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물 2002-05-03 17:45:04 read : 14126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전도서 3:10-13
오늘은 전도서 3장 10절에서 13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3절을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하므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제목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 즉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 1장 17절에서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전혀 변덕을 부릴 줄 모르시는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 같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내려주십니다. 이 말씀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들 중에 절대로 우리에게 나쁜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믿는 사람들도 고난을 많이 당하던데 그럼 그 고난도 하나님의 선물입니까?"라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은 지내놓고 보면 나쁘거나 잘못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 고난을 당할 때는 좀 괴롭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심지어 고난까지라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면 결과가 좋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신 율법도 좋은 것입니다. 사실 잘 몰라서 그렇지 율법주의가 나쁜 것이요,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가정, 우리의 믿음, 약속된 하늘나라 전부 우리들에게 주신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좋은 것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선물이 무엇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모하는 마음 (10-11)
결혼하기 전에 남녀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눈만 감으면 그 사람이 생각이 나고, 또 보이기도 합니다. 열 사람이 옆에서 이야기하며 떠들어도 그 사람의 소리만 들립니다. 사모하니까 그 사람의 소리만 들리는 것입니다. 젊은 청년들은 이 말이 실감이 날 것입니다. 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혼 한 후에도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암담해 지는 것 아닙니까? 일할 때는 혹시 일하노라 잊고 있다 할지라도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가 되면 아내를 그리는 마음 까닭에 집으로 직행하게 됩니다. 아내는 출근해서 일하고 있을 남편을 그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사모하는 마음이 없으면 그 가정은 참고 사는 결혼 생활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모하는 마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 바탕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씨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씨뿌리는 자가 나가서 씨를 뿌릴 때 더러는 길바닥에 떨어집니다.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절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새가 먹어 버리고 맙니다. 열매가 없습니다. 길바닥 같은 완고한 마음에는 말씀이 들어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또 더러는 흙이 아주 얇은 돌밭에 떨어집니다. 떨어져서 싹이 나긴 했지만 햇빛이 워낙 강렬하기에 곧 말라져 죽고 맙니다. 돌은 많고 흙은 얇기 때문입니다. 이 땅은 아주 척박한 땅입니다. 이것은 메마른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러는 가시덤불에 떨어집니다. 씨가 떨어져서 싹은 났지만 가시가 기운을 막아 버렸기 때문에 열매가 없습니다. 앞뒤가 꽉 막힌 마음을 뜻합니다. 사람을 상대하다보면 앞뒤가 꽉 막힌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막힌 사람은 절대로 말씀이 들어가지를 못하고, 들어가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그런가하면 옥토에 떨어진 씨는 백배의 결실을 맺습니다. 옥토는 기름진 땅입니다. 다른 것들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흙으로서 물기도 적당합니다. 그런 밭에서는 백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이 옥토 같은 마음은 아주 부드러운 마음, 아주 순순한 마음, 기름진 마음을 뜻합니다. 그 마음에 말씀이 떨어지면 반드시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마음 바탕이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지느냐? 혹은 누구를 사모하느냐? 가 큰 문제입니다. 옆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도 내 마음에 없는 그 이웃에게는 나 몰라라 합니다. 그러나 천리 만리 떨어진 곳에 사랑하는 아들 딸이 있고 애인이 있다면 사모하기 까닭에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전화를 합니다.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에게 하늘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을 사모하고, 그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그 마음 바탕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요, 축복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에서 11절을 보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는 것입니다(10상반절). 모든 것을 지었는데 때가 되면 그것이 전부 아름답게 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지었다는 모든 것은 온 우주 만물을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11절을 보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은 노고 즉 고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인생에게 고생과 고난까지도 주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뿐만 아니라 믿는 사람에게도 주기에 인생들에게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고생은 싫은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과 고통은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고난까지라도 결과는 축복이 됩니다.
