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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면돌파
    2002-03-25 16:09:03   read : 1494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 8 : 23 - 27 (2002-03-24)

    저는 지난주간 어느 교단이 운영하는 대학병원에 가서 직원 수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직원이 1,300명 가까이 되고 일년에 약 1,000억 원 정도의 재정을 사용하는 큰 병원이었습니다. 병원도 환자가 많아서 제법 운영이 잘 되는 병원이었습니다. 침대 수가 약 1,100개정도 되는데 입원 환자가 약 90% 가까이 되어 입원을 하려면 2인 실 병실이 아니면 입원이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알지 못하는 어떤 문제들이 있어서 병원이 매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빚도 몇 백 억 원 정도 되었는데 그로 인해 직원들 월급도 제 때 주지 못하고 있었고 그 부채가 점점 늘어나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목회하는 저로서는 그 어려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년에 1,000억 원 정도의 재정을 사용하는 병원이 몇 백 억 원 때문에 그렇게 어려움을 당한다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목회를 해 보면 보통 교회는 어렵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교인들이 일년 재정의 몇 배 정도는 헌금을 하여 그 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일년 재정의 절반 정도 되는 액수 정도는 교인들이 어려움을 감당하려고 하거나 그 일의 중요성만 인식한다면 한 두 번의 설교와 한 두간의 기도만으로도 쉽게 감당하는 것을 저는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경험은 이번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하면서도 거의 날마다 경험하는 일상적인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병원은 일년 예산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빚을 해결하지 못하여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에 대하여 깊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기관에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는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는 목회자와 교회의 직원들 외에는 교회에서 월급을 받지 않습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월급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국 교회는 세계의 그 어느 교회보다도 그 훈련이 잘 되어있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병원은 모두가 다 그 병원에서 월급을 받는 직원들이었습니다. 그 병원을 위하여 헌금을 하는 교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병원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하는 마음들은 모두 있었으나 병원을 위하여 자신의 것을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좀처럼 잘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거기서 조금 거창하지만 십자가에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병원에서 손해를 보지 않고 내 이익을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당한 생각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당한 생각이 어려움에 처한 병원을 구하는데는 아무런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병원에는 다만 몇 사람이라도 병원을 위하여 손해를 보고 희생을 하고 최소한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 손해와 희생을 통한 십자가를 집회에 참석한 믿음의 사람들이 감당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언제나 십자가는 믿음의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 중에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별 것 아니지만 내가 받게 될 강사료를 오병이어처럼 먼저 내어놓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 다음 시간 집회가 끝난 후 병원의 원목 목사님이 광고 시간에 자기도 우선 이번 달 월급을 병원을 위해 내어놓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병원 집회에 참석하였던 어떤 교인 한 분이 병원의 직원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100만원을 그 자리에서 헌금해 주셨습니다. 병원의 의사 교수님도 그 동안 병원으로부터 받지 못했던 여러 달 분의 봉급 중 많은 부분을 우선 포기하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적지 않은 직원들이 그와 같은 일에 감동을 하여 눈을 붉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할 일이지만 저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 병원의 직원들이 병원을 위하여 교인들이 교회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헌신하듯 자기 몫의 십자가를 지는 운동을 벌인다면 오늘의 문제는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생명이 있고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없는 곳에는 언제나 사망이 있고 실패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구원이고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문제는 그것을 누가 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십자가를 지고 누가 그 십자가의 열매를 딸 것인가 하는 것이 언제나 어렵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가급적 다른 사람이 감당하고 자기는 그 십자가의 열매는 딸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선뜻 십자가를 지지 못하는 것이고 그러다 보니 서서히 함께 멸망해 가고 파멸해 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 십자가를 질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우리에게 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이번 한 주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고난주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고난주간을 맞으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만이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높으신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하고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하여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위한 고난과 십자가를 함께 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와 제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후손들에게 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물려주려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사랑하는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려면 누군가가 그것을 위하여 져야 할 십자가를 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식과 뜻보다 세상의 꾀를 좇아 하나님과 다른 식과 방법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거스리는 것이며 그 잘못된 관행과 싸우는 것이며 그것과 싸우다가 손해보고 다치고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편할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힘듭니다. 그것은 저보다도 여러분들이 훨씬 더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래도 목사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물론 오늘 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식대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와 교계 안에서도 세상에서 격는 것과 진배없는 어려움들을 격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래도 여러분의 세상에서 격는 어려움과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 즉 믿음의 사람 즉 하나님의 식과 뜻을 고집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사는 것이 편치 않습니다. 오히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꾀와 식을 가지고 살아가면 도리어 편하고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으며 그 식과 삶을 고집하며 산다는 것은 보통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함께 타고 있는 배에 큰 물결이 일어나 덮이게 되었습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배와 씨름하며 살던 어부들이 대부분인 제자들이 죽음의 공포를 느낄 만큼의 파도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바다에 큰 풍랑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바다에는 언제나 큰 풍랑이 있습니다. 보통 풍랑이 아닙니다. 죽을 것만 같은, 침몰할 것만 같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을 것만 같은 풍랑이 있습니다. 그와 같은 풍랑이 언제나 있습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예수 믿는 사람답게 살려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어 보이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있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입니다. 세상 식으로 살면 잔잔한데 하나님의 식대로 살려면 언제나 풍랑이 일어납니다. 나의 온 삶을 삼켜 버릴 것과 같은 풍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풍랑과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도망하지 말라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풍랑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만만치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골리앗만 하고 나는 언제나 다윗처럼 어립니다. 싸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을 하였습니다. 12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10 정탐꾼을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보고를 합니다. 저들은 다 장수들인데 우리들은 저들에 비하면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를 합니다. 여러분 그 보고는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사적인 면에서만 보면 아주 훌륭하고 정확한 보고였습니다. 여러분 그 10 정탐꾼이 보고 느끼고 보고한 것은 100% 다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저들이 싸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니 저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큰 소리를 치며 나아가 싸우자고 한 여호수아와 갈렙을 기뻐하셨습니다.

