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에게 주어진 성질이 있습니다. 그 성질대로 성격이 형성이 됩니다. 그런데 특별한 은혜를 입으면 그 성질이 자기 인격의 성품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그 성질이 부드럽기도 하고 강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부드럽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고 강하다고 해서 나쁜 것도 아닙니다. 그 성질대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성질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품으로 아름답게 변화해서 그의 인생을 영광스럽고 행복하고 창조적인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성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마 1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성품이 온유하셨고 일생동안 온유하게 사셨습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마 5:5). 예수님은 산상팔복 가운데 우리가 땅에서 받는 유일한 축복을 온유한 삶으로 제시해 주셨습니다. 물론 마음이 가난한 자 천국을 받고, 애통하는 자 위로를 받고, 긍휼히 여기는 자 긍휼히 여김을 받는 은혜가 있지만 땅에서 잘되는 축복의 원리를 온유한 자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온유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이 세상을 성공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온유'는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말하는데 겸손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 관계를 화복하고, 참고, 인내하며 다른 사람을 유익하게 만들어주려고 하는 친절과 사랑에 관계된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이 주신 성품이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변화된 인격이요, 그 열매입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그 성품이 온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순한 것과 온유는 다릅니다.
온순은 태어날 때 받는 성품이고 온유는 중생함으로 받는 성품입니다.
온순은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성품이고 온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성품입니다.
온순은 표면적으로 나타난 인간성이요, 온유는 내면적인 속사람의 마음입니다.
온순은 외모의 모습이요, 온유는 인격의 모습입니다.
온순은 사람의 뜻을 따르는 마음이요, 온유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대개 하나님께서 쓰신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들입니다. 온순한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없지만 온유한 사람은 누구든지 은혜만 받으면 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유순하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유순합니다. 그 성질에 대하여 시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유순하게 태어난 사람들을 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온순하다고 착한 것은 아닙니다. 착한 사람은 그 성품이 온유한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입니다.
온순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유익만 챙기고 내심으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온순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자기를 희생하고 선한 일에 적극적이며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세는 유순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공동번역에는 "모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땅에 사는 사람 가운데 그만큼 겸손한 사람이 없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온유와 겸손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궁에서 자라 청년이 되었을 때 밖에 나갔다가 자기 동족이 고역함을 보고 마음에 울분이 타올랐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애굽 사람이 자기 동족 치는 것을 보고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탄로날까 두려워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치고 그곳에서 40년동안 목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는 또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되어 광야를 걸어갈 때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시내산에 올라가 40일동안 금식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백성이 있는 곳으로 하산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서 더디오니까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자 해서 금을 모아 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거기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뛰놉니다. 모세가 진 가까이에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 든 판을 산 아래로 던져 깨뜨립니다.
그는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방의 구스 여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의 원 부인이었던 십보라가 죽은 후의 일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모세가 그 이방 여인과 결혼을 하자 누이 미리암과 형아론이 모세를 비방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에 대하여 성경에 자세한 설명은 없지만 윤리적으로나 율법적으로 크게 범한 잘못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방 여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반역하고 우상을 섬기는 하나님 없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이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이들이 모세를 향하여 거세게 비방했지만 모세는 자신을 향한 비난에 개의치 않고 침묵함으로 자기 마음을 다스리며 참고 인내했습니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저들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결혼의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 아니라 모세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니까 시기심이 생겨서 비방한 것입니다.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아론보다 미리암의 이름을 앞세운 것을 보아마 미리암이 선동한 것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구름 기둥 가운데로서 강림하사 장막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민 12:6-8) 하고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떠나시매 구름이 장막 위에서 떠나갔고 미리암은 문둥병이 들려 눈과 같이 되었습니다.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자 아론이 모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슬프다 내 주여 우리가 우매한 일을 하여 죄를 얻었으나 청컨대 그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소서
모세가 아론의 말을 듣고 여호와께 미리암의 병을 고쳐달라고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모세의 부르짖음을 듣고 "아비가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라도 일주일간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어찌 그럴 수 있겠느냐 그는 진밖에 칠일을 가두고 그 후에 들어오게 할지니라" 말씀하시매 미리암을 7일동안 진 밖에 가두었다가 내놓으니까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모세의 온유함은 출생적인 것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함으로 얻어진 후천적인 성품이었습니다. 모세의 자기 절제는 인간의 본성적 기질로는 불가능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첫째,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온유는 하나님께서 주신 성품이요, 하나님을 향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예수님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어떤 불행이나 슬픔을 당하여도 원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의 뜻을 기다립니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별세하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아름다운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해서 십자가를 진다' 이 십자가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 인간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다 들어있습니다.
성경은 요셉의 일생을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한 온유한 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종살이를 합니다. 그는 잠잠히 말없이 충성합니다. 그는 선하게 살지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고 오히려 모함을 받아 감옥으로 갑니다. 그럼에도 그는 잠잠히 있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말할 수 없는 억울한 환경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형들이 애굽에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 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4-5)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로 알고 순종을 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는 부모에게 순종했습니다. 종살이 할 때는 주인에게 순종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는 간수에게 순종했습니다. 그가 총리대신이 되었을 때는 왕에게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 온유함으로 복을 받았고 땅을 넓혔습니다.