둘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 속에서 즉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에서도 그 고난자체를 보지 않고 저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마음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 자체만 보면 고난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영원을 사모하게 되면 얼마든지 그 고난을 이겨나가게 되고 또 때가 되면 아름답게 된다는 말입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셋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알게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즉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한계가 있기 까닭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종합해서 말하면 고난의 결과는 때가 되면 아름답게 됩니다. 즉 결과는 축복이 됩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 중에 있을 때나 아름답게 되었을 때나 늘 변함 없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한계가 있는 유한한 존재이기 까닭에 영원을 사모해야 합니다. 더욱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재미있게 놀다 보니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헤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루살이가 "메뚜기야 잘 가라, 다시는 못 보게 될거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메뚜기도 하루살이에게 "그래, 내일 또 놀자"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내일? 내일이 뭔데?"라고 물어 봅니다. 하루만 살고 죽어 없어지는 하루살이가 내일을 알겠습니까? 모르기에 내일이 뭐냐고 물어봅니다. 하루살이가 내일을 모른다고 내일이 없습니까? 내일이 있는데 모르는 것뿐입니다. 모르기에 내일을 사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개구리가 메뚜기를 찾아와서 한 철을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이제는 철이 바뀌어 메뚜기와 개구리가 제 갈 길을 가야할 시간이 왔습니다. 개구리와 메뚜기가 헤어지면서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개구리야 잘 가라"하고 인사를 합니다. 개구리도 메뚜기에게 "그래, 메뚜기야 내년에 또 다시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러자 메뚜기가 개구리에게 "내년이 뭔데?"라고 물어봅니다. 메뚜기가 내년을 알고 있겠습니까? 모르고 있습니까? 죽으면 끝이 나기에 모릅니다. 그러면 메뚜기가 내년을 모른다고 내년이 없는 것입니까?
사람이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든지, 한철을 사는 메뚜기 같은 인생이든지 몇 해를 사는 개구리 같은 인생이든지 간에 영원한 하늘의 세계를 모른다고 해서 영원한 하늘의 세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구리는 메뚜기나 하루살이보다는 오래 살지만 그래도 개구리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즉 영원의 세계는 보장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원의 세계를 보장받은 사람은 우리들뿐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영원의 세계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 까닭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라도 영원을 늘 사모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실은 무시해도 좋습니까?"라고 물으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현실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은 현실은 내가 죽으면 나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죽고 나면 이 세상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현실은 잠깐이요, 그 다음부터는 끝도 없는 영원입니다. 바로 하늘의 세계입니다. 하늘의 세계를 사모하면서 사는 사람은 인생이 달라집니다. 땅의 것만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영원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인생의 삶이 천양지차입니다. 영원을 위하여 전력투자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인생을 값지고 아름답고 훌륭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선행의 기쁨 (12-)
성가대원이 성가대에서 봉사하는 일이 선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악한 일입니까? 선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자꾸 결석을 합니까?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할 때 기쁨으로 합니까? 그렇지 아니하면 억지로 합니까? 기쁨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왜 성가대석에 서서 인상을 쓰면서 찬양을 합니까? 생글 생글 좀 웃으면서 할 일이지 왜 인상을 쓰면서 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 '찌릉소 닭보듯 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그 속담이 전국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찌릉소가 콩 깍지를 맛있게 먹고 있는데 닭이 깍지 속에 콩알이 있나 해서 주워먹으려고 가까이로 옵니다. 그러면 찌릉소는 닭이 오기만 하면 받아 버리려고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그래서 '찌릉소 닭보듯 한다'는 속담이 생겼습니다. 성가대원이 찬양을 할 때 왜 찌릉소가 닭 보듯이 하고 있느냐? 라는 겁니다. 생글 생글 웃으면서 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기쁨으로 하는 표시입니다.
성경에서 '선하다' 할 때에는 제 구실을 잘 하는 경우입니다. 즉 천지를 창조하실 때 창조된 것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더라고 하셨습니다. 그 '좋더라'는 말이 '선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는 것을 선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가대원이 선하다"할 때 항상 제 시간에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가대원이 주일에 설악산에 갑니다. 그런 경우 성경은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기뻐하며 선을 행한다는 말씀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2절을 보면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오랜 생활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본문 말씀을 조금 바꾸어서 성가대원들은 '내가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성가대원 노릇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알았고'라고 읽으면 성가대 대원들은 이 말씀이 마음에 와서 닿을 것입니다. 세상에 성가대원으로 봉사하되 기쁨으로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하는 것은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도 기쁨으로 하는 것보다는 좋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항상 구체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선을 행한다는 것'은 남에게 무엇을 조금 베풀어준다 혹은 적선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의 선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선을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성가대원이 자리를 비워놓고 설악산에 가서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뒤따라 산을 오르던 중년 부인이 '찬송을 부르려면 교회에서 불러야지'하고 한마디하고 지나갑니다. 사실은 자기도 권사인데 말입니다. 주일에 성가대원에게 설악산은 제 자리가 절대로 아닙니다. 주일에 등산은 제가 할 일이 아닙니다. 제 자리에 앉아서 제가 할 찬양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성경은 '보기 좋다'또는 '선하다'고 합니다. 성가대원에게 찬양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제 본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주신 내 본분, 내 사명, 내 자리에서 내 구실을 기쁨으로 잘 할 때 하나님은 선하다고 하십니다.
