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의 찬양(사25:1-5) 2002-03-11 00:28:23 read : 1769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화산이 터져 용암이 하늘 높이 솟구치는 것을 보았다면, 지옥이 어떤 곳인지 알 수 있다.
용암이 솟구치는 것은, 땅 어딘가에 펄펄 끓는 불타는 곳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뜨거운 용암이 끓는 곳과 같이,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을, 성경은 지옥이라고 부른다(막9:43,45).
포항 제철소 용광로 안에 던져지는 것마다, 모두 타고 녹아버린다.
제철소의 뜨거운 물이, 내 위에서 쏟아지려는 순간, 어떤 사람이 건져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할까요?
본문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있다(사24장). 세상은 온통 뒤집히고, 신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남은 자들이다.
세상 모든 것이 뒤집어엎어질 때 구원받은 자, 지옥 불에 던져져, 이를 갈며 슬피 울어야 할 사람들, 하나님의 진노가운데 살아 남은 자들의 찬양이, 예언적으로 본문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남은 자의 찬양'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다.
1. 왜 찬양하였나? 구원받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인간의 타락을 전제로 한다. 타락한 존재에게,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이사야를 통해서, 계속 들려진 것은 하나님의 경고였다. 돌아오지 않으면 심판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을 배반하는 불순종을 했다.
이때부터 인간에게 죄가 들어와, 모든 인간은 죄의 종이 되었다. 모두 악을 저지르는 자가 되었다.
마귀가 시키는 대로,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사기, 살인, 분쟁을 일삼는 자들이 되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는 모두 죽어, 죄로 지옥에 가야 할 운명이었다.
지옥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유황불이라고 한다.
1971, 12, 25일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났을 때, TV를 통해 중계되었다. 163명이 죽고, 63명이 부상당했다.
그때 높은 빌딩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도 있었고, 벌거벗고 도망하는 사람도 있었다.
왜 그랬을까요? 어떻게 하든, 그 뜨거운 불길만은 피해 보겠다는 마음 때문이다.
성경은 지옥의 불길이, 대연각 호텔의 불길처럼 실제적이고, 확실한 것이라고 증거 한다.
대연각 호텔에는 뛰어내릴 창문이라도 있지만, 지옥에는 뛰어내릴 창문이 없다.
지옥은 죽음도 없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9:48)고 했다.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되어, 고통만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지만, 지옥에서 받는 고통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고통을 피할 소망이란 전혀 없고, 영원히 계속되는 고통이 있는 곳이다.
지옥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이며, 생생하게 기억이 살아있는 장소이다.
만일 지옥 가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어머니의 기도가 생각날 것이다.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말을 들었던 것도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때는, 때가 늦은 것이다. 영원히 기억하며 고통을 당할 것이다.
원래 지옥은, 인간을 위해 예비된 곳이 아니다.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곳"(마25:41)인데, 마귀 꾀임에 빠져 간다.
악한 마귀는 지옥이 없다고 말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성경은 지옥을 말한다.
만일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범죄한 인간, 지옥에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이 저주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경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53:4).
예언자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700여 년 전에 이미 보고 외쳤다.
약속하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씻어 준다는 것을 믿으면, 구원받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주님께서 확증하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11:25)
믿으면 죽어도 사는 역사가 나타난다.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나를 살리려고 한,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죄가 가장 크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한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짓밟는 죄가 제일 큰 죄이다.
혹시 '나는 술도 안 마셨고, 저주하지도 않았고, 간음죄도 안 지었어'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기를 거절했다면, 바로 지옥 갈 죄인이다.
'나는 세상에서 너무 바쁘게 사느라고, 예수 믿을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 댈지 모르지만,
죽음의 시간은 올 것이고, 구원의 유일한 길을 거절했기 때문에, 지옥에서 깨어날 것이다.
영혼의 문제는 미룰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내일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영혼의 구원 문제이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이 시간 예수님의 피 묻은 손길을 외면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는 시간이 되기 바란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고 기록하였다. 믿고 구원받기 바란다.
어떤 이들은 아버지한테 이를 갈며 부르짖기를 "아버지가 나를 여기 오게 했어! 예수 믿으면 밥 먹여 주냐며, 교회가지 못하게 했잖아.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죄짓고 살다가 결국 아버지 때문에 이 지옥으로 왔어"하며 원망할 것이다.
어떤 딸은 어머니를 향해 이를 갈며 부르짖기를
"엄마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했잖아, 교회 가는 시간이 아까우니, 공부하라고…, 좋은 대학 나왔지만 나는 엄마 때문에 이 지옥에 왔어!"하며 원망할 것이다.
