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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번째 기적 - 요한복음 2:1-11절
    2002-04-11 19:13:32   read : 1804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요한복음 2:1-11절
    제목:첫번째 기적

    문민정부가 들어섰을 때, 국민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부정부패 척결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으로 권위주의 의식과 권력을 동원한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변화와 개혁'이라는 국정의 기조아래 부정부패를 척결하려고 참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 부정부패에 연루된 전직 대통령 두명을 감옥에 가두는 세계에서 전례가 없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가하면 문민정부 말기 '외환위기'라는 어려움 속에서 국민의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민들이 가장 원했던 것은 '경제 회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현 정부 출범당시 대통령의 취임사에서도 경제 살리는 일을 최우선과제로 꼽았습니다. 이와 같이 대통령은 자신이 취임을 할 때 반드시 자신이 먼저 해결해야 할 일과 앞으로 중점적으로 감당할 일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밝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으로 자신이 국정을 꾸려나가는데 있어서 국민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면서 시작이 됩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그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쳤고, 그 말을 들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안드레와 요한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드레의 전도를 받은 베드로와 갈릴리로 가던 도중에 만났던 빌립, 그리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고 했던 나다나엘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들과 함께 동행한 혼인잔치 집에서 공생애이후 첫 번째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이런 생각을 먼저 해 보아야 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혼인 잔치집에서 행하셨는가? 하는 부분입니다. 차라리 장례를 치루는 장례식장에 가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부터 하셨다면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메시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텐데 왜 장례식장에 가서 죽은 자를 살리는 일부터 하지 않으시고 혼인 잔치집에 가셔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첫 번째 기적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든지 중요한 사역을 함에 있어서 첫 번째 행하는 일은 굉장한 의미가 함축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혼인잔치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입니까? 왜 예수님은 장례식장이나 기타 다른 곳을 방문해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고, 하필이면 혼인잔치 집을 찾아가셔서 그곳에서 첫 번째 기적을 베푸셨는가? 말입니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많은 것을 먹고 배를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였을까요? 제자들에게 먹일 수 없는 상황이 앞으로 발생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미리 혼인 잔치집에 데리고 가서 공짜로 음식을 실컷 먹여서 스승으로서의 체면을 세워보려 함이었을까요?

    잔치 집은 모든 것이 풍성하고 넉넉합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간결하고, 음식이 남으면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잔치집이라 하더라도 많은 양의 음식을 하지 않습니다. 먹을 만큼만 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렸을 때 잔치 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참으로 풍성했습니다. 몇날 며칠을 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장만했습니다. 그리고 며칠씩 손님이 다녀가도 음식이 모자라는 법이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개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참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대심방 기간 중에 음식을 일절 내놓지 못하도록 하였더니 많은 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뭔지 모르겠지만 섭섭하고, 허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게 한 저는 여러분을 섭섭하고 허전하게 한 장본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음부터 준비하시라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왜 섭섭하고 허전합니까? 대접을 못했기 때문입니다.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풍성한 식탁과 음식은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여유로움과 기쁨을 선사합니다. 때로는 단절된 대화의 맥을 이어주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혼인 잔치집에 제일 먼저 가신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즉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풍성한 삶' '넉넉한 삶' '기쁨이 넘치는 삶'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 신나고 기쁜 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서 왜 그렇게 인상을 쓰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수심이 가득한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죽을상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곳으로 데려 가신 것은 단순히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의도하셨던 바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마치 혼인잔치에 참여해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즐겁고 신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밝은 모습, 웃는 모습, 기쁜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를 대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전·후·좌·우를 돌아보며 인사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잔치 집에 잘 오셨습니다', '많은 영의 양식을 드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과 2절을 보면 "사흘 되던 날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이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의하면 갈릴리 가나에서 혼인잔치가 있었는데 그곳에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있었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이 혼인잔치를 베풀고 있는 집안은 마리아와 굉장히 가까운 집안의 사람이었을 것으로 추측되어집니다. 왜냐하면 가까운 친척이나 인척관계가 아니면 아무리 잔치집이라 해도 낯선 사람을 한두명도 아니고 이렇게 여러 명을 한꺼번에 데리고 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문제의 발단은 이 혼인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진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왜 포도주가 떨어지게 된 것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가난해서 충분한 양의 포도주를 준비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고, 두 번째는 손님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가지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왜 떨어지게 되었느냐? 