온전히 자유해 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어쩌면 그는 잠시만 도적질을 중단만 한 상태일지 모릅니다. 그는 언제 또다시 도적질하는 자리로 돌아갈지 모릅니다. 언제 그는 도둑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날까요? 그것은 도적질을 중단만 한 상태로는 부족합니다. 그가 이웃들에게 구제하기 시작할 때 그는 이제 비로소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 아닌 '남에게 베푸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가 불의의 종을 면하려면 의에 종속된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바울사도에 의해 롬6:15-18에서 다시 분명히 설명됩니다. 그래서 죄에서 자유를 얻은 사람마다, 의의 종노릇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자유는 온전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2.자유함의 위험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는 위대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모든 가치 있는 선물에는 선용과 남용의 가능성이 공존합니다. 성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성이 선용될 때 이것은 가정의 행복을 지키는 제일의 요소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용되기 시작할 때 성은 가정붕괴의 제일의 요소가 되지 않습니까! 돈을 생각해 보십시오. 돈은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혹시 돈을 싫어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제가 아는 평신도 지도자 한 분이 책을 썼는데 책제목이 "나는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입니다. 아주 솔직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은 선물입니다. 그러나 돈이 잘못 우리의 탐욕으로 남용될 때 수많은 비극들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유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우리를 구속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고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 하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인 우리가 참 자유 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분이십니다. 기독교신앙은 결코 율법주의와 같이 우리의 행동의 강령을 만들어(해야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우리를 구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 갈라디아서 전체를 통해 그리고 본문 2-12절에서 율법주의적 멍에를 메지 말라 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권면이 우리가 마음대로 죄를 지을수 있는 자유를 허락한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표현할 때 기독교는 율법주의가 아니지만 동시에 기독교는 무율법주의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유에는 언제나 방종의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13절에서 바울은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경계합니다. 자유가 남용되는 그 순간 우리는 죄의 종노릇하는 자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소중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의의 종노릇하고 거룩의 종노릇 할 때 우리의 자유는 지켜지는 것입니다.
3.자유함의 관계를 지켜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추구하는 정치적 정체성은 공식적으로 자유 민주주의 입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한 사회속에 잘 정착되어 나가기 위해서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머리가 시키는대로 말고 가슴이 시키는 대로 대답해 보셔요. 피부적 으로 느끼는 우리사회의 문제--특히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가 개선하자고 소리치는 문제--무엇입니까? 질서가 아닙니까? 왜, 질서가 중요합니까? 나의 자유함이 다른 이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오늘의 성경은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질서를 지키자는 그 정도의 상식 수준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들 서로의 관계에서 참으로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입니다. '종노릇'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섬김'(serving)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참으로 자유를 원한다면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갈라디아서 전체와 본문을 통해서 두가지 종류의 섬김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율법에 의한 섬김'과 '사랑에 의한 섬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전 우리의 이웃에 대한 섬김이 율법에 의한 섬김이었다면 이제 우리의 이웃에 대한 섬김은 사랑에 의한 섬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사요, 성경학자였던 M.R.Dehaan은 이것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한 부자집 주인이 한 여인을 하녀로 고용하였습니다. 그녀의 주인에 대한 섬김은 법(혹은 계약)에 의한 의무적 섬김으로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주인과 여인사이엔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들은 부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 여인의 이 남자에 대한 섬김의 방식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이 남자가 여인에게 하루에 봉사시간을 정하겠습니까?(오전9시-오후5시) 그리고 그 봉사에 대한 봉사료를 지불하겠습니까? 아니 이 여인이 봉사료 지불을 요구하겠습니까? 봉사료를 지불 안했다고 파업을 하겠습니까? 이 남자가 이 여인에게 일일이 하루종일의 일과표를 정해 주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법(계약)아래 있지 않습니다.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9시-오후5시가 아닌 저녁에도 한밤에도 이 남자를 향한 봉사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마구 해댑니다. 그리고도 이 여인은 전처럼 이 남자에게 오버타임에 대한 급료지불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대답은 하나입니다. 그녀는 법아래서 고용된 종으로서가 아닌 남편을 사랑하는 아내로 일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법이 요구하는 그이상의 일을 성취해 냅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만이 인간관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사랑 안에서 서로 종노릇 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런 사랑과 섬김의 공동체만이 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목장교회가 이런 사랑의 섬김으로 우리의 피곤하고 고독한 이웃들을 섬기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디에서 우리들이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대답을 바울은 본문 다음에 나오는 16절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 비밀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16절)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하면 그렇게 살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도 우리안에 존재하는 육신(죄성)의 지배를 받아 살면 불신자와 조금도 다름없이 투기하고 분리하는등의 육신의 열매(19절이하)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배아래 있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22절).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은 성령 충만없이 그 어떤일도 행하기를 원치 않았고 그 누구도 만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멘토였던 무디 목사님의 일화를 이렇게 전합니다. 한번은 무디 목사님의 미국 매사추세츠에서 열린 노츠휠드 성경수양회(Northfield Bible Conference)에 영국에서 귀족 손님들이 방문하여 참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영국에는 손님이 오면 복도에서 일하는 종(Hall servant)이 있어 밤새 손님의 구두를 닦아놓는 습관이 있었는지라 무디 목사님의 참모들중에 이 습관을 아는 이가 있어 어떻게 할것인가 라는 토론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결론은 여기는 미국이니까 그만두자 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토론소식을 한사람이 무디 목사님에게 전하면서-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묻자- 그는 빙그레 웃으시며 "글쎄, 주님께 물어볼까" 하더니 머리 숙여 한동안 기도를 한 후 잠자리에 드셨다고 합니다. 그 이튿날 아침 열 사람에 가까운 영국 손님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왔을 때 그들의 구두는 모두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인의 삶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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