가정에 돌아가면 아버지가 있고, 어머니가 있고, 아들이 있고, 딸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하면 그 가정은 아름답고 선한 가정이 됩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남편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지겨워서 나 이제는 남편 그만두겠다'고 한다면 그 집안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머니 역시 '나도 이제는 지겨워서 보기도 싫다' 하면서 남편이 돌아와도 저녁상을 차려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 그 가정은 꼴이 뭐가 되느냐? 는 말입니다. 아들이나, 딸이나, 엄마나, 아빠나 전부 제 자리에서 제 구실을 잘하며 살아갈 때 성경은 '선하다'고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더라'고 하십니다. 동시에 아들 노릇도, 딸 노릇도 부모 노릇도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들을 기쁨으로 행하고, 선을 행하므로 또 다시 기쁨이 새로워지는 그 선행의 기쁨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입니다.
멜랜드라고 하는 미국인 선교사가 브라질 오지에 들어가서 평생 동안 선교를 합니다. 이 사람은 이름 있는 의사로서 선교사를 자원해서 갔습니다.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인디안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약 한 첩을 써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예'자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날 밤부터 잠이 오지 않습니다. '브라질에서 선교사를 필요로 하는데 하나님이여 필요한 사람을 보내 주십시오'라고 열심히 기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왜 누가 가기를 바라느냐? 너를 제일 필요로 하는 곳인데 네가 갈 일이지?"라고 말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목사가 가면 복음을 전할 수는 있으나 병든 사람들을 고쳐줄 수는 없습니다. '나는 의사이므로 고쳐주고 복음 전하면 복음이 더 잘 들어가겠다'는 것을 깨닫고 기쁨으로 자원하여 갔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니 인디안들이 '백인'이 왔다 하고 말합니다. 인디안들 스스로는 자신들이 최고로 생각합니다. 백인이라는 말은 백인을 경원시하여 쓰는 말입니다. 그처럼 백인을 멀리 합니다. 그렇지만 이 선교사는 꾸준히 10년 동안을 그네들과 함께 하면서 묵묵히 돌보아 줍니다. 선교사의 집으로 치료받으러 오지 않으면 아픈 사람을 찾아가서 고쳐주었습니다.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인디안들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백인'이라고 경원시하던 백인을 '존경하는 백인'이라고 하였습니다. 경원하던 사람에게 왜 존경한다는 말을 가져다 붙입니까? 존경할 만한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따라서 우리 주위에서 보는 사람의 시각이 달라집니다. 그 다음에는 말을 모르면 더불어 어울리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또한 음식 문화에 적응을 하지 못하게 되면 같이 먹고 마시지를 못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멜랜드 선교사 부부는 열심히 말을 배웠습니다. 말이 통합니다. 인디안들의 음식을 열심히 먹어서 익혀 놓았습니다. 이제는 먹어도 탈이 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니 초청하기도 하고 초청을 받기도 합니다. 인디안들과 똑 같이 어울려 지냈습니다. 그러자 인디안들이 '백인 인디안'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백인은 백인인데 인디안이라는 말입니다. 어느 날에는 소녀 하나가 발등이 부어서 곪아터지게 되었습니다. 그 상처를 수술해야 하는데 수술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입을 대고 빨아서 고름을 빼냈습니다. 남편들 등에 등창이 나거든 아내가 빨아 주십시오. 그러면 고름이 쭉 빠져 나오고 근이 빠져 나옵니다. 근이 빠져 나오면 쉽게 낫는 것입니다. 입으로 고름을 빼내자 아파서 동동거리던 아이가 그 날 밤에는 잠을 잘 잡니다. 하루가 다르게 낫더니 동네방네 뛰어 다닙니다. 그것을 본 인디안들이 이번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이 사람이 마지못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기쁨으로 갔습니다. 기쁨으로 갔기에 선한 일을 하게 되고 그 선한 일을 하다 보니 또 기쁨이 새로워집니다. 기쁨으로 하다보니 선한 일을 더 크게 하고, 선한 일을 더 크게 하다보니 더 큰 기쁨이 됩니다. 기쁨과 선행은 항상 선순환적인 작용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더라'는 선한 일을 기쁨으로 하는 선행의 기쁨을 날마다 새롭게 체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수고의 복락 (13-)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을 보면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또한 알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노는 사람이 누워 있으면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지겹겠습니까? 지겹습니다. 하루 종일 쉴 틈 없이 일하다가 한번 누우면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지겹겠습니까? 평안합니다. 수고한 끝에 느껴지는 평안함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해야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본문을 보면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가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해서 얻은 그것으로 내가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도둑의 심보일 뿐입니다. 그리고 수고하지 않고 쉽게 얻은 것은 절대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만약 쉽게 얻어 그것을 누린다해도 하나님이 주시는 복락인 줄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감사하지도 못합니다. 내가 땀흘려 수고하고 얻어지는 열매가 얼마나 귀합니까? 참으로 복되고 바람직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땀 흘려 수고한 자에게 응분의 축복으로 보답해 주십니다.
