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잠언 20장 3절에서 7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의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바탕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돌 짝 밭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옥토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신 후에 옥토에 떨어진 씨만 뿌리가 내리고 싹이 나고 많은 열매를 맺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곳에 떨어진 씨앗은 그 씨앗을 받아들이고 키워서 열매 맺을 바탕이 안되어 있기 까닭에 전부 실패했다는 겁니다. 옥토만이 씨앗을 받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바탕이 되어 있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데는 바탕이 중요합니다.
우리말 사전을 찾아보면 둥지라는 말을 다른 말로 보금자리라고 하였습니다. 보금자리는 새나 짐승이나 심지어 사람들이 사는 거처를 가리킵니다. 살아가는 거처에서 쉼을 얻습니다. 거기에서 생활을 합니다. 또 새들은 거기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고, 짐승들은 새끼를 낳고 거기에서 양육을 하고 번성을 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둥지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도 아무 데서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제대로 되려면 바탕이 중요하고 둥지가 중요합니다. 믿음이 되는 둥지가 있고 안 되는 둥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이 잘되고 번성하는 둥지가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화평의 둥지 (3-4)
예수님께서 한번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고 그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 이상의 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복이 있는데 화평케 해야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는 곳마다 불화를 조성한다면 그 사람의 믿음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화목케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믿음은 자라는 것이요, 활성화되고 번성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불화케 하는 자는 화가 있나니 마귀의 자식이오"라는 말이 됩니다. 화평의 반대되는 말은 불화입니다. 복의 반대되는 말은 화입니다. 하나님의 반대는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식은 어디를 가든지 언제든지 항상 불화를 조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있는 말, 없는 말을 만들어 돌리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하고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이런 사람은 교회에 10년을 나왔다고 해도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서 믿음이 제대로 될리가 없습니다. 교회를 10년 동안 왔다 갔다한 것을 자랑할런지는 모르나 결코 믿음이 제대로 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 3절에서 4절을 보면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게으른 자는 가을에 밭 갈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거둘 때에는 구걸할찌라도 얻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다툼을 멀리 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어늘'이라고 하였습니다. 다툼을 멀리한다는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화평케 한다는 말입니다. 저 쪽에서 자꾸 싸움을 걸어옵니다. 또는 시비를 걸어 올 때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싸울 재간이 없습니다. 다툴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가는 곳마다 또는 언제나 화목케 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화목 그 자체가 그에게는 복이요, 영광이라는 것이 본문입니다.
또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달리 설명하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할 수만 있으면 다투지 않고, 원수 맺지 않고 사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자꾸 맺는 사람은 아주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가령, 가는 곳마다 원수를 맺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원수들이 그런 사람이 잘 되도록 내버려둡니까? 원수들이 온갖 훼방을 다 놓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원수를 자꾸 만드는 사람은 미련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목케 하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영광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다투는 일이 있을지라도 해가 지도록 절대 분을 품지 말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밤 12시가 되어야 그 다음날이 되지만 히브리 사람들은 해가 지는 그 시간부터 다음 날입니다. '해가 지도록'이라는 말은 혹시 다투고 싸우는 일이 있어도 그 날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혹시 살아가다 원수를 맺게 되면 그것을 빨리 풀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원수가 줄이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헐벗거든 입혀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원수와 화해하게 되고 원수가 더 굳게 맺어 질 일은 없지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말씀은 빨리 원수를 풀어 버리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화평이라는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은 잘 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서 선거를 한창 치를 때의 일입니다. 