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손을 붙들라 2002-04-07 02:36:37 read : 197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 14:22-33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고양이도 호랑이로 보인다고 합니다.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는 쥐가 있었습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법사가 그 쥐를 고양이로 변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고양이는 개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를 본 마법사는 고양이를 개로 변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자마자 또 이 개는 호랑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습니다.
마법사는 또 개를 호랑이로 변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이제 사냥꾼을 두려워합니다.
결국 마법사는 다시 쥐가 되어라 "너는 쥐의 심장 밖에 가질 수 없으니 나도 어쩔 수 없구나" 라고 하면서 다시 쥐로 변하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정신의학자들은 인간의 두려움을 200여가지로 나눕니다.
경제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건강에 대한 두려움 해산에 대한 두려움, 결혼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등...
정말 많은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은 사람의 마음을 억압하는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긴장으로서 마귀가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육체적,정신적 경제적인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긴장을 떨쳐버릴 길이 없습니다
두려움에 젖은 사람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패배자가 됩니다.
의학자들 역시 두려움을 만병의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 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두려워 하지 맙시다. 두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에는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긴장을 떨쳐버리고 평안을 가져오게 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 14장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긴장으로 가득찬 세상에 있는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며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 사람에게 참 평안을 주실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 지방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로서
범죄하고 도피해 온 사람들 가난과 질병 그리고 삶의 위기로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절망이 가득 찬 세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벳세다 광야에서 예수님의 말씀의 잔치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은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남자들만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먹은 사람이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의 남자들을 먹이고 열두 광주리를 남는 사건을 목격하였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들은 말씀의 은혜를 입은데다
이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하고 흥분해서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감격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어떤 굉장한 자부심을 그들이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제자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더구나 제자들은 은혜의 잔치 축복의 잔치가 있는 벳세다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곳에 머물러 있고 싶었습니다.
다시 환난과 시련이 있는 세상. 두려움과 불안. 공포와 절망 가득한 세상으로 가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고 난 이후 제자들을 급히 배를 태워 보내시고 거기 모인 군중들을 해산 시키시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은 이 기적을 행하시고 난 다음 가장 먼저 제자들을 즉시 재촉하사 배를 타고 먼저 건너가게 하였습니다.
"재촉하다"는 말의 뜻은 "억지로 …하게 하다" 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그 자리를 뜨고 싶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강제적으로 억지로 그 자리를 뜨게 만들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 모인 군중들을 해산시키셨습니다.
기적을 경험한 군중들은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흩으셨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받았으며 축복의 기적을 보았으면 세상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까? 가정으로 직장으로 일터로 세상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가정과 직장에 사업장에 나가서 빛이 되고 소금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신앙 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요6:14-15절을 보면
"그 사람들이 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을 그들의 정치적 메시야로, 세상의 임금으로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사랑하는 제자들을 군중과 격리시켜 가버나움으로 보내셨습니다.
만일 주님이 그렇게하지 않았다면
평소에 예수님이 세상의 임금이 되기를 기대하고 있던 제자들인데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예수님은 한 나라의 정치적인 메시야가 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세우시길 원했던 나라는 세상의 정치적 나라가 아니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나라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제자들을 재촉하여 먼저 보내고 군중들을 해산시킨 다음에 조용히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23절을 볼까요?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게시더니"
왜 무리를 보내신 후에 조용히 따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을까요?
기적을 베푸시고 난 이후 수 많은 사람들의 환호소리와 하늘을 찌를듯한 인기와 함성 소리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홀로 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간 사람들.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간 사람들.
세상의 일터를 찾아 일하러 간 제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기도하셨습니다.
세상풍파 앞에서 실족하지 않도록 넘어지거나 환난을 당하지 않고 승리하도록 주님께서 기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그냥 보내시고 잊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내시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기도중에 제자들이 풍랑속에 갖혀있음을 아셨습니다.
24절을 보면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고난을 당하더라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졌다는 말은 이미 배가 돌아올 수 없는 갈릴리 바다의 한 복판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갈릴리 바다의 한 복판에서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25절을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밤 사경입니다.
밤 사경은 새벽 네시에서 여섯시에 해당되는 시간입니다.
제자들은 그날 초저녁에 배를 타고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새벽이니까 얼마나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다음에도 고난이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다음에도 고난이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아가는 길에도 고난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마침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십니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여기서 밤 사경은 인간의 절망의 때입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힘이 없는 때입니다.
