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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보라 - 요한복음 1:35 - 42절
    2002-04-11 19:11:26   read : 1737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본문:요한복음 1:35-42절
    제목:와 보라

    지난주는 우리 국민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동계올림픽 쇼트 트랙에서 1위를 하고도 미국의 텃세로 인해 김동성 선수가 실격 처리되어 금메달을 강탈당한 일입니다. 분노한 네티즌들은 '올림픽 테러'다 혹은 '짓밟힌 자존심'이다. '북한이라면 가만히 있었겠는가?'라는 글을 남기기도 하고 심지어 '월드컵 때보자'라고 어름장을 놓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사실 그 장면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분개했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보다 더 분개하고, 안타까워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야를 보고도 사람들이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5절과 36절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방금 읽은 본문에 보면 '이튿날'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날 다음날이라는 말입니까? 그것은 요한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한 그 다음날을 말합니다. 성경엔 기록이 없지만 추측컨대 이날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의 주위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모인 자들에게 자기에게 나아오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를 소개했습니다. 그때 모인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매우 냉담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의 주장대로 예수가 그렇게 위대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요한이 신들메 풀기도 감당키 어려울 정도의 분이라면 뭔가 확실하게 다르게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눈에 비친 예수의 모습은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남들이 입고 다니는 옷과 동일한 옷을 입었고, 풍채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은 차라리 본 나이보다 훨씬 더 많아 보이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자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요한의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고 돌아가버렸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이 되었을 때, 요한이 그 자리에 또 다시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고 돌아간 자리에 요한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 이쯤되면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그곳에 나타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의 말을 외면해 버린 장소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사명이 주의 길을 예비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날은 아무도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자신의 사역을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다니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물론 요한이 예수님께서 다니시는 것을 보았다는 말은 단순히 거리를 배회하고 계시는 모습을 보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분명 우리의 행동과는 달랐습니다. 우리의 행동은 이기심에 지배를 받아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합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행동합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과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행동은 자신을 보내신 분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39절)고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이 땅을 밟고 다녔으면서도 결코 이기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하신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요한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의 제자 두명이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왜 요한은 어제와 같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지 않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일까요? 물론 이 문제에 대해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요한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왜 다르게 말했느냐?를 가지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이 굳이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속에는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뜻까지 포함되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이 당시 유대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때 요한이 말한 어린양은 '유월절에 바쳐진 양'을 말한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들은 '매일 드리는 제사를 위한 양'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것을 가지고 왈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유월절 양이나 매일 드리는 제사 때의 양 모두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하나의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반드시 던져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양이 필요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죄의 값'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값을 양을 통해 치루었습니다. 즉 양이 죽음으로 자신의 죄 값을 대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양이 죽어야만 합니까?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이번 김동성선수의 사건에 가장 강하게 어필되고 있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심판의 자질문제입니다. 우리선수단 측에서 심판들이 "오노선수의 과장된 행동을 김동성선수가 반칙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실격 처리한 것은 명백한 오심이었다"라며 자질 없는 심판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습니다. 물론 미국선수에게 금메달을 안겨다 주기 위해 고의로 실격 처리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당사자나 옹호하는 몇몇 사람들 외에는 잘못된 판정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한치의 오차나 잘못됨이 없습니다. 죄에 대한 정확하고도 틀림이 없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이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들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은 서로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어렵게 삽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신체를 가지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를 가지고 살고 어떤 사람은 그런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말했습니다. 왜 심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왜 이 분을 보라고 합니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하는 자리에서 왜 어린양이신 이 분을 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죄에 대한 해결책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어린양을 언급할 때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강한 불쾌감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죄를 지적당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인정하고 있다 해도 누군가가 죄에 대해 언급하면 그만 반발심을 갖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전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을 때 아마 그들 중에 상당수는 불쾌감을 가졌을 것이고 그 이유로 인해 돌아 가버린 사실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는 많은 사람들의 목적은 위로 받고, 용기를 얻는 말을 들으려고 합니다. 반면에 죄를 지적 당하고, 회개를 촉구하면 얼굴을 찌푸리고 싫어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목사님은 왜 치는 설교를 하실까?'라고 합니다. 자신들을 '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입니다. 만약 이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면 우리들도 이 당시 세례요한의 설교에 냉담했던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들만 예수님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두 명의 제자가 관심을 갖게 됩니다. 37절에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의 설교를 듣고 요한의 제자 두 명이 예수를 좇았습니다. 사실 요한의 입장에서 본다면 굉장히 기분 상하는 일일수도 있습니다. 실컷 제자훈련을 시켜 놓았더니 한순간에 엉뚱한 사람을 좇아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요한의 관심은 구속사에 있어서 진정한 주인공인 예수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령 자기를 따랐던 제자들이 예수께로 간다고 해서 마음상할 일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좇을 때 예수님은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38절에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좇고 있는 그들을 보신 후에 무엇을 구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은 "너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나를 좇아 왔느냐?"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얻기 위해 나를 찾아왔느냐?"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물으신 것일까요? 사실은 이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과 너무도 달랐습니다. 만약 그들이 로마를 전복시킬 혁명적인 지도자를 원했다면 차라리 열심당에 가담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입니다. 만약 군사적인 도움이나 재정적인 지원을 원했다면 차라리 권력가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런 것을 그들에게 주시려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께서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와서 무조건 복 달라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건강달라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대학에 붙게 해달라고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물질의 축복을 달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기 원하시는지 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원해도 주께서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그것은 아닙니다.

