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단 받는 사람 2002-03-13 23:45:02 read : 175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5:1-9
오창우
2002-02-10
여러분, 하늘을 한번 쳐다 보십시오. 새가 보입니까? 하늘을 날라다니는 새 가운데 왕이라고 하는 새가 뭐지요? 독수리예요. 독수리가 새 중의 왕입니다. 독수리는 독수리이기 때문에 왕이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독수리 아버지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독수리고 새 중의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독수리 새끼로 태어난다 할지라도 훈련을 받지 아니하면 절대로 새 중의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 독수리 부모는 독수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정도 자라게 되면 높은 하늘로 올라가서 독수리를 떨어뜨린다 그래요. 그리고는 그것을 내려가다가 퍼득거리면서 올라오고 퍼득거리며 올라오고 이런 반복적인 과정을 통해서 새 중의 왕인 독수리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개중에는 이 훈련을 감당치 못해서 죽는 독수리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는 독수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독수리입니다. 독수리는 자기의 새끼가 힘이 약하다고 해서 그 새끼를 참새로 키우지는 않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독수리로 살다가 독수리로 죽어라 그 말이지요.
마찬가지로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순교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훈 목사님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키다가 그래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배신한다고 하는 것은 비극이에요. 우리는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교인의 말이 자기를 자판기에 가서 커피 뽑아먹는 즐거움이 있다고 그래요. 그런데 이 날은 더 큰 즐거움이 있었다고 싱글벙글 하더라구요. 왜냐하면 자판기 앞에 갔더니 150원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뽑아먹었잖아요. 세상에 공짜만큼 좋은 게 어디 있어요.
막 기분이 좋아가지고 커피를 마시면서 몇 걸음 옮기다가 자기의 머리 속에 딱 떠오르는 게 있어 `아차` 돌아서서 가가지고는 200원을 도로 넣었대요. 그거는 고급 커피값입니다. 자기는 200원을 넣어놓고 돌아서서는 더 즐거워하는 거예요. 누가 와서 즐거워하겠지.
참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가 보든 안보든 자기의 길 가는 사람,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 멋있고 이런 사람이 신앙인이 되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선진국 사람들은 뭐가 다르다는 사실을 가끔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물들을 먹는데 지하수 끌어올려서 좋은 물 먹으려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독일 사람들은 10미터와 20미터 사이에서 물을 뽑아먹는다고 그러더라구요. 100미터, 200미터에서 물을 뽑을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들이 10미터, 20미터 그 밑으로 내려가서 먹지 않는 이유가 있다 그래요. 그게 뭐냐면 20미터까지는 우리들이 먹을 물이고 100미터 이상부터는 후손들이 먹을 물이다라는 겁니다. 이런 사람이 선진국민이예요.
우리가 예수님을 보면서 멋있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예수님이 멋있는 이유가 뭡니까? 인물이 좋아서요? 누구보다 오래사는 장수 때문예요? 아니면 그가 부자였습니까? 아니면 권력자였습니까?
그 예수님이 멋있다고 하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완전한 삶을 살았지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이 멋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세계를 정복합니다. 그런 예수님이 오늘날의 역사까지도 지배하고 계신 겁니다. 우리도 이런 신앙으로 살아야 됩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으로 살다가 죽어야 됩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그분은 참 예수였다` 그렇게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독수리가 독수리일 수 있었던 이유가 독수리가 훈련을 받았기 때문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가기 위해서 훈련을 시키신다는 겁니다. 오늘 성경에 바로 그 사실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 말에 `열길 물 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지 않아요. 사람의 가치를 언제 알 수 있습니까? 어려울 때 알아보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서 월드컵이 열리잖아요, 우리 나라도 출전합니다. 우리의 소원은 16강입니다. 아니 한번이라도 본선에서 승리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래서 훈련하잖아요. 하체훈련, 체력훈련도 하고 전술훈련도 하고.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실력을 모르거든요. 그래서 평가전을 하는 거예요. 외국팀하고도 하고 외국의 골드컵에 나가서 출전하기도 하고. 그 이유는 실력을 알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게 전부가 아니예요. 이런 실전의 과정을 통해서 이들의 실력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훈련시키시는 거예요. 그 첫째는 자체훈련입니다. 체력훈련, 전술훈련이지요.
