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어디에? 2002-03-11 10:33:26 read : 1488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 2:41-51> 2002년 3월 10일
□ 예수는 어디에?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누가복음 2:41-51>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관하여는 별로 기록이 없습니다.
누가복음 2장 40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라는 말 이외는 없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은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었기 때문에, 그의 성장 과정을 자세히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먼저 영과 육이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하였고, 그리고 지혜가 충족하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그에게 있었다는 것으로 만족하다고 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성장 과정의 기록입니다.
사실 우리 모든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의 성장 과정보다는 그가 어떻게 살고 갔느냐가 더욱 큰 비중을 차지하는 줄 압니다.
비록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어떤 인물이 되어 사회와 민족을 위하여 공헌하였는가에 따라 평가는 달리하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지난번 3.1절 새벽에 와서 간증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었던 이명박장로의 어린 시절에 보니, 그가 얼마나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하였는가를 우리 모두 듣고 새로운 교훈을 받았던 바가 큰 것 같이, 사람의 성장 과정에서 어릴 때에 관한 기록이 간단하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어린 시절의 기록은 단 한 줄 속에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서, 지혜가 넘쳤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항상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열두살이 되던 해 그 부모들이 예수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함께 동행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세가지 큰 명절과 같이 지켜야하는 절기가 있었습니다.
유월절(무교절)과, 맥추절(첫 열매 드림), 수장절(수확 후 감사)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출23:14-17) 일년에 세 차례씩 유대인의 남자들은 절기에 참여하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의 부모들이 예수님이 12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가 절기에 참석하였습니다. 절기가 되면 사방 각지에서 서울로, 서울로 모여들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많이 모였겠습니까!
저도 시골에서 자라면서 보면, 5일 장이 열렸는데, 어릴 때는 장에 따라가기를 그렇게 기다렸던 일이 기억납니다.
더욱이 민족 고유의 절기 즉 <단오>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납니다.
단오 날에는 그네 타기, 씨름 대회, 각종 놀이들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때 구경도 구경이지만, 먹거리가 제일 생각이 났습니다.
요즘에는 얼마나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자라던 어린 시절에는 아이스크림은 생각도 못했고 어름과자(아이스 케익) 뿐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만 좋은 것을 먹고 우리 한국 사람들은 모두 찌꺼기들이나 먹어야 할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일본 말로 고리가시 하나도 변변하게 먹을 수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래도 사람 구경하고 먹거리 구경하고 그런 것을 보느라고 명절이 되면 공연히 마음이 들떴던 기억이 납니다.
유대인들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북적대던 절기의 기간이 다 마치고 이제 각각 고향으로 다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보고 들었던 얘기들을 주고받으면서 각각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그만 예수가 동행하는지 않았는지도 모른 채 이야기 꽃을 피우며 내려가다가 하룻길을 가서야 비로소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당황하여지기 시작하면서 아이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늘 본문대로 보면 잃어버린 예수를 찾아 친족들과 아는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하다가 사흘만에 다시 예루살렘에 와 성전에서 비로소 예수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탔었겠습니까?
저도 아이를 시장에서 한시간 동안 할머니가 데리고 집으로 간 것을 모르고 잃어버린 줄 알고 애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게 납니다
예수님의 부모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사흘동안이나 잃어버렸던 아이를 만났으니, 얼른 나오는 말이 2장 48절에 있습니다.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너 왜 우리를 근심하게 했느냐?" "너를 찾느라고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근심하면서 나를 찾아요?"
"아,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을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 말은 내가 내 집에 있는데 왜 나를 찾아 헤맸다는 것입니까? 라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깊은 영적 교훈을 되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1. 오늘도 예수 잃은 크리스천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와 가장 가까이 지내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수를 잃어버린 경우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저들은 주일이면 꼬박 꼬박 절기는 잘 지킬 수도 있습니다. 저들은 주일을, 절기(주일)를 지키려고 교회로 모여옵니다.
대형 교회들일수록 훌륭한 예배 프로그램을 잘 준비하여 드립니다.
각종 집회시마다 아름다운 찬양대의 찬송이며, 열정적인 찬송 부르기며, 성경퀴즈 대회며, 봉사 프로그램이며, 많은 볼거리들이 많이 행하여집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로 말미암아 도리어 예수를 잃어버리고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들이 없지 않는지 깊이 살펴야 하겠습니다.