    아이에게 칼자루를 맡기는 것은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구하는 것이 내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지 조차도 생각하지 않고 구할 때가 많습니다. 주께서 무엇을 구하느냐? 고 물으시는 것은 어떤 목적으로 나를 찾아왔느냐? 란 말인 동시에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을 구하면 나는 너에게 그것을 줄 수 없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대답이 참 이상합니다. 마치 동문서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가로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주님의 질문을 받은 그들의 대답이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 어디에 계시옵니까?"라는 말입니다. 즉 지금 어디에 거처하고 계십니까? 라는 말과 같습니다. 왜 그들은 느닷없이 주님의 거처를 물은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들이 주님을 좇은 이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거처를 물었다면 주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해 랍비여! 즉 선생이여! 라고 말했다면 예수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싶다는 뜻이 담긴 표현이기도 합니다. 종합해서 말씀드린다면 "선생님! 당신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란 뜻이었습니다.

    진리를 배우는 방식이 과거에는 오늘날과 많이 달랐습니다. 사실 요즘은 스승과 제자사이의 관계가 지식을 전달하는 정도로 끝이 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특별한 만남이 없습니다. 그저 지식을 전달하고 그 지식을 전수 받는 것으로 그 관계가 단절되어집니다. 삶을 나누거나 공유하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서로를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승과 함께 먹고 자고 하면서 스승의 삶과 인격을 배워 나갑니다.

    지금 이들이 주님의 거처를 묻고 있는 것은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더 많은 시간 대화를 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진리를 가르치시는 분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싶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요즘 우리들의 신앙생활은 너무도 개인주의가 강합니다. 그리고 그 강한개인주의가 결국 우리 중심적인 삶을 추구하는 형태로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주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고 싶어하거나 주님의 거처에 머물러 있고 싶다는 마음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주님께서 유일하게 거처하시는 장소라는 말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적은 사람이 다른 날을 주님과 교제하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더 듣기 원했습니다. 그들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진리를 듣고 싶어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 말씀 안에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책이 그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들의 영혼을 살리는 귀중한 보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들이 교회에 머물러 있는 시간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러다 대학에 떨어지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학에 떨어지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날 문 닫으면 망하지'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가게 문닫는 것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렇다고 정말 주께서 대학에 떨어지게 하고, 사업을 망하게 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렇게 될 것이라고 우리가 미리 염려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3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 보라 그러므로 저희가 가서 계신데를 보고 그날 함께 거하니 때가 제 10시쯤 되었더라" 주님의 대답은 너무도 간결했습니다. '와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로마 군인들을 물리칠 비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만약 잘 사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면 '와 보라'고 하셨을까요?

    주께서 그들에게 와보라고 하셨을 때 그것은 초라한 랍비의 하숙집에 초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으로 초대하는 위대한 초청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때가 제 10시쯤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와 보라'는 말을 듣고 그들이 주님을 찾아간 시간이 제 10시쯤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 있습니다. 왜 사도 요한은 이 시간을 여기에서 밝혀 두고 있는 것일까요? 제 10시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물론 이 본문을 보는 우리들에게는 이때가 10시든 아니면 11시든 12시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에게는 이 시간이 너무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날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던 사람 중에 한사람이 바로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고 있는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할 때의 나이가 몇세 때입니까?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마 구십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이 밤에 찾아간 때는 언제입니까? 청년 때입니다.