하나님은 그래서 모세를 광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론 우리도 광야로 이끌어 내십니다. 그 광야는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고 질병의 고통일수도 있고 대학진학의 실패일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할 때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루이스라고 하는 사람은 `광야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확성기와 같다` 했습니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아라비아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을 떠나서 정말 아무도 없는 공허한 자리에 있는 바로 그 실패의 자리,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리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야 되는 거예요.
그 자리에서 인간의 약함을 깨닫고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인도함을 받는 겁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시간 은혜받은 내용입니다.
오늘은 실전에의 투입입니다. 모세가 바로 앞에 갑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광야의 목자입니다. 애굽의 가장 비천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노예의 대표일군입니다. 그가 만나는 사람은 애굽의 바로입니다. 세계를 정복한 당시의 최고의 나라라고 하는 애굽의 임금을 만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적으로 보면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가장 높은 신분의 사람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일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이런 일 하라고 시키시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남들이 볼 때는 변변치않는 신분이지만은 내 마음 속에는 민족을 품고 있어요, 세계를 품고 있습니다. 민족 복음화와 세계 복음화의 마음을 갖게 만드는것이 하나님이세요.
하나님 우리에게 말씀하시잖아요. "세상으로 가라" 나 비록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이 민족을 가슴에 품게 만드시는 거예요. 신앙만이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만이 이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이런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런 말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갔지만은 바로라고 암초에 부딪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합니다. `바로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하시요` 그랬더니 바로는 뭐라 그럽니까? `여호와가 누구냐? 나 모른다. 너희 일 안할려고 게을러서 그런 말 하는구나` 하고 큰 고역을 백성들에게 안겨줍니다.
이럴 때 백성과 모세는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20절, 21절에 보면 모세와 아론을 보고 `왜 우리를 미움받게 하느냐 너희 잘못을 하나님이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 것 너희는 정말 잘못됐으니까 하나님이 너희를 심판하실 것이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예요. `주여 이 백성이 왜 학대를 당하게 하셨나이까` 하고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모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하느느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로를 변화시키던지 아니면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서 바로를 이기던지 왜 우리에게 능력을 주지 않느냐 그런 얘깁니다.
지난 주일에 출애굽기 4장에 보게 되면 이 모세는 하나님께 얘기합니다. `저는 지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해요. 10절에 말씀에 `저는 본래 말을 잘하지 못하는 이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이런 얘길해요.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습니다. `너를 지도자 삼겠다` 모세가 하는 말이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로 가며 이스라엘로 가리이까` 그 때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모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면 뭔가 달라질 줄 알았어요. 수퍼맨이 될 줄 알았지요. 그래서 오늘 얘기하는 거예요. 나 못가겠다.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주신 다음에도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아무 것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는 하나님이 앞에 이렇게 얘기해요.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보낼 만한 자를 보내라 아니면 나를 보낼 만한 자로 만들어달라 그런 말이에요. 수퍼맨 만들어달라 그 말이에요.
그 전에는 말 못했는데 이젠 말 잘하고요, 그 전에는 극히 인간이었는데 이젠 좀 하나님처럼 능력있게 해달라 그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을 때 이런 요구했어요. 그것 때문에 선악과 따먹었어요. 사람들은 언제나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해요. 예수 믿고 난 다음에 내가 수퍼맨이 되기를 원해요. 목사님도 수퍼맨, 나도 수퍼맨 다 수퍼맨 되기를 원하거든요.
그러다 안되면 당신이라도 되야 될 것 아니냐 하고 이렇게 요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하나님의 사람을 수퍼맨으로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가 되라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쓸만한 자가 되라는 겁니다. 내가 도와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사람의 입은 지었느냐 말 못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 아니냐`
있는 모습 그대로 벙어리면 벙어리, 눈먼 자면 눈먼 자 그대로 내가 만들었다는 말이에요. 문제는 내가 눈먼 자를 통해서 역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자꾸 보낼만한 자를 얘기하고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신앙이라는 게 뭐예요? 하나님 의지하는 겁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에요. 수퍼맨이 아닙니다. 예수 오래 믿으면 믿을수록 더 하나님 의지하고 인간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더 드러내는 것이지 하나님의 능력 속에서 말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에요.
