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15:11-32 <2002. 1. 27.>
I. 구도자를 찾아라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후방기지 병원에 로데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군 포로들의 인체 실험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5장 6부의 일부 즉 허파 얼마를 짤랐을 때 얼마를 살 수 있는가? 간의 얼마를 남겼을 때 얼마를 살 수 있는가? 하는 잔인한 실험을 매일같이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데는 미쳐버리고 맙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토록 끔찍한 실험을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양심의 고통을 잃어버려가고 거기서 오히려 묘한 쾌감과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절규는 "내 양심의 고통을 돌려 주세요”였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단편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의 질병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잔인한 인간성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엔도 슈사꾸의 독약 - 즉, 무관심의 독약, 영혼의 소중함을 잃고 살아가는 독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자칫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소백씨라고 기억됩니다만 오래전에 단편 한 권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간 신문사의 기자로 있던 이 사람이 야간에 사옥을 지키는 숙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홀로 사옥을 지키려고 하니 심심한 생각이 들었던지 동리 슈퍼마켓에 내려가 소주를 한병 사다가 홀짝 홀짝 안주도 없이 마십니다. 찬바닥에 잠이 들어버렸습니다. 새벽에 잠을 깨고 보니 설사를 만났네요. 한 손으로는 아랫배를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다른 배를 움켜쥐고 화장실로 달려들어갑니다. 수위 아저씨가 화장실 문을 철커덕 잠그고 퇴근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급했든지 철조망 담을 뛰어넘어 동리 공중변소를 갑니다. 한참이나 볼일을 보고 앞을 쳐다보았더니 화장실 벽에 새까맣게 낙서가 되어 있는데 그 낙서들이 얼마나 재미가 있는지 한줄 한줄 읽어 내려갑니다. 가운데쯤 왔을까요? 굵직한 글씨로 한줄 크게 씌여져 있었습니다. 「오른쪽을 보시오!」 호기심에 얼른 오른쪽을 봅니다. 많은 낙서 가운데 눈에 익은 그 글씨, 이번에는 「왼쪽을 보시오!」 얼른 왼쪽을 봅니다. 이번에는 「뒤도 돌아다 봐라!」 묘한 자세를 하고 뒤를 돌아다 봅니다. 그랬더니 「위도 쳐다 봐!」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천장을 쳐다보았더니 매직글씨로 「뭘 봐 똥이나 싸지!」 ‘그래 똥이나 싸자' 한참 볼일을 보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게 진리입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앉은 볼일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마다 생각이 나서 글을 써 내려갔는데 한권의 수필집으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 이름을 뭐라고 할까? 생각하다가 화장실에서 인생을 깨달은 것이니 변소철학이라고 하자 그래서 수필집 이름이 「변소철학」입니다. 거기에 보면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의 맥이 있습니다. 사람은 그 자리에 앉으면 그 자리에 앉은 볼일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었으면 목사의 볼일이 있을게고, 대통령이 되었으면 대통령 볼일이 있을게고, 선생님이 되었으면 선생님 볼일이 있듯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볼일이 있는 게고, 교회는 교회로서의 볼일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될 가장 중요한 볼일 -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월로크릭 교회의 빌 하이블스 목사님은 단언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한손으로는 교회공동체를 가족으로 세워가는 일이요 다른 한손으로는 구도자를 구원하는 일이다." 세계교회는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 두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고 있습니다.
첫째, 주님의 신부된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가족입니다. 셀 목장은 가족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교인인 구도자들도 확장된 가족입니다.
둘째, 구도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지상과제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설교 제목이 「구도자를 찾아라」입니다.
II. 정관사(The)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셋이 나옵니다.
일찌기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은 무지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돈은 환경 때문에 잃어버림을 당했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기 판단과 결단에 의하여 집을 나갔습니다.
1. 그러나 성경은 세가지 중 어떤 경우도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잃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죄악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어느날 자녀들이 어버이의 속을 썩입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부모는 결심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 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속에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래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2. 성경은 늘 손해보는 하나님의 짝사랑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잃은 양 한 마리 찾았습니다. 동리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바보 같은 양 한 마리 찾아다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 죽였습니다. 이런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동전 하나 찾아다 놓고 벗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였습니다. 동전 하나 놓고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 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 아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다. 전자계산기 두드려서 하는 일 아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그 무엇 - 심지어 아버지에게 그 유비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에게 탕자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몇 주후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구나.”"예.” "그래 신발을 사 주시든?”"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금가락지를 끼워주셨겠지?”"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데요.”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아뇨. 송아지를 잡아 제게 주시는게 아니라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든데요.”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내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고, 내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보자기는 더 큽니다.
