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평생 여호와 앞에 2002-05-03 17:42:04 read : 1382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열왕기상 15:9-15
오늘은 열왕기상 15장 9절에서 1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일평생 여호와 앞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본문을 돌아가 14절 말씀을 보면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일평생 여호와 앞에'라는 말씀을 그대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산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자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면 이 시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데 하나님이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으로 예배를 받으시고 계신다 생각하면 여러분은 예배를 어떻게 드리겠습니까? 지금은 우리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별 생각을 다하고 별 짓을 다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눈으로 보이게 이 자리에 앉아서 여러분들의 예배를 받으신다면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신데 그런 것을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하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중심은 몸가짐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몸가짐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사람은 못 보아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고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가고 또 예배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들의 삶의 자세가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그 답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정직한 생활 (9-12)
우리는 흔히 '정직하다'고 하면 '나는 평생 거짓말 한 적이 없고, 나는 배고파 죽을 망정 남의 것을 훔쳐먹는 일이 없으니 정직하다'라는 의미로 생각하시겠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에 그런 것을 정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성경을 공자에게 쓰라고 할 일이지 왜 공자는 곁에도 오지도 못하게 합니까? 성경을 쓰는데 공자는 곁에 와서 얼씬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생각과 성경의 가르침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훔친 일이 없거나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어 살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 때 성경은 정직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얼마나 변덕스러운지 모릅니다. 좋을 때는 살이라도 발라 먹여줄 것처럼 그러다가 어느 날 변덕이 나면 인사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런 관계를 가지고 살면 어떻게 될 겁니까? 하나님과 항상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좋은 친구 이상의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사는 것을 정직이라고 합니다.
가령 하나님이 '좋다'라고 하시면 나도 '좋다'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좋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나쁘다'라고 하면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쁘다'라고 하시면 나도 '나쁘다'라고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쁘다'라고 하시는데 나는 '좋다'라고 한다면 좋은 관계, 바른 관계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옳다'라고 하시면 나도 '옳다'라고 하고 하나님이 '나쁘다'라고 하시면 나도 '나쁘다'라고 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배고파도 하나님 편에 서고 출세를 못해도 하나님 편에 서고 내가 풍요롭게 살아도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 편에서 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정직입니다.
한번은 산헤드린 공회가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붙잡아 놓고 죽이기로 결정하자는 겁니다. 72명의 공회 의원들이 모여서 '예수를 죽이자' 하는데 '예수를 살리자' 하고 예수 편 드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산헤드린 공회에서 그 얼마 전에 예수 편을 드는 사람은 출교처분하기로 결정을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의 출교처분은 너무 무섭습니다. 주어진 모든 부귀영화와 좋은 것은 전부 박탈당하고 비참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게 됩니다. 그런 것을 감안할 때 예수 편을 들어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전부 '죽이자'고 결정을 하였습니다. "저희의 결의와 행사"가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만은 "나는 예수 편이요"라고 하면서 "아니다"라고 합니다. 즉 저희의 결의와 행사에 가타하지 아니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선하고 의롭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선하고 의롭다'라는 말을 오늘 본문에서는 '정직하다'라고 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자기는 예수 없이 주어지는 부귀영화는 필요 없다는 자세입니다. 예수 없는 부귀영화는 너희들이 다 가져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와 함께 굶어도 좋고 예수 없이는 이런 권세와 영화는 누리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 편에 서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정직입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 편에 또는 예수 편에 서서 예수님이 '옳다'라고 하시면 나도 '옳다'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9절에서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제 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라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아사가 왕이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의 아들은 솔로몬이요 솔로몬의 아들은 여로보암이요, 여로보암의 아들은 아비얌이요, 아비얌의 아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사왕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가 자기 조상 다윗같이 정직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목사라고 해서 다 똑같지 않습니다. 우리교회 부목사가 지금 19명입니다. 19명의 부목사가 똑같지 않습니다. 심방보고서를 써내는 것을 보면 겉으로는 똑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심방한 내용이 다릅니다. 슬쩍 슬쩍 넘어가는 목사도 있고 정말 진짜로 심방을 잘 한 목사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장로라고 다 똑같지 않습니다. 참 훌륭한 장로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장로도 있습니다. 권사도 안수집사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다 다른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본문에는 '아사가 자기 조상 다윗같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다윗을 본받았다는 말입니다. 정직한 사람이 많고 많은데도 그 중에 최고가 다윗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본받았습니다. 여러분들도 가만히 보시고 정말 훌륭하다 싶은 분의 믿음을 본받으면 됩니다. 아사왕이 다윗을 본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보기에'가 아닙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속일 수가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재산을 팔아 헌금을 할 때 사람 앞에서 얼마나 자랑스러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네가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였다' 라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꼬꾸라져 죽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보기시에는 진실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사람은 보지 못해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십니다.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아사왕이 그 하나님 앞에 정직했다고 하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사왕처럼 항상 그 하나님이 '옳다'라고 하시면 나도 '옳다'하고, 하나님이 '나쁘다'라고 하시면 나도 '나쁘다'하고, 하나님이 '좋다'라고 하시면 나도 '좋다'라고 해야 합니다. 아사왕은 항상 하나님 편에 서서 믿었고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입니다.
