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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필 십자가인가?
    2002-03-25 17:31:02   read : 196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18:33~38 // 2002.03.24

    이율배반
    잠자리 한 마리가 가만히 풀 위에 엎드려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살금살금 다가와 있는 힘껏 잠자리채를 휘둘렀습니다. '윙’하고 바람 갈라지는 소리에 잠자리는 날개를 폈습니다. 가까스로 죽음을 모면한 잠자리가 아이를 향해 말했습니다. "나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어린 너한테 잡힐 뻔 했구나.”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잠자리는 온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워했습니다. 아이에게 말을 하다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파르르 날개를 떨고 있는 잠자리를 보며 거미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날개가 없었다면, 이렇게 거미줄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아무리 움직여 봐야 소용없어, 움직일수록 더 조여들 뿐이니까"

    거미는 재빠르게 잠자리를 먹으려고 달려갔습니다. 그 순간, 산새 한 마리가 허공을 가르며 총알처럼 날아왔습니다. 산새는 표적처럼 박혀있던 거미를 낚아채듯 물고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신음하는 거미에게 산새가 말했습니다. "거미야, 미안해. 네가 몸을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만 않았어도 나는 너를 보지 못했을 거야“

    세상적으로 자랑하고 뽐낼 수 있는 힘과 환경을 가지고 마음껏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도 그 자랑거리가 오히려 덫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부족함 때문에 오히려 넉넉해질 때도 있습니다. - 이철환
    나, 혹시 듣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길을 묻고 나서 그이가 아무 말 없이 지나가 버린 걸 가지고 '그놈, 참 몹쓸 놈이고’하지는 않았는지....... 나, 행여 의족을 하고 버스에 앉아 가는 다리 불편한 젊은이 곁에 서서 가면서 '요즘 젊은 놈들, 어른도 몰라봐’하며 속으로 욕하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고난 주간과 부활 주일을 앞에 놓고 십자가에 관한 성경 말씀이나 설교를 많이 듣게 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 한 구절만 가지고는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8장 28절 이하에서 '주셨다'는 말의 의미를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외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죽이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단호한 뜻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3절에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고 정하신 뜻에 따라서"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알고 미리 작정하신 일이요, 하나님의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는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지 아니하면 안 된다는 분명한 판단 아래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론인 것입니다.