2. 구원받은 자의 찬양
그런데 이렇게 지옥에서 고통 당하고 있을 때, 구원받은 자는, 찬양할 수밖에 없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다'(1).
이 노래는 이사야의 체험이며, 믿음의 표현이며, 신앙 고백이며, 예언이다.
본문에서 '주'라는 말씀이, 계속 반복하여 나타난다. 이사야는 주님을 높이며 찬양하고 있다.
여기서 찬양과 노래가 구별된다.
노래가 자기 인생이나, 자신을 경험에 대한 것이라면,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다.
그러므로 단순한 노래와, 찬양은 엄격히 구별된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만이 찬양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그는, 주의 이름을 높이고( ), 찬양( : 손을 들다)하겠다고 했다.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만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왜 찬양하지 못합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감사할 수 없고, 감사가 없으니 찬양을 할 수 있다.
또한 더러는 하나님을 알아도,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을 알지 못할 때이다.
하나님의 주권이 그 마음속에서 무시당할 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마음이 세속적인 생각으로 꽉 차있을 때, 찬양이 터져 나올 수 없다. 세상 것만 나온다.
어떤 교회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한다.
그 교회 여선교 회장님이, 하루 종일 아파트 추첨하느라고, 바쁘게 뛰어다니다가 여선교 헌신예배의 사회를 보게 되었다.
그런데 사회를 보면서 "다같이 102동,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를 부르시겠다고 했다.
머릿속에 아파트 생각이 꽉 차 있으니까, 찬송가 102장이, 102동이 돼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 생각이 가득 차 있으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우리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해서, 감사와 찬송이 흘러 넘치기 바란다.
여호와여! - 여호와는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 부르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찬양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우리 주변 사람들과 많은 약속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어떤 약속은 지켜지기도 하고, 또 어떤 약속은 깨뜨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약속을 통해서, 상대방의 신실함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실하신( ) 분이다. 또한 진실하신( ) 분이다.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다.
우리에게 약속하셨다. '나를 믿으면, 구원해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진정 믿는 사람이 되라.
여호와는 약속의 주님을 말한다. 약속대로 구원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감사와 찬양이 넘쳐난다.
우리 모두는, 구원을 약속하신 주님을 만나, 이사야의 고백과 같은 확신이 있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계획은, 즉흥적이거나 우발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구원하신다.
이미 영원 전부터 정하신 자신의 뜻에 따라,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다.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릴 수밖에 없다.
비참하게 고통 당하는, 연약한 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이다.
나를 괴롭혔던 자들 앞에서 상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보내기 위해 지옥을 만든 것이 아니니, 가지 말라고 분명하게 여러 번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믿지 않는 죄는, 지옥의 형벌에 합당한 죄인 것이다.
한 노신사가 노예 경매장을 지나다가, 몹시 떨면서 울고 서 있는 한 노예 소녀를 발견했다.
측은하게 여긴 신사가 다가가서 물었다. "왜 울고 있지?"
"이제 어디론가 팔려가서 겪을 고생을 생각하니, 너무 무서워요" 소녀는 울면서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던 노신사는, 경매장의 노예 상인에게 소녀의 몸값을 지불한 후,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제는 자유인이다,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매매증서를 통해 자신이 정말, 노예의 처지에서 벗어났음을 알았고,
곧 뛸 듯이 기뻐하던 소녀는 신사에게 말했다. "제게 자유를 주신 당신을 따라가 평생 섬기겠어요"
그 후 소녀는 노신사의 집에서, 늘 기쁜 마음으로 봉사했다.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 '그렇게 기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그분은 저를 구원해 주셨으니까요"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원은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소망이요, 기쁨이다.
더더욱 멸망 받을 인생이 하나님께 구원받았다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찬양할 일인가!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요, 주님으로 진정 믿고,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구원받았다면,
그 사람의 입에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이런 고백이 나올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구원의 감사와 기쁨의 찬양이 있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지상에서 가장 정직하고 거룩하며 신실한, 주님의 교회에게 이 일을 위탁하셨다.
이는 그리스도의 복음이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가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고 엉뚱한 짓을 하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이 지옥으로 갔고, 지금도 가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가면 거기에는 마귀의 얼굴을 한 자들과 대면해야 한다.
그것도 한 달, 한 해가 아니라 영원을 그렇게 하며 고통 당해야 한다.
주님을 만난 기쁨을 가지고 살자. 이 기쁨을 이웃과 나누자. 주님은 꼭 오신다.
그 날 주님께서 상을 베푸실 것을 믿고, 감사와 찬양을 돌려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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