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살리는 본색(本色)교회/ 말라기의 십일조 2002-03-02 09:28:46 read : 141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색(本色)교회의 건설이 중국 기독교를 살린다
중국의 본색(本色)교회운동가들
지난 연재를 통해 한국, 일본, 인도 등의 각지에서 ‘토착화된 기독교’를 고민했던 신앙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기독교가 각 나라에 자리매김하던 시기에 진통처럼 ‘우리다운 기독교’를 고민했던 신앙인들이 있었다. 이것은 중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차이점이 있다면 개인적인 차원에서 그쳤던 게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연합운동차원에서 중국식으로 토착화된 기독교를 고민했다는 점이다.
국가 정치 체제로 인해 지금까지도 공식적 기독교 전도가 금지되고 있는 중국은 19세기에 신문화 운동, 즉 반제국주의적 물결의 일환으로 격렬한 ‘반기독교운동’에 휩싸이게 된다. 그리고 반기독교운동에 반기를 들어 본래적 기독교, 즉 중국적인 기독교를 찾자는 고민에서 일어난 운동이 바로 ‘본색교회운동(本色敎會運動)’이었다.
당시 오뇌천, 왕치심, 조자신, 사부아, 서보겸, 여일장 등 당시 지성있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해서 처음 언급된 ‘본색 교회’는 중국교회연합, 중국적 기독교를 모색하자는 움직임으로 중국기독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반제국주의가 곧 반기독교는 아니다
1917년 신문화 운동은 중국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호적(胡適)이 쓴 <중국 문학 개량 추이>라는 논문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여 ‘신문화’를 창조해야 한다며 낡은 구문화는 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그 요지였다. 이것이 당시에 큰 반향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주장은 다시 말해 중국의 근본적인 바탕이 되어 온 유교 문화를 버리고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1919년 북경에서 5·4운동이 발생한 후 신문화 운동의 형태와 내용은 과격하게 변하여 ‘중외(中外) 문화’를 새롭게 평가하여 가치 없는 것은 완전히 제거한 후 새로운 사회와 중국을 건설하자는 방향으로 흘렀다. 공격의 대상은 여전히 유교 사상과 봉건 사상, 군벌 등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부터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신문화 운동의 흐름에 반발하는 민족주의 세력의 움직임이 태동했다. 그리고 서양문물에 대한 전폭적 지지가 곧 서구의 제국주의에 놀아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민족주의자들은 기독교까지 거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922년 4월 북경에서 세계기독교학생동맹의 제11차 총회가 열리게 된 것을 알게 된 민족주의 단체에서 공식적으로 기독교를 반대하는 선언문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반기독교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비기독교학생동맹’,‘북경비종교대동맹’,‘사회주의 청년단’ 등은 종교는 비과학적이고 사람들에게 사회에서 노력할 필요를 가르치며,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선봉이며 하나의 문화일 뿐이므로 “기독교는 중국에 해악을 준다”고 주장하며 거세게 반대했다. 더욱이 이런 움직임은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의 지지를 받으며 활발해졌으며 일부 민족주의자들에게서 전국민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다.
서양에 예속되지 않으려는 반제국주의적 움직임과 맞물려 기독교도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치부되었던 것이다. 물론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평가와 움직임이 전혀 사실 무근인 것은 아니다. 초기 기독교가 중국에 전파되면서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전폭적으로 주도되고 중국만의 문화와 특성이 존중받는 기독교로서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기독교를 전파받은 아시아지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서 흔히 있는 일이었다.
◇본색교회 운동가들. 왕치심(좌) 여일장(우)
중국적 교회인 본색교회의 건립을 위해!
그러나 반기독교운동이 중국 기독교에 ‘폐해’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일부 진보적 기독교인들에게는 중국 기독교의 정체성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오뇌천을 비롯해 유정방, 조자신, 서보겸, 왕치심 등 기독교 지식인들을 비롯한 565명의 중국인, 488명의 재중 선교사, 136명의 구미 교회 대표자들이 모여, 제5회 기독교 전국 대회에서 중국 기독교의 연합과 일치를 다지는 기구인 ‘중화기독교협진회’를 발족하였다.
