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생명으로 사는 은혜 2002-03-04 12:28:13 read : 1985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시편 51편 10-15절) // 2002년 3월 3일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최선, 최고, 행복의 상태로 유지시켜 준다
예배를 인도하면서 또는 말씀을 전하면서 성도님들을 바라볼 때 예배드리는 성도님들의 얼굴이 어떤 때는 너무나 어둡고 무거워 보일 때와 피곤해 지쳐있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얼굴에 기쁨이나 즐거움이 없이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웃을 때 우리의 얼굴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기쁜 일이나 즐거운 일이나 좋은 일이 있을 때 웃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사실은 기뻐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기쁨이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얼굴이 밝지 못하고 어둡고 무거운 사람들 중에는 대개 삶의 무게(고통과 시련 질병 실패와 좌절 등)게 너무 큰 사람이거나 아니면 교만의 크기가 너무 큰 사람일 것입니다.
얼굴이란 우리말의 의미는 "얼"은 영혼이라는 뜻이고, "굴" 은 통로라는 뜻이 있습니다. 멍한 사람을 보면 얼빠졌다 라고 합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과 산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기분 좋은 사람의 얼굴과 아주 기분 나뿐 사람의 얼굴이 다릅니다. 얼굴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에 때라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의 얼굴은 마치 영혼이 나왔다 들어왔다 하는 것처럼 바뀝니다. 그러기에 변화무쌍한 것이 얼굴입니다.
첫인상이 결정되는 시간은 6초 정도라고 한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소는 외모, 표정, 제스처가 80%를 차지하고 목소리의 톤, 말하는 방법이 13% , 그리고 나머지 7%가 인격이라고 합니다. "표정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한다" 고 합니다. 표정과 감정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사람의 얼굴 근육은 80개로 되어 있는데 그 80개의 근육으로 7000가지의 표정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체의 근육 가운데 가장 많이 가지고 있고 가장 오묘한 것이 바로 우리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인상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인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은혜를 받은 성도와 은혜를 상실한 성도의 모습은 너무나 다릅니다. 은혜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최선의 상태, 최고의 상태, 행복의 상태로 유지시켜 줍니다.
자기 안에 있는 굶주림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굶주림을 채워보려고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 보는데, 그러다가 중독이 됩니다. 이렇게 중독이 되면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오기가 무척 힘이 듭니다. 일 중독, 알콜 중독, 담배, 마약, 도박, 성, 오락, 쇼핑, T.V., 컴퓨터, 소설, 비디오....등등 이런 것들은 굶주림이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된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중독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음 6가지 체크 포인트를 점검해보면 됩니다.
1)피곤하고 건강을 해쳐도 계속한다.
2)죄책감 느껴도 멈추지 못한다.
3)가족과 주변관계를 망가뜨리면서도 계속한다.
4)생각이 항상 거기에서 떠나지 않는다.
5)그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심심하고, 불안하고, 안절부절하고 방황한다.
6)잠시 의지로 끊기는 하지만, 곧 그런 상황을 찾아가고 다시 빠져든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볼 때 집착을 가장 창조적으로 극복한 사람은 다윗일 것입니다. 그는 집착을 통해 중독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다윗은 초기에는 여러 가지 것에 집착했지만 나중에는 그것들이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방향을 바꿔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마음의 갈급함, 굶주림, 배고픔이 채워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면서 그때부터는 굶주림을 느낄 때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번번이 하나님께 채움 받습니다.
다윗의 굶주린 마음이 채워진 것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굶주린 마음이 치유되고 충만함을 얻습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부어지고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굶주린 내면은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만 치유되는데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그의 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4:7-8절,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시니이다"
시27:1,3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시30:11-12절,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이는 잠잠치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케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영히 감사하리이다"
시34: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예배 중 하나님께서 그의 굶주림을 채워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다시 그 안에서 기쁨이 넘치고,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새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원수가 다가와도, 군대가 에워싸도 요동치 않는 평안을 경험했습니다. 이 고백은 다윗의 경험을 통해 나온 것입니다.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해보았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마음이 공허하신 분이나 밤이면 잠이 오지 않아 누워도 잠을 잘 수 없는 분 있습니까? 어디론가 바람이라도 쐬어야만 살 것 같은 답답함이 있습니까? 불안하고, 답답하고, 허망하고, 절망하시는 분 있습니까? 사람에게 정주고 마음 주고 정성을 쏟았는데 배신감과 상처만 경험한 분 있습니까? 모든 것 잊고, 다 떨쳐버리고 한번 무엇인가에 미쳐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아니면 이미 스스로의 의지로는 끊을 수 없는 어떤 것에 중독 된 분 있습니까? 거기서 나와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좋아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느 정도로 좋아하실까?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장 축복 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업은 축복 받은 사업이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일이 축복 받은 일이고, 하나님이 좋아하는 삶이 축복된 생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 가운데 하나님께서 좋아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비밀이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 주시기를 원하시고, 은혜 받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은혜 받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성경 가운데서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은 사람이 다윗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께 그렇게 기뻐하심을 입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은혜를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전혀 허물없이 의롭게 살아서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고, 부끄러운 허물이 오히려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살아서 땅에서 많은 사람들의 부러움을 받는 사람도 있고 병들었기 때문에 역사에 위대하게 된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했기에 유명한 사람도 있지만 실패했기에 실패로 사람들과 역사를 감동시키는 위대한 인물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공해서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그 성공한 일도 좋은 일이지만 실패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다면 실패한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의 생애를 살펴볼 때 다윗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물맷돌 다섯 개로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민족과 전쟁할 때, 할례 받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도전할 때 다윗은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 17:45)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물맷돌 다섯 개를 던져서 골리앗의 이마에 적중해서 그를 넘어뜨립니다.
