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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땅의 일과 하늘의 일
    2002-05-14 15:31:54   read : 1668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3:9 - 15절 // 02/05/05

    다이어트에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사실 저도 20킬로그램을 감량하고 난 뒤, 그런 생각을 가졌습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몇 년전에 제가 맹장염 수술 받았을 때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수술용 칼을 사용해서 수술을 받은 것이 아니라 복강경이라는 시술을 통해 수술을 받았습니다. 복강경이란 배꼽 밑에 0.5-1cm의 작은 구멍 2-3개를 뚫어 내시경과 수술기구를 넣어 비디오 모니터를 통해 질병유무를 진단하고 이상 부위를 수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수술은 칼을 사용해서 수술하는 것보다 많은 잇점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수술자국이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회복이 빠르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담당의사가 저에게 이 수술을 권유했습니다. 물론 저는 주일설교 때문에 빨리 수술 받고 퇴원할 양으로 흔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복강경 수술을 권유했던 의사는 외형적으로 수술자국이 거의 없다는 것과 회복이 빠르다는 점 때문에 저에게 이 수술을 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의사 선생님 말이 그 당시 저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다이어트를 하기 전이어서 그랬겠지만 그 의사 선생님의 말이 "뚱뚱한 사람들은 메스로 수술하는 것이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좀 더 심한 표현으로 "아랫배 부근에 비개가 많기 때문에 보통사람들 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 칼을 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칼을 댄 길이가 길기 때문에 회복기간도 보통체격의 사람들보다 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얘기를 듣고 충격을 받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뚱뚱하다'는 것도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되고, 자꾸 사람들 앞에 설때마다 위축되게 만드는데 수술도 남들이 받는 것과 같은 수술을 받는데 주저함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제 자신에 대해 많이 실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뚱뚱한 사람들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었던 제가 어쨌든 다이어트 끝에 지금처럼 되었습니다.

    과장된 표현을 포함해서 요즘은 날아다닐 것 같습니다. 지난주 남전도회가 칠보산자락을 등산했을 때 어느 분이 저를 두고 "목사님이 축지법을 쓰시는 모양이다"라고 하셨던 말씀을 기억합니다. 다이어트 전에는 산에 올라가는 것이 죽기보다 싫을 정도였습니다. 누가 등산얘기를 꺼내면 도망갈 핑계부터 찾았습니다. 그런데 몸이 가벼워지고 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 같습니다. 매사에 자신감도 생기고, 누군가가 '운동하자 등산하자' 제의할 때 핑계대면서 도망 다닐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이어트 이후 인생을 새롭게 사는 것 같다할지라도 그것은 새로 태어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지난주에 카드 빚을 갚기 위해 다섯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차에 싣고 다녔던 범인이 붙잡혔습니다. 그 중에 한사람은 자살을 하고, 한 사람은 경찰에서 여죄에 대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물론 재판과정에서 그 죄에 대해 어떤 판결이 나올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얼마든지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그래서 지난주에 재활용품에 대한 얘기를 여러분들에게 들려드렸습니다. 요즘 재활용품점에는 중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도 있습니다. 며칠 전 중고용품을 알아보기 위해 알뜰매장에 들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같은 종류의 제품이 한쪽으로 쭉 진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똑 같은 제품인 것 같은데 그 옆에 진열되어 있는 것과 가격차이가 많이 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제가 보기엔 여기 있는 물건이나 그 옆에 있는 물건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왜 가격차이가 이렇게 납니까?"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 "가격이 싼 것은 중고품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은 다 새것들입니다."라고 대답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중고를 수리해서 새롭게 되는 것과 새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께서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들려주신 말씀도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새로 태어나는 것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는 다시 질문을 던집니다. 본문 9절에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가 구약성경에 능통하여 비록 에스겔서의 말씀을 이해하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줄 설령 알았다 할지라도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모릅니다. 그래서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주님은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1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즉 니고데모가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항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배우는 학생이면 몰라도 적어도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 어떻게 이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선생님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수학선생님이 미분 적분을 모른다든지, 국어선생님이 맞춤법을 모른다거나 바른 표기법을 알지 못한다면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물어보겠습니다. 월요일에 경로잔치를 본 교회에서 계획하고 있습니다. 나이드신 분들을 공경한다고 할 때 '경로'가 맞습니까? '경노'가 맞습니까? 물론 알면 좋습니다. 