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애국 2002-03-04 11:54:00 read : 1427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렘 31:31-34> 2002년 3월 3일
□ 신앙인의 애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 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31:31-34>
3·1 운동과 한국교회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물론 3·1 운동은 일본 제국주의의 포악한 무단통치에 대항하여 폭발한 한 민족의 거족적인 항일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준비과정이나 운동 진행과정에서 기독교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주지하는 대로 33인 가운데 기독교인이 16인이나 되며, 비서명자 48인 가운데도 24인의 기독교인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의 수는 30만명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당시 전 인구 1천 7백만 중 기독교의 수는 불과 2%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던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참여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3·1 운동에 직접 서명한 목사님들 중에 정치와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며 고민하던 신석구목사의 경우 선언서에 서명하는 문제를 놓고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고민하면서 27일 새벽에야 "5천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응답을 받고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길선주목사가 이승훈의 제안으로 독립운동의 주모될 것을 결정한 동기 역시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권고로" 고국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는 신앙적 동기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공소공판에서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독립을 희망하였는가?" 라는 총독부 판사의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감동적입니다.
이승훈은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에 합병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고 하였습니다.
3·1 운동 이후 이로 인하여 받은 교회의 피해는 막심하였습니다.
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통계를 보면, 전부 파괴된 교회당 수가 17동, 일부 파괴된 것이 24동, 그 외 교회당의 손해가 41동, 교회 재산의 손해 액은 3만 달러, 오산중학교의 피해액은 5천 달러였습니다.
그리고 1919년 6월 30일(현재의) 투옥된 사람의 수도 기독교인이 2,190명으로 유교나 불교 및 천도교인을 합한 1,556명보다 훨씬 많았으며, 교역자도 151명으로 천도교 직원 72명을 훨씬 능가하고 있었습니다.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는 3·1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감당해 왔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한 피해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나라를 사랑하며 조국에 소망을 주는 교회로서 사명을 다 하였던 것입니다.
3·1 운동은 우리 민족 역사에서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애국정신의 발로의 날이었습니다. 즉 민족이 애국운동으로 뭉쳐진 대 역사적 사건의 날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지 9년 만에 다시 나라를 되찾아야겠다는 뜻에서 일제의 총검을 두려워하지 않고 맨 주먹으로 독립만세를 방방곡곡에서 외쳤던 날이었습니다.
오늘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가리켜 단순히 정치운동이 아닌, 민중운동이라고 규정짓는 학자들도 있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한(韓) 민족의 출애굽>(Korean Exodus) 운동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실 그 말이 옳다고 봅니다.
삼일절의 거사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事件)이 아니라 신앙적 폭발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운동이 일어난지 83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이 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신앙적 과제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오늘과 같은 정치적, 사회적 혼란 속에서 민족의 나갈 길을 신앙인의 차원에서 스스로 결단해야 할 때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인의 애국은 어떻게 나타나야 하겠는가?
즉 <기독교와 애국운동>이 세상 사람의 것과 달라야 할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말씀에서 찾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정치계에 많이 진출해 있고,
중요한 요소요소마다 믿는 사람들이 들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생각처럼 되어가지 못하는가? 하는 것도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기독교의 애국은 신앙(信仰)적 표현(表現)이어야 합니다.
기독교인의 나라 사랑은 세상 사람들의 정치운동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진정한 애국자'라는 말이 있듯이 신앙인의 애국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와 연결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구호처럼 정치를 위한 애국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려는 신앙적 표현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앙적 표현이 애국운동으로 나타날 때, 왕왕 현실의 정권과 충돌이 있게 됩니다.
즉 신앙인의 애국운동은 정권(政權)을 위한 것도 아니고, 출세와 권세를 누리려는 것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의와 정의가 지배할 수 있는 나라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속에 잘 드러나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예로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애국 운동을 보시기 바랍니다.
구약에 나타난 선지자들의 애국 운동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구원 뿐만 아니라 <땅>과 <영토>와 <사회>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은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고 하나님의 구원역사이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불의한 세력 하에서 박해를 당하고 신음하는 택하신 백성들을 구출해내려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이었습니다.
그것을 전달하고 그것을 고취시킨 것이 선지자들의 애국운동이었습니다.
여러분!
