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원하느뇨? 2002-03-25 17:24:43 read : 1890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 20 :20-28 // 2002. 03. 24
할렐루야!
오늘은 강단에 꽂혀 있는 꽃만 보아도, 찬양대의 찬양만 들어도, 예수님이 달리셔서 고난 받으신 모양의 십자가만 보아도… 이미 은혜 받으신 줄 믿습니다.
종려주일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소리 질렀던 날입니다(요12:13).
"호산나(Hosannah)"는 히브리어로 '호시안나'(Hosianna)라는 말을 헬라적 표현으로 발음한 것인데, 그 본뜻은 "이제 우리를 구원하소서" 또는 "아무쪼록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기도입니다(시118:25, 삼하14:4, 시20:9, 마21:9, 막11:9, 요12:13).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은 당시에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고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먹을 것이 부족했고, 당연히 의료장비나 의약품이 없었습니다. 그런 때 한 젊은이가 나타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풍랑을 잔잔케 하고, 병든 사람을 치료해 주고, 신비로운 일들을 행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만 예루살렘에 들어오면 로마의 지배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굶주림에서도 해방될 수 있고, 병들었던 모든 사람들이 고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록 나귀를 탔지만 예루살렘을 향해 들어오는 예수를 향해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땅에 깔고 개선장군이나 왕에게 흔들어대는 종려나무가지를 땅에 펴고 흔들며 환영했습니다. 무엇인가 큰 일을 하실 분이 예루살렘에 들어오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고난의 출발이었고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일주일동안을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고난 주간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회개하는 성회수요일로 시작되는 그리스도 수난절기의 절정기로서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한 주간을 의미합니다. 이 고난 주간에 예수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승리의 부활을 묵상하면서 신앙의 성숙과 회개를 통한 영적 각성의 기회로 보냅니다. 때묻고 더러워진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특별히 은혜 받는 한 주간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 한 주 동안 주께서 행하신 일을 살펴봄으로써 고난주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주간에 작정하여 새벽기도를 하며, 하루에 한끼 이상 금식하고, 금요일에는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린 시간동안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고 지내다가 부활절 아침에 모든 사람이 기쁨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높은 자리, 좋은 자리에 대한 욕망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의 어미가 그 아들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절하고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예수님 우편에 하나는 예수님 좌편에 앉게 하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35절에 보면 세베대의 아들이 <야고보>와 <요한>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님께 "예수님의 때가 이르거든, 예수님이 그 나라에 가시거든 우리 형제를 하나는 예수님의 우편에, 또 하나는 예수님의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며 자리를 요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 두 곳의 말씀을 합쳐 보면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구했던,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구했던, 예수님께 자리를 구한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높은 자리, 인정받는 자리, 영광 받는 자리를 요청했던 것입니다.
높아지려는 것, 좋은 자리에 앉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들의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자리,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 할 것 없이 더 좋은 것, 더 멋진 것, 더 비싼 것, 더 넓은 것을 갖고 싶어합니다.
만약 여러분 가운데 "나는 그런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말씀하는 분이 있다면 좀 이상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설교하는 저 자신도 그런 것을 싫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집이 있으세요? 아파트를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면 단독주택이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2채, 3채씩 가지고 있고 방도 남아서 다른 사람에게 세를 놓습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집이 없어서 세 들어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 집이 없어 세를 들어 살고 계시는 분들은 열심히 일해서 하루 속히 자기 집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저도 월세방에서 살아 봤습니다. 월세 내는 날은 얼마나 빨리 다가오는지, 2월달은 왜 그렇게 짧은지, 냈는데 금방 또 주는 것 같고… 얼마나 아까웠는지 모릅니다. 집을 갖고 있는 사람은 집을 갖지 못한 사람의 아픔을 잘 모릅니다.