다윗의 용기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다윗의 천재적인 시는 역사에 아무도 그를 따를 자가 없습니다. 다윗의 영감 있는 시는 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감동적인 시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은혜를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고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뜻으로 통치한 왕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믿음으로 살려고 했던 가장 위대한 왕이요, 성전을 건축해서 하나님 앞에 봉헌하려고 했던 착한 심성을 가진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위대한 사람이 된 데는 더 큰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짓고 회개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짓고 망한 사람도 있지만 그러나 다윗은 죄를 짓고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최대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다윗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남아있으며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된 것은 다윗은 넘어져도 은혜를 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사람
다윗은 오늘 본문11절에서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붸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그는 하나님과 참으로 깊은 교제를 체험하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의 주옥과도 같은 시편의 말씀들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교제케 하시는 성령의 지배 하에 있을 때 그런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지배를 벗어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육신적 생각과 욕망에 사로잡히는 불쌍한 죄인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성령의 사람만이 은혜를 압니다. 은혜의 사람이 바로 성령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그래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주 앞에서 좇아내지 마세요!" 여러분, 주님께서 나를 붸아내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짝사랑하도록 만들었지 주님이 나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주님의 은혜의 손길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있었던 것이 너무도 두려웠습니다. 여러분, 성령이 나를 지배하지 못하면 우리의 영은 죽은 것과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구원의 확신이 내게 있어도 감정만은 차가운 종교인이 되고 맙니다. 성령님은 욕망에 사로잡히고 죄악을 품으면 내 마음에 계시지를 못하십니다.
구원의 감격에 젖어 사는 사람
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스도인에게 "구원"은 처음 믿을 때에 갖는 자격증이 아닙니다. 구원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영원토록 소유되어지는 기쁨의 원천이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주님이 주시는 충고의 말씀이 "너희 첫사랑을 버렸느니라" 였는데 첫사랑이란 구원의 확신과 감격에 젖어 살 때의 기쁨을 말합니다. 왜 첫사랑 그 구원의 기쁨을 계속 지속할 수 없을까요? 크게 보면, 영적 관심보다 육적 관심이 커진 탓이었겠지만 그러나 실제는 내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을 남에게 말하고 전하지 못하는 것이 이유일 수 있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하여 기도하고 인도하며 섬겨주는 일을 할 때에 첫사랑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되며 구원의 기쁨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 이 마음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면서 그 마음이 회복될 때에 자신이 하여야 할 일을 다짐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이것은 과거에 자신이 기쁨으로 하였던 일입니다. 잠시 죄를 짓는 동안 잃어버린 일이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거듭나서 새사람 되는 것보다 큰 기적은 없습니다. 거듭난 새사람이 되도록 돕고 섬기는 일보다 더 큰 축복과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때 기분이 좋으면 은혜를 받은 것 같고 기분이 나쁘면 은혜가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은혜를 많이 받았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을 때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보통 사람은 돌에 맞아 죽을 때 미움이 충만하고, 혈기가 충만하고, 분노가 충만한데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사업이 잘 될 때는 기분이 좋고 넘칠 수가 있지만 사업이 어려울 때는 은혜가 충만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분이 넘치고 충만해서 살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충만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의「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로서 전 세계 모든 목회자들의 영성을 깨워주는 위대한 학자이며 치유 목회에서 거장으로 불려지는 큰 인물인데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 입은 치유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뭇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상처를 받고 그는 거기에서 살이 찢겨지고 피 흘리면서 죽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처받은 생애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상처받고, 제자들로부터 상처받고, 마지막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처를 온 몸에 지니고 죽은 상처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처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예수님은 결국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으면 받은 만큼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아픔을 겪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는 그것이 사명이 되어 배고픈 이웃들을 치유하고 도와주는 사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로부터 배신을 경험한 쓰라린 상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원망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같이 그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질병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바로 내 주변에서 그런 질병으로 고통하는 사람들에게,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좋은 치유자가 되라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게 어떤 암 병이 있다가 나았다면 병이 나은 것 때문에 나 혼자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병든 사람을 찾아가서 "나는 당신보다 더 중한 병에 걸렸는데 그 병에서 이렇게 나음을 받았으니까 당신도 나을 수 있다"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을 때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린 나날을 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삶이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운명을 비관하거나 원망하고 상처 입힌 사람들을 증오하고 원수를 맺지 말고 자기 자신이 그 상처를 사명으로 바꾸어서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상처로 두지 말고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십자가에서 모든 상처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상처를 예수님이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상처를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부활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상처로 모든 아픔을 겪고 죽음의 고통을 겪었지만 결국 그 상처가 부활로 승리해서 상처입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서 허덕이는 모든 인류에게 치유자로서 우뚝 서 있는 것입니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야 합니다