    10 정탐꾼의 보고는 인간적으로 볼 때 100% 사실이었지만 신앙적으로 볼 때 100% 거짓이었습니다. 저들의 보고에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홍해를 가르시고 애굽의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적으로 볼 때 악한 일이었습니다. 이길 수 있는 전쟁을 도망하자 한 것은 역적이나 하는 짓이었습니다.

    10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의 거인들만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자신들이 꼭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거인들도 보았지만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니 거인들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메뚜기처럼 보인 것이 아니라 저들 거인들이 자신들의 밥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아가 싸우자라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던 10 정탐꾼들에게는 그와 같은 용기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싸우지 말고 도망하자 하였던 것입니다.

    풍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깨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셨습니다. 말씀 한 마디로 바다를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나중에 보고는 알았지만 먼저 믿지는 못했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여 세상과 싸우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은 '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오늘도 꾸짖고 계십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세상과 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매우 중요한 인생철학과 목회철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싸우면 일주일 도망가면 40년'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따라 믿음으로 정면돌파하였으면 넉넉잡고 일주일이었으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10 정탐꾼의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마땅히 싸워야 할 싸움을 싸우지 않았음으로 저들은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40년 후에 비로소 가나안에 들어가기는 하였지만 믿음 없었던 저들은 광야에서 다 죽고 오직 그때 그 믿음 없는 자리에 없었던,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직 예외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저는 기독교가 어떤 면에서 볼 때 전투적인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전투적입니다. 그 어느 종교와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종교가 바로 우리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우리 기독교의 생명은 그 피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볼 때 잘못된 생각과 판단으로 인하여 엉뚱한 순교와 피를 사람들에게 강요하고 흘리게 한 과오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기독교의 생명을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식과 뜻이 통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세상과 싸우다가 흘린 의로운 피와 그 정신에 우리 기독교의 생명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히려 우리 한국의 교회에는 그와 같은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순교자를 내었지만 그 순교자들로 말미암아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부흥하고 기독교의 수가 전체 인구의 1/4이 넘었다고 하는 요즘 우리는 그 중요한 순교의 정신, 전투의 정신을 상실하였습니다. 피둥피둥 살만 찐 힘없는 돼지 같은 되었습니다. 세상과 자신을 구원할 그 어떤 힘과 능력도 가지지 못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묵상만 하는 교회가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고난에 동참하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식과 뜻을 고집하다가 풍랑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죽기까지 피흘리며 싸우는 교회와 교인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고 손해를 보면서도 피를 흘리면서도 죽으면 죽으리라는 믿음과 믿음의 배짱을 가지고 세상과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는 죽어야 사람들이 살고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 사람들이 이익을 본다면, 누군가를 죽이고 그 덕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손해 보이고 그 덕에 내가 이익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죽음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내가 손해를 봄으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삶을 삽시다.

    "세상과 사람들은 내 덕보게 해 주시고 나는 오직 하나님 덕만 보고 살게 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하면서 세상과 사람들을 축복할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근사한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것이 오늘 고난주간을 앞둔 우리 높은 숭의교회와 교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높으신 뜻과 말씀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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