그러나 틀려도 여러분이나 제가 살아가는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국어선생님이라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전체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새로 태어나는 것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심성이 맑아지고 깨끗해진다고 믿습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들에게 한결같이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정도의 내용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심성이 순수해지거나 깨끗해지는 것은 성경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깊은 산에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든지, 불교의 경전을 외우면서 자기 마음을 비우는 법을 배운다든지, 기(氣) 운동을 통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은 성경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흐르는 전체 사상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물론 많은 부분에서 그런 내용들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2장 2절에도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즉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깨끗하게 하고 정결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흐름은 단순히 깨끗해지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워졌다'가 아니라 '새것이 되었다'입니다. 중고품이 깨끗하게 수리되어져서 매장에 새것처럼 진열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것을 갖다 놓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금 니고데모를 꾸짖는 것도 이것입니다. "적어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면 성경전체가 말씀하는 가장 핵심된 내용을 알지 못하다니 이게 말이나 될 법한 것이냐?"는 의미였습니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니고데모가 성경에 기록되어진 그 사실들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성경 어디에 어떤 내용이 나오는지 알지 못해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성경퀴즈대회를 하면 이런 것 때문에 주눅이 들어 나오지 않는 분들도 가끔 있습니다. 괜히 성경 모르는 것이 들통이 날까봐 슬그머니 빠져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그것 몰라도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무리 성경퀴즈대회에서 많은 문제를 맞추고 성경에 대해 박식하다는 얘기를 들어도 실상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새것이 되는 것', '새롭게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입니다. 니고데모는 이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물었고 주님은 그에게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런 일을 알지 못하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11절과 12절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했습니다. 도대체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여러분! 지금 니고데모가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땅의 일'을 가지고 '하늘의 일'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에 의하면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면 좋든 싫든 그 몸을 가지고 인생을 살다가 생애를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땅의 일입니다. 물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변신을 거듭할 수는 있습니다. 요즘 워낙 성형술과 화장술이 발달해서 이리저리 뜯어고치면 누가 누군지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약간의 변신을 가져온 것일 뿐, 새로 태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니고데모뿐 아니라 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례요한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었고, 그가 증거하는 바를 듣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증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율법주의적인 사고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세례요한이나 주님께서 율법과 전혀 상관없고 말도 되지 않는 것을 증거하신 적은 없습니다. 모두가 성경이 원래 말씀하신 것들을 선포하셨지만 자신들이 자기 세계 안에 갇혀서 그 말의 진정한 의미들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모습이 우리들의 실체일수도 있습니다. 즉 우리들의 모습 속에는 모순된 이중적인 모습을 갖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어떤 것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서 그것이 다 이해가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터넷에 대해 여러분들은 다 이해하십니까? 어떻게 해서 조그마한 컴퓨터를 통해 그림이 전송되고 소리파일이 보내지는지 다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컴퓨터를 집어 던져버리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때때로 해부학이나 생리학을 통해 인간의 신체구조에 대해 모든 것을 파헤치고 알 수 있지만 생명의 탄생은 여전히 신비에 속합니다. 그런데 해부학이나 생리학은 이해가 되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생명의 탄생은 신비에 속하기 때문에 용납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이해가 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것들이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설령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아니 이해가 되어도 여전히 신비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 사람들은 반문하지 않고 곧잘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유독 하늘의 진리에 대해서만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여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이 여러분 주위에도 많이 있지 않습니까? 특히 이런 분들이 주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았느냐?" 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보여달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요구입니까? 그 말속에는 보아야 믿겠다는 것과 이해가 되어야 용납할 수 있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보지 않았으면서 믿고 받아들이는 것들이 어디 한 두가지 입니까? 이해가 되지 않아도 용납하고 수용하는 것들이 어디 얼마나 많습니까?

