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의 잠언 2002-05-03 17:48:57 read : 14055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잠언 10:1-4
오늘은 잠언 10장 1절에서 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생활의 잠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잠언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마샬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쉽게 말씀드리면 격언입니다. 격언이라고 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누가 도서관에 앉아 연구를 해서 '이렇게 말을 만들자' 하여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을 살아오면서 '사실이 이렇구나' 하여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격언 가운데는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 중에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가만히 보니까 여든 살 난 할아버지가 도둑질을 자꾸 합니다. 그래서 알아 봤더니 세살 적부터 남의 것을 빼앗아 먹다 보니 여든 살이 되어서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교육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종종 이야기하지만 젊은 어머니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애들의 기를 죽이지 않는다고 즉 기를 살려 준다고 못할 짓을 하는데도 그냥 내버려두곤 합니다. 못되게 노는 그 기를 살려 주면 그 애가 커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커서도 못되게 놀지 않겠습니까? 교육이라고 하는 것은 할 것과 못할 것을 가려서 할 것을 하게 하고, 해서는 안될 일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죽일 것은 죽여 놓고 살릴 것은 살려야됩니다. 세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이 지나온 날의 인간의 삶, 자기가 지켜본 모든 것들 중에 격언이 될 만한 말들을 모아서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기록으로 남겨 준 것이 잠언입니다. 잠언은 생활의 격언입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솔로몬은 어떤 생활의 격언을 말해 주고 있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지혜의 생활 (1-)
솔로몬은 시편 127편 3절을 통해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은 여호와 즉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업이다'라는 말씀인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자네 요즘 뭘 하나?' '조그마한 기업을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중소 기업을 경영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기업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밤늦게까지 온갖 시간을 그 기업에 투자하고 내 돈을 투자하고도 모자라면 남의 돈까지라도 꾸어다가 투자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이 잘 돌아감으로 불같이 일어나 잘되고 성공하면 '내가 성공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또 그 기업이 망하면 '내가 망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업이 망했는데 내가 성공하는 법은 없습니다.
성경은 그런 기업 중에서도 최고의 기업이 아들 딸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너 한번 기업을 경영해 봐라'하고 기업을 주셨는데 그 기업이 아들 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들 딸을 위해서 전부를 투자합니다. 시간도 투자하고, 정성도 투자하고, 재산도 투자를 합니다. 그래서 아들 딸들이 잘 되면 그 아버지 어머니는 성공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경영하는 공장과 사업은 잘되었는데 아들 딸들은 망해 보십시오. 그 공장을 다 준다고 한들 아들 딸의 실패를 어디에 가서 보상받겠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의 기업도 좋지만 하나님이 주신 기업은 아들 딸이라는 것입니다. 아들 딸들이 잘 될 때 그 가문이 잘 되는 것이요, 그 가문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어서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태의 열매는 자식입니다. 성경은 자식이라는 말을 바꾸어서 태의 열매라고 하였습니다. 아들 딸들이 잘해서 상을 받으면 그것이 바로 부모의 영광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아들 딸들이 잘 하고 상을 받으면 '이것은 다 부모의 덕분입니다'하고 영광을 부모에게 돌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자녀가 잘 되면 이렇게 기업도 되고 상급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자식이나 전부가 다 기업이 되고, 어느 자식이나 전부 상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녀라고 해서 다 똑같은 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을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지혜로운 아들 딸은 아비에게 큰 기쁨이요, 자랑거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지혜로운 아들 딸만이 부모에게 성공적인 기업이 됩니다. 미련한 아들 딸은 어미의 근심이 됩니다. 즉 어미의 부끄러움이요, 수치가 된다는 말입니다. 실패한 기업입니다. 아들 딸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자녀들 중에는 지혜로운 아들, 지혜로운 딸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이 말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여러 형제가 있었습니다. 즉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여러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여러 아들 중에서 대표적인 아들은 둘 입니다. 