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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전을 헐라 - 요 2:13 - 22절
    2002-04-11 19:14:50   read : 1823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요한복음 2:13-22절
    제목:이 성전을 헐라

    지난해, 미국 뉴욕의 중심가를 강타한 테러사건을 뉴스시간에 우리의 눈으로 생생하게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테러사건으로 파괴된 국제 무역센터는 세계 무역의 심장부였습니다. 전 세계인들 앞에 언제나 그 위용을 당당하게 드러내었던 건물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수년 전에 있었던 삼풍백화점 붕괴장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국제무역센터는 테러에 의해서 붕괴된 것이고, 삼풍백화점은 부실공사에 의해 붕괴된 것이지만, 아뭏튼 오랜 세월동안 공사해서 지은 건물일지라도 한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붕괴된 건물의 잔해를 제거하는데만 국제무역센터의 경우 1년 가까이 걸린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면 아직도 작년에 붕괴된 건물의 잔해를 다 제거하지 못했을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 터 위에 다시 건물을 완성하려면 적어도 수년의 세월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삼풍백화점도 건물잔해를 치우는데만 수개월이 걸린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하면 며칠 전 신문을 보았더니 2000년까지 자산규모 1위를 지켜왔던 현대그룹이 2년 만에 13위권의 중견그룹으로 전락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물론 소위 현대그룹내 '왕자들의 난'으로 그룹이 분가를 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2년 만에 13위까지 추락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세우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현대그룹이 과거의 명성을 다시 회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부모와 자녀를 잇는 사랑의 다리'라는 책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부모도 싫고, 학교도 싫고, 반 아이들도, 공부하는 것도, 제 주위의 모든 것이 싫었어요. 그 중에 가장 싫은 것은 '제 자신'이었습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세상에서 가장 악랄한 깡패가 되어서 엄마 아빠를 괴롭히고 싶었어요. 그토록 미웠죠. 지금 엄만 저희 식구들 중에서 저를 가장 싫어 하신답니다. 걸핏하면 죽으라고 하고, 나가라하고, 매를 들고, 전 이런 엄마가 저주스러울 만큼 싫습니다. 현란한 음악을 들으며 춤추고, 어두운 조명 속에서 혼자 웅크리고 앉아 무서운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졌어요. 이젠 제 자신을 가누질 못하겠어요. 선생님! 더 이상 쓰지 못하겠어요. 제가 무슨 말을 쓰고 있는지 무서운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말은 100%진실이에요."

    이것은 파괴되어진 한 가정의 자녀가 회복될 수 없을 정도의 절망과 좌절을 경험하면서 선생님께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상처받은 아이가 과연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어질 수 있을까요? 아마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한 가정이 무너지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가정이 다시금 회복되어지고 그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이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을 요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건물도 그렇고, 회사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무너지는 것은 쉽지만 회복시키고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 주님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헐면 자신이 '사흘동안에 다시 일으키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이 말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무슨 성전이길래 사흘만에 일으킬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레고'라면 가능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레고로 집을 짓는 일이면 단 몇 시간만에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성전을 무너트리고, 그 무너트린 곳에 다시 성전을 세우는데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단 말입니까? 성전을 허는 것도 쉽지 않겠지만 그 잔해를 치우고 그곳에다 성전을 사흘동안에 다시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도 몇 안되는 제자들을 데리고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오늘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생각해 볼 때, 적어도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는 어떤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이 말씀의 시작은 주님께서 유월절이 다가왔을 때 예루살렘성전에 들어가시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본문 13절과 14절을 보면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무엇을 보셨습니까?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과 사람들이 돈 바꾸어 주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느냐? 라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것들을 판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당시에 성전 안에서 이런 것을 팔려면 성전의 제사장들과 상당한 이권을 주고받아야 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이런 것을 성전에서 팔수 있도록 허락을 해주는 대신에 뒤로 뇌물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유월절에 빈손으로 성전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제물을 몰고 성전까지 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드릴 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는데 자칫 먼길을 몰고 오다가 상처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섣불리 몰고 올 생각을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전에서 파는 제물은 적어도 그런 염려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제물을 사곤 했습니다.