하는 것보다 '떨어졌다'는 그 자체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유야 어찌되었든 이 당시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잔치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얘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흥겨워해야 할 판국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더 이상 혼인 잔치를 계속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천국 혼인잔치에서 기쁨을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 일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각자 다른 이유로 인해 기쁨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문제가 시작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쁨을 상실한 모습, 즐겁고 신나지 못하고 뭔가 어둡고 만족이 없는 생활, 이것은 실로 우리들에게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옛날 다윗은 하나님 앞에 범죄한 후 눈물로 호소하기를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구원을 소유하고는 있었지만 기쁨을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쁨이 회복되기 전까지 자신의 삶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내 안에 기쁨을 상실했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에게 주님이 필요한 때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즐거워야 할 잔치 집에 포도주가 떨어져서 낭패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조치가 취해집니까? 3절에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왜 마리아는 포도주가 모자란 사실을 알았을 때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말했을까요? 물론 어떤 이들은 예수가 집안의 장남으로서 항상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장남인 아들에게 어떻게 해결 좀 해 보라는 요청이었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친척 잔치집에 갔는데 포도주가 떨어져서 잔치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보았을 때 마리아가 어떻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옆집에 가서 빌려오던지 아니면 가게에 가서 포도주를 사오든지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아닐테고, 이 잔치 집에 온 맏아들에게 시키는 것이 제격일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라고 말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건대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마리아는 이때야말로 그동안 자신의 가슴속에 담아왔던 오래 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시킬 기회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즉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그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때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라고 한편으론 황당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말씀대로 되어지기를 바라나이다"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부정한 여인으로, 심지어 정혼한 요셉마저 자신을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했던 상황에서 마리아는 자신이 잉태한 아이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잉태한 아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30여년동안 이 사실을 입증할만한 아무런 증거가 없었습니다. 30여년동안 천사가 한 말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회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기회입니다. 아들이 지금 혼인잔치를 계속할 수 있도록 어떤조치를 취할 수만 있다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그 오랫동안의 혐의가 벗겨지게 될 것이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에게 '포도주가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는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 사실을 예수께 알렸을 뿐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4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말을 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자기 어머니한테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라고 할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말하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죽도록 두들겨 맞고, 그 다음에 까무라칠 정도로 몇 대 더 맞아야 할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자여'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신의 어머니를 향해 칭할 수 있는 최고의 존칭어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정중하게 자신의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내가 당신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는 말입니다. 좀 더 쉽게 표현한다면 '어머니 왜 이 문제에 나를 끌어들이고자 하십니까?'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모자지간의 관계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높은 차원의 관계를 설명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혈육의 관계로서 마리아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마리아의 감독아래 있지 않음을 시사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는지 궁금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했을 때, "구해 오겠다든지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든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정상적인 말일텐데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때에 대한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서 하신 말씀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왜 이 말을 여기서 할 수 밖에 없습니까? 마리아는 30년동안을 기다려 왔습니다. 자신의 누명이 벗겨지고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니 서두르고 싶은 마음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때입니다.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때는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중하게 마리아의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하는 실수가 어쩌면 마리아의 모습과 흡사한지 모릅니다. 사실 마리아가 당했을 지난 30여년 동안의 고통을 생각하면 지금 이때를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이 회복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오히려 왜 빨리 회복시켜 주지 않고 30여년의 세월을 지나오게 했는지 항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것 때문에 자칫 하나님의 때가 아닌 우리의 때를 고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나의 뜻을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를 살피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그 말이 무슨 말씀인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릅니다. 왜 아직 그때가 아닌지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5절에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적어도 이 상황에서 예수님이 아니면 달리 해결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결되어질는지 마리아는 모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결되어지든지 간에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 문제가 해결되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그녀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문제에 대해 전적으로 예수님께 맡길 때 해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까? 