환자가 아픈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는 아픈 곳을 감추어서는 안됩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의롭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역사에 다시 없는 죄인이 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그는 평생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상처가 바로 간음과 살인죄였습니다. 다윗은 역사에 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그는 그 죄책감으로 마음속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고통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6편 6절에서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라고 했고 시편 32:3-5절에서는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를 보내서 다윗을 책망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다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 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삼하 12:7-10)
그때 다윗이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고백할 때 나단 선지가 "여호와께서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죄의 상처에서 치유를 받고 새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시를 읊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려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와 악을 사하였나이다"
인간의 마음에 멍든 상처 가운데 최고의 상처는 죄가 가져온 상처입니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모든 상처의 원인은 결국 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신음하는 상처들은 개인의 문제이든 가정의 문제이든 결국 죄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는 모든 불행들이 결국 우리 속에 숨어있는 죄악이 뿌려놓은 결과들이요, 이제 그 모든 상처들을 치유 받는 길은 바로 죄 사함을 받는데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드러내야 사함을 받습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죄인 됨을 고백하므로 사함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나를 아프게 하는 과거의 상처들을 내 속에 감추지 말고 드러내서 주님 앞에 내놓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내놓을 때 주님은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다윗의 가장 위대한 점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드러낸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를 사하실 때 먼저 원하시는 것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는 일입니다. 다윗은 사죄의 은혜를 알고 있습니다.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용서받은 자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죄인의 진실을 알았습니다
다윗은 새로운 존재로서 그에게 주어진 자기 자신의 사명을 알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13-15절)
그는 범죄한 후에 주께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첫째 "나와 같이 범죄한 자들에게 주님의 사유하심의 진리를 가르치겠습니다. 그때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라고 고백하고, 두 번째로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내 의를 자랑하고 내가 노력해서 의를 이루려고 했지만 이제는 이것은 다 무너져버리고 주님의 의로 내가 의로워지며 주님의 의로 내가 인정을 받고 주님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라고 고백하고, 세 번째로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전파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범죄한 후에 은혜 받고 이 은혜 받은 사실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했습니다.
다윗은 "내가 죄악 중에 잉태하였고 죄 중에 탄생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본질적으로 죄인이요, 본래 의를 행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오늘 지은 죄가 우연이 아니요, 본래 그런 사람이라 언제나 이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인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짓고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성군이 된 것입니다. 가난할 때 그 가난을 가지고 주께로 가면 우리 주님께서 그 가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요를 주실 것입니다. 실패했을 때그 실패를 가지고 주님께 가면 주님은 그 실패를 바꾸어 우리에게 놀라운 은혜를 부어주실 것입니다. 이 땅에서 받은 모든 상처를 홀로 간직하고 원망하거나 탄식하지 말고 그 상처를 가지고 주께로 나아가면 주님은 그 상처를 십자가 상에서 안고 내 삶을 부활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는 그 죽음을 주께로 가지고 나아가면 우리 주님이 그 죽음을 받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놓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처 입은 치유자이신 그리스도가 이루시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자신이 받은 모든 상처를 상처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새로운 축복으로 삼아야 됩니다. 의사는 자기 아픈 곳을 진실하게 말하는 자를 치료하기 시작합니다. 가슴 속에 담아진 모든 것을 십자가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때 치유가 됩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가지고 온 고통을 주님께 어떻게 내놓아야 되겠습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에게 함께 묶여야 됩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난할 때 돈으로 도와주려고 물질을 가지고 온 분이 아니고 내가 가난할 때 함께 가난 속에서 고통하시는 분입니다. 내가 가난할 때 옆에서 가난하게 살아주는 한 사람만 있다면 가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우리 주님은 함께 병상에서 고통하십니다. 내가 억울하게 한 맺혀 있을 때 주님은 그 억울함 속에서 함께 울어주십니다. 내가 죄지었을 때 주님은 그 죄의 아픔을 함께 하시면서 내 죄의 심판을, 고통을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받으십니다. 이것을 다윗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다윗은 여기에서 죄 사함을 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면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것이다."라는 말과 같이 주님께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며 도와주신 것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함께 고통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가 받은 모든 정신적인 상처, 육체적인 상처까지 다 주님의 십자가에 함께 묶어서 거기에서 완전히 나도 죽고, 내 상처도 죽고, 내 과거도 죽고 새로운 부활로 받아 새 생명으로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실패라는 제목의 글을 소개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이제 실패자임을 뜻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성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당신이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새롭게 배웠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당신의 위신이 손상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무엇인가를 용감히 시도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방법으로 해야 할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당신이 열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완전한 존재가 아님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당신이 포기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입니다.