아들 중에서 아주 못된 아들은 압살놈입니다. 눌러 죽이는 것을 압살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압살놈은 정말 눌러서 죽일 놈입니다. 이 아들이 가만히 보니까 왕자들이 많은지라 가만히 있다가는 왕의 자리가 자기에게 돌아올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불량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세력화한 다음에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가 왕의 자리에 앉으려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한 때 아버지를 내 좇았습니다. 처음에는 성공한 것 같았지만 나중에는 그 반란에서 패배하고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성지 순례를 가게 되거들랑 압살놈의 무덤을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또 유대인들이 지나갈 적마다 돌을 던져서 돌무덤이 되다 싶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좋다고 한들 아버지를 죽이고 왕 노릇을 하겠다니 참 고약한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움이요, 수치가 아닙니까? 자랑이라 할 것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 반대되는 아들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아버지 다윗에게 자랑거리요, 기업이 될 만한 아들입니다. 솔로몬의 삶 중에 유명한 삶이 기도하고 지혜를 축복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언제 했습니까? 꿈속에서 한 것입니다. 제 정신 차리고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꿈속에서 기도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상시에 기도생활을 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꿈속에 나타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라고 물으셨을 때 솔로몬은 "하나님! 나는 하나님이 왕으로 세워 이 직분을 주셨는지라 나에게 지혜를 주셔야 이 직분을 잘 감당하겠습니다. 다른 것은 주지 않으셔도 좋지만 지혜만은 꼭 주십시오"라고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직분을 맡겨 주시니 그 직분을 잘 감당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아무 아무 그 사람이 미워 죽겠으니 그 사람을 처리해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부귀영화를 달라는 기도 역시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않은 부귀영화까지 더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태평성대를 이루었습니다. 즉 평화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솔로몬은 사실상 그 아버지의 기쁨이 되고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으로 모실 줄 아는 지혜로운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지혜로운 생활의 잠언을 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꿈속에서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꿈속에서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평생동안 기도라는 것은 생각지도 않기 때문에 꿈속에서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꿈속에서 종종 설교를 하곤 합니다. 여러분은 꿈속에서 설교한 일이 없을 줄 압니다. 설교를 하는 사람만이 꿈속에서 설교를 해 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가지고 일주일 동안 씨름하는데 설교가 잘 되는 내용이 있고 잘 안되어서 고통스러운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묵상하고 고민하고, 묵상하고 고민하다 보면 밤에 잠자다가 꿈속에서 그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제가 설교에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다 보니 꿈에서도 설교를 한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꿈속에서 기도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기도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꿈속에서도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으로 모시고 '나는 그 하나님께 기도해야 되는 그런 존재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지혜가 아닙니까? 박사 학위 셋을 받았다고 해서 성경은 지혜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으로 모시고 나는 무엇이며, 내 위치가 무엇인지 자기 자리를 찾아 앉고 서는 사람 즉 자기를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헬로라고 하는 사람이 "소매치기"라고 하는 조그마한 작품을 썼습니다. 이 사람은 소매치기 기술이 얼마나 좋은지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 있는지 다 압니다. 왜냐하면 남자들은 주머니에 돈이 두둑하게 들어 있으면 생기가 팔팔 납니다. 저런 사람은 100만 원짜리다 하고 지갑을 꺼내 보면 영락없이 100만 원짜리가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코가 쭉 빠져 있는 사람은 천 원짜리 몇 장만 들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지갑은 아무리 꺼내봐야 천 원짜리 몇 장뿐입니다. 도둑놈이 그 사실을 먼저 압니다. 그래서 네 돈은 네 돈이 아니라 내 돈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대로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얼마나 소매치기를 잘하는지 나중에는 네 돈을 전부 꺼내 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소매치기한 돈을 모아 떼부자가 되었습니다. 떼부자가 되니 그 주위에 미녀들이 몰려듭니다. 아름다운 여자들의 숲 속에서 재미있게 살고 하고 싶은 일을 다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소매치기 버릇은 버리지를 못합니다. 