시편 128편 1절,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가면서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는 노래를 합니다. 손이 수고한대로 먹는 것이 복입니다. 많이 수고했으니 많이 먹고, 크게 수고했으니 크게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공입니다. 그러나 작게 수고했는데 많이 먹는다면 뭔가 잘 못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부정이 있습니다. 크게 수고했는데 작게 먹는다면 이것은 실패입니다. 수고한 만큼 먹는다면 이것은 복입니다. 많이 수고했으니 많이 먹는 것입니다. 많이 수고했는데 적게 먹는다면 그것 역시 실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복락입니다. 그렇게 되면 수고 자체가 복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 수고로 얻어 누리는 것은 "복락이라"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수고의 복락이 날마다 생활 속에서 체험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대인의 전설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열 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자, 그런데 산에 올라가게 되면 돌이 필요하니까 너희들이 각자 힘껏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큰돌을 가지고 끙끙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갑니다. 다른 제자들도 각자가 적당한 돌을 들고 올라갑니다. 그런데 항상 말썽인 가룟유다가 땀을 흘리면서 큰돌을 들고 올라가는 베드로에게 병신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돌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여기서부터 가지고 가야만 돌인가'라고 불평도 합니다. 자기는 그냥 올라가면서 즉 쉽게 올라가면서 스스로 지혜롭게 생각합니다. 올라가 보니 분명히 산꼭대기에도 돌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다 불러 놓고 "너희들이 가지고 올라온 돌을 모두 앞에 내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모두 자기 앞에 돌을 내놓았습니다. 가룟유다는 자기의 돌이 없는지라 산꼭대기에 있는 큰돌을 빨리 가져다가 자기 앞에 놓았습니다. 얼마나 지혜롭습니까? 돌을 다 내어놓자 예수님께서 '기도하자' 하시더니 기도하십니다. 앞에 있던 돌이 전부 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룟유다가 가져온 돌은 떡이 되지 아니했습니다. 산아래서 주님이 명령하실 때 그 곳에서 가지고 온 돌만 떡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방법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꼭대기에서 주워다 놓은 돌은 떡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룟유다가 제 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전부 배불리 먹고 남는데 가룟유다는 얻어먹어야만 했습니다. 제 꾀에 제가 속았습니다. 신앙의 생활에는 잔꾀가 통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명하신대로 순종할 뿐이지 제멋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룟유다는 제멋대로 했다가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비록 전설이지만 가르치는 교훈이 있습니다. 수고한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놀고 먹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고한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얼마나 귀한 복락입니까? 이처럼 수고의 복락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에게는 많이 수고했는데 적게 먹는 실패가 없기를 바랍니다. 또한 적게 수고하고 많이 먹으려고 하는 좋지 못한 술수도 없기를 바랍니다. 수고한대로 먹는 것입니다.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 수고의 복락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첫째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이 세상은 잠깐이요, 영원한 세계가 우리에게는 약속되어 있습니다. 현실도 중요하나 죽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서도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사람은 생활의 자세와 내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위해서 전력 투자를 하게됩니다. 둘째 선행의 기쁨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제 구실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 맡은 자리에서 제 구실을 잘 하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또 다시 선을 행하게 됩니다. 선행의 기쁨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셋째 수고의 복락입니다. 믿는 사람은 엿새 동안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응분의 열매를 얻게 됩니다. 수고하므로 누리게 되는 복락 역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들이 여러분들이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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