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 받은 기도자 2002-04-13 17:19:40 read : 2102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눅18:9-14 // 2002-04-07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말씀은 기도 응답에 결론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우리는 두 주전에 정의로운 기도를 하라는 제목의 설교 말씀을 들었습니다.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에게 자기의 소원을 아뢰는데 그 소원이 응답이 되었습니다. 응답이 된 이유가 무언가? 부르짖음이 열심히라서 그랬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서 했다? 그것도 아닙니다. 단 하나, 그의 기도가 정의로왔기 때문에, 원한을 풀어주소서! 하는 이 말은 정의로움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기도할 수 있는 당위성이고, 그것이 기도를 지속할 수 있고 간구할 수 있었던 힘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은 그것에 대해서 정의로움이 무엇인가? 기도의 정의로움, 그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의 의로운 기도자의 신앙인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입니다.
여러분, 제가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해 보십시오. 기도해 보셨습니까? 기도 응답 받았습니까? 기도 응답 받고 난 다음에 여러분의 신앙의 인격이 어떻게 변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린 크게 두 가지 생각합니다. 하나는 기도 응답 받은 다음에 내 능력이 크다, 자기 자랑하고 남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기도 응답 받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이 크다, 자기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남을 높이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어떤 분은 기도원의 누구에게 기도 받아 병 낳았다고 해서 그 기도원의 아무개가 능력 있다고 하더니 그 능력 있는 분이 권사인지, 목사인지, 전도사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분을 그렇게 따라 다닙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기도 응답이 되었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 기도의 응답은 그 사람에게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소위 기도의 영발이 있기 때문이다 하면서 사람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헌금하고 그 기도원은 어느새 기업이 되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청계천에 가면은 세운상가 옆에 할렐루야여 영원하라! 라고 쓰여진 큰 간판이 있습니다. 그 전에는 그 곳이 아세아 극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곳에 할렐루야여 영원하라! 이렇게 써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기도원, 병 잘 고친다는 그 기도원이 하고 있는 영업집인 것입니다.
기도해서 병이 낳았는데, 왜 그 기도원이 큰 기업체가 되어야 합니까? 여러분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런 경우는 결코 맞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기도 응답 받은 것은 놀랍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은 사실이지만, 기도 응답의 목표가 단순히 기도하는 사람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친구가 목회하는 청주의 대농교회가 있습니다. 대농이라고 하는 회사의 직원들을 선교하기 위해서 세운 교회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심령들이 취직하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믿음 얻고 예수 안에 잘살았습니다. 공장 안에 전문학교 과정의 신학교까지 세우고 교역자들을 배출했으니까 복음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회사가 방직공장이다 보니까 인건비가 높아지고, 또 IMF가 와서 회사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래서 법정관리가 되어서 직원들이 많이 없다 보니까 교회도 전과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회사에서 퇴직한 이들과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어우러져서 교회가 유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안되겠다 생각해서 공장 밖에 사는 사람들, 그러니까 일반인들에게도 이 교회 와서 신앙생활할 수 있도록 해야 되겠다, 이렇게 계획을 하고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교회에 오도록 했습니다. 시설이 좋고 잘 해놓아서 많이들 옵니다.
그런데 이 공장안으로 들어오다 보니까 공장 안에는 기계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교인들만 오면 좋은데, 혹시 불순불자들까지 올까 해서는 일일이 검사를 하는 겁니다. 이름이 뭐냐? 주민등록번호가 뭐냐? 왜 왔느냐? 이렇게 일일이 체크를 하고 조사를 하니까 사람들이 쉽게 교회로 오질 않는 겁니다. 그러니 제발 정문에서 그런 일 좀 안해주면 교회에 나오겠는데, 그것 때문에 교회 못나오겠다 그러니 교인들의 기도 제목이 무엇이겠습니까? 무사히 통과하게 하던지 아니면 교회 쪽으로 문을 내게 하던지가 이들의 기도 제목이었습니다.