아들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꼴을 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눈에 그 아들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밤낮없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먼발치에 희미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나간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자비의 눈이 아들의 회개의 눈보다 빨랐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이 달려오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패와 고통으로 지새우는 수 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보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아들을 아버지의 눈은 뒤쫓고 있었습니다. 돼지우리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속에 빠졌던 그 모습을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야지, 아니야 돌아가도 용서하지 아니 할거야' 망설이는 그 모습을 아버지는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충혈된 눈과 굶주린 창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류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 각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오늘 본문의 이 사랑은 정관사의 사랑으로 묘사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정관사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잃은 양, 잃은 돈, 잃은 아들 그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동전을 찾습니다. 건초더미에서 흘려버린 동전 대신 아무 동전 채워놓고 열 개 채웠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기고 떠난 그 돈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시장에서 양 한마리 사다 놓고 백마리 됐다 할 수 없는게 목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 양, 상처났을 때 어루만지던 그 양, 젖을 짜던 바로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하나 데려다 놓고 이제 두 아이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그 아들, 옹아리를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아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대문을 닫을 수 없는게 바로 이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은 자기 생명과 우리 자신을 맞바꾸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산 양이 우리 한사람 한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앰블런스와 같은 심정으로 앰블런스가 엥엥거리고 달려 갈 때에 다른 모든 차가 길을 비켜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라고 하면, 구도자를 살리는 일이라고 하면, 영혼을 건지는 일이라고 하면 교회 모든 프로그램은 길을 비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정신이요, 복음 목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입니다.
「주의 심장 가지고 이제 우리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구원함을 얻은 기쁨 세상에서 제일이라」
3. 세 비유의 공통단어가 있습니다. "휴레카" I found it. "내가 찾았다"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휴레카 I found it 이라고 하는 단어는 너무나도 유명한 단어였습니다.
임금이 순금 왕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순금인지 아닌지 무게와 부피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면 금속은 전부 무게가 다르니까 알수 있겠지요. 그런데 들쑥 날쑥해서 이 부피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이것을 연구하던 아르키메데스가 너무 골치가 아파서 세라큐스 공중 목욕탕에 갔습니다. 물이 철렁 철렁 흘러 넘치고 있는데 사람들이 마침 아무도 없습니다.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물이 출렁하고 넘칩니다. ‘아! 물이 흘러 넘친 만큼 부피가 되겠구나'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구나' I found it. 휴레카! 휴레카! 옷 입는 것도 까맣게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휴레카! 휴레카! 내가 찾았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한 단어를 오늘 본문에 기록함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III. 주인공 추적
이 사실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의 주인공을 우리가 추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본문의 주인공을 우리가 알아야 될 필요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이 이 본문의 주인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 - 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은 꼭 놀아도 저런 것들하고 논다고. 그때 예수님께서 몸을 돌려 저희에게 비유로 일러 가라사대 오늘 본문을 들어야 될 1차적인 청중은 바로 바리새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입니다.
우리가 소설 한권, 영화 한 편 만화책 한권을 읽어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칼만 옆으로 쓱 지나가도 엑스트라들은 몇 십명씩 죽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총 몇방 맞아도 언덕으로 굴러 떨어져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고 치료받아 회복함으로 마침내 복수에 성공해서 끝까지 살아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장 24절로 둘째 아들의 얘기는 깨끗이 막을 내립니다. 25-32절 가운데 둘째 아들의 얘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막이 내려집니다. 맏아들이 주인공이다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의 타성을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습관의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못난 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교회안에 성도끼리만 교제하고,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끼리만 교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교회안에 성도들끼리 교제하면서도 세상 밖에는 무관심한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복음을 전할 마음이 없는 타성적인 신앙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결론은 구도자에 무관심한 교회를 나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많이 닮은 신구약 성경의 인물을 찾아본다고 하면 틀림없이 바리새인 일것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이다. 니가 바리새인일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바뀌어야 한다. 맏아들이 바뀌기 전까지는 바뀌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입니다.