교만하지 마세요. 겸손해야 되요. 모세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같지만은 바로라는 암초에 그냥 부딪치는 거예요. 그저 하나님께서 다 아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감당할 능력이 없습니다. 나 자신에겐 없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나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게 신앙이거든요. 우리가 어려움을 만날 때 이 어려움 속에서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이 어려움 속에 신앙 고백을 하십니까?
저는 어려움을 당할 때일수록 더 절실하게 느껴지는 것이 무어냐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라는 것을 나는 믿습니다.
여러분 알렉산더 왕이 유대나라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유대 왕이 하는 말이 "우리에게 은금보화 있는데 얼마나 드릴까요?" 그랬더니 알렉산더 왕이 하는 말이 "나 은금보화는 많다 그런데 너희가 지혜의 나라라, 민족이라 그러는데 너희가 생각하는 정의가 무엇인지 얘기해 봐라" 그런 얘기였습니다.
그랬더니 이 유대 왕이 정의를 설명을 해요. 어떤 사람이 길을 지나가다가 폐품더미를 샀다는 거예요. 필요해서. 폐품더미를 싸게 사가지고 집에 와서 폐품더미를 풀려보는데 그 안에 커다란 금덩어리가 있었어요. 엄청난 가치를 지닌 금덩어리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래 이 사람이 깜짝 놀래가지고 그 장사꾼에게 찾아갔어요. "여보시오, 내가 폐품을 샀는데 이 안에 금덩어리가 있어요. 나는 폐품을 샀지, 금덩어리를 산 게 아니니까 이 금덩어리를 당신 겁니다" 줬다는 거예요.
장사꾼이 그래요 하고 받아드렸으면 얘기할 게 없는데 이 장사꾼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입니까? 나는 폐품더미를 팔 때 금덩어리까지 같이 팔았습니다. 그러니 이거 당신 겁니다."했다는 거예요.
두 사람이 이만한 금덩어리를 놓고 니꺼다 니꺼다 이러고 다투다가 유대의 랍비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이거 해결해 주십시오. 해결이 되요, 안되요?
그러면 그거 내가 가질게 그러면 되는데 랍비가 이렇게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가만히 보니까 당신에게는 결혼할 나이의 아들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당신에게는 결혼할 딸이 있지요?" "예 있습니다" " 러면 이 두 젊은이를 결혼 시키십시다. 사돈 맺으십시다. 그리고 그 금덩어리를 결혼할 새 가정에 주십시다." 합의를 하고 줬다는 거예요.
유대왕이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의 정의입니다. 알렉산더가 뭐라 그랬겠어요? "우리는 힘있는 사람이 정의인데 너희는 그게 정의이구나" 감동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기 전에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구원이에요. 예수 믿고 구원, 그러나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뭡니까? 주안에서 하나 되는 거거든요. 교회가 뭐예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잖아요. 우리는 그 몸의 지체라 그랬잖아요. 그러므로 이 손과 발이 따로 놀면 안되거든요. 서로 협력하는 거거든요. 하나되는 거예요. 이게 신앙의 목표예요. 구원받은 성도들의 목표예요. 성도와 성도가 하나가 되고 성도와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삶, 이것이 우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 해요.
여러분 고린도교회는 은사를 참 많이 받은 교인들이 있어요. 그러나 시끄러워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 은사를 가지고 내 은사가 크냐 네 은사가 크냐를 다투라고 주신 것이 아니거든요. 그것을 가지고 서로 한몸 되도록 힘쓰라는 거예요.
그래 믿음, 소망, 사람 세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것은 연합, 서로 사랑으로써 내 제자인 줄을 알이라 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우린 그렇게 살아야 되요. 그러기 때문에 나와 성도간의 하나, 나와 하나님간의 하나 되기를 힘쓰는 삶을 사는 것이지요.