중국내 교회의 연합과 일치를 위한 기구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중심은 ‘본색교회’를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본색교회란 일방적 기독교 전통이나 역사로부터의 관계가 단절된 교회가 아니라, 세계 각 교파의 기독교와 관계를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중화 민족 고유의 문화와 정신적 바탕에 적합한 교회였다.
서구에서 유입된 기독교이기에 무조건적으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된 본색교회의 개념은 중국인들에게 참된 기독교의 의미와 중국적 교회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본질에 깊게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본색교회 위원회는 1925년에 만들어졌다. 반기독교운동, 교육권 회복 운동, 반제국주의운동 등과 급속도로 민족주의적 흐름에 휘말리는 중국에서 기독교의 본질과 중국적 교회를 고민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그 안에 여일장, 왕치심을 비롯한 많은 기독교 지식인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서적, 잡지를 통해 알려지는 기독교의 진수
이 때 여일장은 다른 기독교인들과 더불어 월간 <생명>이란 잡지를 출간하였다. 당시 본색교회운동에 공헌했던 출판사인 ‘생명사’와 ‘문사’는 기독교의 진리를 전하는 가감없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애썼다. 또 <생명>과 더불어 문사에서 발간된 <문사 월간>도 본색 교회 운동에 앞장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인에게 적합한 기독교 진리를 탐구하는 데 그 열정을 굽히지 않았다.
월간 <생명>은 그 성격에서 밝히고 있듯이 “국경을 나누지 않으며, 종파를 나누지 않고, 당회를 나누지 않는다”는 등 상당히 혁신적인 내용을 담아냈다. 또 “종교교육을 토론하고 성서를 연구하며 신학을 연구하고 사회문제, 교회문제를 연구하여 기독교 혁신 운동을 제창한다”는 취지와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깊이 있는 신학적, 사회적, 신앙적 내용들을 담아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사 월간>도 그 책 1,2권에서 왕치심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은 색안경으로 보는 일방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것을 옛것으로 하지 않고서는 중국 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관계가 될 수 없기에 이런 원인에서 이 잡지를 출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당시 본색교회 운동가들이 그들의 작업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외국 세력의 보호로부터 벗어나기, 중국의 주권 확립, 인재 양성, 중국 문화에 적합한 방법으로 선교하기, 교회의 건축, 음악, 미술, 절기, 예의 등을 중국화하기 등이었다.
또 예배 의식을 개혁하여 강대상을 성전 중앙에 두고 옆에 강단을 세우고, 예배드릴 때 촛불을 켜고 민속음악을 연주하는 등의 획기적 예배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왕치심은 기독교에 불교의 개인 명상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으며, 중국의 전통절기를 기독교적으로 재해석하고 대체함으로 기독교와 중국 문화의 끊임없는 만남의 연결고리를 고민하였다. 이처럼 본색 교회 운동가들은 서구에서 들어온 천편일률의 기독교, 그리고 제국주의적 문화와 결부된 기독교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문화와 삶 속에서 펄떡거리는 기독교를 만들고자 했다.
◇중국문화와 기독교의 결합을 지향했던 월간 <생명>지.
비록 역사 속에 스러지기는 했으나
그러나 본색교회 운동가들의 이런 작업들이 결코 쉽게 진행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국 사회의 분위기에서 참 기독교를 찾으려했던 본색교회 운동가들은 각 행정기구의 편찬과 잡지를 통해 다양한 활동을 했지만, <문사 월간>과 같이 결국 정간하게 된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문사 월간>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던 왕치심은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26년 <문사 월간>의 위치는 중국 본색기독교의 저작을 촉진코자 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문사 월간>이 발행된 후, 이것을 읽었던 사람들이 비판을 갖기 시작하고 언론들이 일제히 비난하였기 때문에 일반인들조차 <문사 월간>을 기피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문사 월간>은 1928년에 정간하고야 말았다.”