한 일년쯤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목사님, 목사님이 가서 사장님한테 얘기 좀 해서 문 좀 내게 해주세요, 목사님도 회사의 생리를 잘 아는데, 그런 얘기 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목사님이 가서 얘기하면 되면 될텐데, 왜 얘기 안하느냐 하면서 또 기도하면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한달 전에 만났습니다. 꼭 얘기 할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 회사에 새로운 사장이 부임해 왔다는 겁니다. 회사에 대한 브리핑을 하다가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누가 와서 신앙생활 하느냐? 밖에 있는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느냐? 들어옵니다. 저희들이 이 사람들을 일일이 체크하고 조사를 해서 혹시나 공장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잘 하고 있습니다. 얘기했더니 사장님이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아니 교인들 때문에 직원들이 나와야 되고 그 검사를 해야 하고, 그러다가 불순분자라도 들어오면 어떻게 해? 교회 쪽으로 문하나 내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응답이 되었어요? 안되었어요? 사장님은 교회 위해서 한 일이 아니고 회사 위해서 한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한 기도가 응답이 된 줄로 믿습니다. 감사하지요.
이런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야, 우리 기도의 영발이 세 가지고 기도 응답을 받았다, 이랬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너무나도 놀랍다, 상상하지도 못하게 이루어주신다, 이랬겠습니까?
여러분, 이 두 가지의 마음 중에 여러분이 그 교회의 교인이라면 목사님이라면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너무나 놀라와서 그 앞에 겸손해지고 낮아지고 더 하나님 의지하는 그런 신앙의 인격으로 변화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도의 응답을 받은 자의 신앙의 인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의 본문 9절부터 14절까지 한 목소리로 보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아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냥 비유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비유를 말할 때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 목표가 무어냐? 9절 말씀에 나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첫째는 자기가 의롭다고 믿는 사람들, 그 착각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누가복음 18장 1절에서 8절까지의 정의로운 기도, 정의로운 기도자는 어떤 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하고 나서 응답을 받으면 사람의 신앙의 인격이 어떻게 변하냐 하는 말입니다.
오늘 비유 속에 보면은 바리새인의 기도가 나오고 세리의 기도가 나오고 주님의 판정이 나옵니다. 이 바리새인은 특징이 뭐냐면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다, 즉 나는 토색, 불의, 간음, 세리와 같지 않다, 다른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금식하지만 나는 두 번 금식한다 십일조 한다 하는 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열심이 있습니다.
세리를 보십시오.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 치면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그랬습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순이 있습니다. 바리새인, 다른 사람처럼 죄 짓지 않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권력이라든지 돈이라든지 지식을 가지고 얼마든지 간음도 할 수 있고 불의한 일도 할 수 있고 남의 것을 뺏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안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두 번 금식을 했습니다. 십일조를 했습니다.
세리, 세리는 세무공무원입니다. 오늘날도 세무공무원이 원하든 원치아니하든 문제만 생기면 세무공무원들의 세금포탈 혐의가 나오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당시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 중에 몇 사람을 뽑아 가지고 너희들이 세금 걷어와라 내가 너희에게 100원 걷어 오라 그러면 네가 200원을 걷든 300원을 걷든 네 마음대로 하고 나에게 100원만 주면 된다 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원을 걷으라 하면 200원, 300원을 걷어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세리가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된 사람이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러는 것 봤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대포를 들고 탱크를 들고 들어와서 나라의 권력을 잡았다, 권력 잡은 사람들이 이것 잘한 겁니까? 잘못한 겁니까? 그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총칼로 들어와서 나라를 잡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대통령 되고 난 다음에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것 봤습니까? 그 권력 더 휘두릅니다. 더 힘세게 굽니다. 불의란 불의는 다 저지르고 간음이란 간음은 다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리가 자기 가슴을 친단 말입니까?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기입니까? 여러분, 불의자가 자기 가슴 치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 봤냐 그 말입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러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유란 말입니다. 비유.
