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기준 2002-02-25 11:25:08 read : 2008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4:10-17 < 2002.2.17>
요사이 인기 있는 영화가 아카데미 영화상 13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있는 반지의 제왕이
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주인공 프로도에게 우연히 반지가 들어옵니다. 이 반지는 악을 멸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포인트가 있습니다. 주인공 프로도는 이야기
합니다. 갈라 드리엘이나 간달프 같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반지가 들어오지 않고‘왜 반지
가 하필 내게 왔지?’라고 끊임없이 한탄합니다.
영화 내용은 반지가 왜 주인공에게 왔는지, 즉 왜 주인공을 선택했는지 이야기를 전개하
고 있습니다. 상당히 신앙적인 스토리입니다.
여러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우리에게 어떻게 이런
운명이 오게 되었습니까?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모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실 모세만큼 모순 덩어리도 없습니다. 모세는 말을 전해야
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말더듬이었습니다.
모세는 말로 사건을 푸는 사람이기보다 폭력과 살인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할 수 없다고 이야기 한 부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모세를 쓰셨습니다. 왜요?
사실 모세 외에 많은 성경인물들을 보면 하나님께서 쓰시는 기준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속 사람이 변화된 사람을 쓰십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진짜 만난 것은 언제
인줄 아십니까? 나이 80세였습니다. 그 동안 40년은 애굽의 왕자였습니다. 그리고 40년은 무
엇을 했습니까? 광야 훈련을 받았어요. 사실 모세가 확실히 변화되기 시작한 것은 소위 광
야학교 입학하고 나서입니다.
모세는 40년간 왕자로서 최상의 학문을 배우게 됩니다. 최고의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교육 방법이 필요하셨던 같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 줄 아세요? 광야 교육
입니다. 참으로 독특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리려 시면 광야 카페로 부
르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32장 10절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렇습니다. 바로 광야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임을 알려 줍니다.
그렇다면 광야는 무엇입니까? 들판입니까? 황무지입니까?
먼저 광야의 본질적인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광야는 히브리어로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본 어간은 디바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디바르의 뜻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말씀,
말하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광야라는 말은 '말씀 안에서' 라는 말입니다. 광야는 말씀
을 만나는 것으로 히브리인들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말씀하십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왜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
멍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처럼 이야기했을까?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죠. 우리는 가진 것이 많을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습니
다. 그렇게 생긴 모습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께 돈을 벌기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돈을 쓰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돈이 있을 때가 죄로 빠지기 쉽거든요. 여러분들
은 돈을 쓰기 위한 기도를 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거
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왜요? 한 부자가 있었는데 매일 창고 지을 생각만 했다. 즉
간단합니다. 광야대학에 입학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 창고만 짓죠?
그런데 거지 나사로를 보십시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거지입니다.
왜 천국에 갈 수 있었습니까? 비유를 통해서는 어떤 이유도 안나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사로는 삶의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광야에 있던 것으로도 신앙의 깊이를 이
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광야에 있으면 믿음이 좋아집니까? 고난을 당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고난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즉 광야는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도서관에 가면 공부를 집중할 수 있어요. 운동을 하
려면 헬스 장에 가야 합니다. 집에 러닝머신이 있어도 거의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하려면 교회에 와야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자신의 영성을 집중으로 훈련
시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광야는 직접적인 하나님만을 체험 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많은 성경의 인물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갖았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내게 고난이 없으면 은혜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빠지게 되면 얼마나 은혜가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 개인적으로는 광야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요?
실제적으로 모세는 왕자로서 40년을 훈련받았으면 되었지, 광야에서 40년을 무슨 훈련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고난을 받아야 되는 이유입니다.
찰스 스윈돌이라는 사람은 모세가 광야에서 네 개의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무명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는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곳입니다. 그리고 부탁 할 일도 없는 곳입니다. 단지 사막의
들짐승과 양떼만이 친구였습니다. 우리가 수술하러 들어 갈 때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을 때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존재를 알은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즉 무명박사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시간에 대한 박사입니다.
이스라엘을 가보신 분을 아시겠지만 한나절이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갈 수 있는 거리입
니다. 아마 당시로 보면 보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430년 동안 광야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리고 출애굽 하면서 3일만에 불평하고 짜증을 냈습
니다. 모세는 광야 40년 동안 기다리는 것을 배웠습니다.
