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2002-05-03 17:55:35 read : 160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고린도전서 10:23-33
오늘은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33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을 그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그밖에 무슨 일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고 믿고 살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하고 고백하기를 '하늘 나라는 이 세상보다 천배 만배로 더 좋은 곳이다'라고 합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라는 찬송을 부를 때는 얼마나 하늘 나라를 사모하고 그리워하면서 부릅니까? 그런데도 배가 아프면 병원에 달려가서 나 살려 달라고 합니다. 큰 병일 경우에는 수술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병이 나으면 좋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천국이 좋으면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갈 일이지 무엇 때문에 돈을 가져다주고 수술하느라고 고생을 합니까? 천국이 더 좋다고 하면서도 하루라도 더 살고 일년이라도 더 살아야 하겠다 할 때에는 거기에 합당한 답변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누가 그렇게 물으면 여러분들은 무엇이라고 답변을 하시겠습니까? 하늘 나라는 우리가 언제 죽어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삶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루라도 더 살고, 일년이라도 더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될 일을 많이 하고 가는 것이 큰 축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과 총체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서 어떠한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건덕의 생활 (23-24)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건덕'이라는 단어 자체는 없습니다. '건덕'이라는 말은 '덕을 세우다'는 말이 아닙니까? '덕을 세우다'라는 말은 '오이코도메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건축을 하다'라는 뜻입니다. 즉 '집을 짓다'라는 말이 됩니다. 집을 세우면 건축한다고 합니다. 이미 있던 집을 헐어 버리면 파괴한다고 합니다. 교회에 덕을 세우는 사람은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은 교회를 비판하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덕을 세우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을 보면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모일 때"라는 말씀은 예배 할 때를 가리킵니다. 각각 찬송시도 있다는 말씀은 예배시간에 찬송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말씀 즉 성경교육도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가 있는데 이는 설교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는 '방언도 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은 기도를 깊이 하다 보면 하나님께서 보실 때 필요하다 싶으시면 방언의 은사를 주십니다. 그러면 밤 세워 기도를 해도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방언은 기도의 은사입니다. 그런데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면 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다만 내 영이 하나님과 교제 즉 교통을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고 있습니다. 방언 기도는 무슨 소리인줄은 몰라도 내 영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과 교통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됩니다. 그리고 '통역함도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방언을 통역하는 일이 있습니다. 방언 한마디를 하고는 우리말로 통역이 되고, 한마디를 하면 우리말로 통역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내용을 환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명심할 것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할 때 다섯 가지로 나타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일이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덕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할지라도 해야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덕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3절에서 24절을 보면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라고 했는데 '가하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옳을 可자입니다. 내가 볼 때 이런 것이 옳고,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이렇게 하는 것을 다 허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좋아 보이고, 옳아 보이고, 해도 되는 것의 결과가 다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결과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못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것이 못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것이므로 안 하는 것만 못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몇 해 전에 우리 교회에 돈을 조금 갖고 있는 분이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큰 빌딩은 아니지만 건물을 좀 크게 짓고 지하실은 예배당으로 꾸미겠습니다. 광성교회에서 부목사님 한 분을 보내 주시면 거기에서 제가 개척교회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광성교회는 돈 한푼 내지 마시고 거기에 개척교회를 할터니이 어디 어디 광성교회라는 이름만 붙이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개척교회를 자신의 돈으로 하겠다고 하니 좋습니까? 나쁩니까? 좋지 않습니까? 물론 좋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제가 "형제여 미안하지만 그거 그만 두십시오. 우리 부목사님을 보내지도 않겠고 광성교회라는 이름도 안 붙이겠습니다. 우리가 돈 한푼 안내고 왜 광성교회라는 이름을 붙입니까? 벼룩도 낯짝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자 "왜 그러십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형제가 그 곳에 교회를 세워 놓고 그 교회에 나가겠습니까? 우리 교회를 나오겠습니까?" 그러자 "아무래도 그 교회에 나가야하지 않겠습니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거기에 나가 앞자리에 앉아 감놔라 배놔라 하고 있으면 그 교회는 주인이 둘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고, 하나는 당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부목사님이 가서 어떻게 피곤해서 일을 하겠습니까? 당신이 돈만 내고 우리 교회를 나오겠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면서 허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 돈을 들여서 교회를 개척하겠다, 너는 돈 한푼 내지 않아도 된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옳고 또 해 봄직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이 덕이 됩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말입니다.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그 전에 우리 교회 부목사님 한 분이 제가 성지 순례를 하고 오니까 그 사이에 교회를 개척할 자리를 이미 얻어 놓았다고 하면서 "개척교회를 하겠으니 목사님 창립 예배를 드려 주십시오"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준비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은 아니지만 다른 교회에 나아가는 분이 돈을 내어서 홀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몇 가정과 함께 교회 개척을 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 계획을 세워 놓았고 이미 얻어진 것인데 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제가 창립 예배 설교를 했습니다. 저는 그 교회에 돈을 낸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모릅니다. 설교 중에 "미안하지만 이 홀을 얻는데 돈을 낸 사람은 다음 주일부터 이 교회에 나오지 마십시오. 이 자리에 와서 주인 노릇하면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절대로 교회에 유익이 못되고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함께 교회를 창립한 창립 멤버는 교회가 부흥 될 때까지만 있고 그 다음에는 다 흩어져 가십시오. 내가 이 교회 창립 멤버다 하여 좌지우지하고 있으면 교회에 절대로 덕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주일부터 돈을 낸 분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창립 멤버는 흩어져야 합니다. 교회에 유익이 되지 않고 덕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얼마나 좋아 보이고, 얼마나 옳은 일입니까? 얼마나 해 봄직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은 절대 덕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양심의 생활 (25-30)
도둑놈들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함께 도적질을 했으니 나 혼자 먹습니까? 나누어 먹습니까? 나누어 먹습니다. 네가 조금 더 가져보십시오. "이놈아 넌 양심도 없는 놈이야"라고 야단합니다. 도둑놈이 도적질해서 나누어 먹으면서 네가 조금 더 가지면 양심이 없다고 야단합니다. 도둑놈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양심은 화인 맞은 양심입니다. 소위 악한 양심입니다.