스텐턴이라는 사람이 악랄하게 아브라함을 헐뜯었습니다. 그는 쥐꼬리만한 것을 황소만한다고 하고, 없는 것도 말을 만들어서 누명을 씌웠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링컨이 그 사람 때문에 얼마나 곤경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링컨 대통령 진영에서는 '저 사람은 적이요, 원수'라고 합니다. 그러나 링컨 대통령이 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대통령이 되어 장관들을 임명하고 조각을 할 때 제일 마지막 국방장관에 그렇게 못살게 굴던 스텐턴을 임명하였습니다. 그의 측근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각하 저 사람은 우리 적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국방장관의 직책을 저 사람만큼 수행할 능력자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합니다"하고 스텐턴을 국방장관에 기어이 임명을 했습니다. 얼마나 장관직을 잘 감당하는지 모릅니다. 몇 해가 지나서 아브라함 링컨이 암살을 당했습니다. 그 때 스텐턴이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 조사의 내용을 요약하면 두 마디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많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다'고 칭송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로 '이제 그 분은 모든 세대에 속한 사람이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에 속한 사람이라면 이 시대 사람만 알고 끝이 납니다. 그러나 모든 세대에 속했기 까닭에 세대가 흘러가고 또 다른 세대가 와도 아브라함 링컨은 계속 알아 주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만큼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브라함 링컨을 보십시오. 스텐턴을 계속 따돌리고 원수로 내 버려 두었더라면 죽을 때까지 괴롭힘을 당했을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원수로 남았을 것입니다. 원수를 풀어 버리고 화평케 하고 화목케 한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우리의 믿음이 이처럼 화평이라고 하는 것에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이 번성하고 잘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충성의 둥지 (5-6)
바울사도는 디모데전서 1장 12절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직분이 먼저입니까? 충성이 먼저입니까? 충성하니까 직분을 맡겼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2절을 보면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잘 여길찌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직분 이전에도 충성이요, 직분 이후에도 충성이라는 말입니다. 처음에도 충성, 나중에도 충성해야 합니다. 일군에게서 충성을 빼고 나면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도, 축복도 역시 충성을 빼고 나면 자녀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충성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5절에서 6절을 보면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찌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는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나를 해치고 빼앗으려는 저 사람의 궤계를 명철한 자는 다 알아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명철한 사람은 귀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남에게 인자한 사람은 더 귀하다고 계속해서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을 누가 만날 수 있으랴'고 하였습니다. 즉 인자한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무엇인가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그 사람 보다 더 귀한 사람이 충성된 사람인데 누가 만날 수 있겠느냐?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은 많을지라도 충성된 사람을 구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구하기 힘든 충성된 사람, 그 사람의 믿음이 제대로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충성이라는 둥지에 믿음을 깃들이면 그 믿음은 잘 되고 성장하고 번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충성'이라는 말과 '믿음'이라는 말을 따로 나누어 쓰지 않습니다. 우리는 '충성'이라는 말이 따로 있고, '믿음'이라는 말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국 사람들 중에는 믿으면서도 충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충성'과 '믿음'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충성하는 것 같은데 제 기분으로 하고 믿음으로 아니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그런데 히브리사람들의 '아만'이라는 단어를 우리 성경에서 번역할 때에 '믿다'라는 말로 번역을 했는가 하면 '충성하다'라는 말로도 많이 번역을 했습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찾아가 보면 '아만'이요, '충성하다'라는 말을 찾아가 보면 '아만'입니다. 믿음과 충성은 절대 나누어 질 수 없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만은 아주 귀한 것입니다. 성경에서 히브리인을 통해서 말씀해 주는 내용은 '이 믿음과 충성의 뿌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믿음은 반드시 충성에 뿌리를 내리고, 충성이라는 둥지에 깃들이어야만 거기서 자라고 번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는 만큼 충성하는 법입니다.