다윗 왕이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린시절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여 형을 만나러 갔다가 골리앗을 이기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에게 쫓김을 당하여 엔게디 골짜기에 있는 굴속으로 숨어 들어갔을 때 마침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격하다가 용변이 보고 싶었던지 캄캄한 굴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말합니다.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그때 다윗 왕이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는 사울의 옷자락을 가만히 베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핍박 속에서도 사울을 왕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다윗이 원수를 사랑하며,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마음이 온유한 자 복이 있나니 저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이 말은 야베스의 복처럼 "복에 복을 더하사 그 지경을 넓혀준다"는 말입니다. 사업의 지경, 인격의 지경, 지성의 지경, 모든 지경을 넓혀준다는 것입니다.
온유는 나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복종시키는 강한 인격의 성품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순종은 온유한 자에게 나타난 사랑의 열매입니다.
이 세상을 보면 부조리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선한 자가 잘되어야 할텐데 선한 자가 고난을 받고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을 봅니다. 이때 행악자를 보고 불평하거나 불의한 자를 투기하기 쉽습니다. 그때 온유한 사람은 잠잠합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따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과거를 고치지 못합니다. 악한 자들이 잘되는 것을 고치지 못합니다. 날씨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좋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대로 좋다.' 그래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성품을 고치지 못합니다. 인간이 죽는 것도 고칠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한 마음입니다.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민 12:3)
모세의 온유함은 천성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년동안 목동생활을 하면서 그 온유함을 배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동안 모세를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저들의 원망과 불평을 온유함으로 받았습니다. 온유한 모세는 오직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에 따라 순종하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하심은 십자가에서 나타났습니다. 원수들이 욕하고, 비웃고, 핍박했으나 잠잠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베드로는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벧전 2:23-24)
둘째,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목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고, 은혜를 받고, 사람들로부터는 사랑을 받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화평합니다. 친절하고 이해심이 많고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으며 살아갑니다. 남을 존중히 여기며 서로 격려하고 허물을 덮습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사랑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는 비결은 온유한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무섭게 비판하거나 배타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를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다가 깨끗한 것 더러운 것 구별하지 않고 다 받아들이듯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칭찬을 받아도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시와 멸시를 당하여도 화를 내지 아니하며, 모든 일에 겸손함으로 참습니다. 남의 단점이나 들추고 장점을 경시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최근에 결혼 대상자들을 상대로 조사한 것을 보니까 배우자를 선정하는데 있어서 첫째 조건이 성격이라고 합니다. 옛날에는 인물이나, 학력이나, 직업을 봤는데 지금은 그런 것 보지 아니하고 성격을 본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은 참으로 현명한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 12:18)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 3:13)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우리가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서로 용납하는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은 자기도 상처를 받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내들이 남편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하면 정이 떨어지고 집을 나가게 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 온유한 사람은 과격한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유순합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말이 과격해지려고 하면 자꾸 온유한 말로 바꾸어가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변화를 봐야 됩니다.
'실낙원'을 쓴 밀턴은 소경입니다. 그가 어느날 부인과 함께 길을 가는데 한 신사가 가까이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부인이 장미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장미는 예쁘기는 한데 가시가 있어서 콕콕 찌릅니다."
노자는 죽으면서 중대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어느날 사랑하는 제자들을 앉혀놓고 입을 벌리면서 질문을 했습니다. "내 입속에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고 물렁물렁한 혀가 있습니다." "그렇지, 젊은 날 내 치아는 아주 좋아서 내 혀를 많이 물어뜯었지 그런데 잠잠히 참았던 혀는 남아있고 강한 치아는 다 빠져버리고 없느니라 부드러운 것은 생명이고 강한 것은 죽음이다. 그러니 너희들이 강팍하면 쉬 죽는다. 온유한 것이 생명이니라."
셋째, 온유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똑똑하고 강한 자는 승리하는 자처럼 보이나 스스로 부러집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겸손한 자는 망하고 빼앗기고 사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합니다. 거칠고 사나운 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세상이지만 행복은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온유한 자에게 행복이 있습니다.
온유한 자는 행복합니다.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출생, 신분, 용모, 성격 등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출생을 원망하고 신분을 부끄러워하며 용모에 대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 부모를 존경하고 자기를 사랑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현재 자기 환경에서 감사를 드립니다.
온유한 삶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온유한 마음은 어느 정도 수양과 훈련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온유는 겸손한 인격입니다. 나무도 껍질이 굳어지면 고목이 됩니다. 그래서 여우가 그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살지만 부드러운 것은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여자가 장수하는 것은 부드럽기 때문이고 남자가 쉬 죽는 것은 강팍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온유하게 살지 못했으면 온유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봄이 오면 날씨가 따뜻하니까 모든 나무가 부드러워지면서 새순이 나오고 꽃이 핍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면 날씨가 춥기 때문에 모든 고목나무처럼 딱딱하게 굳어집니다.
우리가 성령의 열기로 은혜가 충만하고 내 심령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성품이 부드러워집니다. 제자들도 처음에는 거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부드러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온유한 마음이며, 성령이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 이 귀한 은혜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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