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청년부 목회자의 마음에 대하여 2002-03-26 22:25:24 read : 20309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김대응 kd2@korea.com 서울침례교회 대학청년부·전도·교구 목사
청년들을 향한 “예수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고, 관계 형성을 이루어 가는 지혜가 특히 요청이 된다
청년들과 함께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요소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들을 향한 “예수의 마음”이다. 여기서 “예수의 마음”이라는 것은 그들과 함께하는 목회자의 마음을 뜻한다. 마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마음”이 결코 아니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겪게 되는 많은 부분에서의 공감과 이해, 실망과 희망, 인내와 훈련, 현실과 비전, 사랑과 배신 등의 다양한 관계를 어떻게 형성해 가느냐에 달려 있다. 이들을 향한 소명과 사명과 열정만 가지고는 이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교회 전체 사역 가운데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실제로는 큰 데도 교회 전반적인 인식은 그리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있다. “청년들이 살아야 한다” 라고 하면서도 그들을 살리기 위한 배려는 정말로 부실하기 그지없는 것을 현장에서 발로 뛰어본 목회자라면 공감을 할 것이다. 청년들이 교회의 분위기를 체감하는 것은 청년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통해서다. 물론 전반적인 교회 예배나 행사를 통해서 분위기를 알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청년들이 활동하고 비전을 가지는 것은 부서 활동을 통한 것이다.
이들을 담당하는 목회자에게 하나님이 그들을 향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실제적인 배려가 필요하다. 하나의 거쳐 가는 과정으로서 이 부서를 담당하게 하거나, 교회의 통제력을 전달하는 기관 담당자로서 목회자를 그곳에 있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교회의 생명력 있는 몸의 한 지체로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팔, 다리 그리고 뜨거운 심장이 뛰어 노는 활력을 이들에게 불어넣어 주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년 목회자는 교회 전체 속에서 그들이 꿈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한다. 교회의 전체 분위기와 전략이 하나로 통일이 될 때 지역교회를 넘어선 꿈을 바라볼 수 있다.
청년들이 그 시절에 누려야할 특성들을 살려주는 계획들이 있을 때 교회에서 전폭적인 지원은 못하더라도 인정은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장년들이 하는 계획의 축소판으로 청년들이 따라와 주기를 요구하고, 강요 아닌 요청(?)을 한다면 그 분위기는 금세 침체가 된다. 그런 현상이 한 두 번 계속이 되면 사건은 한 두 번이었지만 그 분위기는 몇 달에서 몇 년을 가기도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한 두 번의 사건으로 교회가 청년들에 대한 분위기를 살려주지 못할 때 그들을 인도해 가는 목회자의 마음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청년담당 목회자는 자신의 의지대로 되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교회마다 그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 교회에서 기둥과 같은 청년 일꾼들이 나오기도 하고, 기둥은커녕 성장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청년들이 발생하게 된다.
청년들을 향한 목회의 부르심을 입은 목회자들이 그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의 부수적인 일들에 청년들을 시도 때도 없이 동원하는 일들은 없어야 할 것이다. 청년들이 그들의 목회자를 따라 한 믿음으로 교회 안에서 바르게 양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 부서 담당목회자는 속된 말로 위로부터 치이고, 옆으로부터(동역자들) 치이고, 특히 영향력 있는 관계된 안수집사(=장로)로부터 치이게 된다. 치인다는 말이 좀 우스운 표현일지 몰라도 눈치를 보게 된다는 말이다. 부서 목회자가 거기에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은 담임목회자의 인사권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의 입김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자꾸만 담임목회자에게 부정적인 말을 넣게 되면 여론에 밀려서 얼마 못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옮겨지게 된다.
청년들이 기도하며,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아주고 그 시절을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포용력이 있으면 희망이 있다.
청년들이 있는 곳에는 좋은 일도 많이 있지만 궂은 일들이 더 많이 있다. 청년들이 행하는 일들에 대하여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아주고 그 시절을 아름답게 성장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면 좋을 텐데 이상하게 눈엣가시처럼 보는 인식은 교회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 어두운 요소이다. 청년들이 꿈들이 많지만 그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막상 지역교회라는 현장에서 그것을 이루어가는 것은 청년담당목회자의 숙제인 동시에 더욱 큰 교회의 사명인 것이다.
