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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을 보내신 이유
    2002-05-14 15:33:07   read : 15933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3:16 - 21절 // 02/05/13

    박찬호선수가 텍사스로 이적한 후, 부상으로 주춤하는 사이 아리조나의 김병현선수가 지금 10세이브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기록은 방어율과 세이브면에 있어서 메이저리그 전체 구원투수부문 2위에 해당하는 기록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탈삼진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메이저리그 전체 구원투수가운데 1위를 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구원투수로서 자기의 몫을 너무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김병현선수가 처음부터 이런 성적을 낸 것은 아닙니다. 그도 지난 월드시리즈에서 엄청난 시련과 좌절을 겪어야만 했었습니다.

    사실 자신이 속한 팀이 꿈의 월드시리즈에서 진출한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의 월드시리즈에서 많은 구원투수들을 제치고 마운드에 설 수 있다는 것은 감독의 절대적인 신임이 아니면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김병현선수가 지난해 동양인 최초로 월드시리즈에서 구원투수로 나와 공을 던질 수 있는 큰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구원실패였습니다.

    그는 3대1로 앞서 나가던 월드시리즈 4차전에서 팀내 제1선발이라고 할 수 있는 커트실링을 8회에 구원 등판하여 공을 던지게 되었는데 결국 홈런 2방을 맞고 오히려 패전투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그 날 구원투수로 나왔다가 패전투수가 되어 마운드를 내려가는 김병현선수의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웠는지 모릅니다. 아마 그 장면을 지켜 본 사람들마다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구원투수라 할지라도 모든 선발투수를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패전투수로 처리되어 선발투수의 선발승을 놓쳐버리게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박찬호선수가 팀을 옮긴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자신의 뒤를 받쳐줄 든든한 구원투수가 있었다면 꿈의 20승을 달성할 수도 있었을텐데 자신이 속해 있던 팀에서 그런 뒷받침이 되지 않아 번번히 20승의 문턱에서 좌절하게 되자 결국은 다저스를 떠난 것입니다.

    지금 김병현선수는 최단기간내 10세이브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항상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난해 월드시리즈 때처럼 그런 실패가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공을 던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패배했을 때 심한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를 보면 구원투수는 정말 멋지게 잘 던졌는데 수비진들의 어이없는 실수로 점수를 주고 그 결과 패전 처리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 정말 속이 상합니다.

    평범한 땅볼을 처리 못하거나 병살타 코스의 공을 놓쳐버려서 경기에 져 버리는 사례도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일부러 시합에 지기 위해 그렇게 하는 선수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운동경기에서는 얼마든지 그런 이변이나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종종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 무조건 그 사람의 전적인 책임이라고 몰아 붙을 수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그렇게 실수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김병현선수가 월드시리즈에서 패전투수가 되고도 그 팀에서 방출되지 않고 다시 공을 던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것이 용납되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패전투수가 된 그에게 더 많은 격려와 박수를 사람들은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앞에 굴러오는 평범한 땅볼을 의도적으로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그 사람의 책임입니다. 그런 사람은 마땅히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모든 책임을 감당해야만 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누군가가 자신을 돕기 위해 나섰는데 그 도움을 뿌리치거나 의도적으로 회피한다면 그로 인해 찾아오는 모든 결과는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가하면 집안에서 자녀 때문에 울화통이 터지는 부모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녀가 몹시 답답하게 행동한다고 생각되는 경우입니다. 즉 밥 먹는데 한시간, 옷 입는데 30분, 세수하는데 30분, 한가지 일을 제대로 마치지도 않고 또 다른 일을 벌여서 방을 어지럽혀 놓는 경우, 무슨 일이든지 대충 대충하고, 기껏 도와주기 위해 엄마는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분주한데 정작 자신은 하나도 급하지 않고 여유를 부리는 자녀를 보면 한마디로 울화통이 터집니다. 도대체 뭘 믿고 그렇게 느긋한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런 일은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종종 경험하는 일일 것입니다.