IV. 맏아들은 무엇을 잃었나?
진정한 탕자가 맏아들입니다. 맏아들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맏아들은 구도자를 잃어버렸습니다.
1.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난 반찬을 드시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지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자식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짓밟아 버린, 잔치집 분위기를 망가뜨린, 가정의 행복을 꺾어버린 자식이 맏아들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열처녀의 비유가 나옵니다. 열처녀가 동일하게 준비한 것은 기름등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했고, 다른 다섯처녀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똑같이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형식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직분도 있습니다. 헌신도 합니다. 헌금도 드립니다. 인격적인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는 다 갖추었고 형식은 다 취하는데 그 가운데 복음은 준비하지 못한 그리스도인! 예수를 닮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님 오실때 내가 구원받았을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 가운에 적어도 50%는 구원받지 못할 수 있다는 무서운 가능성을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 귀신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귀신이 쫓겨났습니다. 집안을 소제했습니다. 쫓겨난 귀신이 사방팔방으로 돌아다니다가 있을 곳이 없어서 옛날집이 그리워 찾아와 보았더니 깨끗이 소제가 되었고 정리가 되었는데 주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곱귀신을 데리고 들어와 살았더니 이 사람의 나중형편이 처음형편보다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반듯하게 인격을 갖춘 것 같지만 그 영혼속에 그 삶속에 그 언어속에 그 사상속에 인생의 목표속에 그의 우선순위 속에 복음이 없을 때에 예수가 없을 때에 하나님이 아니 계실 때에 이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구도자를 잃어버렸습니다.
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잔치집 분위가 무르익었습니다. 집에 달려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에서 종을 부릅니다. 이 무슨 일인가? 종이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Your brother. 당신이 사랑해야 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한번도 자기 동생을 향하여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다시 깨우쳐 줍니다. Your brother.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Your brother. 그러나 끝까지 이 아들은 자기 동생이란 말을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이 아들 원문에 보면 Your son. 당신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한 번도 내 동생이란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이 둘째 아들은 창기와 함께 탕진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아버지 내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고백했습니까? 아니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동네사람들 중에 그렇게 말했습니까? 친구들 중에 그렇게 증인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종들이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아니요. 이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만났는지? 큰 빌딩을 지었는데 홍수에 날라갔는지? 아니면 사기를 당했는지 알길이 없지요.
본문의 설명에 허랑방탕이란 말은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는 말은 맏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일하게 이 맏아들이 자기동생을 비난하기를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날린 이 아들이라고 혹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이었습니다.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어두운면만을 과장하여 얘기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구도자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특별히 바리새인들은 죄인과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처럼 생각했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교제하지 않았습니습니다. 이방인들을 천국의 가족으로 환영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이요 오늘 우리의 마음이요 교회의 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도자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 돼지 쥐엄 열매에 이제 지쳐 있습니다. 세상은 저들에게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누가 17-20절).
당신이 품은 구도자 그도 우리 천국의 가족입니다. 그도 우리 형제입니다. 그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구도자, 태신자가 없는 사람은 소중한 천국가족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본문의 맏아들입니다. 그가 탕자입니다.
3. 이 맏아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덤비면서 하는 얘기가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과연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까? 신구약 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입니다. 두 번째,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메시지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네 동생 찾아와. 날이면 날마다 얘야 네 동생이 집을 나간지 며칠이 지났구나. 동생 좀 찾아 보려무나. 그러나 한 번도 찾아 나선 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 네 동생을 사랑해라. 네가 찾아 나서지 않다고 하면 돌아오는 그 동생이라도 사랑해라. 그러나 사랑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아침에 일어나라고 하면 일어났습니다. 씨를 뿌리라고 그러면 씨를 뿌렸어요. 추수하자고 그러면 추수했어요. 그래서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을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찾아 나서라고 하는 엄청난 지상명령을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가족들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는 사랑의 계명을 어기고 살면서도 주일날 되면 교회 나와서 예배드렸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내가 봉사하는 자리에서 헌신하고 충성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번듯하게 양복을 입고 주님전에 나가 가끔 주님의 얼굴을 대면했다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내게는 염소 새끼 하나라도 준 일이 없다고 넉두리를 늘어놓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에 봉사한 유일한 이유는 염소 새끼 때문이었습니다. 유치한 보상심리 때문에 교회를 섬겼습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해서 예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해서 헌금하고 있습니까? 찬양대들 여러분 주님을 진짜 사랑해서 찬양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사랑해서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까? 내 행복이 예수안에 있습니까? 세상에 알량한 내게 행복과 기쁨이 있지는 않았습니까?