이처럼 믿고 사는 아사가 왕이 된 후에 남색하는 자를 소탕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색이 무엇입니까?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색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끼리 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꼴을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그래서 아사왕은 남색하는 자들을 전부 소탕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즉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전부 타파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들을 전부다 없애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정직한 것입니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좋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만금이 쏟아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편에서 살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직이기 때문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으로 폴리갑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 할 때 붙잡혔습니다. "예수 안 믿는다고 한 마디만 하라 그리하면 살려주겠다"고 합니다. 물론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얼마나 심하게 때리는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는 안 믿겠다 하지 않고 끝까지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 때 나이 86세입니다. 마지막에는 말을 듣지 않으니까 기둥을 세워 놓고 거기에 폴리갑을 꽁꽁 묶어 놓은 다음 장작을 쌓아 놓고 불을 질렀습니다. 산 사람을 불로 태워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 때 폴리갑은 "86년 동안을 나를 돌보아 주셨고 나를 배신한 일이나 저 버린 일이 없었던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내가 이제 얼마를 산다고 그 하나님 그 예수님을 배반하겠느냐? 나는 죽어도 예수 믿는다"라고 하면서 순교하였습니다. 목숨을 내 걸고 항상 하나님 편에 섰고 예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대로 살고 믿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정직입니다. 평생 여호와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정리하는 생활 (13-)
정리라는 말은 주변을 정리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저녁에 죽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저녁에 내가 죽는다고 하면 주변정리를 하지 않겠습니까? 우선은 목욕탕을 갔다 와야 할겁니다. 더러운 때를 다 씻고 깨끗이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리해야만 수의를 갈아 입힐 때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욕탕에 가서 깨끗이 씻고 머리방에 가서 머리를 예쁘게 하고 분을 바르고 화장을 할겁니다. 그리고는 원수졌던 사람, 섭섭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오라고 하든지 찾아가든지 다 풀어 버려야 할겁니다. 이것이 다 주변정리입니다. 그리고는 내 손닿는 곳까지 깨끗하게 정리해두고 시간이 되면 '나는 시간이 되었으니 간다' 하고 가면 될 것입니다. 문상객이 와서 보면 '사람 참 깨끗이 살았다'라고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항상 우리는 주변정리는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레위 마태라고 하는 사람이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가서 몇 마디 이야기하시더니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태가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하더니 자기 집에 달려가서 아내에게 잔치 준비를 하라고 합니다. 귀한 손님이 온다고 하므로 아내가 잔치를 잘 준비했습니다. 예수님도 모셨고 제자들도 모셨고 자기와 함께 세리 노릇하던 사람들 즉 민족도 팔아먹고 양심도 팔아먹고 신앙도 팔아먹고 돈이라면 끔뻑 죽어지내던 그 사람들을 다 초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청하지도 않은 바리새인들도 왔습니다. 잔치가 굉장했습니다. 그 잔치는 무엇을 의미하는 잔치입니까? '지금까지는 내가 예수 없이 또는 예수는 내 몰라라 하고 살았던 삶이었지만 오늘 이 잔치는 예수님과 새롭게 인연을 맺는 잔치'라는 뜻입니다. 예수 영접하는 잔치였습니다. 그리고는 세리라고 하는 직업이 아무리 금덩어리가 쏟아져도 그것을 깨끗이 정리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예수를 모를 때라면 모르지만 예수를 안 이상 신앙 양심과 민족을 팔아먹고 버는 돈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주변정리를 잘 합니까? 그리고 그 친구들에게 "너희가 예수를 믿겠다고 하면 같이 친구가 되고 사귀지만 끝까지 예수를 믿지 아니하면 오늘 너희는 나와 이별해도 좋다"라는 뜻입니다. 그 잔치는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는 잔치였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에는 항상 이렇게 주변을 정리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주변정리를 잘하고 출발을 했으니 레위 마태의 믿음 생활이 얼마나 잘 되었습니까? 나중에는 유대를 중심으로 해서 이웃 나라들을 다니면서 전도 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죽기 전에 마태복음을 써놓았습니다. 훌륭한 업적을 남기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주변정리를 잘하고 믿음 생활을 했기에 그런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3절을 보면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아사가 왕자로 있을 때 자기 어머니가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복을 달라고 자꾸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아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찌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그렇게 미워하는 아세라 신상을 그냥 놔둘 수 없다하여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고 그것을 끌고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기드론 시냇가에 가서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태후라고 하는 자리에서 폐하여 버리고 평민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태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그 권세를 이용해서 또 우상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것입니다. 자기의 어머니의 자리인 태후도 폐해버리는데 무엇이 무서워서 주변정리를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종교 개혁을 아주 깨끗이 단행하였습니다. 주변정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집사쯤 되었으면 나는 안주만 먹는다고 술자리에 따라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오징어 안주만 집어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계속되면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잔 두 잔 하게 되고 그것을 계속하다보면 술 주정꾼이 됩니다. 세상일에 아무리 도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손해를 주는 일은 가차없이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면서 믿음 생활을 할 때 그 믿음 생활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아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내 주변을 정리하면서 믿고 살아야 한다는 본문의 교훈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경도에 김승명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면장이되어 세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없던 그 동네에 도율림 선교사가 전도를 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배당을 다 짓고 헌당식을 할 때 면장과 그 동네 유지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맥도날드 선교사가 설교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이 세상에 재물을 쌓아 두면 녹이 슬고 도둑이 도적질 해 가고 죽을 때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그대로 놓고 가야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 두십시오. 