우리가 현실적으로 보면 금식하는 사람 겸손하지요. 반대로 이렇게 토색하고 나쁜 짓 하는 사람들은 교만하게 되어 있다구요. 왜? 다 이유가 있습니다. 자기가 불쌍하다 그러면 이거 다 내놔라 그럴 판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요? 이건 비유입니다. 그러니 모순이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의 평가는 뭐냐면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말씀했던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말씀의 목표는 무엇인가 하면 제발 낮아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는 것은 좋은데 금식하면 낮아져야지 그 금식한 것 가지고 교만해진다?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하나님 앞에 십일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간음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으면 낮아져야지 높아진다? 세상에 이 세리들이 돈 가지고 권력 가지고 교만하게 구는 것과 차이가 뭐가 있냔 말입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똑같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극단적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세리 같은 너희들이 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가슴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면 그 사람이 더 의로운 사람이다 그런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과 세리를 비교했을 때에 삶의 스타일에서는 당연히 바리새인이 낫습니다. 그러나 그 삶의 인격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여러분, 주여! 주여! 하는 게 뭐가 나빠요? 선지자 노릇한 게 뭐가 나쁩니까? 단지 하나 나쁜 것은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치 아니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여! 하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지요. 선지자 노릇하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야지요. 자기 뜻, 자기 자랑, 자기 높이는 것, 남 무시하는 것, 이런 것 하면 안된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그 과정에서는 분명히 바리새인이 낫지만은 그 결론이 세리하고 다른 것이 뭐가 있느냐? 한 사람은 돈 가지고 자랑하고 큰소리치고, 한 사람은 종교 활동한 것 가지고 큰소리치고, 다를 바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뭔가 달라야지요. 그것이 무어냐? 신앙의 인격이 달아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주님이 하시려고 하신 의도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이 전도하러 나갔다가 귀신들이 자기들을 보고 벌벌 떨고 도망가는 것을 보고 갔다와서는 얘기하는 겁니다. 야, 내가 갔는데, 귀신이 도망가더라, 서로 그러는 겁니다. 나도 그랬는데, 나도 그랬는데, 정말 기분이 좋다, 멋있다, 그런 얘기를 하니까 누가복음 10장 20절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아멘.
무슨 말입니까? 나의 한 일로 나타나는 나의 능력자임을 나타내기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고 내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더 기뻐하라 그런 얘기입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여러분 보세요. 높이는 자를 낮추시는 분이 있다 말입니다.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 있단 말입니다. 그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시란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다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 진정한 신앙인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런 말입니다.
여러분, 세상 종교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다른 점이 이런 점입니다. 세상 종교는 자기 공력 따라서 부처도 되고 해탈도 되지요. 어떤 사람은 깊은 산에 가서 도 닦았다 하면서 자기 능력 자랑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세상 종교인들은 특성상 자기를 높여야 합니다. 나는 신과 같은 존재다, 이쯤 자기를 높여야 됩니다. 이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 우리 예수님, 자기를 잡으러 온 로마 군병들을 향해 어떻게 했어요? 베드로는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었더니 예수님은 검을 쓴 자는 검으로 망한다면서 귀를 주워서 다시 붙여 주지 않습니까?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주님, 바다와 풍랑도 잔잔케 하시던 주님, 죽은 자도 살리신 주님, 그 가지신 능력과 하신 일이 대단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어라 하니까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까? 한 마디로 낮추는 분입니다. 능력이 없어서 낮아진 것이 아니라 그 능력을 낮추는 데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시 부활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이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사도바울은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깊이가 더해가면 갈수록 나는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라고 하면서 나보다도 나쁜 놈은 없을 것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습니까? 자기를 낮추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얘기하는 의로운 사람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따로 서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난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겁니다. 자기 신앙을 자랑합니다. 남을 무시합니다. 아니, 멸시한다고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면에서 잘못입니다. 하나는 육적이고, 세상적인 면에서입니다.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 하는 얘기 가운데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 얼마든지 많습니다. 자기 자랑하지 마세요. 언젠가 그것 때문에 부끄러움 당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이번에 중국 상해에 처음 가봤습니다. 북한에 김정일이 상해를 보고 천지가 개벽했다고 하는데, 저도 정말 놀랬습니다. 중국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30층이 넘는 빌딩이 2,500개나 되는데, 그것도 같은 건물이 하나도 없어서 상해는 세계 건축박람회장이라고 안내를 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탑이 있습니다. 상해 시내 구경을 하자고 나가서 차를 타고 두 시간 반을 기다렸지만 차가 하도 많아서 길이 막혀서 그 높은 탑이 있다는 푸동지구에는 그냥 강 건너서 보고, 시간 되서 그냥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던 날 아침 일찍 나가서 또 거기 가자하고 가다가 보니까 또 길이 막혀서 멀리서 쳐다보고는 공항으로 그냥 왔습니다.