제자들은 어부들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실력을 당 동원해서 풍랑을 헤쳐 나아가려고 했습니다.
자기들의 경험을 다 동원해 보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해보았으나 대책이 없을 때에 한계상황에 도달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많은 경우 주님은 우리 인간의 절망의 때에 찾아오십니다.
모든 일이 오직 주의 은혜로만 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의 끝이야말로 하나님의 시작이 되는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빠지신 분이 게십니까?
살아갈 용기 마저 잃어버리신 분이 계십니까?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되시는 분이 계십니까?
낙망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 순간이야 말고 당신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겸손하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주님을 찾으십시오. 주님의 얼굴을 구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에게 찾아오실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무서운 풍랑 속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계셨듯이 인생의 풍랑을 만나 어쩔줄 몰라 하며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갑자기 찾아온 우리 가정의 풍랑 앞에서
한 가족을 책임져야 할 가장으로서 믿음의 어머니로서 어찌할 줄 몰라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듯이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보고 계십니다.
남편의 구원을 위해 새벽마다 눈물을 흘리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자식의 변화를 위해 설거지하다가도 눈물을 적시며 기도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인내하는 당신의 모습을 주님이 보고 계십니다.
26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미 바람과 파도를 정복하신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는 인생의 풍랑을 잔잔켸 하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주님 밖에 없습니다.
바다가 살아 있기에 파도가 일 듯이 살아 있는 우리의 삶에는 풍랑이 이는 것입니다.
풍랑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풍랑이는 바다 위를 걸어오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을 보겠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은 무서워 떠는 제자들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남편의 진로, 자식의 진로에 대한 두려움,그런데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려 365회나 나옵니다.
왜 우리가 두려워 하지 말아야 합니까?
풍랑을 밟으시고 걸어 오시는 주님이 바로 내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주님에게 청을 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면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오라"는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바다에 발을 내딛고 걸어가다가 바람과 파도를 보자 겁에 질려서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베드로의 몸은 순식간에 바다에 잠겼으며 죽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가까이 오셔서 베드로의 손을 잡으시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시며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는 진리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1) 제자들이 한 밤중에 큰 풍랑을 만나 씨름하는 갈릴리 바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환난과 시련이 있는 세상입니다.
2)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처음에 베드로는 주님의 모습과 주님의 음성만을 듣고 배에서 내려 주님을 바라보면서 풍랑 이는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한 눈을 팔고 풍랑을 바라 볼 때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곧 바닷물 속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목표가 아닌 것을 바라보는 순간 마음이 흔들려서 실패한 것입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기 위하여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반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 것입니다"
내가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는 어두운 바다위로 오직 믿음을 가지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럴 때 그는 물 위로 걸어갈 수 있는 놀라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불안과 염려의 배 위에 머물러 있지 말고 뛰어 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님을 믿음으로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이해하고 믿으려 하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우리는 주님 안에서 영광을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번지 점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번지 점프하는 사람들 속에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그들은 줄이 자기를 안전하게 매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줄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뛰어내리더라도 주님의 말씀의 줄이 나를 붙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행동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과 다를바 없는것입니다.
지금 배 위에는 열 두명이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 위로 뛰어내린 사람은 한 사람 베드로 밖에는 없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는 이런 말을 했을 거예요. "안돼, 절대로 그럴 수가 없어."
가룟유다는 "뛰어내린다고 뭐 돈이 생기냐 괜한 짓을 하고 있어." 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베드로는 물 위로 뛰어내렸고 그는 물 위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파도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바람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시선이 맞추어져 있을 때에는 물 위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의심의 생각으로 파도를 바라보면 빠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공감을 하는 것은 우리도 그와 비슷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감격 가운데 교회 문을 나서지만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는 마음이 든든했는데
어느 순간에 나도 모르는 가운데 나의 모든 환경과 어려움들을 바라보니 믿음이 흔들리고 다시 낙심과 좌절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믿음이 연약하여 물에 빠지는 순간에도 베드로는 주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30절을 우리 같이 읽어보십시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그렇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환란이 와도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믿음이 흔들려도 주님을 불러야 합니다.
잘 걸어가고 있을 때도 불러야 하고 쓰러졌을 때도 주님을 부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실패를 경험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 이것이 저의 한계입니다. 이것이 저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의 승리가 되시고 주님이 저의 능력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사랑의 주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우리를 건져 주실 것입니다.