베드로사도는 베드로전서 3장 21절을 통하여'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양심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우리 보다 더 양심적일 수 있습니다. 더 아름다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양심을 선한 양심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양심만이 선한 양심입니다. 이 선한 양심을 따라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30절을 보면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시장에서 고기를 사오거든 아무 소리하지 말고 구워먹든지 삶아 먹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 우리가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바울사도가 그런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그 소리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분들은 고린도라고 하는 도시에 가 보십시오. 그 곳에 가보면 조금 터가 높고 좋다 하는 곳에는 전부 귀신의 신전 즉 우상의 전각들이 있던 자리로 큰 돌기둥이 우뚝 우뚝 서 있고 건물들은 모두 무너져 있습니다. 곳곳에 그런 것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서울 안에 교회가 많듯이 귀신의 신전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 신전에서는 날마다 수없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를 드린 고기를 전부 소비할 수 없어서 일부를 시장으로 내다가 팝니다. 그러니까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제물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는데 거의가 제물입니다. 그럴적에 시장에서 고기를 사오거든 제물이냐? 아니냐? 를 묻지 말고 그냥 먹어도 된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그 다음에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이 잘 차려 놓고 청하면 가서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고, 믿음 생활한지 얼마 안되어 믿음이 약한 사람이 그 사실을 보고 "집사님 그것은 바로 직전에 우상에게 제사 드린 제물입니다"라고 알려 주거든 내 양심이 아닌 그 사람의 양심을 생각해서 당장에 숟가락을 놓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즉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시장의 것은 사다가 마음대로 먹으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 자유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 의해서 판단을 받고, '감사합니다'하고 먹는 일이 어떻게 비방을 받겠느냐고 하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 때 고린도 사람들은 그렇게 집집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우상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드린 제물은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기에 마음대로 먹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제사 드린 음식, 옆집에서 굿하고 가져온 음식을 먹지 못하겠거들랑 저의 집으로 다 가져오십시오. 제가 다 먹겠습니다. 그 음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전부 하나님의 것이기에 '감사합니다'하고 먹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이 약합니다. 진짜 우상이 신인 줄 알고 거기에 드렸던 제물을 먹으면 부정을 타는 줄 알고, 큰 죄를 짓는 줄 알고, 지옥에 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은 절대로 먹지를 못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제사 음식을 먹고 있으면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됩니까?"라고 물어 오지 않겠습니까? 우상의 제물을 떳떳이 먹고 있으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이 시험에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약한 사람이 "우상의 제물이다"라고 가르쳐 주거들랑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숟가락을 놓고 나와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먹을 수 있으나 믿음이 약한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입니다. 내 양심이 존중을 받아야 되는 것처럼 약한 자의 양심도 존중해주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적인 생활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칼 발트라고 하는 현대 신학의 거장이 있습니다. "양심은 삶의 완전한 해석자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 양심은 내 삶을 해석해 주는 유명한 해석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모르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모르는 것이기에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 때 성경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해석을 잘 해 주면 속 시원히 '아 이런 것이로구나'하고 깨닫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내 양심은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해야될 일, 하지 말아야 될 일, 그리고 그밖에 옳고 그른 일 등등을 다 해석을 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심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양심적이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 양심을 절대 속이지 마십시오. 남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바를 행치 마십시오. 양심적인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선린의 생활 (31-33)