집이 있는 사람, 아파트든지 단독 주택을 갖고 계시는 분들은 몇 평짜리에 사십니까? 또 몇 평 이면 만족할 것 같습니까? 또 여러분의 집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우리나라에서 최고 비싼 아파트가 35억이라고 합니다. …… 우리 기둥교인들은 워낙 넉넉하기 때문에 아파트 하나가 35억이라고 해도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이 35억짜리 아파트가 200평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200평이면 우리 기둥교회 예배실 바닥의 절반쯤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넓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자기 인생에 대해 만족할까요? 그 사람은 더 넓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우리 나라에 100평, 150평 되는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너무 많아 수를 셀 수 없다고 합니다. 보통 20억 정도 되는 아파트는 많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만족하며 살까요?…… 아닐 것입니다. 아마 더 좋은 곳, 더 넓은 곳에 살고 싶어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같게 되고 싶어서, 하나님처럼 되고 싶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는 자신이 직접 하나님이 되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해서 선악과를 따먹었던 처음 사람처럼, 자신들의 이름을 하늘에까지 이르게 하려고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들처럼 사람들은 끊임없이 높은 자리, 좋은 자리를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 - 봉사의 성격
교회 내의 모든 직분들은 세상 조직에서처럼 어떤 신분상의 직급을 나타내는 것이아닙니다. 단지 봉사의 성격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교회와 현대 교인들의 문제는 교회의 평신도 - 평신도는 성직자가 아닌 집사, 권사, 장로… 등 모든 신자를 말합니다 - 직분이 '상하 계급'처럼 인식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직분은 봉사의 성격일 뿐 상하 계급이 아닙니다. 신분상의 높고 낮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신분상의 높고 낮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는 다른 교회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기둥교회만 보면 장로님들이 제일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장로님들은 수고의 짐이 많습니다. 마음의 짐도 무겁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큰 일을 하거나 땅을 사고 건축을 한다고 하면 제일 고개를 숙이고 다니는 분들이 장로님들입니다. 선뜻 나서지 못해 미안해 하시고, 많이 드리지 못해 죄송해 하시고, 목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기둥교회 장로님들은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수고를 많이 하십니다. 최선을 다해 헌신 하시고 헌금도 많이 하십니다. 그런데도 늘 죄송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제가 서울의 어느 교회 목사님과 둘이 '서로 자기 교회 장로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강단에서 어쩌다 장로님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10,000원씩 낸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강단에서 불려졌음으로 감사함으로 회비를 낸다고 합니다. 대부분 장로님들은 주머니 속에 빳빳한 새 돈을 준비해 두시고 강대상에서 자신의 이름이 불려지면 10,000원씩 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걷혀진 돈은 회계 장로님이 따로 있어서 관리하시고 모아서 선한 일에 쓰신다고 합니다.
그 목사님의 얘기를 듣고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아서 우리 기둥교회 장로님들에게도 1부 예배 때 말씀드리고 우리도 그렇게 하기로 만장일치로 통과했습니다. 그리고 회계 장로님을 뽑아서 오늘 저녁 예배 시간부터 제가 "○○○장로님~!"이라고 부르면 그 분은 10,000원씩 내시기로 했습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섬기고 봉사하고 희생하는 일에 앞장 서라고 직분을 세우는 것이지 계급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입니다.
무엇을 원하느뇨?
진실로 낮은 곳을 향해 오셨고, 진실로 천한 모습으로 오셨고, 진실로 겸손하게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야고보와 요한, 그들의 어머니 세베대의 아내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 같은 모습으로 있으면 안되는지요? 버젓이 다른 제자들이 보고, 듣고 있는데 그 자리에서 야고보 요한만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제자들이 화가 났습니다. 본문 24절에 보니 "열 제자가 듣고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마20:24)이라고 했습니다. 한 두 사람의 욕망은 다른 사람을 마음 아프게 하고 분내게 합니다.
육적인 욕망, 높아지려는 욕망, 자리에 대한 욕망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화나게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짓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함에 만족하고, 의로운 적은 소득에 감사하고, 많은 소득이라도 의로운 것으로 얻었다면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도록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희생물로 삼아 잘 되려 하고,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자기는 웃으려 하고, 다른 사람은 배고프고 한숨 쉬게 하고 자신은 풍요롭기 원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요 벌받을 생각입니다.
오늘 이 거룩한 주일에, 여러분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도 아마 예수님 앞에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처럼 예수님 앞에 넙죽 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이유
예수님은 높은 자리, 좋은 자리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20:2) 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가오는 자신의 시련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 말씀하시며 "너희도 내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겠니?'라고 물으신 것입니다(마26:39,42).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섬김을 받으려 오심도 아니고, 대접 받으려 오심도 아니고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심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습니다(마20:28).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음 상한 사람들에게 위로자로 오셨고, 낙심한 사람들에게는 소망을 주시는 분으로, 외로운 사람들에게는 친구로, 세상의 더러운 땅을 밟고 사는 사람들의 발을 씻는 겸손한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믿으면서, 그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서 무엇을 원하며 무엇을 꿈꾸며 사십니까?
기독교는 예수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을 믿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이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는 상 주심을, 복 주심을 믿는 종교입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는 예수 믿고 천국을 소망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믿기 때문에 고난에도 감사하는 종교입니다.