집들이 얼마나 큰지 가정주택, 나는 미국에서 그런 집들을 봤는데 미국보다 더 좋은 집들이 즐비합니다. 상해 도심만 벗어나면 얼마나 집들이 대단하지,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 물어봤습니다. 1층부터 3층까지 다 쓰냐고 다 쓴다고 합니다. 제가 묵었던 호텔에서 이 주택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형도 전시하고 카다로그도 전시하고, 제가 그 카다로그를 갔다가 봤는데, 규모가 엄청납니다. 그런 집들이 즐비합니다.
여러분 제가 여태까지 갔던 중국이라고 하는 것은 일을 하러 갔기 때문에 연길, 용정, 두만강변, 북한땅 내다보는 곳이었습니다. 식량도 보내야 되고 탈북자들도 도와야 되고 거기 조선족 전도사님들도 교육시켜야 되고 또 교회도 세워야 되고, 그런 일들 해야 하니까 중국의 서북쪽 제일 끝 시골에만 가서 야, 중국은 정말 못사는 구나 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사람은 정말 배워야 합니다. 좀 돌아다녀 보니까 다릅니다. 할 말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중국이 가난하다구요? 천만예요. 여러분 그렇게 무시했다가는 어디가서 망신당하기 딱 좋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하루 아침에 바뀔 수가 있습니다. 뭘 자기 자랑을 해요? 그러면 망신당할 때가 온단 말입니다.
우리 나라의 낙태율이요, 세계 최고랍니다. 세계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어 있습니다. 영어 배우기 열풍이 어느 정도냐? 종교를 불사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 있는 집들 영어 가르킨다고 아이들 그냥 데려다가 발음 좋아지게 한다고 혀를 잘라낸다고 합니다. 애들 왕따 시키지 않으려고, 조기 취학하지 않게 하려고, 애들 좀 커서 입학시킨다고 애들을 학교에 안보낸다고 합니다.
언제까지 이 나라가 자기 자랑하고, 자기 힘 자랑하고, 이것 가지고 마치 다된 것처럼 생각하고 살 것입니까? 여태 우리 자부심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왜 그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하고 전쟁을 하고 삽니까? 자기 자랑해서 그럽니다.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의로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기도 응답이, 내가 기도하는 방법 때문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 모른다 그러면 부끄러움 당할 날이 오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가 아니요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그러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 멸시하고 괄시하기 때문에 자신만 따로 행동하는 것은 교만인데, 이 교만 가운데 가장 큰 교만이 뭐냐 신앙의 교만입니다. 이것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공부 좀 했다고 지식에 교만을 가진 사람도 있고, 너보다 내가 돈 몇 푼 더 있다고 부자로서 돈 있는 교만 부리는 사람도 있고, 너보다 한자리 높다고 해서 권력의 교만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신앙의 교만입니다.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너보다 오래 믿었다, 어떤 직분을 가졌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믿음의 교만에 빠진 사람은 기도하러 교회 나와서도 따로 행동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자기 자랑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교만해지고, 그러면 망한다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로운 사람이 되려면 자기 가슴을 치라는 겁니다. 세리는 자기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은 누구 가슴 치고 있습니까? 남의 가슴을 치는 겁니다. 저 불의한 자들, 토색한 자들, 간음한 자들, 세리와 같은 자들, 이번 기회에 완전히 뒤집어지게 해달라 이런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기도하려면 자기 가슴 쳐야지 왜 남의 가슴 칩니까? 시어머니, 가정이 잘 되고 못 되고는 시어머니 가슴을 쳐야지, 왜 며느리 가슴을 치냐 말입니다. 며느리들은 왜 시어머니 가슴을 치고 있어요? 그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거든요.