신앙 생활이 하나의 <이벤트>, 즉 교회의 행사 참석 이상이 되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개인의 인격과 생활에서 예수는 보이지 않고 단순히 교회에서 하는 절기들에만 참석하는 그런 경우를 말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예수를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한 문제입니다.
오늘도 예수 잃어버린 그리스도인들, 예수가 그저 동행중에 있겠지라고 착각 속에 신앙생활 하고 있는 집사, 권사, 직분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없이 예수의 일군이라고 자처하고, 예수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만 착각하고 있는 크리스천들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것입니다.
아마 일주일 동안 절기를 기키면서 일어났던 일들을 예수의 부모들은 정신없이 얘기하면서 하룻길을 걸어왔을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행사들은 부지런히 참여하면서도, 그리고 그런 일에 관하여는 이런 저런 얘기들을 많이 하면서도 정작 예수를 잃어버린 경우들이 없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남미에 선교를 할 때,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남미에는 성당은 많으나 하나님은 없다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가보니 그러했습니다. 남미의 도시들을 보면 모두 도시 중앙에 큰 성당이 중심이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성당이 그 도시의 센터가 되어 있습니다.
볼리비아의 싼타크로스라는 도시를 보면 맨 중앙에 성당이 서 있고, 성당을 중심으로 원으로 도시가 설계되었는데 원도 이중, 삼중, 사중의 원으로 도로망이 사통팔달로 뚫려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당이 있지만 그 성당에는 하나님이 살아졌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남미의 모든 문화가 카토릭 문화이지만 실제 그들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적인 말일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은 어떻습니까?
오늘의 한국의 크리스천들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정작 생활 속에서 예수를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 조차 모르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없지 않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2. 그러면 잃어버린 예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의 부모들은 잃어버린 예수를 친척들과 아는 사람들 중에서 찾으려 했다고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사람에게서 예수를 찾으려고 합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에게서 예수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처음 교회에 나오다가 교회의 사람들과 무슨 안 좋은 관계로 다시 세상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를 어디서 찾으려고 하였는가 하면 사람들 틈에서 예수를 찾으려고 한 결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부모들이 처음 시도했던 일입니다.
그렇게 찾았지만, 결국 찾지 못하였습니다.
사흘동안 찾으면서 다시 예루살렘까지 올라왔다고 하였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를 찾으려고 한다면 영원히 찾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령 절에 나가는 사람들도 부처를 어디에서 찾으려고 합니까?
절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부처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진리는 진리대로 만나야 할 곳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사람들을 보면 안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어디에서 찾았습니까?
결국 <성전 안>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서기관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주고 받으며 있는 예수를 찾아 만났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였나이까?" 라는 말씀에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의 성전>에서 만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이란 <말씀>이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란 <제물>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하나님의 성전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는 곳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날 참으로 이상야릇한 집회들이 많습니다.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을 퍼주는 집회들이 있는가 하면, 온갖 각색 병을 낫게 해 주는 기적을 일으키는 집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어디입니까?
내 아버지 집입니다. 내 아버지 집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의미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벽돌로 지은 집입니까? 화려하게 건축한 이 건축물입니까? 아닙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지으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뜻을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전에 계십니다.
그 성전은 바로 우리의 마음의 전입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천 마음에 말씀이 없다면 그런 마음 속에 예수님은 거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성전이 되어야 합니다.
내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이 거할 수 있는 성전이 되어져 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그러면 말씀이 있는 마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과 함께 하는 대화가 단절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기도생활입니다. 오늘의 크리스천들이 기도생활에 약합니다. 기도생활이란 물리적 시간 관념에서 얘기하기 쉽습니다.
옛날에는 기도로 하루 종일 보낸 사람들을 성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지적했듯이 형식적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기도는 곧 <확신>이며 <위임>이며 <행위>입니다. 믿고, 믿는 대로 맡기고, 맡겼으면 따르도록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오늘도 이런 기도자들이 많이 있는 교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누가 새벽기도회에 빠지는가? 어떤 장로가 어떤 집사가 수요예배에 잘 나오지 않는가? 그런 것을 살펴서 그런 것을 지적하는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이란 올바른 기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올바른 기도생활자들이라면 어떤 경우에서도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모두 맡깁니다. 그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상태를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에 예수가 있습니까?
지금 내가 예수와 동행 중에 있다고 확신하십니까?
행여나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절기를 지키는 일에만 분주하다가 정작 예수님을 잃어버리지는 아니했습니까?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알았으면 다시 내 마음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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