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중의 복 2002-05-03 17:58:24 read : 1513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계시록 2:1-7
오늘은 요한계시록 2장 1절에서 7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복 중의 복"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복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첫째로는 건강이 복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 저런 것을 다 가졌다고 할지라도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든든한 육체, 건강한 정신이 복입니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 내는 명철한 두뇌가 복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내는 아이디어가 복입니다. 셋째로는 다른 사람이 만들지 못하는 것을 만들어 내는 비상한 재간이 복입니다. 손재주 하나로 가정을 얼마든지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그런가하게 되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하는 재물도 복입니다. 재물이 없으면 멸시와 천대를 받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그것 보다 더 귀한 것은 가정이라는 복입니다. 나이 50세가 되도록 총각이 장가를 못 가고 가정을 갖추지 못했다고 한다면 세상 것을 다 가졌다고 한들 무엇이 복이겠습니까? 처녀가 50세가 되고 환갑이 되도록 시집을 못 가서 가정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면 세상의 어떤 것을 가졌다고 해도 복이라 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신랑을 만나고, 좋은 아내를 만나고, 귀한 아들 딸을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 모릅니다. 가정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상막합니까? 그러기 까닭에 가정도 큰복입니다. 이런 복 보다 더 귀한 복이 오늘 성경에 쓰여져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복들 중의 복이 무엇인지 성경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인정의 복 (1-3)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1절을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 하였습니다. 좇지도 아니하고 서지도 아니하고 앉지도 아니한다는 말씀은 하지 않을 것은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또 2절을 보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묵상합니다. 즉 할 것은 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종합해서 이야기하면 처신을 바로 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3절을 보면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잎사귀가 마르지 않고, 시절을 쫓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건강을 의미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이 건강한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셋째로 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을 망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믿음생활을 하고 봉사와 충성을 열심히 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그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마 7:22-23) 인정받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3절을 보면 '에베소 교회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2절에 보면 '알고', 3절을 보면 '아노라'고 하였습니다. 알고 안다는 것은 네게 대해서는 내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네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일은 내가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은 주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주님의 인정을 받은 내용은 네 행위 즉 네가 얼마나 수고하고 봉사한 줄을 내가 알고, 환란과 핍박을 다 이겨내는 인내의 생활입니다. 또 악한 자들과 거짓 선지자들, 즉 사이비 이단자들이 들어와서 믿음을 어떻게 하든지 망쳐 놓으려하였으나 그것을 방어하였고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을 드러낸 것과 자칭 사도들이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의 신앙을 미혹하는 잘못된 행위를 다 드러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이 감언이설로 귓맛을 즐겁게 할지라도 다 거짓이다 라고 가려낸 에베소 교인들의 수고를 인정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참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환란을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열심을 인정하여 주셨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한 것을 보면 더 이상 우리가 할 것이 없습니다. 가만히 따져 보십시오. 우리가 교회 생활을 할 때 에베소 교회 교인들 보다 더 이상 잘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도무지 모른다고 하신다면 불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 하나 다 알아주고 모두 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성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가령, 아내가 동네 사람들에게는 온갖 칭찬을 다 받는데 남편 이 여자를 믿지를 못하겠다, 이 여자를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아내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런가 하면 동네 사람들이 뭐가 나쁘고 뭐가 나쁘다고 하면서 야단을 할지라도 즉 천만인이 뭐라고 할지라도 나는 이 여자를 믿는다고 하게 되면 그 아내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고, 남편에게도 인정을 받는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인정을 해도 좋고 하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우리 주님만이, 하나님만이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제가 5학년 때 아라히라고 하는 여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왜정 때였습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마치고 다 돌아가는데 저를 혼자 남으라고 하셨습니다. 친구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 혼자 남아 있으려니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내 심부름 좀 해 줄래?"하고 심부름을 시키셨습니다. "이것 좀 도와줄래?"하면서 일감을 주어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심부름과 선생님을 돕는 일을 한 시간쯤 한 다음에 "참 수고했다, 이제는 가도 된다"라고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친구들은 벌써 동네에 가서 자기들끼리 놀고 있겠지만 싫지가 않았습니다. 요즘 학생들 같으면 그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선생님의 심부름이 은근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집에 가는 길을 걸어갔는지, 뛰어갔는지, 날아갔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한테 내가 인정을 받는다 하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학생은 선생에게, 제자는 스승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둘째, 깨달음의 복 (4-5)
예수님이 한번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때 길가에 떨어진 씨는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돌짝 밭에 떨어진 씨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도 결실을 맺지 못하였으나 좋은 땅 즉 옥토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어 30배, 60배, 100배가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3장 23절을 보면 '좋은 땅에 뿌리었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배, 육십배, 삼십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고 하였습니다.