남의 가슴을 치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예요. 첫째는 자기 신앙생활에 만족이 없다. 부자 청년, 율법학자 그렇게 성경을 잘 알고 신앙생활 잘해도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주님 앞에 오지 않습니까? 자기가 부족하니까 남을 이렇게 찔러 대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잘못된 신앙 때문입니다. 남을 비판하는 것이 정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의 아닙니다. 남에게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기독교 신앙인은 자기 가슴 치는 신앙입니다.
여러분, 손 들어서 자기 가슴 한번 쳐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런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남의 가슴을 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해서 처음에는 잘 살았는데, 점점 사이가 나빠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있으니까, 기도할 문제라고 기도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남편이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 아내를 완전히 뒤바꿔 주시기를 바랍니다. 변화되어야할 사람은 저 마누라입니다. 그러니까 아내는 저 편에서 하는 말이 하나님, 내 남편 바꾸어 주십시오. 변화되어야할 사람은 저 남편입니다.
저마다 상대방이 변화되기를 기도했습니다. 누가 사랑에 대해 설교를 하면 마누라가 들어야되는데, 사랑에 대한 책을 읽으면 내 남편이 읽어야 되는데, 문제가 해결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정작 고쳐야될 사람은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을 변화시키고 상대방을 뜯어 고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까 문제는 더 심각해진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아니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 행복이 찾아오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아내가 변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남편이 변화되기를 바라지 말고 내가 먼저 달라지면 우리 부부 사이가 좋은 관계가 되고 행복이 찾아오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세리, 자기 자랑 안하고 무시도 안합니다. 반대로 원망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워낙 가난한 집에 태어나서 그런 것 아닙니까? 가난한 게 뭐 죄입니까? 그래 내가 돈 좀 벌려고 했는데, 사람들은 왜 나에게 손가락질 합니까? 내 팔자가 이게 뭡니까?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드러내 놓고 자기의 부족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되느냐? 첫째는 하나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성프란시스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는 다 겸손할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겸손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랑하고 남을 무시하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지 않기 때문에 그럽니다.
미국에 대통령 가운데 가장 무능한 대통령, 그 사람은 지미 카터입니다. 대통령 재임시에 제일 무능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겸손한 지 모릅니다.
대통령 선거 유세하러 다닐 때에 주일날만 되면 자기 고향 마을 조지아 주에 작은 교회에 가서 23년 동안 개근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스무 명을 앞에 두고 가르치고 하나님 앞에 경건하게 예배드렸습니다. 그 바쁜 시간에. 기자들이 70명이나 몰려 왔습니다. 어떻게 바쁜 시간에 교회는 꼭 여길 나와야지 하나님이 계십니까?
지미 카터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대통령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게 더 중요합니다. 내가 부탁이 있는데, 이렇게 찾아주는 것은 고맙지만 다음 주일부터는 여러분들도 여러분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가 먼저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예배함이 없이는 내 삶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겸손할 수가 없습니다. 낮아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의 부족함이거든요. 자기는 선지자이지만, 기름부음 받았지만 자기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저는 여행 중에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나는 목사로서 어떤가? 정말 나는 겸손한 자가 되고, 낮아지는 자가 되는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제 자동차가 오래 되었다고 느끼는지 동네 사람들이 제가 차 타고 지나가면서 만나면 목사님, 차 좀 바꾸세요, 그럽니다. 난 그럽니다. 예, 바꿀게요.