    그런데 상인들이 이런 점을 노려 아주 비싼 값에 제물을 팔았고 그 판 금액의 일부는 성전안에서 팔도록 허락을 해 준 제사장이나 기타 당국자들에게 뇌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성해야 할 하나님의 전이 뇌물을 주고받는 곳으로 더렵혀지고 있었고 그 모습을 주님께서 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보면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시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행동하실 것이 무엇이냐?"라고 말입니다. 오늘날로 표현하면 "예수님께서 좀 오바 하시는 것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까지 하십니까?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좀 심하다는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냥 말로 해서 쫓아낼 것이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서 양이나 소를 쫓아내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고 상을 엎으시기까지 하는 것은 좀 심한 것이 아니냐?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권과 결탁한 상인들을 내어쫓는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이권이 개입되지 않아도 상인들을 내어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이 열리던 해도 그랬지만 올해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월드컵이 열린다고 해서 서울시에서는 구청에서 대대적인 도시정화에 나섰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구청직원들을 동원해서 거리에 있는 포장마차를 단속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리에 나와있는 입 간판에 대한 단속입니다.

    구청직원과 상인들의 모습을 보면 마치 게릴라전을 연상케 할 정도입니다. 단속하는 사람과 단속을 피해 달아나는 사람들의 모습이 게릴라전을 방불케 합니다. 단속을 강화하면 사라졌다가 단속이 좀 느슨해지면 어느새 다시 그 자리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누가 잘했느냐? 못했느냐?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상인을 단속하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그 일이 정말 어렵다는 말입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을 단속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엄청난 이권이 개입되어 있는 장소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행위를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의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열정적으로 단속하는 일입니다. 상인들의 입에서 "저 사람 미친게 아니냐? 라든가, 저 사람은 도저히 말릴 수가 없어"라는 말을 들을 때까지 열정적으로 단속하는 일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물론 상인들은 분명히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단속하느냐?"고 말입니다. "구청직원이면 다냐?"고 말입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당신이나 우리나 다를게 뭐가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가 구청직원과 상인과의 관계라면 그래도 마음을 좀 냉정하게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상인들을 내 쫓으시는 것은 그런 정도의 관계에서 행하신 행동이 아닙니다. 만약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교회 앞마당에서 전을 펴고 장사를 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장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들이 아무데서 볼일을 보는가하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욕지거리를 마구 해대고, 자기들끼리 자릿세를 주고받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기왕에 벌어진 장(場)이니까 물건이나 싸게 사서 집에 가자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정신이 있느냐?"고 화를 내겠습니까?
    수년 전, 개척교회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저희교회가 지하에 세 들어 있었습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지하의 특성은 외부로부터 감추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문 입구에 누군가가 배설물을 배설하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그곳에다 배설을 했겠습니까? 더구나 볼일을 보는 동안 본인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저는 너무도 불쾌했습니다. 한편으론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든지 며칠간 잠을 제대로 못 잔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하고 가는지 그 이후로 주의깊게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여학생 몇 명이 그곳에서 담배를 피다가 저에게 발각되었습니다. 교회입구에서 담배를 피다니 이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주 혼을 내준 기억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흥분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사람들 말대로 오바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집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 집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집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장사를 했습니다. 장사만 한 정도가 아니라 오물을 버리면서 마구 더럽혔습니다. 그것도 모잘라서 자기들끼리 자릿세를 주고받았습니다. 엄연히 주인은 따로 있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도저히 이 일을 용납하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몰아내는데 모든 열정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한마디로 주님께서 왜 그토록 성전에서 상인을 쫓아내시며 그 성전을 청결케 하시려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열정을 쏟으십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대체 당신이 뭔데 이 곳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리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이런 행동은 자칫 큰 화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몰매를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내 쫓는 일에 조금도 머뭇거림이나 비굴함 없이 당당하게 그것도 매우 열심을 품고 행동을 했습니다.