자녀를 키우면서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자녀를 어떻게 좀 해보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가정생활에서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고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때문은 아닙니까?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어떤 것은 맡기고 어떤 것은 내 생각대로 하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지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나의 노력이나 행위가 필요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나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구분해서 이것은 맡기고, 이것은 내가 해결하고, 그것이 믿음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어떤 것이든지, 말씀대로 그대로 행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행동하게끔 했습니다. 물론 아직 때는 아닙니다. 주님께서 방금 말씀하신 때는 아닙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믿음은 예수님을 움직이게 했습니다. 6절에서 8절을 보면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섯 개의 돌 항아리가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여섯이라는 숫자에 굉장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육은 마귀의 숫자니 결국 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게 하고 포도주로 만드신 사건은 마귀의 권세를 깨트리신 주의 능력을 상징한다 라고 말하기도 하고 여섯은 불완전수다 라고 말하며 괴상한 의미를 부여합니다.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여기서 여섯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왜 여섯 개냐고 따지고 묻는 것은 여러분의 집에 그릇이 몇 개인지를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저희 집에 된장 뚝배기가 두 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왜 된장 뚝배기가 두 개냐고 물어온다면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대답보다는 '우리 집에 된장 뚝배기가 두 개든 세 개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화를 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돌 항아리가 왜 여섯 개냐?를 가지고 목숨 걸 필요는 없습니다. 어떻게 하다보니까 그 집에 있는 돌 항아리 숫자가 여섯일 뿐입니다. 물론 왜 돌 항아리가 여러개 두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인들은 결례를 위해 손발을 씻는 돌 항아리를 여러 개 준비해 두고 그곳에 물을 아구까지 가득 채워두곤 했습니다. 아마 이때 손님들이 많이 왔기 때문에 그 곳에 채워진 물을 다 써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손발을 씻는 결례용 물을 사용하여 포도주를 만드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차라리 물을 사용할 것 같으면 마실 물을 이용할 것이지 손과 발을 씻기 위한 물을 가지고 기적을 베푸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좀 불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세례 주실 때 정수기 물을 사용하셨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냥 수돗물로 세례를 받으면 좀 찝찝하신 모양이지요?

    세례를 받아도 정수기에서 받은 물로 세례를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면 손발을 씻기 위해 돌 항아리에 담아놓은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다면 좀 찝찝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실을 주님께서 모르셨기 때문에 그 물을 사용하신 것일까요? 물론 그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물을 사용하신데에는 더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물은 손발을 씻는 것 정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더러운 겉만 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는 물로 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가능합니다. 포도주가 무엇을 상징했습니까? 성만찬 때 이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상징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곧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상징하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신학적 근거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면 적어도 아무 의미없이 손발을 씻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명령하셨을 때 하인들은 그 명령에 순종하여 물을 아구까지 채웠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고 하십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당시 돌 항아리 하나에 두 세통씩 물을 채울 정도라면 상당히 많은 물을 길어 그곳에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엔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고 합니다. 화 나는 일이 아닙니까? 우리말로 '똥개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처음부터 물을 떠서 연회장에 갖다주라고 했으면 두 번씩이나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았을텐데 이게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대로 갖다주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좀 삐딱한 사람들은 '속으로 불평했는지 어떻게 압니까?'라고 말할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속으로 불평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건대 속으로도 불평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죄송한 표현이지만 '뭐 눈에는 뭐 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불평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자주 그렇게 하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가 생각건대는 그저 묵묵히 시키는대로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체념이라기 보다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인들은 부산하게 움직이는데 주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말로만 모든 것을 지시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물 한 방울도 떠내신 일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돌 항아리에 한 방울도 붓지 않았습니다. 포도주를 연회장으로 갖다주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기의 좌석에서 한번도 움직이지 않고 앉아 계셨는지 모릅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한번 퍼질고 앉으면 엉덩이 무거운 줄 모르고 마냥 앉아 있는 한국의 아줌마들처럼 그렇게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로서만 단지 하인들을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우리들 중에 종종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시는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부산을 떨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도대체 하나님은 무얼 하시길래 아무런 응답도 없느냐? 고 항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것 같아도 결국 가장 핵심된 일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전도를 하고 교회에 데리고 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가 변화되도록 주께로 인도하고 그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9절과 10절에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고 했습니다.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시키는대로 했습니다. 그래서 물을 떠서 갖다 주었더니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해 있었습니다.

