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무식함을 빗대어서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미로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아주 가까이 있기에 그 존재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존재 자체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말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그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남편이나 아내에 대한 소중함입니다.
부부싸움 끝에 아내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어디 나 없이 한번 살아보라지"하는 말입니다. 좀 더 심한 표현을 쓸 경우 "어디 늙어서 한번 보자"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남편들이 아내의 존재가치에 대해 별로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가까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혹은 늘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거나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평소에 부부사이에 대화가 없기로 말한다면 경상도 사람들이 세계 최고일 것입니다. 경상도 남편들은 주로 네 마디 밖에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떤 말입니까? 집에 들어오면서 "별일 없나?" 옷 벗으면서 "아는?" 세수하고 수건으로 얼굴 닦으면서 "밥 묵자" 신문보고 텔레비전 조금 시청하다가 "자자" 이 네 마디 밖에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말없기로 한다면 경상도 여자도 그에 별로 뒤지지 않습니다. "별일 없나?" "어데예", "아는?" "저기 밖에", "밥 묵자" "앉으이소", "자자" "불 끄이소"
부부간에 참 정없이 삽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아내나 남편에 대한 소중함을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아내나 남편이 자기의 곁을 떠나는 날, 경상도 사나이들은 가슴으로 울부짖습니다. 심령을 찢는 눈물을 가슴으로 삭힙니다. 그리고 또 한마디로 그 마음을 표현합니다. "우짜꼬?" 왜 그렇습니까?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같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소중함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못했다가 막상 자기 곁을 훌쩍 떠나가 버린 아내나 남편을 생각하니 뒤 늦은 후회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밝히고 있는 부분도 바로 그런 것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남편이나 아내의 소중함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을 사람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분을 많은 사람들이 거절했다고 했습니다. 그들 가까이 계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이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그분이 얼마나 귀한 분인지 깨닫지 못하고 그분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컴퓨터의 등장은 여러 면에 있어서 우리의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는 인터넷을 통해 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유익은 우표도 붙이지 않고, 우편배달부도 없이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전자메일을 보내는 것입니다.
저도 하루에 적어도 서너통의 전자메일을 보내기도 하지만 10여통 이상되는 전자메일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저에게 보내지는 메일은 저에게 불필요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즉 상업성 광고메일이 제일 많고 가끔은 음란성 메일도 보내집니다. 그런데 그런 메일 맨 아랫부분에 보면 "이 메일은 발신 전용 메일입니다. 수신을 원하지 않으시는 분은 수신거부를 선택해 주십시요."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이 메일을 앞으로 받고 싶지 않으면 수신거부를 하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경우 내게 유익한 정보인지 아닌지를 가려서 수신거부를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그런 식으로 보내지는 메일들은 조금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거의가 유익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나와는 특별히 관계가 없는 것들입니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보내지는 메일 일뿐, 나에게는 별로 유익하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그런 메일을 보면 두 번 다시 살펴보지도 않고 수신거부를 눌러 버립니다. 다시는 그런 메일을 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의하면 유대인들이 예수에 대해 거부를 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잘못이며 그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손실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들이 거부해서는 안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그들이 그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야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분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사실에 대해 우리들에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사도 요한은 먼저 본문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과거엔 사람들이 이 빛에 대해 선지자들을 통해서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듣기만 했지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체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아주 어렸을 적에 만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용돈을 받으면 특별히 공상만화를 빌려보는 일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공상만화라고 한 내용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 그 속에서 차를 타고 다니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런가하면 로켓트를 타고 우주를 항해하는 모습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 그림들이 저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당시에는 그런 신기하고 놀라운 것에 대해 단지 그림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실체를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상현실로 소개된 만화의 얘기들이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모두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지하에서 차가 다니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얼마 전엔 '데니스 티토'씨가 2000만 달러를 지불하고 우주선에 승선하여 우주를 여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첫 우주여행 관광객이 된 셈입니다. 우주를 연구하기 위해 우주선을 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돈만 있으면 우주 관광여행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어렸을 적에는 이런 일을 만화나 그림을 통해서만 볼 수 있었고,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보고 있습니다. 상상이 아니라 현실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빛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엔 그랬습니다. 참 빛에 대해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듣기만 했고, 들은 것을 토대로 상상의 그림만 그렸을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실체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았다 할지라도 간접적으로 알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 빛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습니다. 그 빛이 실제로 그들 곁에 있습니다.
물론 그동안 빛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모세도 하나의 밝은 빛이었습니다. 그 빛으로 인해 한 민족이 어둠 속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얻고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례요한도 사람들을 어린양께로 인도하는 길목에서 하나의 빛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참 빛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빛의 아류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짜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빛들은 여기서 말하는 '참 빛'을 증거하는 희미한 빛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빛은 내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와 달라고 우리가 사정한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빛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며, 감격할만한 일입니까?