31절 말씀을 우리 같이 한번 읽으십시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내가 쓰러젔으나 내손을 잡아주는 분이 계십니다.
내가 연약할 때 나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내 약함을 아시고 내 실패를 아시고 나를 다시 일으켜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는 예수님이십니다.
이제 주님만을 바라보십시다. 물결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사람들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물질을 바라보지 마십시다.
여러분,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를 보셨습니까?
몇 발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한 서너 발을 걷습니다.
어머니가 손을 벌리고 "이리 와, 이리 와" 세 발을 걷고 넘어지려고 하면 다가오셔서 가슴에 아기를 안아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몇 발자국 걸을 수 없는 걸 주님이 다 알고 계세요.
그 주님이 팔을 벌리고 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3장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생의 목표를 분명하게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주님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선이 흔들리고 방향감각이 혼미해질 때에 세상 풍파의 깊은 곳으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바람과 풍랑을 보면서도 무서워하지 않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말씀만을 붙잡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힘있게 항해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 우리들에게도 뜻하지 않는 풍랑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질병의 풍랑. 물질의 풍랑 등 뜻밖의 재난의 풍랑 그 풍랑에 빠져서 허덕일 때 누가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겠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손을 붙잡아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주님의 손을 잡고 있는지 사람의 손을 잡고 있는지 아니면 사탄의 손을 잡고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공하거나 복을 받으면 교만해져서 주님의 손을 놓아 버립니다.
또는 어려울 때 남을 원망하고 미워하면서 주님의 손을 놓아버립니다.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물 속에 빠지게 될 때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고 소리 쳤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베드로의 손을 붙잡아 주셨습니다.
여러분 자기자신의 연약함과 무능함을 알고 주님의 손을 붙잡는 것이 곧 능력입니다. 그리고 축복입니다.
내가 약할 때 주님의 손을 붙드는 것이 최대의 축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희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의 손만을 든든히 붙잡고 날마다 세상 풍파를 이기며 나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마치 세상에 돈과 명예와 권력의 손을 잡으면 거기에 인간의 행복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돈과 탐욕과 이기심과 명예와 권력을 잡으면 실패하게 됩니다.
인간이 명예의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잘난 사람으로 착각을 합니다. 자기가 아니면 다른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돈과 손을 잡으면 돈의 노예가 됩니다.
탐욕과 부정과 손을 잡으면 협잡군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을 때에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가 잡을 수 있는 손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십자가에 못자욱이 그대로 남겨있는 예수님의 손을 잡아야 구원을 얻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피묻은 손을 잡아야 세상으로 부터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의 풍파로 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손은 오직 예수님의 손 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때 우리는 세상의 풍랑으로 부터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 18세의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의 일생을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스코피에(Scopije)에 있는 정든 집을 떠나려는 순간이었습니다.
순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그녀의 어머니가 두 눈에 가득히 눈물을 머금으면서 목멘 음성으로 부탁합니다. "얘야! 너는 이제부터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리고 네 손이 예수님의 손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하고 자기의 딸에게 부탁합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르기로 한 이 순박한 18세의 소녀는 자기의 고향을 떠나온 이후로 한번도 이 어머니의 음성을 잊지 않았습니다.
기쁠 때에도 슬플 때에도 고통스러울 때에도 고단할 때에도 늘 "너는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어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음성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예수님의 손과 같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그녀는 인도의 캘커타에서 굶주림과 가난과 질병으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일했습니다.
그녀는 마침내 1979년에 마침내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테레사 수녀. 그녀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평생 한 손으로는 예수님의 손을 꼭 붙들고 또 한 손으로는 죽어가는 인도인의 손을 꼭잡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풍파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갈릴릴 호수에서 제자들을 위협했던 파도보다도 더큰 파도가 우리를 침몰시키려고 합니다.
때로는 질병이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이때 예수님의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사업의 실패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때에도 예수님의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풀리지 않는 가정의 문제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와 권력을 쥐면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물거품과 같은 것입니다.
아침에 생겼다가 햇빛이 나면 없어지는 아침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오직 우리가 세상의 파도를 이길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해 먼저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손을 붙잡을 때에만 우리는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빠져들어 가는 파도 속에서도 "주님 저를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들도 이시간 주님을 향해 소리쳐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여 ! 지금 어려운 문제 앞에 있나이다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하고 외치면 주님께서 여러분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세상 풍파 앞에서 주님만을 바라보고 오직 주님의 손만 붙잡고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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