    다른 죽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죽음일까요?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가장 잔혹하다는 그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을까요? 갈라디아서 3장 13절만큼 이것에 대해 선명한 답을 주는 곳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십자가는 한마디로 저주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했던 한 가지 이유는 예수님이 저주의 죽음을 죽어야 할 입장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율법의 저주 아래 갇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율법의 요구요 명령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해 나 자신을 사랑했습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기보다 언제나 나 자신만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온통 죄만 짓다가 한 생을 끝내야 되는 것이 우리의 입장입니다. 결국 율법이 명령하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하게 불복종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죄 값으로 물으시는 저주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의 저주 아래 놓인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그 저주를 다른 누군가가 대신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도 적당하게 받아서는 안 되고, 저주받은 자가 죽는 죽음을 대신 죽어야 했습니다. 십자가 죽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예수님을 십자가의 저주스러운 죽음을 당하도록 하셨을까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답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결코 방관자가 아니십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자기의 모든 뜻하신 바를 끝까지 수행하시고 완성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면 그 일을 완성하시기까지 결코 쉬지 않으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빌라도의 재판 과정이나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갈 때 한 행동들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십자가를 통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선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한번 봅시다. 그들은 새벽에 예수님을 불법으로 재판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기소하고는 당시 로마 제국의 총독으로서 유대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던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했을까요? 물론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만족할만한 대답이 못 됩니다. 왜 하필이면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 갔을까요? 십자가에 잔인하게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쳐죽이는 것으로는 분에 차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법에 의지해서 예수님을 당시에 가장 잔인하다는 십자가 죽음으로 죽게 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증오심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의 표현
    "예수님은 누구도 비판하신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비판하는 사람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누구도 규탄하신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은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누구도 심판하신 일이 없는데도 그를 본 사람들은 심판을 받은 것으로 느꼈습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 나라 지도자들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고 처형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살려 두는 것은 곧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고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죽도록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오가 지나치자 그들은 일종의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떤 사람을 죽도록 미워하면 결국 그 증오는 모든 정상적인 판단 기능을 파괴시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상식도 벗어나게 만들고,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행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사람을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끌고 가는 것이 바로 증오인 것입니다. 대제사장들과 그의 추종자들은 바로 이런 증오의 제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이는 것으로만 안 된다. 잔인하게 죽이자. 가장 무서운 십자가형으로 그를 죽도록 만들자. 그가 그렇게 죽는 것을 보아야 만이 우리의 분이 풀리겠다.'하고 작정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섭리였습니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이와 같은 사실을 놓고 우리가 정리해야 될 은혜가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아무도 막을 수 없구나 하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시고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자기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자기 외아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게 하심으로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키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대제사장들이 막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증오가 그 사랑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까? 빌라도의 권위와 그 비겁한 성격이 하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있었습니까? 절대 그 사랑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를 잔인하게 죽이려고 했던 대제사장들의 행동은 거꾸로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의 홍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들이 악하게 행동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에 더욱더 넘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하고 소리치면 칠수록 하나님의 사랑은 더 풍성해졌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미워한 나머지 그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했지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기를 원하셨고, 또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증오를 이겼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던 세상이 십자가의 피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이 이긴 것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역력히 증명하셨느니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원천입니다.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이 큰사랑을 우리에게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잔인하게 죽이려고 했던 대제사장과 예수님을 살리려고 하다가 안되니까 비겁하게 십자가에 처형한 불의한 재판관 빌라도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참으로 놀라운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전의 법칙
    둘째는,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악을 선용하십니다. 이것은 비록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개인의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지금 여러분이 악처럼 보이는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건강 관리를 열심히 했는데 병이 생겼습니까? 악이지요. 그렇게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 직장에서 쫓겨납니까? 의롭게 살려고 애쓰는데 악하게 사는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냅니까? 이 모두가 악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악들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하시고 사랑이 넘치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가끔 악하게 보이는 것들을 우리에게 허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줄 아십니까? 그 악을 선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것에서 좋은 것을 낳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다
    셋째는, 예수님만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하실 구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은혜입니다. 이 땅에 교회가 처음 탄생하고 나서 한 300년 동안 기독교는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이 피를 흘렸는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그 300년 동안 무섭고 혹독한 핍박을 견디며 점점 퍼져나갔습니다. 그리하여 결국에는 로마 황제가 기독교 앞에 굴복하는 날이 오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초대 교회 성도들이 그 혹독한 시기를 견뎌냈는지 아십니까? 십자가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십자가를 자랑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은 그 출발이 자기부정이며, 그 노정이 자기비하이며, 그 종점이 자기희생입니다. 결과는 무엇을 가져오겠습니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하리라 하신 대로 결과는 망하고 마나 십자가의 뒤를 따라 그의 사랑 안에서 사는 성도에게는 자기 부정과 자기 비하와, 자기 희생을 통하여 영원한 영생을 가져옵니다. 또한, 참 신앙은 영생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다른 사람들의 과거로부터 죽고 내 안에 있는 분노로부터 죽는 것이 믿음의 길"이라 했습니다. 사람들은 계획함으로 시작하고 노력함으로 성취하고 교만함으로 멸망합니다. 예수님은 군중들이 몰려와서 억지로 왕을 삼으려는 것을 피하여 혼자 산으로 떠나 기도하셨습니다(요6:15). "영이 걸리기 쉬운 병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매우 잘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체스터튼).