대개 유명한 사람을 만나려 하거나 권세 있는 사람을 만나려면 내 쪽에서 먼저 요청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 만나는 것이 좋을 것인지 상의해서 만날 시간을 결정하게 됩니다. 만약 그 사람이 아주 유명하거나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일방적으로 약속시간을 정해버릴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어느 시간을 정해놓고 만나고 싶으면 그 시간에 오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참 빛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 쪽에서 만나달라고 요청한 일이 없습니다. 만날 시간약속을 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참 빛되신 분이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빛을 비추기 위해 그분이 이 보잘것없는 죄인된 우리와 세상을 향해 먼저 손을 내 미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짝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의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온 것과 같습니다. 짝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와달라고 하지 않아도 언제나 내 곁에 머물러 있고 싶어합니다. 먼저 나를 찾아와서 내 곁에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 사랑을 몰라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그 짝사랑은 대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자기 곁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왜 자기 곁을 떠나지 않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지를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더라면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해 좀더 깊은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10절과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라고 했습니다. 참 빛 되신 그분이 세상에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주인 된 그분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전도대에 참여하신 집사님중에 이런 짧막한 간증을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목요일 전도대가 모여서 기도하고 그 날은 그 집사님이 세를 준 가게에 전도를 나가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 세 들어 있는 사람이 주인인 그 집사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왠 낯선 사람이 찾아와서 이상소리를 하고 있나?"하는 표정으로 듣는 둥 마는 둥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표정을 보면서 '자신이 이 집에 세를 준 주인'이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반갑게 맞아주었고, 복음을 제시할 때 순순히 듣더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 일이 있습니까? 세를 주고는 거의 한번도 그 세든 사람을 만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세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런 경우가 편할 수 있습니다. 주인이 자꾸 왔다갔다하면서 살피면 괜히 내가 잘못한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사실은 여러모로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주인이 세 든 사람의 집을 자주 방문하는 것은 기분이 상쾌한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세 들어 사는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기억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참 빛되신 그분은 세상을 지으신 세상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에 의해 지음을 받은 세상은 당연히 주인되신 그분을 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분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주인이라고 나타난 것도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주인에 대한 얘기가 있어왔고, 가깝게는 세례요한에 의해 그분에 대해 다시 증거 되어졌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주 가까이 그들 곁에 왔는데도 그들이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이분을 기다려 왔습니다. 그 분이 오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작 그분이 왔을 때 그분을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고 잠시 길을 떠났습니다. 얼마동안의 세월이 흘러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알아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왠 미친사람인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그를 쫓아내고 병원 문을 걸어버렸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참 빛으로 오신 그분은 많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했습니다. 심지어 그분을 몰라보았던 것은 외국인들이 아니었습니다. 모습이 하도 비슷 비슷해서 구분이 잘되지 않아 몰라 본 것이 아닙니다. 그 땅에 잠시 여행 삼아 왔던 관광객들이기 때문에 그분을 몰라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분을 몰라보았던 것은 다름 아닌 자기 땅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자기 땅'은 단순히 영토적 개념에서의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통치 영역을 말합니다. 자신의 통치영역 아래에 있는 자기의 백성들이 그를 몰라본 것입니다.
중국사람이 이 땅에 와서 김대통령을 몰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한국사람이지만 김대통령을 모를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입니까? 외국에서 태어나 외국에서 사는 한국인 2세나 3세 같은 경우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본에 가서 고이즈미를 몰라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한국에 살면서 김대통령을 몰라본다든지 일본사람이 일본에 살면서 고이즈미 총리를 몰라본다면 그것은 말도 안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자기 땅에 온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오래 전에 산골에서만 살았던 소녀 영자에 대한 얘기가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산속 외딴집에서 아버지와 단둘이 문명을 등진 채 샘물로 밥을 짓고 호롱불 아래서 아버지에게 명심보감과 한학을 배우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휴대폰 CF를 찍은 장면이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적이 있었습니다.
이미 도시사람들에게는 휴대폰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데, 그에 반해 그 소녀는 산골짜기에서 문명을 접한다는 것이 그렇게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만약 그처럼 산골에만 파묻혀서 지낸 사람이라면 자기 땅에 온 참 빛 되시는 분을 몰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이 참 빛을 몰라본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들이 산골짜기에 들어가서 참 빛에 대해 전혀 들어본 바도 없이 생활했던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참 빛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 곁에 왔을 때에 그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 당시 유대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이 땅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문제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 그분을 거절하는 것일까요? 왜 그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것은 자신들의 마음에 그분을 받아들일만한 공간을 남겨놓지 않고 세상적인 일과 자신들의 욕심으로 가득 채워놓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 그렇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마음속에 참빛 되시는 예수님을 받아들일만한 공간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필요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컴퓨터 디스켓이 파일들로 가득 차 있어서 공간이 부족하면 다른 파일을 첨부할 수 없습니다. 불필요한 파일을 지우지 않는 한, 그곳에 다른 파일을 저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세상이라는 파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 놓았습니다. 그 속에 예수를 받아들일만한 조금의 공간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거부합니다.