감쪽같이 소매치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사람이 어떻게 해서 돈을 벌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중년 부인이 지나가는지라 그 핸드백에서 지갑을 꺼냈습니다. 지갑을 꺼내면서 슬쩍 얼굴을 보니 어디에서 본 얼굴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굴까 생각하다가 머리에 떠올라 무릎을 쳤습니다. 그 부인은 다름 아닌 옛날에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항상 자기 옆자리에서 공부하던 단짝이었습니다. 그렇게 재미있게 지내던 단짝이 숙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여자의 것을 모르고 꺼냈습니다. 그 때 자기 자신을 발견합니다. '나의 단짝은 이렇게 훌륭한 숙녀가 되었는데 나는 도둑놈이라니 이 꼴이 무엇인가? 내가 왜 이지경이 되었는가'생각하고 지갑을 돌려주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렇게 해서 그 옛날에 단짝이었던 그 숙녀의 도움을 받아 교회에 나가게 됩니다. 교회에 나가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지나온 날의 온갖 즐거움이 사실은 참 즐거움이 아니었고, 성공이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참 성공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영접하다 보니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발견한 그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도와주실 지라도 이런 사람을 돕고, 축복을 해도 이런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이것이 지혜의 생활이요, 그 생활이 곧 지혜임을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아무리 출세를 했다고 한들 부모를 몰라보는 자식이 자식입니까? 아무리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된다고 할지라도 부모를 몰라본다면 지혜로운 자식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하나님을 알아보는 성도가 바로 지혜로운 자식입니다. 지혜로운 자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돕고 축복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의리의 생활 (2-3)
다윗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깊이 사귀는 친구는 하나 내지는 둘이면 족합니다. 그 나머지는 알고 지내면 됩니다. 다윗에게는 친한 친구가 꼭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요나단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 즉 왕자입니다. 다윗은 쫓겨다니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혀 신분이 다름에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평생에 도움만 받고 요나단은 친구 다윗에게 평생 도와만 줍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둘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요나단은 왕과 함께 전쟁에 나갔다가 한날 한시에 왕과 함께 전사를 당했습니다. 다윗은 쫓겨다니는 신세였다가 사울왕을 이어서 왕의 자리에 올라 나라를 평정하고 자기의 기반을 굳혔습니다. 이제는 옛날에 그 도움을 주었던 친구, 도움 받을 때마다 이 신세는 꼭 갚겠다고 다짐했던 그 친구 요나단이 생각났습니다. 신하들을 시켜 요나단의 자손들을 찾아보라고 하였습니다. 신하들이 전국을 샅샅이 뒤져서 요단강 건너 마하나임 땅에 숨어서 지내고 있는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옵니다. 그 아들이 절름발이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아들들과 똑 같이 왕자의 위치에 놓고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살도록 하면서 온갖 배려를 다 했습니다. 친구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킨 다윗왕의 의리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가 너의 도움 받을 때는 할아버지 할아버지 하지만 전혀 도움이 필요치 않다 싶을 때에는 나 몰라라 합니다. 안면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배신자, 변절자입니다. 다시는 상종도 못할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내가 아무리 손해를 봐도, 아무리 어려워도 의리를 지킬 수 있는 그 사람이 진짜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도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의로운 생활이라고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에서 3절을 보면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 여호와께서 의인의 영혼은 주리지 않게 하시나 악인의 소욕은 물리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불의한 재물은 무익하다'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자기가 땀흘려 정정당당하게 벌지 아니한 부정축재는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에 재판 받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땀흘려 벌어 놓은 돈 때문에 재판을 받는 것입니까? 전부 불의한 돈 때문에 인생을 망치고 지금은 구속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재물을 모았다고 해서 우리가 부러워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땀흘려 정정당당하게 벌어 모은 부자는 우리가 존경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부자라고 해서 절대로 시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못된 부자는 얼마 안 가서 다 들통이 나고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정당당한 부자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입니다. 내가 못산다고 부자를 시기하고 미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의한 재물은 무익합니다.