외로움에 대한 박사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에 가면 자기 혼자 밖에 없습니다. 정말 괴
로운 일입니다. 침묵훈련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정말 힘듭니다. 그런데 나중에 얼마나 좋은
지 모릅니다.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이 많으면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광야로 여러분을 내 모셨겠습니까? 고독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보라는 것입니다.
불편에 대한 박사입니다. 광야의 생활은 '불편'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광야에 나온다면 실제적인 문제가 부딪치게 됩니다. 화장실문제, 먹는 문제? 자는 문
제 등 의식주 문제에 부딪히게 됩니다. 불편하게 됩니다. 불편을 감사로 받아들이면 참으로
광야에서 훈련을 잘 받은 것입니다.
이런 네 가지의 이해와 더불어 광야로 인도하시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잡초근성입니다. 광야에서 훈련을 받아 광야
박사가 되게 한 것은 잡초근성을 회복하기 원한 것입니다.
믿음 생활 이건 사회 생활이건 이대로가 좋사오니 하면 마귀에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우
리는 잡초 근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운동경기를 직접 경기장에서 보신 적이 계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아니! 축구경기를 텔레비전에서 보면 오죽 좋아? 누워 보면 되지, 사람들도 없지, 게다가
해설도 해주지" 이런 분들은 이해 못합니다.
그러나 직접 가서 보는 것은 180도로 다릅니다. 말로 이해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게다
가 직접 운동을 해보면 그냥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치열함이 있습니다. 경쟁이 있고,
몸싸움이 있습니다.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잡초 근성을 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
에 광야로 내모신 것입니다. 온실 속의 모세가 광야 속에 잡초근성을 지닌 모세로 바뀝니다.
결국 우리는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나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입니다. 겉모습은 변화가
쉽습니다. 그러나 속사람이 바뀌려면 광야 학교 졸업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랬습니다.
여러분! 바울도 마찬가지이지요.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곧장 3년 동안 사
라집니다. 바울은 그때 어디에 있었습니까? 광야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아리비아 광야 학교입
니다. 바울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능력 있게 행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4장 12절-13절에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
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백한 것입니다.
광야생활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은 바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모세나 바울이
나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은 자들은 광야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도 광
야학교 졸업생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광야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자기를 버리는 훈련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배웁니까? 겸손과 온유를 배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광야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으로 돌아갑니다. 그때 부딪친 사건은 바로의 저항과 유대인
들의 원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해서 간 것인데 어려움과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벗어날 수 있습니까? 여전히 고난은 있을 것입니다.
광야학교를 졸업하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언젠가 어느 집사님에게 평범한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계속 제 마음에 있습니다.
"정말 고난에 빠져있으면 힘이 들어요"
"그래요 저는 힘이 들 때 하나님 사랑해요" 혼자 읊조립니다.
여러분 하나님 사랑해요. 고백할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암초를 만났을 때 암초를 보면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모세가 광야대학에서 바로에게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바로를 제거하지 않습니다. 대신 다섯 번에 걸쳐
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을 더하므로 바로가 그들을 그 땅
에서 쫓아내리라"
어떤 문제에 있습니까? 광야에서 해 메고 계십니까? 하나님만이 해결책임을 믿으시길 바
랍니다.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방법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광야에서는 어렵고 힘듭니다.
대신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런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을 쓰신다
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혹시 여러 가지 일로 고난 당하고 있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속 사람을 바꾸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오면 빨리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할 때에도 "하나님! 길이 열리게 하십시오, 관계를 회복 시켜 주십시오, 길이 열리게
하십시오"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그렇습니다.
"나를 변화 시켜 주십시오. 내 속 사람을 변화시켜 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왜
냐하면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속 사람을 바꾸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출애굽기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 움직였습니까? 적들이 공격할 때 아닙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아닙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을 보고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인! 변화를 느낄 때 전진하
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가 있고 은혜 받을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우리
에게 사인입니다. 이때 속사람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이라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없으면 잠시는 잘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점진적으로 흔들리게 됩니다.