하늘을 위해 쓰십시오. 이 다음에 당신들은 다 하늘에 가야 합니다. 얼마나 귀한 삶입니까?"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뭔가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들은 김승명은 그 날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큰 잔치를 열었으나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은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술친구들 그리고 소작인들과 면직원들을 청하여 술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오늘부터 예수 믿소. 지금까지는 예수 없이 살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예수와 새롭게 인연을 맺는 잔치요. 여러분들도 오는 주일날부터 교회에 나오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면 친구가 되지만 끝까지 나오지 않으면 여러분들과 이별해도 좋소"라고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첩살이를 했고 주색잡기를 즐겼는데 그 날로 모든 것을 정리하였습니다. 저 건너편에 있는 첩의 집을 정리하여 목사님께 사택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색잡기를 전부 끊어버리고 예수 믿기를 출발했더니 얼마나 믿음이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본인이 나중에는 그 교회에 장로가 됩니다. 그에게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게 합니다. 교인들이 "장로님, 성경에 보면 맏아들을 하나님께 바치어 목사를 시키라고 했는데 왜 셋째 아들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것은 유대나라 법이고 우리 나라에서는 신에게 제사드릴 때 물고기를 사다가 제사를 드리려면 머리를 자르고 꽁지도 자르고 가운데 토막으로 드리는 법입니다. 그래서 가운데 아들로 목사가 되게 한 것이요"라고 대답하였답니다. 그의 셋째 아들이 목사가 되어 이승만 대통령 당시 초대 군종감을 지낸 분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한 것은 없습니까? 정리해야 할 것을 정리하지 못한 일은 없습니까? 정리하지 못하고 10년 20년 교회 나왔다고 한들 그 믿음이 됩니까? 빨리 주변을 정리하시고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온전히 믿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성별의 생활 (14-15)
성별이란 말은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내 것과 네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구별하지 않아도 됩니까?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아내와 네 아내를 구별해야 합니다. 내 남편과 네 남편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큰 변이 납니다. 이것은 알면서 하나님 것과 내 것은 왜 구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다 먹어도 좋으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얼마나 혼이 났습니까? 우리까지 그 난리를 겪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또는 침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일주일 중 주일날 하루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날 하루 중에 낮 한시간만 예배 드렸다고 해서 오늘 하루 거룩하게 지켰다고 생각하십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24시간 전부 거룩히 하나님의 날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 날에 내 좋아라 하고 설악산에 가거나 대천해수욕장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날과는 구별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얻는 것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러분 왜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십니까? 목사님은 왜 자꾸 돈 이야기만 하냐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목사의 책임입니다. 그러기에 여러분이 듣기에 좋아하든지 싫어하든지 가르치는 것은 저의 책임입니다. 가르쳐야 되는데 안 가르친다면 저는 목사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비위만 맞추어 주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내가 가르쳐 주는 것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누구의 할 일입니까? 여러분들이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지 않으면 저는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의 기분을 좋게 하려면 지켜야 되는데 지키고 있습니까? 저의 기분은 상관하지 마시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라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뜻이라고 하면 저는 가르치는 것입니다.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구별하시고 절대 손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구별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4절에서 15절을 보면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과 금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명은 무엇입니까? 기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별하여 드리지 않겠습니까? 기명은 그릇을 뜻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다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말입니다. 아사왕의 아버지 아비얌은 금 그릇과 은 그릇만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하여 따로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배운 아들 아사왕 역시 금 그릇만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구별하여 하나님의 전에 드렸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여로보암 때 애굽왕 시삭이 예루살렘에 쳐들어 왔습니다. 대항해서 싸우다가는 망할 형편입니다. 선물을 두둑히 주어야 돌아갈 것 같으므로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금이라는 금은 몽땅 가져다주었습니다. 금방패 오백과 금 그릇과 은 그릇 심지어는 기둥에 입힌 금까지 몽땅 벗겨 다 주었습니다. 그 후에 아들 되는 아비얌은 금 그릇이 생기기만 하면 주의 성전에 바쳐 빼앗긴 성전의 모든 것을 보수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의 손자 된 아사도 금 그릇이 생기기만 하면 하나님의 것이라 하여 구별하여 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것은 항상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바칠 수 있는 온전한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성별의 생활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사왕은 평생에 정직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을 본받아 정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항상 정리하며 살았습니다.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별의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고 또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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