    바람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바람의 존재를 아는 것입니까? 에너지를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힘의 존재를 믿는 것입니까?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 존재의 실체를 믿고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하늘의 진리에 관한 한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않는 너희가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땅의 일'이란 땅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즉 중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중생에 대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하물며 어떻게 하늘 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은 어떤 것입니까? 13절에서 15절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늘의 일이란 땅의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을 말합니다. 즉 중생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속죄의 사역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주님은 먼저 자신이 어떤 분이신가? 를 밝혔습니다. 즉 자신은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 영원한 구원계획에 참여한 장본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새롭게 되어지는 것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가능할 수 있습니다.

    산 속에 들어가서 깊은 수양을 통해 자기 성찰을 일구어 낼 수 있습니다. 깊은 명상을 통해 자신의 욕심과 정욕을 어느 정도 억제할 수도 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하면서 청빈한 삶을 살며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뭔가 다르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은 그렇게 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도를 닦아서 되는 것도 아니고, 깊은 명상 속에서 자기를 발견함으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선한 행실을 많이 쌓는 것만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동남아의 많은 나라들은 한결같이 범신론의 사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신과 우주를 똑같은 것으로 보는 종교관 또는 철학관. 만유신관을 말합니다. 이것은 초월적 신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연만물이 신이 될 수 있음을 전제로 유한한 만물을 신이기도 하고, 신의 현현(顯現)이라고 강조하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힌두교의 나라 인도나 신사의 나라 일본 같은곳에 가면 얼마나 많은 신들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런 잡동사니 신들을 통해 구원을 얻고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들 중에서도 '아무 종교나 믿으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왜 기독교는 꼭 자기 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고집불통들이며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뭐라해도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진리입니다. 땅의 일을 가능케 하기 위해 하늘에서 세우신 계획은 오직 하늘에서 내려온 인자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작정하심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하늘에 올라간 자가 왜 예수밖에 없느냐? 성경에 의하면 에녹도 있고 엘리야도 있지 않느냐? 라고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원어해석상 그 뜻이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는 분, 즉 하늘에 계셨기에 그곳의 모든 것을 보고, 체험하고, 알고 계시면서 지금은 하늘에서 내려온 상태에 있는 인자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이나 엘리야가 아니라 오직 천상의 모든 회의에 참석하셔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에 직접 참여하신 자신을 일컬어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구약에 나오는 말씀으로 다시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내용이 14절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 즉 하늘에서 내려온 자신이 들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 내용에 대해 니고데모는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행하다가 다시 하나님을 향해 원망했습니다. 그들의 원망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민수기 21장 5절에 의하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애굽을 탈출케 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셨습니다.