    그러니까 백발이 된 노인이 청년에 있었던 한날에 대해 시간까지 기억하고 있다면 그날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 준 날인지, 그리고 얼마나 중요한 날이었는지 우리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와 보라'는 말을 듣고 주님을 찾아간 날 그 날은 사도 요한에게 있어서 전 생애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위대한 초청을 받아들인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리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례요한의 말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았고 만났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날, 이 시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이 자리에 무엇을 위하여 나와 계십니까? 친한 사람을 일주일만에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안 나오면 뭔가 찝찝하고, 뒷덜미를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나오셨습니까? 우리가 여기에 나온 것은 생명을 말씀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인생을 사는 동안 많은 질문들이 있습니다. 해결되지 않는 갈등과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도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그러면 주님은 '와 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도 실망하여 돌아갔습니다. 왜 돌아갔습니까? 예수님의 겉모습을 보고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죄가 지적 당하는 것이 불쾌해서 돌아갔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의 욕심과 이해관계에 얽혀서 예수를 쳐다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갈망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자는 주께서 만나주십니다. 그것도 '와 보라'는 것입니다. '와 보라'고 초청할 땐 초청 받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가기만 하면 됩니다.

    '와 보라'는 말은 교회에서 초청잔치를 할 때 구호로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초청잔치를 하면서 '와 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교회를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초청잔치를 한답시고 떠들썩하게 준비를 하는데 대개는 교회자랑입니다. 와서 교회를 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교회는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 이게 전부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초청은 진리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은 지금 진리 가운데로 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갈등하고 있느냐?" '와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 갈급함이 있느냐?" '와 보라'는 것입니다. "너희 안에 해결되지 않는 외로움과 고독이 있느냐?" '와 보라'는 것입니다.

    초청에 응하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은 값없이 그 사람을 만나주십니다.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밤에 주께 찾아온 이 사람들에게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요? 물론 무슨 말씀을 나누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화 속에 이들이 한가지 확신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40절과 41절에 보면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은 두 사람 중에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대화 중에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을 만났던 안드레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메시야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히브리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과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안드레는 무엇을 확신했습니까? 그 밤에 자신이 만났던 그분이 세례요한의 말처럼 '하나님의 어린양' 아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사도요한은 자신이 주님을 만난 날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날짜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단 중에 구원파들은 자신이 구원받은 날짜를 모르면 진정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틀린 주장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요한은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으면 수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함께 같던 안드레는 또 어떻습니까? 메시야를 만났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만난 그 감격스러운 날을 기억하십니까? 그 날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메시야가 되신다는 확신,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을 만났다는 확신, 그런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정말 주님을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누고 그 속에서 주님이 메시야 되심을 발견함이 없이 주를 만났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확신이 없습니다. 만난 것 같은데 그의 삶을 보면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왕좌왕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갈 수 있으면 좋고, 안나가도 크게 마음 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정말 내 마음속에 주를 만난 확신이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안드레가 어떻게 행동합니까? 자기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를 주님께서 인도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계셨습니다. 42절에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안드레의 인도를 받아온 그가 안드레의 형제 베드로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앞으로 어떻게 사용되어질 것인지에 대해서도 주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게바라고 붙여주었습니다. 즉 베드로가 교회에서 반석같은 존재가 될 것임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시몬 베드로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어질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지금 베드로가 어떠한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가 어떻게 변화되어질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게바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도 지금 우리의 삶과 형편을 보지 않습니다. 장차 저와 여러분이 어떠할 것인가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베드로의 급한 성격과 충동적인 행동 때문에 베드로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조석으로 변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를 향해 장차 반석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흔들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신 것이 아니라 요지부동의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를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자마다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베드로가 게바가 됩니다.

    주께서 우리를 여기에 있게 한 것도 지금 나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장차 변화되어질 나의 모습을 기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장차 변화되어질 우리의 모습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베드로가 아닌 게바로서의 삶을 우리들에게도 기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늘도 여전히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어떻게요? '와 보라'고 말입니다.

    교회에 한번 들러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진리 가운데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고 변화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니 확신을 갖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초청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조금 더 생각해보겠노라고 미루시겠습니까? 와 보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여기에 저와 여러분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그러므로 광야에서 '보라'고 외치던 세례요한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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