실패는 당신이 인생을 낭비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시 출발해야 할 좋은 이유를 갖고 있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나에게 기쁨이 있는가하면 슬픔도 있습니다
기쁨은 지금 당장 표현하여 함께 나누겠지만 슬픔은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슬픔을 승화시켜 내 삶의 새로운 힘이 되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만족이 있는가 하면 불만도 있습니다.
만족은 지금 바로 표현하여 전하겠지만 불만은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만을 감사함으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감사가 되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랑이 있는가 하면 미움도 있습니다.
사랑은 지금 바로 누군가에게 나타내 보이겠지만
미움은 잠시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움을 겸손으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사랑이 되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희망도 있지만 낙심도 있습니다.
희망의 설레임은 지금 바로 가슴에 채우겠지만 낙심은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낙심을 인내로 다스려 내 삶의 새로운 소망이 되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잘하는 일도 있지만 잘못하는 일도 있습니다.
잘 하는 일은 지금 바로 행하겠지만 잘 못하는 일은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하는 일을 지혜로 다스려 내 삶의 여유의 일부분이 되게 할 것입니다.
나에게는 부드러운 말씨도 있지만 거친 말씨도 있습니다.
부드러운 말씨는 지금 당장 사용하겠지만
거친 말씨는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친 말을 온유함으로 다스려 내 삶에 빛나는 말들로 삼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좋은 만남도 있지만 슬픈 이별도 있습니다.
좋은 만남은 지금부터 소중히 지켜 나가겠지만 슬픈 이별은 조금 늦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별을 승화시켜 내 삶의 새로운 만남의 계기로 삼을 것입니다.
-가슴에 남는 좋은 느낌 중에서-
참 즐거움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죄는 인간의 행복을 빼앗습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소망과 사랑과 인격을 파괴합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옵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옳바로 되어 있습니까? 나와 하나님을 가로막는 죄는 없습니까? 참 즐거움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마르지 않는 즐거움의 근원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즐거움이 나타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즐거움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키소서 여기의 구원이란 영혼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즐거움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 날마다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복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기쁨이요 즐거움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문제마다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쳤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생명의 위기에서도 전쟁을 하는 가운데서도 원수 앞에서도 도움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계에 다른 이 물질이 들어갔습니다. 방해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문은 닫혔습니다. 축복의 문이 닫혔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즐거움이 괴로움을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뻐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는 복의 복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도우심은 축복입니다. 우리가 구할 때 응답하심도 하나님은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이 우리에게 큰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은혜를 입기 위하여 날마다 그의 도움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합시다. 그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웃으면 즐거운 기분이 되는가? 즐거운 기분이 웃음을 짓게 하는가? 웃음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가? 감정이 웃음을 불러일으키는가? 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되어왔습니다. 얼굴 표정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이론을 처음 제기한 사람은 19세기 생물학자 찰스 다윈과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였다고 합니다. 웃음이 즐거움 마음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행동심리학자들은 반론을 폈는데 즉 "기분이 좋아야 웃음이 나오지 어떻게 웃어야 기분이 좋아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즘은 다시 다윈과 제임스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우리들도 행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구원받았다고 무엇이든지 만사 형통하리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을 위하여 노력해야 하고 힘써야 합니다. 많은 것을 주었는데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으려고 합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기웃거립니다. 재물 속에서, 권력 속에서, 명예 속에서, 쾌락 속에서, 이성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즐거움과 기쁨은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적인 것으로는 온전한 즐거움을 맛볼 수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보이는 육신적인 것이 없이도 즐거워했습니다. 하박국은 3:17-18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노래했습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서 나옵니다. 여기에서 즐거움이, 기쁨이, 감사가 나옵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시기를 바랍니다. 새생명으로 사는 은혜가 사순절을 맞는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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