구약을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히브리 민족의 율법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설사 팔았더라도 희년(禧年)이 되면 다시 옛 주인으로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땅의 귀속은 곧 영혼의 귀속으로 나타납니다.
희년의 복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되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의 외침은 개인의 영혼 구원 뿐만 아니라 조상들이 물려준 땅과 영토를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까지 이스라엘 민족은 영토를 자신의 생명으로 지키고 보존하고 있습니다. 저들은 지금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고 적군의 침략을 당한다면 모두 영토를 지키기 위하여 솔선 귀국하는 것이 우리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땅을 생명으로 지키는 애국은 바로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나라 사랑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창세기에서부터 나타납니다.
<땅>을 주관하고 <자연>을 보존하고 지켜야 할 책임이 인간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에는 국경이 없지만, 기독교인에게는 땅에 영토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땅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땅, 조상이 물려준 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신앙인들에게는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적게는 그 땅이 가정이요, 크게는 민족이요, 지구촌의 나라라는 말입니다.
2. 기독교의 애국은 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단순히 자기 땅을 지키려는 국가 지상주의적인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우주적인 신앙적 발로에서 우러난 애국운동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의 애국은 자신의 이해관계에서 행동하지만, 그러기에 그러한 운동은 '정치 집단'이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공동체'는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애국운동은 민족 공동체로서의 하늘나라 시민운동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순수(純粹)해야 합니다.
자신의 출세 영달이 아닌 모든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야 합니다.
세상의 정치가들이 말하는 애국은 정권(政權)욕에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하나님의 정의(正義)를 위한공동체 형성에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 위에 실현되도록 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함에 있습니다.
세상의 관헌들의 애국은 집단적 이기주의와 자파(自派)세력의 확대에 있지만, 기독교의 애국은 나의 주장과 나의 생각 대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항상 묻는 가운데서 자기 갱신(更新)과 자기 개혁(改革)의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애국은 <소금>과 <빛>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일 뿐입니다. 소금이 필요한 것은 맛을 내기 위함이요, 소금이 있어야 할 이유는 부패가 생겨지기 전에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빛이 필요한 것은 어둠이 있기에 불의가 있는 곳에서 자신을 태우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였으나 정권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자기 동족과 민족을 사랑하였으나 집단 이익이나 동족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의 나라 사랑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사방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하고, 배척을 당하기도 합니다.
2,000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기독교의 애국운동은 세상의 정권욕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이용을 당하기도 하고, 아니면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애국운동은 여(與)로부터도, 야(野)로부터도 비난과 공격을 받게 되기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들은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지만, 저들은 모두 나사렛 예수가 자기들 편에 서 주지 않았을 때,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에서는 하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정권욕에서 이용하려고 합니다.
모두가 자기들 편에 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자기들 편에 서지 않으면 핍박하고, 조롱하고, 멸시하고 탄압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애국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려는 데 있습니다.
3. 기독교의 애국은 언제나 <말씀>에 기초한 것이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
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라"(딤후3:16-17)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은 비인격적인 관념이나 사상이
나 이념이나 철학이 아니라 우리와 호흡을 함께 하는 역사적 인격의 하나
님입니다.
그 인격의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으로 우리에게 임합니다.
그 말씀은 언제나 옳고 진리요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은 모든 책망(비판)과 바르게 함(개혁)과 의로 교육함에
기초가 됩니다. 기독교의 애국은 어느 정치적 보스 한 사람의 명령이나 지시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집단 이익을 추구함에 있어서 다수결에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응답하는 양심의 행위일 뿐입니다.
양심(良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이나 제도나, 사람은 없습니다.
양심의 주재는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양심적 행동에 기초가 될 것 뿐입니다.
말씀에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 편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곧 정의 편에 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이 되어 모든 선악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에 당신이 원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조물인 인간을 통하여 당신이 영광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제일 큰 죄악은 인간을 학대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것, 바로 그것을 제일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이 본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제일 기뻐하십니다.
그것이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것이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없는 폭력과 인권유린에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 구원이요 애국운동이란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한 정권을 두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그 정권이 얼마나 인권을 존중하고, 그 정권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가까운 의를 실현하는가에 따라 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의 나라 사랑은 말씀에 기초한 정의실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신앙적 표현이 애국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다시 자신들을 되돌아보는 계기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되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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