    주님의 그런 열정적인 모습을 본 제자들의 말이 무엇입니까? 17절에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예수님의 열정은 오직 성전으로만 향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편 69편의 말씀을 떠올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다윗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는 고난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에게 다가온 모든 고난을 참아낼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전에서 쫓겨나는 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성전만 생각하면 그대로 주저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보기에 다윗은 성전에 대해서만큼은 미친 자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보기에 지금 예수님의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단순히 장사하는 것을 싫어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 주님이 상인을 내 쫓는 일에 열심인 것은 하나님의 전이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바른 모습을 갖도록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의 바른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 영혼이 하나님께 나아와 죄를 고백하고 죄에 대한 고백을 통해 사함을 입고, 그 속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전의 기능은 온데간데 없고 물건을 팔아 이익을 챙기는데 급급해 있는 이 가증된 모습을 주님은 그대로 묵과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로 엄청난 주님의 책망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참된 사명이 무엇입니까? 죽어가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우매한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우매한 질문입니까? 18절에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 아들로서의 자격을 가지고 성전을 청결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참 어리석었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당신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을 보니까 평범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은데 선지자라도 된다면 당신이 선지자라는 증거를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성전을 청결케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직도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의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랐던 위대한 선생 세례요한도 이 사람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사건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성전을 청켤케 하시며 자신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말씀을 듣거나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들 마음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진리가 아니라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돈에 자신들의 양심을 팔고, 돈에 진리를 팔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신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가장 아픈 치부를 찔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심정을 도려내는 듯한 주님의 말씀을 애써 외면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이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쩌면 무감각하고 무감동적인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자신의 마음을 닫아버리는 경향들이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서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고 있는데, 그 말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마음마저 막아버리고는 자신을 향한 찔림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심한 경우에 주일예배를 참석하는 분들 중에는 설교를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설교를 감상하는 사람들이 적잖습니다. 누가 매끄럽게 설교하느냐? 라든지 누가 해석을 탁월하게 하느냐?라든지 누가 은혜롭게 설교하느냐?를 감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마음 문을 열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한 진리의 말씀이 어떻게 살아서 역사하며 그 말씀 앞에 나의 모습을 돌아보기보다는 세련된 설교의 내용이나 스피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가운데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듣고 그분께 나아와 무릎을 꿇고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설령 그것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고통과 힘든 상황이 뒤따른다 하더라도 진리 앞에서 우리는 조금도 자신을 감추어서는 안됩니다. 때때로 나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부를 드러내지 않으면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이들은 애써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주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분몬 1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동안에 일으키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미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그들이 이 말을 제대로 알아 들을리 만무입니다. 그래서 다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성전을 헐라는 것과 자신이 사흘동안에 일으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한 성전을 파괴한다는 것은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성전을 헐어버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성전이 파괴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전을 파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더구나 파괴된 성전을 사흘동안에 일으킨다는 것이 말이 될 법이나 합니까?

    그래서 그들은 다시 질문했습니다. 20절에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46년동안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이들의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이 성전은 46년동안 공사해서 지은 튼튼한 성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성전을 허물고 사흘동안에 일으킬 수가 있겠습니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세상적인 관점이며 사람의 계산일 뿐입니다.

    46년이 아니라 460년이 걸려 지은 성전이라도 주께서 허물려고 하신다면 왜 허물지 못하겠습니까? 또 사흘이 아니라 말 한마디로도 허물어진 성전을 일으키시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이 진정으로 예수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자 했다면 감히 이런 말로 그분을 기만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성전을 허물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장 절망적인 상황으로 생각하는 때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느껴질 때입니다. 오래 전에 그들은 바벨론 포로생활을 경험했습니다. 그 포로생활당시 하나님의 성전을 그리워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빨리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어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되고 그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손으로 결코 성전을 파괴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는 일과 동일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21절과 22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및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것에 대한 말씀이었음을 여기서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돌로 짓는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석공들이 해도 됩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성전을 짓는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짓고자 하셨던 성전은 어떤 성전입니까? 그것은 외형적으로 화려하게 꾸며놓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원하셨던 성전은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모입니다. 즉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성령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교회 공동체를 주께서 원하셨습니다.

    그 일을 위해 자신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직 이 일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이 일에 열심을 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에 그릇된 모든 것들은 과감하게 내 쫓는 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향한 열심이 있습니까? 예배당이 아닌 교회 공동체에 대해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까? 아니 하나님과 얼마나 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들의 관심을 건물을 짓는데 있지, 영혼에 대한 관심은 언제나 부족합니다. 주님은 이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죄악된 우리의 본성, 경건하지 못한 삶의 태도, 영원토록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습성을 허물어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께서 다시 새로운 성전을 그 위에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사실을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룩하지 못했던 과거의 모든 습관과 더러운 행실을 허물어 버리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새롭게 지어져 가는 성전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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