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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누구에게 이웃이 될 수 있는가?
    2002-03-28 23:13:27   read : 159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설교 본문 : 누가복음 10:25-37 방송 듣기

    영생이 무엇입니까?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사를 섭리하시고 심판하시는 유일한 하나님은 오직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을 허락하십니다. 영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과 그분이 당한 지옥고통은 우리의 생명줄입니다. 예수없이 구원없고 하나님의 은혜없이 영생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목숨이 있는 모든 사람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이여!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하면서 예수님께 나아와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떤 율법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고 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한 가닥 남은 마지막 자존심이긴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치명적인 헛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하에 어떤 사람도 자기 스스로의 선한 행실로 영생에 이를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겠습니까?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얻겠다고 말한 율법사의 말이 진리겠습니까?

    구원은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묻기전에 어떤 사람인가를 묻습니다. 행위보다 존재의 문제가 선결되어야 합니다. 행위의 문제는 이 존재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에 언급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오늘은 이 구원의 문제, 존재의 문제가 이미 해결된 성도들의 사랑의 삶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사랑의 삶은 율법사가 앵무새처럼 읊은대로 곧 영생의 삶입니다. 영생의 삶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여기 네 번씩이나 "다하여"란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하신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이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일편단심 민들레 인생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심으로 충성하는 모습은 예배를 통해서 봉헌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이 예배시간에 모든 회중으로 하여금 영생의 기쁨을 맛보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주의 날에 영생의 하나님을 극진히 찬미합니다. 우리는 전 생애를 드려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사로 응답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첫 번째 행복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이 영생의 삶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자기에 대한 사랑보다 덜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의 삶에 영생의 꽃이 피고 있습니까? 영생의 꽃은 사랑입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고 했습니다(시 133). 영생에 대해서 롬 5:5에는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했고, 빌 4:7에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했으며, 벧전 1:8에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사랑으로, 평강으로, 영광스런 즐거움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흔히 "내 이웃이 누구란 말입니까?"라고 변호사처럼 논쟁하다가 볼일 다 봅니다. "저 사람도 내 이웃이 된단 말입니까? 아닐 것입니다. 저런 예수도 안 믿는, 이방인은 내 이웃일 수 없습니다. 예수 믿어도 저렇게 못된 인간, 성질 고약한 사람은 내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에 어떤 사람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지금 교회에 다니는 사람보다 못된 사람이 나와야 하는 곳입니다. 죄도 많고 실수도 많고 교회 욕도 많이 하던 사람이 나오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2-13).

    우리 이웃이 누구겠습니까? 저는 제일 먼저 우리 이웃은 병든 자라고 말해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 말씀하신 이웃은 길을 가다가 떼강도를 만나서 그 옷을 벗기우고 맞아서 거의 죽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의 비극은 악이 구조화되고 조직화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떼강도가 되어 때리니 때려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맞아도 누구한테 맞았는지 얼굴이 없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벽한 건강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100년 이내에 정신을 까마득히 잃고는 한번은 죽어야 할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인생은 실로 짧은 그림자입니다. 우리 모두는 조상으로부터 유전받은 죄성이 있는가 하면 사회의 환경 또는 가정의 역사속에서 이런 저런 강도들을 만난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온전한 건강을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 사람의 옷이 벗겨졌습니다. 이 세상에서 옷은 우리들의 체면을 유지해 주는 최후의 자존심입니다. 그런데 군에 가든지 감옥에 가면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여기는 사회의 지위나 계급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의 병사나 죄인으로 취급받을 뿐이라는 겁니다. 옷을 벗는 순간 지위에 따른 대우가 다 사라지고 맙니다. 이렇게 자존심이 상해서 안으로 피가 흐르고 있고, 또 가진 것은 다 빼앗겨 가난뱅이가 되었고, 얻어맞아서 몇 개월, 몇 년이나 치료받아야 할 사람이 길가에 버림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날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의 죄값입니까? 강도를 만났기 때문입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안과 밖으로 많이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보신 우리의 이웃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 곁에 있습니다. 주님이 내 앞에 두신 병든 자, 가난한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이웃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건강하라! 완전하라! 얼어서라!" 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통하지가 않습니다. 바로 그 이웃의 곁을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제사장은 오늘 말로 하자면 예배에 수종드는 당회원과 같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강도만나 거반 죽어가는 이웃을 만납니다. 너무나 일상적인 일이 아닙니까? 오늘 우리 주위에는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들, 강도들을 많이 만나서 어쩔 수 없이 고통하고 신음하는 사람들로 즐비합니다. 가정에도 있고 직장에도 있습니다. 친구중에도 있고 건너집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은 예배 때 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하고 또 새로운 은혜를 받고 돌아가면서도 그 사람의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왜 못했을까요? 그가 강도 만난 이웃을 제 나름대로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6 공화국이 들어섰을 때 5공 청문회가 있었지요. 그때 유명했던 말이 총체적 진실이란 말입니다. "증인은 총체적 진실을 말하시오!" 여러분, 우리가 하나 크게 잘못 알고 있는게 있는데요. 사람은 총체적 진실을 결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모든 진실이 드러나기를 바라고 다 알아야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여러분 자신에 대한 총체적 진실을 다 알고 계십니까?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남의 총체적 진실은 알아야겠다고 부득불 애쓰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은 강도 만난 사람의 총체적 진실을 다 알기 전에는 무슨 일에 말려들까 겁이나서 피해갔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에 대하여 절대적인 지배자가 되려는 의지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내 손에 잡히는 사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겠다고 고집하지 마십시오. 거저 하나님이 내 곁에 보내주셨기 때문에 내가 그에게 이웃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지배자는 인간의 창조주요 소유주이신 하나님뿐이십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다 아십니다. 인간의 총체적 진실을 아시고 인간의 운명을 책임지시고 바꾸십니다. 총체적 진리, 전면적 진리는 책임지고 해결할 수 있는 분만이 알 권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하나님의 총체적 진리를 알려고 덤볐던 적이 있었지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동산 중앙에 있던 선악과를 따먹었던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이 될려고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또는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 최종 가치판단인 것처럼 착각에 빠져 왔던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러분의 이웃을 다 알기 전에는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든지, 한두 가지 사실을 가지고 그 사람을 전부 안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그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를 존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를 다 모르는 것은 내 자신이 나를 다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예수께서 나의 운명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 올라가신 그 사랑과 희생의 크기를 우리는 영원히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헤아리십니다. 하나님이 홀로 심판하시고 하나님이 홀로 끝내십니다. 구원의 알파와 오메가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분 외에는 아무도 구원의 진상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행하신 결과를 거저 믿고 받을 뿐입니다.