그분은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시려고 우리 곁에 오신 참 빛 되신 분이신데 우리는 말하기를 "나는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질만한 시간도 없고, 여유로운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치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 생활에 어느 정도 안정을 이루고 이것저것 여러 가지 여유를 가진 사람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사치스러운 것 중에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나같이 바쁘게 사는 사람들, 나같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에게 그런 얘기는 꿈 같은 얘기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애는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는 아주 짧은 세월에 지나지 않습니다. 잠시후면 영원한 세계가 우리 앞에 펼쳐질 터인데 사람들은 참 빛 되시는 그분을 거절하면서 영원한 사망으로 자신의 걸음을 옮기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에 그런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혹 여러분의 가족 중에 누군가가 그렇게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오신 그분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 그분을 영접하는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당시 사람들은 빛에 대해 마치 시각장애인과 같았습니다. 모두 영적으로 앞을 볼 수 없는 죄인들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들이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빛이 비춰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 빛에 대해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캄캄한 어둠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빛을 영접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 빛에 대해서 알고 깨닫는 것은 어떤 지식이나 생활여건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그 사실을 모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아는 것이 없어도 그 빛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입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영접한다'는 것은 마음에 모셔들이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시작은 그분을 내 마음 한 가운데 모셔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전적으로 그분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입니까? 신분의 변화입니다. 어떻게 신분이 변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얻게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분을 내 삶의 왕으로 모시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의 자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왕이 되면 아내는 황후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가 왕이면 자녀는 자연히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자녀다운 삶입니까?
그분을 자신의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분의 명령에 복종하는 삶입니다. 즉 그분이 나에 대해 모든 결정권을 갖도록 나를 그분께 맡기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그분이 결정하시는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정욕대로 살거나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인생을 끌고 나가면 안됩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신 사람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맡기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할 때 자신이 손해보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는 내용이지만 자녀들이 과자를 먹고 있을 때 '아'하면서 한 입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녀에게 있는 과자를 빼앗아 먹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러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여러분 자녀의 먹을 것을 빼앗아 먹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하고 입을 벌리는 부모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했을 때 입에 쏙 넣어주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아'했을 때 아이가 부모의 입에 과자를 한 입에 쏙 넣어주면 부모는 기뻐서 당장 가게에 가 그보다 더 큰 과자를 사다가 그에게 안겨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그분께 전적으로 맡겨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손해보지 않습니다. 절대로 여러분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챙기시지 않습니다. 더욱 풍성케 하실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이처럼 모든 것을 그분께 맡기고 그분께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됩니다. 물론 내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13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가 되는 것은 혈통으로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모태신앙, 모태신앙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모태신앙이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는 신앙생활 정말 엉망으로 하면서 누가 물으면 '자신은 모태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모태 신앙만큼 신앙생활 못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또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도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적인 열심이나 사람의 의지를 가지고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은 열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은 절대 아닙니다. 그러나 열심이 곧 나를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사실 우리들 중에는 이런 열심조차도 없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하는 둥 마는 둥, 교회에 와도 오는 둥 마는 둥, 찬송가를 불러도 부르는 둥 마는 둥,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정말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매우 열심이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는 잘못된 열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열심히 말하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사에 유대교를 위해 충성하고 열심을 내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회심하기 전까지 그의 열심은 잘못된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열심만으로도 안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야 합니다.
어느날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향해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잘못된 것을 고쳐서 다시 쓰는 재활용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옛사람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모든 것이 변합니다.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옛날 그 사람이 아닙니다. 어제의 그 모습이 아닙니다. 완전히 바뀌어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특히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것으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세상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나아가기만 하면 그분은 자녀들에게 능력과 권세를 부여하십니다.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삽니다. 절대로 세상을 의지하거나 세상의 것을 취하여 살아가려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분은 너무도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우리가 조그마하게 그분의 이름을 불러도 그분은 언제든지 대답하실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가까이 있는 분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너무나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의 소중함을 생각하지 못한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가까운 곳에 여러분의 왕이시며 아버지시며 세상의 주인이시며 참 빛이신 그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인생의 길에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분을 영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거절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오늘 이시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결단하는 은혜가 넘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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