본문은 이어서 '의리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동시에 '의인의 영혼은 하나님께서 주리지 않게'하십니다. 성경은 의리를 지키는 사람을 의인과 똑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원어인 히브리말에 의하면 본문에 나오는 의리를 체다카라고 합니다. 체다카라고 하는 낱말은 구약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오는 말인데 전부 '의'라고 하는 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은 '의리'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잘하고 하나님과의 의리를 지킬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갖 혜택을 다 받을 때는 그저 '하나님, 하나님'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다고 할 때 교회는 내 몰라라 하고 교회를 소홀히 합니다. '내가 미쳤지'라고 하면서 봉사를 그렇게 잘 하던 사람이 봉사를 안하고 주일에도 가책 없이 행락을 찾아 돌아다니면서 변절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어 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온갖 혜택을 다 받았으면 하나님께도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의리를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의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라고 하는 말을 본문에서는 '의리'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에게도 의리를 지켜야 되지만 하나님께도 의리를 지키는 의로운 생활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고 축복이 있고 인생의 승리가 있고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7절을 보면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튼이라고 하는 주경신학자는 이 말씀에 대해서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내가 약속을 지키었으니'라고 새롭게 해석을 했습니다. 약속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의리를 지켰다는 말이 됩니다.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할 때 언제 주님과 약속을 했는지 아십니까? 바울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주님과 만났습니다. "너는 이방인의 그릇이라 이제는 이방으로 나가서 나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면서 주님이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 때 바울사도가 "주여 좋습니다"하면서 철석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바울사도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손해를 보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환난과 고초를 겪습니까? 그래도 나이 많아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냅니다. 그렇게 손해를 보고 그렇게 고생스러워도 나는 약속을 철저히 지켰다고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의리가 아닙니까? 이것이 의로운 생활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도, 그리고 너에게도 의리를 지키는 의리의 사나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기뻐하고 이런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리플레라고 하는 사람이 "믿거나 말거나"라는 이야기만 모아서 책을 냈습니다. 그 중에 내용 한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미국 돈으로 5달러하는 쇠뭉치 하나가 있었습니다. 별것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을 녹여서 말발굽을 만들면 50달러 짜리가 됩니다. 10배가되는 것입니다. 다시 녹여서 두드리면 찌꺼기가 다 빠져나가고 강철이 됩니다. 그렇게 하여 만들어진 바늘을 팔면 5,000달러가 됩니다. 1,000배가되는 것입니다. 다시 두드려서 또 다시 찌꺼기를 버리고 시계를 만들면 50만 달러가 됩니다. 10,000배가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똑 같은 쇳덩어리로서 재료는 같고 수량도 똑같은데 무엇이 되느냐에 따라서 값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되느냐가 상당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됐느냐? 못됐느냐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됐느냐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거기에 합당한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고도 아들 딸 노릇을 못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백성 노릇을 안 해 보십시오. 아들 딸 노릇도 안 하면서 백성이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기 까닭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아들 딸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기본문제입니다. 그러나 아들 딸이 되었으면 아들 딸 노릇, 백성이 되었으면 백성 노릇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대한 의리요, 너에 대한 의리입니다. 얼마나 믿음생활에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하나님께 대해서 의리를 다 지키시고, 이웃에 대해서도 의리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에게 승리가 있다고 약속하고 있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공들이는 생활 (4-)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손을 게으르게 놀린다는 말은 게으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똑 같은 일이어도 손을 부지런하게 놀리면 그 손이 열 번 또는 백 번이 갑니다 그 만큼 공이 들고 정성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나름대로 생각하여 '무슨 일이나 공들이지 않은 일은 되는 것이 없고, 공들이는 일은 반드시 성공한다'라고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장사도 정성을 들이고 공을 들인다면 그 장사는 되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에도 정성을 들이고 공을 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도 정성을 들이고 공을 들일 때 그 믿음 생활이 성공하는 것입니다. 믿음 생활에 공을 들이지 않는다, 정성이 없다고 한다면 그 믿음은 되지 않습니다. 공들이는 생활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할 생활이요, 즉 생활에는 우리의 공이 들어가야 한다고 솔로몬은 증언했습니다. 이런 생활에 하나님의 도움과 축복이 있고 성공이 있다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도의 생활 잠언은 첫째 지혜의 생활입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상급입니다. 그 결과는 부모로 기쁘게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생활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고 지혜입니다. 지혜로운 생활에 축복이 있습니다. 둘째, 의리의 생활입니다. 본문의 의리라는 말은 "의"로 많이 번역되었습니다. 의리를 지키는 삶이 의로운 삶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항상 의리를 지켜야 합니다. 의리의 생활에 축복이 있습니다. 셋째, 공들이는 생활입니다.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됩니다. 손이 부지런하다는 말은 공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업에 공을 들이는 것처럼 믿음 생활에 공을 들이면 성공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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