결실을 30배, 60배, 100배 맺는 자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다음에는 깨달음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생활은 학생들이 학교에 다니는 것과 똑같습니다. 선생님이 가르쳐 줄 때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듣지 않으면 그 학생은 공부를 못합니다. 우리의 믿음생활도 먼저 말씀을 열심히 들어야 합니다. 한시간 동안 듣기는 들었는데 무슨 소리인지 전혀 깨닫지를 못했다고 하면 들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학생이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면 그 문제의 핵심과 원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진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듣고 깨닫는 자가 열매를 백배나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한 시간 예배하러 나와서 말씀을 듣고도 깨달음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처럼 답답하고 속이 타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5절을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단단히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동시에 "잘 해 보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남의 집 자식이 도적질을 한다고 책망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사람들이 싸운다고 뜯어말리고 네가 옳고 네가 나쁘다고 가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싸우겠으면 싸우고, 도적질을 하겠으면 하고, 영창에 가겠으면 가고 내 몰라라 합니다. 내 자식이 아닌 남의 집 자식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내 자식이 도적질을 하고, 길거리에서 얻어맞고, 또는 약한 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그냥 지나가겠습니까? 단단히 혼을 내주고 얼마나 책망을 하겠습니까? 야단을 치지 않겠습니까? 미워서 야단을 칩니까? 다른 집 아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두는 것은 사랑해서 내버려두는 것입니까? 오히려 야단치고 책망하는 것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충고가 오히려 사랑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그렇게 야단을 치고 책망하는 것은 미워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에베소 교회가 엄청난 실수를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니 오죽 답답하시겠습니까? 그 때 책망을 하고 충고를 하는 것은 깨우쳐 주기 위함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는 말씀이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어디서 떨어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떨어진 줄을 알고 회개치 아니하면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즉 에베소 교회를 없애 버리고 말겠다는 뜻입니다. 엄청난 책망이요, 경고가 아닙니까?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왜 잃어버렸습니까? 거짓 선지자들 요즘으로 말하면 사이비와 이단자들이 교인들에게 파고 들어가서 신앙을 미혹시키기 까닭에 그 때 에베소 교회 지도자들이 그네들의 주장을 낱낱이 들추어 "이것은 거짓이다"하여 교리를 갖고 크게 싸우다 보니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결국 이단과 사이비를 들어내어 교리 싸움에서는 승리했지만 사람을 미워하므로 사랑은 식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나를 해치는 원수라도 성경은 사랑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즉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너희는 사랑만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를 가려낼 지라도 그 사람들만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단에 대한 뒤처리는 내가 하겠다 뜻입니다. 교리 싸움하느라고 사람까지 미워하다 보니 처음 사랑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식어지면 교회 본질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빨리 사랑을 회복하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그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떨어지면 이미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큰복입니까? 주께서 나의 잘못된 것을 충고해 주시고, 깨우쳐 주시므로 잘 못된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복 중의 복이라는 말입니다.
셋째, 제자의 복 (6-)
석가의 제자는 누구를 닮아 갑니까? 멀쩡한 사람이 공부도 잘하고 장가도 가고 아들 딸도 낳았고 가정 생활을 잘 하다가 어느 날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갔습니다. 왜 머리를 깎고 산에 들어갔습니까? 사원에 들어가 승려가 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는 사원에 들어가서 불경을 외웁니다. 석가라고 하는 사람이 결혼까지 했다가 다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버리지 않았습니까? 그 석가의 제자가 되려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닮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석가를 닮으면 석가의 제자가 되고, 공자를 닮으면 공자의 제자가 됩니다. 요즘에도 상투를 틀고 공자왈 맹자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우리가 우리를 볼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예수를 닮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교회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전도하여 데려다가 예수님의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거기 까지가 우리의 사명입니다. 전도해서 데려다 놓았더니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된 후에도 할 짓 못할 짓 다 하는 것은 사명 완수가 아닙니다. 불신자를 데려다 놓고 붙들어서 양육하여 예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열두 제자에게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내가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키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제자된 우리의 할 일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사명은 제자 삼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닮아 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됨이 복 중의 복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을 보면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를 보면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니골라당의 행위를 그렇게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니골라당이 하는 짓이 그렇게 미우냐? 나도 니골라당의 행위가 정말 미워서 못 견디겠다'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니골라당의 행위가 무엇입니까? 니골라는 예루살렘에 일곱 집사 중에 하나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니골라가 집사가 된 후에 얼마나 패거리를 만드는지 나중에는 니골라가 패당을 이루었습니다. 그렇게 패거리를 만들고 교회를 어지럽히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세를 확장시키지 못하게 되고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므로 유대교로 가 버렸습니다. '그 니골라당의 패거리가 에베소 교회까지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 교인들이 그 패거리들을 미워했습니다. 