해롤드 쿠스노 라고 하는 사람이 쓴 책 중에-최근에 쓴 책이에요-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쿠스노는 랍비에요. 자기 회당에 모이는 사람이 2,500명이 되거든요. 이 쿠스노에게 어떤 일이 생겼느냐 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병이 있는 거예요. 알아 보니까 빨리 늙는 조로증에 걸렸어요. 그래서 아이가 크면서 머리가 생기는 듯 하더니 다 빠지고, 왜 늙으니까. 주름이 생기고 그래 12살이 되던 해에 이 아이가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래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그랬어요. "하나님, 내가 나쁜 한 것도 없는데, 내가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나한테 이런 나쁜 일이 생깁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신앙의 고백을 책에 썼어요.
그 책에 결론은 이거 더라구요. `하나님은 선하시다` 욥의 고난을 보면서 욥의 말이 옳으냐, 욥의 친구들의 말이 옳으냐 이것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크게 의미가 없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다.
왜 우리가 부자가 선이고 반대로 거지가 되는 것은, 가난한 것은 저주예요? 건강한 사람은 축복이고 병약한 사람은 저주입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6절에 있는 말씀처럼 우리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거든요.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선한 것과 악한 것을 합해 가지고 선을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일 많이 있어요.
여러분 우린 물 없이는 못 살잖아요. 물은 산소와 수소가 합해 이루어져 있어요. 산소는 마시면 좋지요. 그러나 수소 먹으면 죽는 거예요. 그러나 산소와 수소가 합해 지니까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될 물이 만들어지는 거거든요.
어떤 집이 좋은 말이 있었답니다. 아주 좋은 말이에요. 아주 자랑스런 말이에요. 그런데 이 말이 어느 날 우리 문을 박차고 없어져 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는 거예요. 실종됐지요. 그래 이 말을 잃어버렸다 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 집 정말 재수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웬걸요, 한 1년쯤 지났는데 이 말이 새끼 말을 데리고 돌아온 거예요. `야, 그 집 재수 좋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얘기했어요. 그랬더니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 집에는 외아들이 있었어요. 몇 대 손입니다. 몇 대 외아들이에요. 얼마나 귀하겠어요. 그런데 이 아들이 데리고 온 망아지를 타다가 떨어져 가지고 다리를 못쓰는 장애자가 되고 말았어요. `아하, 좋은 줄 알았더니 이게 재앙이구나` 하고 사람들은 손가락질은 했어요. 그런데 주인이 하는 말이 `두고 봐야지요`
그런데 얼마 안 있다가 전쟁이 일어났어요. 마을의 젊은 청년은 전쟁에 가서 다 죽었는데 이 집 아들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대를 이을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또 얘기했어요. `아, 저 집은 정말 복 받았다` 주인은 뭐라 그랬게요?
여러분, 당장 일어나는 일 가지고 좋다 나쁘다가 아니란 말이에요. 세상살이가 그래요. 저는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느껴지는 게 뭐냐면 두도 봐야 한다는 거예요. 더 이것이,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 망하지 않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꺼꾸러뜨림을 당해도요, 망하지 않아요. 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기 때문예요. 이게 사도 바울의 신앙이고 신앙의 선배들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하나님에게 바쳐라` 재앙이에요, 축복이에요?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은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도 묻지를 않아요.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냥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그냥 순종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던 아브라함, 하나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이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너희 민족을 창대케하고 자손대대로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거예요.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겠다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어요, 거절하셨어요? 거절했어요.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게 얼마나 귀한 일이에요. 그런데 거절을 해요.
우리도요, 주의 일 한다 할 적에 때론 거절당할 때도 있어요. 섭섭해요, 안해요? 어떤 사람은 교회도 떠나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죠, 이 다윗은 아무 소리 안해요. `예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묻지 않아요. 왜?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우리는 내 생각대로 되고, 내 신념대로 되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야 축복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줄로 알지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협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거절을 받아들일 줄 아는 신앙, 그건 딱 하나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그렇다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일을 통해서 그 자손대대로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어요. 두고 봐야되요. 하나님의 선하심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순종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많은 연단과 시련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어요. 첫째는 기다림의 축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유안진이라고 하는 시인이 쓴 시 가운데 이런 시가 있어요.
