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2002-02-24 23:02:17 read : 1952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6:25-34
오늘은 의학 공부부터 하겠습니다.
오장이 무엇입니까? 장이란 속이 꽉찬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장은 심장 신장 간장 비장 폐장을 말하는 것이며
육부는 속이 빈 것으로 대장 소장 위 슬개 삼초 방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 제가 오장 육부를 말하는가 하면 우리의 근심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장 육부 모두가 염려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장육부(五臟六腑) 전체로 염려합니다.
그래서 어떤 증상이 나타납니다. 염려를 많이 하는 사람들!
'제2의 마음'이라고 하는 위(胃)가, 염려할 때 가장 많이 상하죠? 소화가 되지 않죠? 그래서 위궤양에 걸립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심하게 염려할 때 수많은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약해져서 병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
염려는 우리의 건강을 해칠 뿐만 아니라,
때로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과대학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의사에게 오는 환자의 20%가 그들의 근심과 두려움을 면할 수만 있다면 자기들 스스로 병을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였습니다.
사람들은 이 염려를 줄이기 위해서 술을 마십니다.
그러나 술을 마신다고 염려가 줄어들던가요? 잠시 잊어버릴 뿐입니다.
"사람들은 걱정을 덜기 위해 술을 마시지만 오히려 술을 마신 것 때문에 걱정거리는 더욱 쌓여만 간다"고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수면제를 얼마 정도 먹는가?
미국 시민들이 하루 동안에 먹어 치우는 수면제의 양이 7톤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7000Kg의 수면제를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경안정제를 찾고 수면제를 찾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염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염려는 더 심해지는 것 같습니다.
어느 날, 큰 동네에 죽음의 사자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정확히 30일 후에 그 동네의 사람들 가운데 2000명을 데려가겠다는 것이었어요.
큰 근심에 빠진 동네 사람들... 상의를 한 끝에, 대표되는 추장이 가서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짓습니다. 그래서 줄이고 줄여서 1000명만 데려가기로 협상을 했습니다. 추장이 돌아와 그 보고를 했지만 사람들은 별로 기뻐하지 않았어요. 왜냐 하면 2000명에도 포함될 수 있는 사람이 1000명에도 포함될 수 있으니까요.
드디어 약속한 한 달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들이닥쳤는데, 놀랍게도 그 동네에는 1000명이 아니라, 7000명이 죽어 자빠졌습니다.
너무너무 화가 난 추장이 죽음의 사자를 만나 따졌습니다. 분명히 약속하지 않았냐고, 1000명만 데려가기로 약속하지 않았냐고, 그런데 어떻게 해서 7000명을 데려갈 수가 있냐고 했더니 죽음의 사자가 얘기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한 일이 아니오. 나는 1000명만 데려 갔소. 나머지 6000명은 내가 간다는 소리를 듣고 염려해서 그 걱정 때문에 죽은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얘기를 만들어 냈을 것 같습니까?
염려가 얼마나 우리에게 해로운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얘기를 만들곤 합니다.
염려는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본문3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여기에서 염려는 다 이방인의 삶의 방법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없이 영생의 소망 없이 현대인의 삶의 모습 그들에게 있어서 염려는 당연한 삶의 한 부분입니다.
염려하는 것이 하나님 없이 삶을 살고 있는 불신자의 삶의 모습이라는 말씀입니다.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의 밑바탕에 무엇이 흐르고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내 삶에 대한 계획을 가지시고, 나를 돌보시며, 나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있다면 왜 염려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만큼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있는가?
질문에 대해 답변을 줄 수있는 잣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염려거리가 찾아올 때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내 신앙의 진면목을 과시하는 순간입니다.
불신자처럼 큰 한숨쉬며 염려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님 앞에 달려나와 주님게 모든 것을 맏기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에서 주님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하십니다.(27,28,31,34절)
사람이 염려하지 않고 평안하게 사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가은데 가장 큰 복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모든 염려와 걱정에서 쉬게 하십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도 우리의 염려를 주님에게 맡기고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영혼과 심신에 평안함과 안식이 이루어 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이름을 행복한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나와서 행복함을 누릴수 있어야지
교회 나오 부담주는 교회 긴장과 갈등과 두려움을 주는 교회라면 나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불신자들은 근심할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보살펴 주는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근심할 이유도 권한도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1-32)
근심은 사탄이 우리 마음속에 심어주는 정신적 살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 1:7)
'염려'는 헬라어로 '매림노'라는 말인데 이것은 '마음을 나눈다'는 말입니다.