스코틀랜드 에딘버러라고 하는 곳에 가면 충견비가 있다고 합니다. 개 한마리가 그렇게 주인을 좋아했습니다. 주인도 그 개를 더없이 사랑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주인이 그 개를 데리고 다니고, 주인이 어디를 가면 꼭 따라가서 심부름을 시킬 때 얼마나 잘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죽었습니다. 주인을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가족들이 저녁때 집에 돌아와 보니 개가 없었습니다. 동네방네 찾아 다녔습니다. 여기 저기 찾아봐도 없는지라 마지막에 그 주인의 무덤에 가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개가 그 무덤에 버티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끌고 왔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 또 없어져서 주인의 무덤에 또 가보았니 개가 그 무덤 앞에 버티어 앉아 있었습니다. 아무리 끌고 와도 개가 오지를 않습니다. 집안 사람들이 '우리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자'하여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면 개는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고 무덤 주위를 돌고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러면서 14년이 지났습니다. 그 개가 죽으니까 그 옆에 개 무덤을 해 놓고 '충견비'라는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 개는 주인만 알고, 오로지 주인만 사랑하고, 주인에게만 충성하였습니다. 이것이 충성이 아닙니까?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예수 믿는 사람도 이렇게 우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반드시 충성이라는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거기서 활동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믿음은 충성의 둥지에 깃들여야 잘되는 법입니다. 이 말씀을 꼭 명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정직의 둥지 (7-)
본문으로 돌아가 7절을 보면 '완전히 행하는 자가 의인이라 그 후손에게 복이 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후손은 조상을 잘 만나야 합니다. 자식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합니다. 부모가 망할 짓을 하는데 자손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부모가 정말 복 받을 의인이면 자손이 복을 받습니다. 조상이 복 받을 조상이면 자손도 복을 받습니다. 부모 된 여러분들, 할아버지 할머니로서 조상된 여러분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후손이 복을 받겠는가? 하는 교훈을 이 본문에서 많이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완전히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빈틈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즉 완벽의 뜻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합니까? 하나님만이 완벽할 뿐입니다. '완전히 행하는 자'라는 말의 뜻은 '정직한 자'라는 뜻입니다. 정직이라고 하는 둥지에 믿음이 깃들여야만 그 믿음이 자라고 번성한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왜 정직인지 아십니까?
유다의 모든 왕들 중에서 하나님 앞에 아주 독실하고, 진실하고, 성실한 왕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그 조상 다윗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라고 하였습니다(왕상 15:5). 즉 유다의 왕들 중에 정말 정직하다 싶은 왕들이 있으면 '그 조상 다윗'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윗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보기에'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은 보기도 하고 못 보는 일도 있습니다. 듣기도 하고 못 듣는 일도 있습니다. 알기도 하고 모르는 일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보기에 정직한 사람'은 사람 보는 앞에서는 천사입니다. 사람이 보고 듣고 사람이 알고 있기에 사람 앞에서는 그렇게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래서 '사람 보기에'라는 표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뒷골목에 가면 사람이 없는지라 사람이 볼 수가 없기 까닭에 별 짓을 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보기에'입니다. 즉 사람 표준입니다. 그런 사람의 정직은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못 보아도 하나님은 보십니다.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듣습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 '하나님 보시기에'를 표준으로 하는 사람은 사람이 있든 없든 보든 안 보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보시기에'를 표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완전히 행하는 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즉 정직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처럼 정직하게 사는 부모를 둔 자식, 또 그런 조상을 둔 후손은 복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정직이라고 하는 둥지에 깃들일 때 번성하고 잘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의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입니다.
밀러 스타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정직하라'는 말을 했습니다. 내가 내 양심을 못 속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속여도 절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속이지 못합니다. '죽을 때까지 내 양심에 정직하라'는 말은 참 훌륭한 말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귀한 말이 있습니다. 내 양심은 나도 모르고 속이는 일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까지 양심적인 줄 알았는데 지나 놓고 보니 나도 속았다고 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내가 나 자신에게 정직해도 잘 못될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라는 표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정직입니다.
제가 청년 때 파계라는 영화를 보고 상당히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을 잠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아가씨 하나가 훈련을 받고 모든 과정을 거쳐서 수녀원에 수녀로 임명이 되면서 원장 앞에서 선서를 합니다. 수녀원의 규칙이 얼마나 엄한지 자꾸 그 규칙을 어기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괴로워하다 못해서 원장에게 사표를 냅니다. "왜 그러느냐?" "정말 수녀 노릇을 못하겠습니다" "왜 못하겠느냐?" "더 이상 하나님과 내 자신을 속이지 못하겠습니다"그리고는 보따리를 싸 가지고 나왔습니다. 파계라는 말은 '깨뜨리어 헐어 버린다'는 뜻입니다. 내 양심은 속이지 못할 것 같아도 지나 놓고 보면 나도 모르게 내 양심을 속였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속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정직에 믿음이 깃들여야 합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은 화평이라고 하는 둥지에 깃들여야 합니다. 그리해야만 번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가는 곳마다 화평을 도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믿음은 충성의 둥지에 깃들여야만 합니다. 거기서만 활동하고 성장하고 번성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정직의 둥지에 깃들여야 합니다. 부정직한 곳에서는 믿음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질식해서 죽습니다. 화평과 충성과 정직의 둥지에 깃들이는 믿음이 되어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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