    연회장은 이 포도주를 맛보고 도대체 어디서 이것이 났는지 알 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랑을 불러 사람마다 좋은 포도주를 먼저 내고 취한 후에는 낮은 것을 내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주었다고 칭찬했습니다. 술에 취한 그들은 술의 좋고 나쁨은 금방 분별했지만 하나님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들이 하나님의 표적은 분별하지 못합니까?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세상은 처음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지만 끝에 가서는 가장 나쁜 것을 우리에게 줄뿐입니다. 세상을 오래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세상을 향한 실망과 좌절밖에는 경험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술에 취해 있으면 세상적인 판단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지금 당장은 나에게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나쁜 것, 이런 것을 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한 것은 나중에 여러분은 가장 좋은 것을 받으실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힘든 십자가를 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면류관을 쓰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고난의 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은 영광이 길이 펼져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힘들거나 어려움을 당한다고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나중은 영광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절 이하를 보면 믿음이 영웅 모세에 대해 이렇게 기록을 해 놓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처음에 모세에게 좋은 것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잠시 죄악의 낙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잠시였습니다. 잠시후면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으로 그의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것을 거절하고 고난받기를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나중을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나중에 여러분의 삶에 대해 상주시는 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더욱 분발할 수 있습니다. 더욱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술에 취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술맛의 좋고 나쁨은 알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인들은 알았습니다. 무엇을 알았습니까? 이 포도주가 어디에서 나왔으며 어떻게 포도주가 되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포도주의 맛을 아는 것보다 그것을 행하신 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포도주가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것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이로서 염려했던 일들은 다 해결되어졌습니다. 연회장엔 다시 포도주가 풍성하게 되었고, 포도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취객들을 볼 수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져서 더 이상 잔치를 베풀수 없었던 위기를 말끔히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채워졌다고 그들의 삶이 진정으로 회복되어진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취해있었습니다. 세상의 술은 그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만 맛보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이 의도하신 바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하단 말입니까? 11절에 "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표적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그분을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전에는 믿지 않았는데 지금 비로소 믿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전에도 믿었지만 이제 그 믿음이 더욱 확고해 졌다는 말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지금 자신에게 포도주가 없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졌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채우는 일에 모든 열정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없거나 모자라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결국 주를 믿는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새로운 삶의 변화에 관한 문제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모신 삶을 산다면 우리는 진정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모세가 출애굽을 위해 바로 앞에서 행한 첫 번째 기적은 물을 변케 하여 피가 되게 하는 심판에 대한 재앙이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향한 메시지였습니다. 그러나 은혜아래 있는 우리들을 향한 첫 번째 기적은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표적을 보이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계십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변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주를 온전히 신뢰하십니까? 날이 가면 갈수록 그분에 대한 믿음이 더욱 견고하여져 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쁨이며, 즐거움이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무거운 짐을 한 개 짊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주님은 첫 번째 표적을 혼인 잔치집에서 행하심으로 우리의 삶이 축제와 같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이 맹물이 아니라 포도주로 변화되어 축제와 같은 삶이 계속 이어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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