    우리 앞에는 영생과, 영광과, 부활과 승리가 있으니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주께서 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갑시다. 우리의 기도가 속히 응답이 안 온다고 낙망하지 마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길이 십자가의 길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가슴에 십자가로 인한 뜨거운 감격과 놀라운 은혜와 찬양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늘 고난주간을 시작하면서 성만찬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제 성만찬의 의미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성부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서의 성만찬입니다.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뜨거운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속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하게 하신 구속의 사랑을 뜨거운 감격과 감사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가 바로 성만찬입니다. 순교자 저스틴은 주님의 만찬을 대할 때마다 죄로 죽었던 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려 주신 하나님의 은총 앞에 먼저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한다고 명령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은 늘 성만찬을 통하여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칼빈도 "주님의 만찬은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하나님의 은사"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결국 성만찬의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속의 은총에 대하여 감사하는 감사의 예전입니다.

    2.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만찬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6:56) 세례가 하나님의 자녀로의 인침이라면, 성만찬은 그 인침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찬을 받아 먹고 마실 때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요, 내 안에 주님이 계신 것을 새롭게 새롭게 확인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성만찬을 받는 자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내대신 죽음을 당하시고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만찬은 바로 이 희생의 주님의 몸에 내가 연합하는 신비의 체험입니다.

    3. 그리스도에 대한 기념으로의 성만찬
    성만찬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생활과 그 희생에 대한 실체의 표징입니다. "아남네시스"란 말은 "기억"이나 "회상"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과거에 있었던 한 사건의 결과를 현재 속으로 이끌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의 사건을 하나님 앞에서 성만찬이라는 의식을 재현함으로써 그 사건으로 하여금 지금 내가 성만찬을 받는 여기에서 똑같은 효력을 발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서 성만찬의 의식이 거행될 때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현재적인 사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성만찬은 주님의 죽음과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부활과 앞으로 있게될 하나님나라의 메시야적 향연의 약속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즐거운 축제"인 것입니다.
    4. 하나님 나라의 식사로서의 성만찬
    마지막으로 성만찬은 약속된 하나님의 통치를 소망하도록 해주며, 또한 그것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심을 축하하고 확신하는 축제입니다(고전11:26,마26:29) 그러므로 성만찬은 이미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나라와 장차 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열어주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천국의 잔치를 미리 경험케 하는 식사인 것입니다. 한스큉(Hans Kung)이란 신학자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점에서 성만찬을 잘 설명해 줍니다.

    "과거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회상과 감사의 식사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교제의 식사요 언약의 식사요, 미래의 관점에서 주의 만찬은 메시야의 종말적 식사에 대한 예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만찬이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현현해 주는 귀한 예전임을 말한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따라서 성만찬은 이 땅의 마지막 날에 기쁨과 영광 중에서 우리 주님과 함께 나눌 하나님나라의 식사의 표징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합니다. 여러분은 성례전에서 내가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이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기로 새롭게 다짐을 하게 되며, 감사와 감격의 삶 속에서 우리의 잠자는 신앙이 이 예식에 참여함으로써 다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성례전에 믿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영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게되고 감격과 감사가 넘치는 축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식에 참여하는 여러분은 확신 있는 믿음으로 거룩하게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 이웃과 눈에 보이는 형제들을 사랑하며 기꺼이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른 때보다도 오늘 이 시간의 성만찬은 새로운 의미의 성만찬이 되어야 하고, 주님이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성만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받은 말씀대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오늘 나에게 다시 살아 역사하시며 나를 변화시키는 성만찬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세례와 성만찬을 통해 내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인쳐 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내 안에 주님의 생명이 있으며, 주님의 인격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이 거하심을 믿습니다. 주님 앞에 가는 그 날까지 주님의 분신으로 항상 승리하는 증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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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속에서 씨앗을 보신다
    생명의 잠재력
    자유하셨습니까?
    인간의 한계 앞에 선 하나님의 할 일
    새 포도주의 기쁨을 새 부대에
    누가 내 삶의 주인입니까?
    그리스도인의 삶과 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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