제목 :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나는 조금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를 느끼지 때문이다
많은 말이 얼마나 사람을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얼마나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생각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두면서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고
더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될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 안의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에라도
해명도 변명조차도 하지 않고
무시해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베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는 유안진 시인의 시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기다릴 줄을 몰라요. 좀 가던 길을 멈추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파란 신호등이 계속될 때 고속도로를 달리는 느낌 대단하지요.
그런데 저는 요즘에 빨간 불에 서는 즐거움과 기쁨 속에도 삽니다. 얼마나 그 때가 좋은지 모르겠어요. 저는 자동차를 오래 타는 것을 참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는 차를 바꾸자고 그래도 내가 거절을 몇 번씩이나 했습니다. 새차가 싫어서가 아니라 아직도 차가 튼튼하기 때문에 그래요.
한 10년쯤 되면요, 차 엔진소리도 좀 이상해지거든요. 난 서있을 때 차 엔진소리를 듣습니다. 괜찮나? 엔진소리를 들으면 난 기술자는 아니지만, 차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겠더라구요. 평소보다 다른 소리가 나면 빨리 병원에 가야지요. 또 그거 다 끝나면 주유소에서 준 휴지가지고 차 내부 청소도 못하는데 그 때 닦습니다. 라디오도 한번 보면서 점검도 해보고 또 테잎도 바꿀려고 한번 보기도 하고 얼마나 즐거운지 몰라요. 말하는 것만 복이 아니고 가는 것만 복이 아니고 서는 것도 복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잖아요. 너희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 일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란 말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기 때문에 기다릴 줄 아는 축복도 알고 두 번째는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신을 돌아봐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쓰임 받는 존재가 되었는가 말씀 위에 서 있는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는가 동역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를 돌아보란 말이에요.
여러분 아무리 잘 돌아가는 기계라고 할지라도 가끔 돌아봐야 해요. 이물질이 낀 것은 없는지, 이물질 하나만 끼어도 기계가 돌아가는데 문제가 생기잖아요.
오늘 우리의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아무리 완벽하고 바르게 사는 것 같아도 사탄이 나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아요. 세상이 나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하는 그런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깨끗함, 말씀 위에 든든히 서가는 이 모습을 보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의 해석을 받아야 되요. 우린 다 성령의 사람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모세를 광야에서 만나실 때 불붙는 가시떨기를 통해서 만나셨어요. 여러분 불붙는 가시떨기는 불이 붙지만 타지 않고 재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그것을 통해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어요. `내가 너를 불붙는 가시떨기가 되게 하리라`
내게 성령의 불이 있지만 성령이 내게 불을 태우는 게 아니에요. 나를 그냥 불덩어리도 만드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불붙는 가시떨기처럼 재가 되지 않고 늘 항상 힘있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어요. 일 좀 하다 보면 재가 되는 사람이 있다구요. 일을 했는데 뭔가 허탈해요. 누가 나 알아 주지고 않고 섭섭하지요. 그것은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나는 게 아닙니다. 일을 했는데 성령의 힘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항상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성령의 힘으로 주의 일에 충성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승리하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시면서 우리를 실전의 현장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연단하시는 거예요. 그리고 그 일을 통해서 우리의 실력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완전한 신앙인으로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험 당할 때 이상하게 여기지 마세요. 기쁘게 여기세요.
여러분, 깨끗한 물이라도 모아두면 썩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이 가지고 나간 물은 한 달이 되도 썩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한가지이에요. 파도에 물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아무리 좋은 믿음이라고 하나님이 연단하지 않으면 우린 깨끗함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우린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이것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우리가 기억하고 원망, 불평, 우리가 실족하거나 실패하는 신앙인 되지 말고 주 의지하고 주 안에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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