    저도 저희집 아이의 그런 모습을 가끔씩 봅니다. 아침에 깨어놓으면 일어나는데 10분, 세수하는데 10분, 양말 한짝 신는데 5분, 이렇게 느리게 행동합니다. 지켜보고 있는 제가 더 급합니다. 분명 오늘 당번이고, 몇시 몇분까지 가야하는데 아직도 한쪽 눈은 감은 채 양말 한 짝만 신고 있으니 정말 답답해 죽을 지경입니다. 왜 그렇게 여유를 부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여유를 부리던 결과가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 아직도 정확한 인식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분명 늦장을 부리다 학교에 지각하거나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결국 반성문을 쓰거나 교실청소를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동안 그 사실에 대해 별로 인식이 없는 아이들은 그렇게 늦장을 부리고 여유만만 해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복음에 대한 우리 인간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보이는 반응은 그렇게 반가운 표정들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반가워하기보다는 오히려 의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거나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복음에 대해 반가워하지도 않고 느긋한 자세로 일관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온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을 거절하는 자들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먼저 복음을 얘기할 때 오늘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과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독생자를 주셨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멸망치 않고 영생이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는데 어떻게 사랑하셨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자식이 없는 집안에 자기의 자식을 양아들로 보내는 경우가 종 종 있었습니다. 대개는 집안의 종손가정에 자녀가 없을 때, 둘째나 혹은 셋째의 가정에 있는 아들을 종손 가정에 보내어 그 가정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양아들로 살게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는 대개 보내는 집안에서 그래도 자식이 여러명 있는 경우입니다. 만약 우리집안에도 자식이 하나밖에 없는데 양아들로 남의 집에 그 아들을 보내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즉 여러명의 아들이 있는 가운데 어느 아들을 보낼 것인가? 생각하다가 그 중에 하나를 택해서 보낸 것이 아니라 단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 보냈다는 말입니까? 아들 없는 집에 양아들로 보냈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를 세상에 보내었다고 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귀한 아들을 이 험악한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까? 첫째는 이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이며 둘째는 저를 믿는자마다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습니까? '이처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랑에 대한 감동적인 얘기를 하나 소개하겠습니다. '연탄길'이라는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국립묘지앞 좌판에서 꽃을 파는 할머니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가 파는 꽃은 묘지에 꽃혀 있던 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할머니는 이른 아침에 전날 묘지를 방문해서 꽃을 꽃아둔 그 묘지에 가서 꽃혀 있는 꽃을 몰래 가져다가 파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국립묘지 앞에서 꽃가게를 하고 있는 민혜네가 알고 있었습니다. 민혜는 그것이 늘 못마땅했습니다. 물론 그 할머니 때문에 꽃가게가 어려운 것도 있지만 할머니의 양심적이지 못한 행동이 더 미웠습니다. 그리하여 민혜는 투덜거립니다. "도대체 팔게 따로있지 어떻게 묘지앞에 놓인 꽃을 몰래 가져다가 파는 거야?" 그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오죽 살기가 힘들었으면 죽은 사람들 앞에 놓인 꽃을 가져다 팔겠느냐?"며 그냥 모른척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날씨가 추운 겨울날이면 묘지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묘지에 꽃히는 꽃도 자연 적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날씨가 추워진 까닭에 꽃을 파는 할머니는 묘지에 꽃힌 꽃이 없어 그냥 왔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 멀리 보이는 묘지 중앙쪽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고 그가 양쪽 손에 무언가를 들고 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무래도 꽃을 가져가는 할머니인 것 같아서 민혜는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습니다. 민혜의 아빠가 묘지 앞에서 꽃다발을 한아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혜가 다가가서 왜 묘지 앞에 꽃다발을 들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아빠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겨울이라 하도 꽃을 사가는 사람이 없어서 그랬어 묘지 앞에 꽃힌 꽃이 없어서인지 할머니가 며칠째 보이시지 않는구나 그래서 아빠가 묘지에 꽃을 갖다 놓은거야"