그 패거리들을 예수님도 미워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닮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미워는 것을 나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기에 우리도 마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데 나는 그 마귀를 좋아한다면 30년 동안 교회에 나와서 믿음생활을 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좋다' 하시면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좋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옳다'고 하시는 것은 나도 '옳다'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것은 나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하지 않으시는 것은 나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나쁘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좋다고 한다면 50년 교회생활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닮는 생활이 복 중의 복 인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제자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마펫이라고 하는 사람이 '어제'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의 골자가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것에 대해서 두 가지로 말하였는데 첫째로는 믿음은 구체적인 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5년, 10년 동안 구체적인 희망을 가지고 믿고 열심히 일 했더니 10년 후에 그것이 실상으로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꿈, 구체적인 희망이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미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에 미치면 어떻게 됩니까? 안 미쳐 봐서 모릅니까? 밤에 눈만 감고 있으면 그 사람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미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떠들면서 몰려와도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의 말소리만 들리고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야단을 해도 그 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에 미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미치면 자꾸 주고 싶어집니다. 받는 만큼 주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에 미쳐 버리면 일구월심 너 밖에 모릅니다. 이처럼 믿음은 예수께 미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하고 또 예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고 온갖 충성을 다 하면서도 더 못해서 안타까워합니다.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닙니까? 이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된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런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 됨이 복 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넷째, 승리의 복 (7-)
이 나라와 저 나라가 군대를 총동원하여 전쟁을 합니다. 이 나라가 이기면 몇 등입니까? 1등입니다. 그러면 저 나라는 몇 등이 됩니까? 2등이 됩니다. 우리 군대가 2등이니까 은메달이다 라고 하면서 국민들이 잘 했다고 칭찬을 하겠습니까? 전쟁에는 2등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1등뿐입니다. 승리뿐입니다. 군대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싸워서 2등 하는 군대는 있으나마나한 군대입니다. 어떤 적군이 쳐들어와도 물리치고 승리하므로 1등을 해야합니다. 군대는 오직 승리만을 목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군병입니다. 우리의 적은 마귀와 마귀를 따르는 그 악령들입니다. 악령은 우리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와 타협을 하면 안됩니다. 마귀를 용납하면 안됩니다. 예수님과 마귀가 싸워 마귀가 패하지 않았습니까? 그 예수님이 우리 십자군의 대장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이겨 놓았기 까닭에 이미 마귀와 그 군대는 패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에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는 줄로 믿어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을 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가 이긴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충만한 사람, 입만 열었다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요, 또 그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승리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성령의 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검을 가지고 역사를 하는데 마귀는 말씀의 검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성령이 말씀을 가지고 역사 하실 때 믿지 않는 사람이 그 말씀에 뜨거운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거꾸러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의 역사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을 검으로 삼아서 병들어 죽어 가는 사람에게 역사하면 말씀을 듣는 순간에 그 말씀이 가슴에 뜨겁게 부딪혀 오면서 확신이 생깁니다. 그래서 열두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말씀의 검의 역사입니다. 이 말씀이 충만할수록 성령의 능력은 충만히 나타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말씀으로 물리치고 승리했습니다. 말씀으로 마귀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이 밖에 나가서 두들겨 맞고 울면서 들어오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싸워 이기고 기분 좋게 들어오는 것이 좋습니까? 그러니까 매 맞고 들어오는 것이 좋으냐 그렇지 않으면 싸워 이기고 들어오는 것이 좋으냐 하는 말입니다. 내 아들 딸들이 맞지는 않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못된 놈이 뭐라고 하면 꽉 붙잡고 '너 진짜 까불래?'하고 한대 쳐 놓고는 '더 이상 까불지마'라고 한다면 누가 건드리겠습니까? 우리가 자꾸 맞아 줘야 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의 아들 딸들은 맞고 들어오는 것보다는, 아빠 엄마가 잘 못했다고 사정하고 빌 망정 두들겨 패고 들어오는 것이 좋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아들 딸들에게 충동질하여 싸움꾼을 만들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이 항상 마귀와 싸워 승리하기를, 이기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늘도 마귀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우는 꼴을 못 보십니다. 당당하게 싸워 이기기를 바라십니다. 만약 마귀와의 싸움에 패하고 돌아와서 주여 오늘도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잘 못했습니다. 용서하옵소서'를 매일 같이 반복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꼴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우리는 마귀의 유혹과 마귀의 핍박과 맞서 싸워서 승리하는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 승리가 복 중의 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복 중의 복은 첫째 주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자는 가장 불행한 자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깨닫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내 자신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며 나와 어떤 관계가 되는지를 깨닫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제자됨이 복 중의 복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예수님을 닮고 예수님 자신을 살아가는 제자가 복 중의 복입니다. 넷째 승리가 복중의 복입니다. 성령은 말씀을 검으로 삼아 역사 하십니다. 그 말씀이 충만한 사람이 능력도 충만합니다. 사탄은 그 말씀의 검이 무서워 질겁을 하고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씀으로만 승리합니다. 말씀으로 승리하는 것이 복 중의 복입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