예수 때문에 기쁘고, 예수 때문에 행복하고 예수 때문에 신명이 나고 예수님 때문에 손해보고도 살아가느냐?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V. 내가 기록하는 33절
맏아들이 집안일을 돌보고 밭에 나가 일하는 그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과소평가 되어서는 아니될 중요한 일입니다. 문제는 태도의 문제요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우선순위에서 늘 밀리는 일은 주님 오실 때까지 못하고 마는 겁니다.
USA Today 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도시 현대인들이 하루동안 이것 저것 해야 할 일을 다하려면 하루가 24시간이 아니라 42시간이 필요하다고 발표했습니다. 결국 인생은 자기 할 일을 다 못하고 죽는 겁니다. 우선 순위 - 이것이 신앙이요 인생관이요 역사관입니다.
한 3주후에 저희 교회를 방문하게 될 랄프 네이버 목사님의 얘기 가운데 등대지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바닷가에 등대를 밝히는 등대지기가 있었습니다. 등대를 밝히기 위해 매달 일정량의 기름이 배달됩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마을 어느 가정 외아들이 큰 병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부모는 등대지기에게 달려와 기름 좀 팔아 수술비를 마련해 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거절할 수 없었지요. 어느 집의 아들 대학 등록금으로, 밥을 먹지 못하는 어느 할머니의 양식을 사기 위해 기름을 조금씩 조금씩 팔았습니다. 마침내 등대를 밝힐 수 없게 된 그날밤 마을 모든 장정들이 고기잡이를 나갔다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등대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바다 가운데서 방황하다가 암초에 부딪혀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등대지기의 지상과제는 등대를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교회엔 분명한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교회를 주님의 신부된 가족, 공동체로 세워가는 일과 구도자를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것 한 다음에 봉사도하고 성가대도 하고 영성훈련도 하고자 하는 겁니다. 주님이 교회를 디자인하실 때 그렇게 디자인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하여 32절로 막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립니다. 33절이 기록되어야만이 완성되어집니다.
33절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아버지 아버지와 더불어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만난 음식을 드시면서도 왜 울어야 되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밝은 달이면 언덕에 올라 먼산을 왜 쳐다보시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품에 덥석 안겨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33절이 가능합니다. 또 다른 33절, 둘째 아들이 돌아왔는데 아버지 가슴에 못질하고 다시 집을 떠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먼길을 떠나는 33절이 가능합니다.
왜 33절은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이제는 그 33절을 우리가 기록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 여러분이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주님앞에 서는 심판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33절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제 복음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십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그 분 한분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분과 더불어서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십니까?
VI. 구도자를 살리는 교회로
오늘날 현대교회에 주어진 지상과제도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구도자를 살리는 교회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두 번 정도 자원하여 안수기도를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미국 수정교회에서 죤 윔버를 만났을 때 안수기도를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미 그때 그는 병약하여 한시간 강의조차 힘든 상황이라 감히 요구하지 못했습니다.
첫 번째는 알파코스의 개발자의 대표자인 니키 컴블 목사님이 영락교회에 왔을 때 치유사역을 위해 안수기도를 하길래 달려나가 내 머리를 맡겼습니다. 두 번째는 싱가폴 FCBC교회 로렌스 콩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의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당신의 그 불과 열정을 내게는 나눠주시오." 요청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뜨거웠고 그 내용은 분명했습니다. "한국의 류 목사님이 교회안에 있는 많은 교인들보다 교회밖에 더 많은 하나님의 가족,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있음을 보게 해 주십시오." 하는 기도였습니다.
두 번 다 몸에 특별한 느낌이 있었던 것도 방언이 터지고 하늘의 불이 떨어지는 느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점차적으로 부족한 종을 통하여 우리교회를 통하여 치유의 역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구도자들을 보는 눈이 열려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자원을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쓰려고 몸부림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로 세우기 위해 함께 발버둥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앞으로 더욱 크게 우리교회가 쓰임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발돋음하게 될 것입니다. 민족을 세우고 한국교회를 세워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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