    그 다음에 제사장이 그를 그냥 지나간 이유는 강도 만난 사람의 상태가 매우 부정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남의 잘못 하나를 너무 확대 해석하는 경향입니다. 난데없이 강도 만나서 지금은 죽어가고 있지만 전에는 건강했고 지금도 이 병만 낫고 나면 얼마나 멋진 인간이 될 것인가? 우리는 그런 배려에 너무나 인색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곤경에 대해서 "이제는 끝났다, 죽어라"고 하신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네 죄만 사하고 네 병만 고치면, 너는 건강할 것이요, 행복할 것이요, 아름다와질 것이요, 평안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너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를 믿을 수는 있지 않느냐?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받을 것이라"(롬 3:17)는 것입니다.

    실제 우리가 당한 상황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습니다. 한두 가지만 정리되면 또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가 아리면 세상에 살고 싶지가 않지요. 그러나 그 이빨을 치료하고 나면 얼마나 가뿐합니까? 마찬가지로 마귀가 여러분에게 여러가지를 복잡하게 덮어 씌울 때는 망치려는 악의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이웃을 볼 때마다 이런 관점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이래서 안되겠다"가 아니라 "이것만 고치면 되겠다"고 생각하십시오. "되겠다, 안되겠다" 의 차이에 주의하십시오. 언제나 그 사람의 좋은 점 하나, 작은 선 하나를 찾아서 인정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 번 꾸지람하는 것보다 작은 것 한번 칭찬해 줄 때 우리는 고침을 받고 새로와지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사장이 강도 만난 이웃을 피해간 까닭은 강도 만난 이웃이 나의 도움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하고 회의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우리가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나의 선행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질문은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받으셨을 만큼 우리가 가치있는 존재일까요?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그것이 영생의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내 느낌, 내 체면, 내 이익을 가지고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가치있게 불러주신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너도 이웃을 가치있게 여겨라고 말씀하십니다. 강도 만난 그 사람은 가치있는 영혼입니다. 우리의 물질을 써야 할 귀한 대상입니다. "이웃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는 문제는 나의 가치관을 다시 정립해야 할 판단의 문제가 아닙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러한 복잡한 논쟁이 제사장의 마음에 오간 것처럼 레위 사람의 마음에도 오갔습니다. "그를 나는 모른다 그는 너무 죄가 많아 보인다 그가 내 이웃이 되기에는 너무 무가치해 보인다." 레위 집사는 교회에서의 봉사는 잘했지만 그만 세상에서나 가정에서의 봉사생활에는 실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웬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장사하기에 바빠서 먼 길을 다녀야 했고 새벽처럼 일어나 길을 떠나야 했지만 그 강도 만난 사람곁으로 달려갔습니다. 상처를 치료해 주었을 뿐 아니라 몇십 만원을 주어서 입원시키고는 내가 책임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평신도였습니다. 그의 행동을 지배했던 것은 곤경 당한 사람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독생자를 보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보면 총체적 진실은 몰라도 총체적 난국이 보입니다.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보면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한 일입니다.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강도 만난 이웃을 보면 그 영혼이 자기 시간보다 물질보다 체면보다 자존심보다 더 가치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롬 6:23). 우리는 영생을 찾고 누리고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자기연민과 피해의식은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우리가 영생의 꽃인 사랑을 실천하기만 하면 영생의 아들들인 행복의식과 감사의식에 둘러싸여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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