    그 불뱀으로 인해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갔습니다. 그제서야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죄를 고백했을 때 모세는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불뱀을 떠나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불 뱀만 떠나가게 한 것이 아니라 이미 불뱀에 물려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까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놋으로 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어 달게 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놋으로 된 뱀을 만들어서 장대에 매단다는 것은 그들의 죄의 원인이 된 사건을 공개적으로 시인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원래 놋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막의 번제단도 놋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번제단은 무엇을 위해 사용되는 기구입니까? 죄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의 죄를 사함받기 위해 제물을 드리고 불 태우는 곳이 번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이곳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이 번제단이 놋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는 것이며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의 상징인 놋뱀을 쳐다볼 때 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놋뱀에 대한 제안을 누가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렇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불뱀에게 물렸으니 놋뱀을 매어달면 되겠다하여 그렇게 조치를 취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 참 해학적이신데가 있습니다. 아마 우리 조상들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뱀에게 물렸다면 '된장 갖다 발라라'고 했을 것입니다. 물론 실제적으로는 뱀에게 물렸을 때, 즉시 독이 퍼져나가지 않도록 상처가 나지 않은 입으로 독을 빨아낸다든지 칼로 물린 부위보다 좀 윗부분을 찢어서 독이 빠져나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게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해학적입니까? 그런데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뱀에게 물렸을 때 입으로 독을 빨아낸다면 완전하게 독을 제거하기가 어렵습니다. 칼로 살을 찢는다면 엄청난 고통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불뱀에게 물린 사람을 치유하는데 놋뱀을 장대에 매달게 하시고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마다 깨끗하게 낫도록 하신 것입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물린 사람은 우린데 그렇다면 우리의 상처가 낫고 내가 살아나려면 내가 그 어떤 고통도 감수하며 이겨내야 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뱀에게 물린 나를 치유하고 살리시는 방법으로 놋뱀을 장대에 달아 매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당시에 사람들의 반응을 시시각각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대체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면서 열심히 자기 나름대로 민간요법을 찾아 헤매었을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고 '불뱀 때문에 다 죽게 되었는데 또 뱀을 보란 말이냐'면서 아예 쳐다보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거나 말거나, 과학적이거나 비과학적이나, 쳐다본 사람들은 살고, 쳐다보지 않은 사람들은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세시대때 있었던 이 사건을 통해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가르쳐주신 진리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인자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놋뱀처럼 나무에 매달리게 될 인자를 바라볼때에만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인자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분이 불뱀에게 물린 상처입은 자들을 위해 놋뱀으로 나무에 매달리신 것을 바라보면 결국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그분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분을 쳐다보기만 하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생명을 얻기 위해 주께로 나오는 것을 주저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 남편중에 그런 분이 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족중에 누군가가 주저하고 있지 않습니까? 왜 그들은 주께로 나아오는 일, 주를 바라보는 일에 대해 주저하는 것일까요? 놋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데 왜 바라보지 않고 죽어가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이유는 근시안적인 사고 때문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때부터 안경을 썼습니다. 처음에 학교 칠판에 쓰인 글들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공부하는데 많은 불편을 겪었습니다. 또 불편한 것은 버스를 제대로 탈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버스가 많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 가득태우고 다니다 보니 기다려 주는 법도 없고 제자리에 정차하는 법도 없습니다. 저 멀리 차를 세우고 휑하니 가버립니다. 그래서 차가 멀리서 오면 대충 어디에 설 것인지 판단해서 미리 그곳까지 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눈이 나쁜 저리로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번 차를 놓치곤 했었습니다. 가까이 있는 것은 보았지만 멀리 있는 것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 안경을 쓰고보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얼마나 세상이 환하고 맑은지 안경 쓴 분들은 다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의 인생이 어떤 인생입니까? 지금 당장 내 생활이 불편해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왠지 불편한 것이 많아지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들이 있습니다. 주일날 쉬지도 못하고, 불교 믿는 부모님과 마찰이 생길 것 같고, 거기다가 제사도 지낼 수 없고, 술도 제대로 못 마시고, 담배도 공개석상에서 피울 수 없고, 더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 괜히 쫌생으로 보이는 것 같아서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 사고입니까?

    그것이 과연 영생을 얻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안경을 쓰면 세상이 얼마나 환한데 안경이 불편하다 하여 벗어버리거나 쓰지 않는 사람들은 안경을 통해 볼 수 있는 그 놀라운 세상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희뿌연 세상 속에서 인생의 차를 놓치고 방황하다가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들 중에는 구경꾼으로 있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교회 나오기는 하는데 아직도 예수님이 필요없는 분은 계시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그분을 통해 영생을 얻습니다. 이 거듭남이 있어야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영적인 어두움에 속해 있지 않습니까? 밝은 곳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여러분을 구원하셨으며 그 사실이 여러분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이라는 사실을 굳게 신뢰하면서 하늘의 일에 여러분의 삶을 의탁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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