비행기 사고의 대부분은 무엇입니까? 조종사가 비행기 계기를 믿지 못하고 감각을 믿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행 조종사들은 항상 느낌보다 계기를 믿는 훈련을 한
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알 수 있습니까?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매일 내게 주시는 말씀을 읽으면 달라집니다.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Q.T를 생활화 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분명한 지침이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려면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력한 이유는 무엇입니
까?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실력이 없습니다. 내가 하려고 해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힘입니까? 성령의 힘입니다. 성령을 의
지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살기 힘드십니까? 성령에 의지하십시오, 기쁨이 없고 걱정이 많습니까? 성령을 의지하십
시오, 삶의 무미건조합니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중심으로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 이런 사람은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철저하
게 바뀝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약속에 생명을 거는 사람들을 쓰십니다.
저는 키가 큰 편이 아닙니다. 아니 요사이 청년들과 비교하면 작을 수 있습니다. 요새 아
이들이 원하는 기준 키가 185라고 합니다. 엄청나게 커졌지요.
여하튼 제 키가 중학교 때의 키인데 제가 싸움을 별로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싸울 때 어떻습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에도 코피를 쏟게 하면 이기는 것
입니다. 그래서 먼저 코를 때려서 코피를 냈는데, 울지도 않고 끝까지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때 제일 무서운 말이 "야! 죽여라, 죽여!" 하는 말입니다.
정말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도 세상이 힘들 때 하나님께서 생명을 거는 자들을 택하신 것입니
다. 하나님은 세상이 어지러울 때 사람을 택하셨습니다. 특히 생명을 거는 사람들을 찾으셨
습니다. 그래서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명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예레미야, 이사야, 에스겔, 세례요한 등이 그렇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생명을 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엇에 생명을 걸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약속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에게 특히 생명을
거는 자에게 능력을 부어주셨습니다.
모세에게 바로를 이길 힘을 주었습니다.
아들의 약속을 기다린 아브라함에게 믿음의 힘을 주었습니다.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한 예수님에게 마귀를 이길 힘을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보고 생명을 구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다
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걸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쓰시지 않습니다.
예배도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입니까? 환경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단순하게 말하자면 말씀의 약속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얻었다고 감사하지만 바뀝니다. 그러나 말씀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도가 왕성해지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을 붙드는 것입니다.
고난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금 고난이 너무나 어려워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때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십시오, 생명을 걸고 목숨을 내놓으십시오, 그런 사람을 하나님
께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셋째, 실패에서 배울 줄 아는 사람을 쓰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패를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실패한 경우에 두 가지로 갈라지게 됩
니다. 한편은 실패자체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음은 실패를 통해 배우게 되는 사람입니다. 하
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치게 하시는 것은 실패입니다.
성공을 통해서 우리의 길을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알려주시는 방법을 주
로 사용하십니다.
베드로도 실패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주 그리스도이심을 알았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하였습니다.
모세의 인생은 애굽 왕자40년, 히브리 목자 40년, 지도자로서 40년을 보냅니다.
그런데 모세의 인생 중 언제 하나님이 사용하셨습니까? 겸손하게 낮아질 때였습니다.
잘되고 강할 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이 사용하신 것입니
다. 모세는 왕자로 있을 때 대단한 인물(something)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자로 있을 때 부족한 종(nothing)으로 생각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 (everything)로 세워 주게 된 것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실패를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행동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은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성숙함이란 자기 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맡길 것과 자신이 힘써야 할 것을 구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 가지 일을 만납니다. 내가 감당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감당하면 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감당하지 않으면 됩니다. 간단합니
다.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하나님은 이런 분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형통합니까? 아닙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경험 하셨을 것입니
다. 사실 예수님 믿어도 실패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실패를 통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성도들이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만히 살펴보십시오, 실패를 많이 경험하신 분
들은 순종을 합니다. 그러나 성공만 하는 성도는 교만합니다.
살인 등 순간적인 실패를 많이 경험한 모세가 나중에 어떤 소리를 들으시는 줄 아십니까?
민수기 12장 3절을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하
였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어떻습니까? 더욱 강퍅해졌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실패 속에서 다시 배움을 아는 분들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119:71에서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패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여기 저기 왔다리 갔다리 하는 신자가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흔들 전
런 말에 흔들하는 흔들흔들 신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다리 신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다리 신자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속
해 있습니까?
하나님은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생명을 거는 사람들을 쓰십
니다. 실패에서 배울 줄 알며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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