염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버린다는 것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요,
실패와, 좌절과, 열등 인생으로 만드는 병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밤에 잠이 오질 않아서 뒤척이며 힘들었던 적이 있습니까?
잠을 청하는 효과적인 방범 중에 '하나, 들, 셋......'하면서 숫자를 헤아리며 잠을 청하는 범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범이 누구에게나 다 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천, 이천이 넘어가도록 세도 잠이 안오고 머리만 더 아프더랍니다.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밤에 잠이 안오는 이유가 단순히 커피를 마셨기 때문"
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뭔가 심각한 걱정꺼리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털어 버리고 잠을 자려고 해도 염려 때문에 생각에 골돌히 빠져들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는 거지요.
저는 이럴때 편히 잠을 청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립니다.
1)만일 작은 아이 때문에 걱정이 되서 잠이 안 온다면
반대로 그 아이가 그래도 잘 자라주고 착하게 커가는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생각하며 아이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안함이 옵니다.
2) 만일 돈 때문에 걱정이 돼서 잠이 안 온다면
지금 돈이 없어서 힘든 현실을 탓하지 말고
과거 많은 물질을 부어주셔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때를 생각하고
아울러 이렇게 내가 앞으로 받을 복을 생각하고 역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그러셨듯이 미래에도 나를 '곤란'에서 건져내시겠구나 하고 확신을 갖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교훈은 반대로 생각하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를 "감사하라"로 뜻으로 바꾸어서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염려는 우리의 신앙을 파멸시키며 정신을 늙게 하고, 몸도 늙게 합니다.
본문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키'는 '신장의 길이'나 '생명의 길이' 모두를 뜻하는 단어인데 여기서는 '생명의 길이'로 해석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염려함으로 더 오래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염려가 인생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에게 금지된 것 중의 하나가 염려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아십니다.
본문 32에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25절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염려 가운데 하나는 의식주 문제입니다.
그러나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할지, 어떤 집에서 살아야 할 것인지 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물질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신자나 불신자나 삶의 수단으로서 너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방법으로 물질을 얻는 것은 바람직한 일입니다.
물질을 사랑함으로 물질의 노예가 되어 버리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시면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자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
예수님은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실제적인 교훈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 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는 미래의 자기 생존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겨울에도 먹을 것이 없어 죽는 새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새들은 창고도 없습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습니다.
저들은 농사도 짓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풍성함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새가 먹이가 입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자세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과 지혜와 꿈을 주셨음으로 최선을 다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중의 새를 볼 때마다 우리를 기르시겠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느껴야 합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볼 때마다 우리를 입히시겠다는 하나님의 축복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공중의 새! 들에 핀 백합화!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와 축복하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이 지금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뭘 걱정하드냐"
30절 후반절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는 말은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약할 때에 우리는 걱정에 휘말릴 수밖에 없습니다.
걱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신앙이 없는 사람일 경우가 분명합니다.
루터에 관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 교황청으로부터 굉장한 압력을 받게 됩니다. 그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는 한은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교수형에 처하겠다는 협박을 받게 됩니다. 걱정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매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던 아내가 여간 안타까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루는 캄캄한 밤에 검은 상복을 입고 루터 앞을 왔다갔다하기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갑자가 아내가 야밤에 상복을 입고 이상한 행동을 하니 소름이 끼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크게 일어났구나 생각하면서 아내에게 묻습니다.
"누가 죽었소?" "예, 그래요."
"누가 죽었단 말이요?" "하나님이 돌아가셨답니다."
"아니 하나님이 어떻게 돌아가실 수가 있단 말이요? 말이나 되는 소리요."
"만약 하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으면 당신이 왜 그렇게 한숨쉬며 걱정하겠어요?"
라고 말하자 루터가 믿음이 없을 부그럽게 생각하고 다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가 걱정으로부터 속히 벗어나야 하는가?
걱정이 심해질수록 우리의 믿음과 영적인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걱정 때문에 이 생각 저 생각이 들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결국 망설이다가 아무일도 못하고 맙니다.
크리스천이 되려면 필연적으로 세 개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맨 처음 만나는 것은 '해방의 강'이다.
첫 번째 먼저 죄와 근심과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의 강을 건너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쁨의 강'이다. 주님이 있음으로 기도와 말씀과 예배가 있음으로 행복합니다.
세번째로 만나는 것이 '고난의 강'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이 강을 건너지 못하고 중도에서 하선합니다.