    민혜아빠는 며칠째 보이지 않는 할머니를 위해 자기 꽃가게의 꽃을 가져다가 묘지에 꽃아둔 것입니다. 감동적인 얘기가 아닙니까? 그 외 많은 얘기들이 이 책에 쓰여져 있습니다. 그 내용을 읽을 때 잔잔한 감동이 저에게 밀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약간의 꽃다발에 묻어난 사랑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데 오늘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정도의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사랑입니까? 자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신다는 것은 양아들 삼도록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독생자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희생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에게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대상인 이 세상은 도대체 어떤 곳을 말합니까? 썩고 부패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스리고 대적하는 악한 본성을 지닌 곳입니다. 그런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은 사랑 받을만한 어떤 훌륭한 일을 했거나 선행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 본성이 착하거나 선해서도 아닙니다. 이 세상은 더럽고, 추하고, 부패한 세상입니다. 아니 세상만 부패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우리들이 부패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패한 인생들을 향해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기꺼이 보내신 것입니다.

    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까?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17절에도 보면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종종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살면서 잘 사느냐 못 사느냐?에 굉장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인생을 사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근본 우리들의 문제는 이 땅에서 얼마나 호위호식하며 사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의식주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원래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심판받고, 그로인해 멸망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과 관련있는 것입니다. 즉 영원한 심판을 받고 멸망하느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어 천국에 들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고상한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안에 굉장히 고상한 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 믿고 천국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의 수준을 한 단계 높일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모두 틀렸다' 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로 고상한 척 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생명이 전제된 상태에서만 가능합니다. 인간다운 삶을 사는 것도 생명이 보장되어졌을 때나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영원한 심판을 받느냐? 아니면 영원한 생명을 얻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볼 때 오늘날 어리석은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은 의식주 문제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좀 더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느냐?에 거의 목숨을 걸다시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식들에게 좀 더 나은 환경 속에서 공부를 할 수 있게 할 것인가에 자신의 인생을 걸다시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은 대개 정말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그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보다 중요한 문제는 영원한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부패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리고 배반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이기 우리를 벌주고, 심판하고 그래서 궁극적으로 영원한 불 못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말을 오해해서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들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복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만큼은 철저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심판을 위해서라면 굳이 그분이 나서지 않아도 저절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8절에 보니까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그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습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어떤 심판을 받았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심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우리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 우리들은 독생자께서 어떤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저절로 심판의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그 심판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 있는 자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그 일이 가능하다고 했습니까? 독생자를 믿으면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너무도 쉽고 너무도 단순하고 너무도 간단합니다. 세상의 종교가 구원을 말할 때 어떻게 말합니까? 많은 선행을 쌓으라고 합니다. 고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이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도대체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 선행을 쌓아야 한다면 얼마만큼 쌓아야 하는 것일까요? 고행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고행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과연 누가 그런 선행을 할 수 있고, 누가 그런 고행을 통해 해탈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아마 여러분이면 몰라도 저같이 인내심이 부족하고 조급증을 내는 사람이면 당연히 탈락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그분을 믿으면 멸망당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얼마나 쉽습니까? 누구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은 이 쉬운 것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시험지를 받아들었을 때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다가 쉬운 문제까지 풀지 못하고 결국 시험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면 허겁지겁 대충 번호 찍어서 답을 쓰는 사람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쉬운 문제부터 풉니다. 반대로 인생을 가장 어리석게 사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쉬운 문제를 놔두고 어려운 문제를 푸는 사람입니다. 더 어리석은 사람은 쉽게 풀 수 있는 문제를 스스로 어렵고 복잡하게 만들어서 풀지도 못하고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19절과 20절에 보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했습니다. 왜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습니까?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죄는 밝은 빛을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 가운데로 나아가면 그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싫어서 그냥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으려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이 텔레비전 뉴스시간에 그 모습이 비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같이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고 애를 씁니다. 모자를 뒤집어 쓰든지 아니면 머리를 아래로 숙이고 자기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합니다. 밝은 빛은 더더욱 싫어합니다.