사실 우리 장로님들도, 교인들도 차 바꾸자고 하지만 구태여 바꿀 것 있나요? 이렇게 1년, 2년 타다 보니까 10년쯤 탔습니다. 이번에 차를 수리했더니 어떻게나 차가 잘 나가는지, 고만큼 더 탈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내가 그래도 괜찮은 목사다, 큰 차 타려고 욕심도 안 부리고. 세차를 10년 동안 하는데, 내가 세차하든지, 박집사님이 도와주시든지 아니면 주유소에서 기름 넣고 공짜로 하든지 이렇게 해서 교회헌금 한푼이라도 아껴야 되겠다 그렇게 자동차를 타면서 10년 세월을 왔거든요. 그래 난 괜찮은 사람이다. 누가 뭐래도 난 괜찮은 사람이야, 난 이런 것 잘 참을 수있어.
그런데 이것이 신앙적으로 겸손을 나타냈는데, 어느덧 이것이 자랑거리가 되고 말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헌금 생활하고, 내가 하나님 앞에 헌신의 생활을 했는데, 이것이 어느덧 내 자랑이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덧 내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습니다. 나를 대우해 주지 않으면 이것 섭섭한 생각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잘못했습니다. 목회를 하면 할수록 더 겸손해져야 되고 더 진실해져야 되고 낮아져야 되고 자기 자랑하지 말아야 되고 남 무시하지 말아야 되는데, 제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가운데 자식을 잘 키운 어머니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럼 거기서 끝나야지요. 며느리에게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고생은 내가 하고 복은 네가 다 받느냐? 그게 그렇게 섭섭하고 시기가 되고 질투가 되가지고 자식하고 등지고, 며느리하고 손가락질하고, 그게 어떻게 내가 키운 겁니까? 어려운 중에 어떻게 내가 키웠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키워주셨지.
교회 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교회 이만큼 키웠다, 내가 교회 이만큼 봉사했다, 이만큼 헌금했다, 어느덧 자랑이 되버리고 말고,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 무시하고 있는 나는 아니지.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깊이가 더해 가면 갈수록, 연륜이 더해 가면 갈수록, 내 직분이 하나씩 새로운 직분을 맡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낮추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높이시는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시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집트에 가면 피라미드 구경해주는 것처럼, 이번에 중국에서 아침새벽기도회 5시에 시작을 해 가지고 한시간 반 예배드리고 나면 아침 식사하고 아침 식사하고 나면 차 타고 구경시켜 준다고 하는 겁니다.
중국 땅이 얼마나 넓습니까? 넓으니까 서너시간 차 타고 가 가지고 보여줍니다. 뭘 보여주느냐? 무덤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무덤이 큰지. 호구라고 하는 곳에 갔었는데, 호구가 소주라고 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니까 상점 이름들이 오자가 많더라구요. 오무슨 상회, 오무슨..... 그래 제가 가이드에게 물었습니다. 이곳이 오나라가 시작된 곳이냐? 그렇다고 합니다. 오씨가 대접받는 곳이 이곳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나라 왕이 자기 아버지가 죽고 난 다음에 무덤을 만들었습니다. 수 천명이 그 공사를 했습니다. 엄청난 무덤입니다. 그런데 옛날 왕들 죽으면 무덤에 부장품들을 많이 넣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하는 사람들이 그 부장품이 어디에 놓여있는지 알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왕이 어떤 생각을 하느냐? 너희들 다 모여라 수 천명 그들을 옆에서 지키고 있던 병사들 다 와라 하고 한군데 모아 놓고는 내가 너희에게 특별한 술을 내리겠다 한잔씩 마셔라 그게 무엇이었겠습니까? 독주였습니다. 한자리에서 그냥 그것 먹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돌 갖다가 쌓았습니다.
내 그것을 보면서 세상이 이렇게 악하냐? 자기 아버지 무덤 하나 지키고, 그 부장품 하나 지키려고 자기 위해 충성한 사람들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남 죽이고 자기가 사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사는 기독교인의 신앙은 내가 죽고 남을 살리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겁니다.