신앙이란 비행기를 타고 구름층 위로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 층을 뚫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기체가 심하게 흔들리는 시련을 거쳐야 한다.
.........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여기 '먼저'라는 말은 첫 번째로 란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구하라"는 것은 곧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염려하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죄짓지 않고 착하게만 사는 사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사람들 입니다.
강 모라는 사람이 어느 시골의 우체국 집배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참 편지를 분류하다가 문득 "하나님 나라에 계신 어머님께 드림"이라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편지 봉투에 받는 사람에 대한 주소는 없이 그저 "하나님 나라"라는 곳으로 보내진 이 편지를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일단 먼저 자신이 그 편지의 내용을 보기로 했습니다.
내용은 부모를 잃은 한 고아가
어린 동생을 데리고 동네에서 밥 한 술 얻어먹고 사는 거지로 전락하여
겨울날 배고프고, 추운 날에 갈 곳이 없어 헤메다가
문득 세상을 떠난 어머니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어 쓴 편지였습니다.
""어머니, 어머니. 어린 우리 남매를 두고 어디로 가셨나요?
어머님이 계신 하나님 나라로 나도 가고 싶어요.
천국에 계신 어머님은 언제 오시나요? 어린 동생은 춥고 배고파 울고 있어요.
이 추운 겨울 동생을 데리고 갈 곳도 없어요.
어머님 오실 때 좋은 옷도 사고, 맛있는 것 많이 가지고 오세요.""
편지를 읽고 난 집배원은 자신이 고아들의 어머니가 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래서 편지의 답장을 쓰고 옷도 사고 과자도 사서 이를 우편으로 보냈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서 아이들은 고아원으로 보내고 고아원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대학까지 나았고 국회의원 후보로 나올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합니다. 실화입니다.
여러분 큰 믿음이란 무엇ㅇ니가요
생활에 모든 어려움을 주님에 게 맏기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마음속에 하나님 아버지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이 말씀은 우선 순위를 아버지께 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모든 염려를 극복할 수 있는 적극적인 처방입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면 염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근심과 염려를 벗어나는 비결입니다.
결국 우리의 삶은 우선 순위는 주요한 문제입니다.
주님께 우리 마음의 우선 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물질 문제에 마음을 빼앗겨서 하나님을 등지는 사람이 될 것인가?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맏기고 우선 교회로 달려 나와 기도를 할 것인가?
우선 순위가 중요한 것입니다.
염려에 갇혀 사는 한 인생은 비전이 없습니다.
그러나 염려를 접어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문제들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분별하는 믿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대학교 총장이 신입생들에게 강의를 하면서 커다란 항아리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주먹만한 돌을 항아리 속에 하나씩 하나씩 넣기 시작했습니다.
항아리에 돌이 가득 차자 총장은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자
테이블 밑에서 자그마한 자갈을 한 웅큼 꺼내 자갈들을 항아리에 집어넣고는 자갈들이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항아리를 힘껏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눈이 동그레진 학생들은 '글쎄요'하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총장은 다시 테이블 밑에서 모래 주머니를 꺼내서 모래를 항아리에 넣어 주먹만한 돌과 자갈 사이 빈틈에 가득 채운 후에 다시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항아리가 가득 찼습니까?'
학생들은 꾀가 나서 '아니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총장은 '그렇습니다'라고 말하더니
이번엔 물이 담긴 주전자를 그 항아리 속에 물을 가득 부었습니다.
그리고서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실험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도 대답을 못하자 총장이 말했습니다.
이 실험 의미는 만약 여러분이 큰 돌을 먼저 넣지 않는다면 나중에는 영원히 큰돌을 넣지 못한다는 실헙입니다...'
다시 말해서 중요한 것을 먼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단 한번 뿐인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중요한 일을 먼저하지 않으면 늙어서 후회를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이란 항아리에 먼저 큰 돌을 넣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먼저 채워가야 할 인생의 큰 돌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겁니다.
인생에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돌보신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믿음 없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 수가 없습니다.
삶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불안으로 몰아가는 게 아닙니다.
결핍과 부족에서 염려가 생겨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를 불안으로 몰고 가는 것은 믿음보다 의심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염려가 커지면 믿음은 작아지고
믿음이 커지면 염려는 작아집니다.
쏜살같이 흐러가는 세월속에서
내가 평생에 힘써야할 생의 과제가 무엇인지?
먼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후회없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에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