    정치권의 사람들이 줄줄이 소환되는 모습을 우리는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모두들 검찰에 소환되어 들어갈 때는 당당합니다. 자기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밝히겠다고 말합니다. 검찰청에 들어가는 모습도 어쩌면 그렇게 당당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주 초췌한 모습으로 자신의 얼굴을 반쯤 가리면서 나옵니다. 그리고 기자들이 묻는 말에 대답도 하지 않고 경찰차를 타고 구치소로 이감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렇게 당당했던 모습이 자신의 죄가, 자신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그렇게 부끄러워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빛으로부터 자신의 모습을 가려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우리들이 한 두 번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구치소로 끌려가는 몇몇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악가운데 있는 자들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 빛이 세상에 왔지만 빛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빛을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내 모습이 밝은 빛 가운데서 비쳐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왜 믿지 않는 가족들은 완강하게 주께로 나오는 것에 대해 거부하는 것입니까? 자기 실체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더럽고 추한 모습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나오기를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이 빨리 병이 낫습니까? 자기의 병을 드러내놓는 사람입니다. 드러내 놓지 않고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평생가도 못 고칩니다. 내가 이런 이런 병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료가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 모습이 어떠하든지 그 실체를 빛 가운데 드러내 보여야 합니다.

    요즘은 매주 강단에 꽃꽂이를 하지만 개척당시에는 화분을 강단 옆에 둔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명력이 강하다는 나무들도 빛이 없는 지하실에서는 오래가지 못하고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를 선물하신 분들은 하나같이 저에게 '이 나무는 오래 갈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결국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하 개척시절에 많은 나무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들도 햇빛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물론 사람이나 모든 자연이 햇빛을 보지 못하면 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둠에 속해 있으면 자기의 악한 모습을 감출 수는 있겠지만 얼마가지 못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동안 내 죄악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악하고 모난 부분이 드러나는 그때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 받고, 믿음의 생활을 견고하게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마음껏 주께 여러분의 실체를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때부터 실상은 치유가 이루어집니다. 내 가운데 있는 상처, 내 마음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분노, 슬픔, 이 모든 것은 나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상담학자들은 어떤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고자 할때 그 사람이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 그리고 성장과정 이 모든 것을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이 스스로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을 오늘날 '내적치유'라고 말합니다. 이 내적치유에 있어서 전제되는 조건은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끄집어내고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치유가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빛 가운데 살기를 원한다면 나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해 주저하거나 거리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가 이 땅에서 좀 더 편하게 살고, 지치고 힘들 때 위로해주는 정도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생명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얼마나 인식하고 계십니까? 장길수군 가족이 일본 영사관 집입을 시도했다가 두 명은 성공하고, 세 사람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이 국제적인 여론에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입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성공하면 살고 실패하면 죽습니다. 그들은 일사각오로 진입을 시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입구에서 일본 영사관 직원들이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지켜보고만 있었을 뿐 아니라 저지하던 중국공안원의 모자가 떨어지자 태연스럽게 그 모자를 주워서 그에게 갖다주는 모습이 방영되었습니다. 일본 영사관 직원들에게는 별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입을 시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자기 생명과 관계된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어떤 이들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뒷짐 지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오는 특별하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뒷짐지고 구경만 합니까? 왜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어두움에 속해 있어서 밝은 빛을 꺼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거의 필사적입니다. 왜냐하면 생명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절박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1절에도 보면 "진리를 좇은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왜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오게 됩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는 완전하지도 않고, 나는 부족한 것 투성이지만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일 인줄 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생활을 하는 것이 여러분의 삶에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이 신앙을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이 있습니까? 아니면 강건너 불 구경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명에 관한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시시하게 이 땅에서 좀 더 잘 살고, 편하게 살면서 힘들고 지칠 때 적당하게 위로나 받고, 배불리 먹다가 우리의 인생을 마감하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영생에 관한 문제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고 있으니까 됐어"라고 안심하면서 나태하게 생활하면 도리어 하나님께 더 큰 책망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그것도 잠깐동안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형편에 놓여있든지 상관없습니다. 그분을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진리를 좇고 그로 인해 여러분의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나타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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