제가 목요일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인천에 도착하니까 9시 10분전쯤 되었습니다. 나와서 이태원에 오는 버스를 35분쯤 기다렸습니다. 그것을 탔더니 막바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의도를 들르는 겁니다. 여의도 들르니까 벚꽃놀이가 한창이라 차를 삼중사중 주차해놓으니까 차가 못 가는 겁니다. 집에 도착하니까 11시 반쯤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성묘가야 된다고 아버지 산소 가자고 그래서 갔는데, 길이 얼마나 막히는지, 하여간 갔다 돌아오니 저녁 8시 반쯤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는 길에 길도 막히고 해서 휴게소에 들렀습니다. 한참 서 있는데,보니까 요만한 액자에 글이 하나 써있었습니다. 그 얘기가 이런 얘기입니다. 영국 동부에 코벤틀이라고 하는 성이 있습니다. 11세기니까 지금부터 1,000년전의 얘긴데, 마을 사람들이 성주한테 세금을 바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땅이 다 성주 땅이고 그 소작농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세금을 바치는데, 세금을 너무 많이 바치니까 이 사람들이 힘들어서 못살겠다, 그래서 성주의 부인을 찾아가서 부탁을 했습니다.
우리 세금 좀 감면해달라, 이 얘기를 듣고 성주 부인이 성주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는데, 듣질 안는 겁니다. 자꾸 부탁을 하니까 성주가 안들어줄 수는 없고 하는 말이, 당신이 빨가벗고 말타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오면 세금 감면해 주겠다 그런 겁니다. 이 말이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는 말입니까? 안해 주겠다는 말입니까? 안해 주겠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 성주의 부인의 마음 속에 어떤 마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성주 부인이 빨가벗고 말을 타고 마을을 돌기 시작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창문을 다 열어놓고 이 성주의 빨가벗은 모습을 바라본 것이 아니고 이 얘기를 듣자마자 창문들을 닫았고 커튼을 다 가리고 그리고 그 일이 끝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돌고 난 다음에 성주가 세금을 감면해 주었겠습니까? 안해 주었겠습니까? 감면해 주었습니다. 이 성주의 부인이 죽고 나자 마을 사람들이 다 돈을 모아 가지고 그 마을 입구에다가 말 위에 빨가벗은 여인상을 만들어놓고 사람들은 그 동상을 바라볼 때마다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숙연해지면서 존경을 표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글을 거기다 붙여 놓은 분의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나를 높여서 높아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높이실 때 비로소 높아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기도에 대해서 4번 말씀드렸습니다. 경건의 기도를 해라, 하나님만 바라보고 기도를 해라, 관계의 기도를 해라, 하나님과 교제를 해라, 정의로운 기도를 해라, 욕심의 기도를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를 해라, 오늘 마지막 시간 기도하는 사람의 마지막 결론은 무엇인가? 좋은 인격자가 되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결과는 좋은 인격자가 되라는 겁니다. 봉사의 결과도 좋은 인격자가 되라는 겁니다. 낮아지는 자가 되어라,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은 여러분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계시는 겁니다. 여러분을 낮출 수도 있고, 높일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만은 패망의 선동입니다. 망하려면 우리가 교만하면 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 주시고 겸손한 자를 붙들어 주시고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어주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그런 말입니다.
마직막으로 한가지 얘기하겠습니다. 남쪽 사람하고 북쪽 사람하고 같이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남쪽 사람이 하는 말이 우리는 어려운 일이 생기면 119에 전화를 하면 소방서에서 즉시 달려와 가지고 불도 꺼주고 환자들은 병원에다 데려다 주는데, 미국에서는 911이라 그러더라. 너희는 도대체 번호가 뭐냐? 119냐? 911이냐? 그랬더니 북한 사람이 비웃으면서 하는 말이 야, 우린 그런 것 필요 없어 우리는 119를 누르든 911을 누르든 112를 누르든 113을 누르든 네 마음대로 다 눌러봐 아무 것을 눌러도 당에서 다 듣고 있어.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누가 나를 알아주던 안 알아주던 낮아지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 응답 받은 사람,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되고 겸손해져서 하나님이 높이시는 법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이런 겸손의 인격을 가져서 하나님 높이시는 그런 축복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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