'선린'이라는 말은 착할 善자에 이웃 자를 씁니다. 즉 착한 이웃이라는 뜻임으로 선한 이웃으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이웃에 대하여 비유로 가르쳐 주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가 그 사람을 때리고 옷을 몽땅 벗겨 갖고 갔습니다. 가진 것을 몽땅 다 잃고 옷까지 잃은 것입니다. 거의 죽게 된 것을 내버려두고 갔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보고는 그냥 갔습니다. 누구가 묻는다면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레위인도 보고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교회 봉사에 일등 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교회 안에서는 그렇게 봉사를 잘 하는데 교회 밖에 나가서는 절대 봉사를 하지 않고 나 몰라라 합니다. 오늘날 이런 교인들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봉사를 시켜주지 않는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밖에 나가서는 절대 봉사를 하지 않습니다. 레위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여행 중에 그 모습을 목격합니다.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은 아주 친한 사이입니까? 원수지간입니까? 원수지간입니다. 자기를 그렇게 멸시 천대하는 유대인이 강도를 당해서 죽어갑니다. 저 같으면 지나가다가 한번 더 밟아 버리고 지나갈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게 자기를 깔보는 그 사람에게 달려갔습니다. 강도가 어디에 숨었다가 자기를 때리고 옷을 벗겨 갈는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베풀어주었습니다. 즉 원수를 도왔고 위험한 상황에서 도왔습니다. 어떻게 봉사를 했습니까? 성경에 보면 '가까이 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풀고 도우려면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리고 '싸매 주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상처받은 사람, 믿음에 상처받은 사람, 생활에 상처받은 사람에게 가서 싸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선한 이웃의 생활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나귀에서 내리고 자기 자리에 그 사람을 태웠습니다.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입장을 바꾸어 보면 이해 못할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잘 돌보아주었다고 했습니다. 주막에까지 가서 끝까지 도와주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이웃의 삶입니다. 이렇게 선한 이웃의 삶을 살 때 그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1절에서 33절을 보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라 하였습니다. 성가대 하시는 분들 중에 '저 사람 꼴 보기 싫어서 성가대 나오기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성가대에 거침돌이 되는 사람입니다. 말도 막합니다.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처럼 행동도 제멋대로 합니다. 꼴보기 싫습니다. 이런 사람은 거침돌이 됩니다. 성경은 그러지 말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즉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교회에나 거침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거침돌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거침돌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 실족케 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너에게 베풀려고 하면 내 것을 몽땅 챙긴 다음에는 베풀 것이 없습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밑져야만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차를 네거리 지하 주차장에 주차하라고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니까 눈을 딱 감고 교회 마당에 주차를 했습니다.
주님은 '전도하라 전도하라'하니 전도를 해야 됩니까? 안 해도 됩니까?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광성교회 집사님 한 분이 새로 나오기로 약속한 사람을 정문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사람이 오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되었다 싶을 때 그 사람이 나타나는데 교회 마당에 차가 꽉 차버렸습니다. 들어오겠습니까? 돌아가겠습니까? 돌아갑니다. 그 사람이 돌아가는 책임을 누가 져야 합니까? 이쯤되면 30년 믿었다는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조금 불편하다고 너를 위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이 무슨 선한 이웃입니까? 내가 손해를 안 보고, 내가 밑지지 않고는 너에게 편안함을 줄 재간이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이 그 말입니다. 내가 손해를 보고, 내가 좀 밑지더라도 또 불편하더라도 너의 유익을 구하고, 교회에 유익을 구하여 덕을 세우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선한 이웃의 생활을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호레시우스라고 하는 사람이 "이웃집에 불이 나면 나의 집도 위험하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처마를 맞대고 사는데 옆집에 불이 났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안됩니다. 그 집이 다 타버리고 나면 그 다음에는 내 집 차례가 아닙니까? 가령 신사복을 입고 어디를 갔다 오고 있는 중이라고 합시다. 그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옷을 입은 그대로 부엌으로 들어가서 물을 퍼다가 꺼야 되지 않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끄는 것입니까? 이웃을 위해서 끄는 것이지만 결국은 나를 위함이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이웃의 생활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장사해서 물건을 팔아야 됩니다. 이웃들이 몽땅 망했는데 어떻게 내 물건을 사 줍니까?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 될 때 내 물건을 사주어서 함께 잘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더불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선한 이웃의 생활입니다. 선한 이웃의 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결론을 지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첫째, 덕을 세우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유익하고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내가 하는 일이 좋아 보이고, 옳아 보이고 또 해도 되는 일이라 하여도 덕이 안 된다고 하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덕되는 생활만이 하나님께 영광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양심적인 생활을 해야 합니다. 내 양심과, 네 양심에 함께 충실한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마지막으로 선한 이웃의 생활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혼자 살게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닙니다. 더불어 살게 지음 받았기 까닭에 선한 이웃으로서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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