짧았던 3년여의 시간. 그 시간에 <문사 월간>의 작업은 닫을 수밖에 없었으며 다른 본색 운동가들의 활동도 계속 지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 추구를 목적으로 세상의 어떤 철학과 이론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열정적 활동과 핵을 찌르는 글로 중국적 기독교의 진리를 모색하는 데 힘썼던 본색 운동가들은 당시 중국 교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들의 노력이 한 켜가 되어 쌓여 중국 기독교에 면면히 살아 숨쉬고 있을 것이다.
<주간 기독교> 김진아 기자 nebo@cnew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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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 선지자의 십일조는 어떤 상황인가?
본문/ 말 3:8
“너희는 나를 속이면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속이다니요 어떻게 하나님을 속이겠습니까’ 하는구나.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바친다고 하면서도 그대로 바치지 않으니 나를 속이는 것이 아니냐”.(공동번역)
구약성서에 나타난 모든 예언자의 글을 읽을 때, 예언자가 살았던 특정시대의 배경아래서 바라본다면 아무리 긴 분량의 예언서라 할지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은 그가 산 시대와 동떨어진 말씀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말라기 선지자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말라기 선지자가 언제 활동했는지, 그가 무엇을 선포했는지에 대해서보다 그가 특별히 십일조를 강조한 예언자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말라기 인용은 개역성서의 강력한 말투를 빌려 십일조를 바치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사람(3:8)’으로 표현하며 십일조를 바칠 것을 독려하는 데 국한되고 있다.
그러면 말라기 선지자 선포의 핵심이 ‘십일조’일까? 물론 아니다. 말라기 선지자 선포의 핵심도 말라기가 살았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과 연결시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기원전 450년 경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당시는 유다가 멸망한지 140여 년 정도 지난 상황으로 강대국 페르시아가 유다를 다스리고 있었다. 유다가 멸망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당시인 바벨론 포로시기(주전 587~539년)에는 많은 유다사람들이 정치적 공동체 회복에 대해 강력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라가 멸망한 지 100년이 넘어가고 정치적 공동체의 회복이 요원하게 보이자 ‘유다’라는 그들의 정체성마저 흔들릴 위협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유다의 지도자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정치공동체의 희망을 과감히 버리고 그들이 야훼하나님의 백성임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하는 종교공동체로서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하였다.
왜냐하면 종교공동체의 유지만이 그들이 강대국의 속박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당시 쓰여진 것으로 알려진 성경인 역대상·하, 에스라, 느헤미야 등은 모두 종교공동체 강조의 맥락에서 쓰여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페르시아시대에 활동한 말라기 선지자의 가장 큰 고민이자 선포의 핵심도 종교공동체의 유지였다. 당시 말라기 선지자가 바라본 유다공동체는 제사장에서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종교공동체의 유지와는 상관없는 종교적 타락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데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라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만일 국가라는 보호막이 없는 상황에서 종교공동체마저 무너진다면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공동체는 이전 앗시리아의 민족혼합정책으로 인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북쪽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 그들도 마찬가지로 역사에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 대한 대응으로 눈먼 것, 저는 것을 예물로 바치는 제사장들의 죄를 책망하며 종교공동체 회복을 외쳤고, 일반 백성들을 향해선 십일조 문제를 거론하며 온전한 야훼종교 회복을 강조했던 것이다.
즉, 말라기 선지자는 무너지는 종교공동체를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온전한 십일조라는 수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말라기 선지자의 모든 주변 상황을 생략한 채, 무너지는 교회 재정을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십일조를 강조하거나 세속적인 목적에서 말라기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작정 인용한다면 크게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간 기독교> 오택현 ■ 영남신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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