[기독교]하면 십자가를 떠올릴 만큼 십자가는 기독교의 대표적인 상징물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심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놓으셨음을 믿고 "저를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중요한 상징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져야 하기 때문에, 예수 이름으로 고난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기 때문에… 십자가를 중요한 상징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믿음으로 져야 하는 수고의 짐이 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 져야 하는 희생의 짐이 있고 헌신의 짐이 있습니다. 그 짐을 지려 하지 않은 채 큰 자리, 높은 자리, 좋은 자리를 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 학기부터 대학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학교의 여러 가지 사정과 요청에 의해 다시 학교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목요일 오전에 대학원생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학부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목회실습>을 주관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목회실습은 외래 교수 12명이 각 학년 별로 3명씩 나누어 가르치는데 첫날 수업에 한 분 교수님이 오시지 않았습니다. 제가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학기 첫 수업이라 제가 대신 수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가서 보니 제 아들이 그 강의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아들의 얼굴을 보니 아버지가 들어오는 것에 대해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낙심한 표정이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여기에 들어왔나, 이번 학기 큰 일났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모르는 척 하고 출석을 부르는데 맨 앞에 앉아 있는 <김태형>이라는 학생이 대답을 하는데 굵은 톤의 아주 매력적인 목소리를 가졌습니다. 수업을 마치고 "목소리 좋은 사람이 기도하라"고 그 학생에게 기도를 시켰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저런 내용으로 기도하더니 "하나님, 우리 모두 잘 배워서 큰 인물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들 잘 배워서 '큰 사발'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가만히 듣다가 "큰 사발"이라는 말에 얼마나 웃음이 나는지…, 그 학생은 잘 배워서 <큰 그릇>되게 해 달라는 말을 <큰 사발>이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학생들도 여기 저기서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의 순수한 기도의 표현이 참으로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 자신이 <큰 사람, 큰 그릇>이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사발>이 되기만 원하지, 큰 사발이 되기 위해 져야 하는 십자가를 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져야 할 십자가
■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져야 하는 십자가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지는 십자가가 있는데 그 십자가를 얼마나 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교회를 위해(기둥교회 성도로서) 교회의 짐을 얼마나 지고 있습니까?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수고와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감수하는 희생이 얼마나 되십니까?
카르타고의 감독을 지낸 키프리아누스(Cyprianus, 258년순교)는 "어머니인 교회가 없다면 아버지인 하나님을 볼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의 일원으로서 교회를 위해 어떤 짐을 지고 계십니까?
■ 성도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져야 하는 십자가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간에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는 십자가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보면 "형제를 서로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와서 다른 사람이 먼저 인사하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먼저 친절을 베풀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이 내게 먼저 호의를 베풀기를 기대하지 마세요. 성경에도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먼저 자신이 하라고 했습니다.
•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3)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위해 얼마나 대접하고 사셨습니까? 얼마나 베풀고 나누며 사셨습니까? 교회에서 고난 주간에 "금식합시다. 금식미를 냅시다"라고 하는 것도 교회에서 쌀이 모자라 걷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금식하고 낸 쌀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선교회에서 선교회비를 모으는 것도 어려운 교회와 목회자, 선교사를 돕기 위함입니다.
•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롬12:15)
여러분은 선교회에 가입해서, 속회 속도원으로서 얼마나 열심히 함께 돕고 사십니까? 회원들의 가정에 초상이 나면 얼마나 가서 도와 주셨습니까? 기쁜 일이 생기면 얼마나 함께 기뻐하셨습니까? 목사인 제 눈으로 봐도 심은 대로 거두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교인들은 자기에게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라도 잘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기 때문에 열심히 잘 하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사랑과 관심이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8)
사이 좋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미워해 봐야 자기가 손해입니다. 자기의 기도가 막히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원망하면서 예물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이 원치 않으십니다(마5:24). 성경에도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마5:46)
■ 가정과 친척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져야 하는 십자가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식구끼리, 친척 간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는 십자가 있어야 합니다.
- 남녀 관계에서도 서로 좋을 때는 깨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결혼도 합니다. 그런데 계속 깨가 쏟아집니까? 그러나 그 남편과 아내가 때로는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엎어 버리고 싶은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참고 기도하고 노력해 보셨습니까? 십자가를 지듯 죽기까지 이를 악물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하며 참아보셨습니까?
-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기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부모님이 때로는 십자가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가운데도 부모님 때문에, 장병 으로 고생하는 어른들 때문에 눈물 흘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 십자가를 잘 지고 가는 하늘의 큰 상급이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 형제간에, 시누이 올케 간에 화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그 십자가를 벗으려고만 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믿음과 참는 인내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 말씀에 순종하려고 지는 십자가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세상에서도, 학교에서도, 일터에서도 "빛"되고 "소금"되라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지는 십자가가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빛되고 소금되려니까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것이 십자가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하는 것 때문에, 봉사하고 섬기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려는 것 때문에… 겪는 어려움, 흘리는 눈물 그것이 헛되지 않음을 믿고 낙심치 마시기 바랍니다.
"<인격>은 고난과 시련 속에 성숙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난과 성공은 언제나 함께 다닌다"는 말도 있습니다. 만일 고난 없이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면, 어떤 큰 일을 이루었다면... 그 일을 위해 반드시 어떤 사람이 고난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당하심으로 우리가 그 예수님을 믿고 천국 백성이 되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고난 주간에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뇨?"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이 다가오셔서 "무엇을 원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우리의 귓가에, 우리의 가슴에 주님이 물으십니다.
"무엇을 원하느냐?"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의 십자가를 주님이 지신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목에 걸고, 반지를 끼고, 장식품으로 만들어 가지고 다녀도
십자가와 가까이 사는 것 같지만,
져야 하는 십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벗으려고만 했지
감당할 만한 믿음과 조건을 달라고
기도하지 못했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무엇을 원하느뇨? 무엇을 원하느뇨?"라고 물으시는 주님 앞에
겸손히 자신이 답할 것을 찾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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