청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마음 놓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일할 수 있는 현장을 펼쳐주는 것이 요청된다. 교회 전체의 행사는 행사대로 돌아가고 이들이 거기에 휩쓸려 동원되지 않고, 그들이 함께 꿈을 이루어갈 동역자들을 서로 발견하는데 그 계획대로 갈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청년들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청년들과 함께 하고 싶어도 교회 전체 행사에도 함께 하고, 청년들과도 함께 한다는 것은 상당한 무리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청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길 희망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는 지도자라면 생각해야 할 위치에서 신중하게 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단독으로 청년목회를 꿈꾸는 것이 좋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도 않고 소신 있게 그 꿈을 이루어가면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인내와 대가 치름이 있다. 청년들에게는 심지가 깊지 못한 면이 많이 있고, 언제나 유동성이 있다. 그들은 아직도 배워야 하고, 가치관도 재정립이 되어야 할 시기이다. 그들에게 어떤 부담감을 주는 일들로 교회에 묶어두려고 하는 인상을 주게 되면 정착하기 어렵게 된다. 막상 생각으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지만 실제는 하는 일마다 일이 되고 부담이 되게 된다. 그들이 일할 만하면 결혼을 한다거나 직장을 따라서 또는 군 입대를 하기에 이들을 통한 열매는 장기적이 된다. 그 기간을 기다리지 못하면 모든 꿈이 물거품이 된다. 아니 손에 잡히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거시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다 유익하다고 통이 큰 목회(?)를 지향하면 괜찮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안하느니만도 못한 것이 된다.
청년 목회자는 그들을 양육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일꾼을 키우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그들도 교회의 지체라는 사실을 교회가 잊지 않으면 오해는 없을 것이다.
지역 교회 안에서 청년들에게 집중하면 저네들끼리 따로 논다고 소위 찍히게 되고, 그렇다고 교회의 모든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되면 청년들이 아우성친다. 우리에게도 우리에게 맞는 영의 양식을 달라고. 이 둘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청년목회자의 애로이다. 이 쪽 저 쪽 균형을 맞추어 가려고 하다보면 양쪽에서 다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렇다고 어느 한 쪽에 관심을 쓰게 되면 다른 쪽은 돌아보지 않는다고 더 야단이다.
마음만 가지고 청년목회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체험한다. 마음과 더불어 얼마나 교회 전체의 이해 속에서 그것을 이끌어 가느냐 하는 것이다.
청년만 담당하게 하고 그 일에만 집중하여 부흥시키도록 하면 가장 좋은 일이다. 지역교회가 그렇게만 한다면 반드시 청년목회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통해서 교회는 부흥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자연적인 성장이며, 기적이 아닌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나님의 축복인 것이다.
청년들의 마음을, 마음에 품은 목회자를 하나님이 부르고 있다. 그리고 지역교회 안에서 담임목회자의 마음에 청년목회를 마음에 품은 목회자를 찾고 있다. 청년목회자와 담임목회자가 한 마음으로 합한 목회를 꿈꾸는 지역교회는 반드시 자연적인 부흥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부흥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관계의 설정과 이해에 어떤 ‘버그’가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빠른 시일 안에 해결해야 순차적인 성장이 오게 된다.
마치 담임목회자와 청년목회자와의 관계가 회사처럼 주종관계로 형성이 되어 있다면, 직원처럼 인식의 틀이 고정이 되어 있다면,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의 교회가 한 가족 개념으로 인식의 틀이 바뀌지 않는다면 교회가 피가 통하지 않는 조직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청년들에게는 젊음의 피가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젊음을 바칠 수 있는 교회의 가족개념이 성경적으로 회복이 되기만 한다면 담임목회자나 청년목회자나 청년들이나 한 성령 안에서 한 마음으로 뜨거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일어서는 청년 군대가 될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200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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