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 2002-05-03 17:38:21 read : 1366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역대상 15:25-29
오늘은 역대상 15장 25절에서 2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사람을 도우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돕기는 돕는데 무조건 다 돕는 것은 아닙니다. 평생 도둑질만 한 사람을 하나님이 도우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돕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오히려 저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왕과 다윗왕을 비교해 보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력한 요청이 있을 때 사울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처음에는 괜찮던 사람이 왕이 된 다음에는 변질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변질되면 좋지 않습니다. '저 사람은 직분을 맡더니 사람이 변질이 되었다'라고 하게 되면 곤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울로 왕을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후회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줄 것이 무엇이 있으며 도울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에 대해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 한사람'이라고 기록하고있 습니다. 즉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그 다음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도왔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양 몇 마리 치는 목동의 자리에서 일국의 왕으로 세웠고 왕통을 계속 이어가는 중에 그 왕통에서 메시아가 납니다.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우심은 이렇게 굉장한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는 말씀에 의지해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도우시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즐겁게 일하는 사람(25-26)
즐겁게 일하는 자를 바꾸어 말하면 즐거움으로 봉사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서 성가대원으로 봉사를 할 때 억지로 하면 안 하는 것 보다 낫습니다. 그러나 할 바에는 억지로 하는 것 보다 즐거운 마음으로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 항상 첫 손가락에 꼽는 가장 유명한 신학자로 추앙을 하는 토마스아퀴나스가 신학대전이라고도 하고 신학개요라고도 하는 방대한 부피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그 책의 골자가 천주교 신학의 뼈대가 됩니다. 토마스아퀴나스가 천주교 신학을 정립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토마스아퀴나스에게 나타나 묻기를 "네가 무엇을 원하든지 내가 다 주리니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토마스아퀴나스가 "난 별달리 구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도 무엇인가 있을 텐데"라고 말씀하시자 "하나님, 나는 하나님 이외에는 다른 것은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합니다"라고 말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토마스아퀴나스가 얼마나 마음에 드셨겠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하지 아니하고 그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구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토마스아퀴나스가 평생 동안 즐겁게 책을 섰고 즐겁게 일했고 즐겁게 봉사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기에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즐겁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해도 즐겁고, 하나님을 꿈속에서라도 뵈면 더 즐거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즐거워했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다 보니 하나님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아퀴나스로 하여금 그렇게 굉장한 일을 하도록 도우신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26절을 보면 '이에 다윗과 이스라엘 장로들과 천부장들이 가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즐거이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올라왔는데 하나님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을 도우셨으므로 무리가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 가지 일을 즐거움으로 했습니다. 첫째로 다윗 성에 성막을 지어 놓고 오벧에돔의 집에 있는 하나님의 법궤를 옮기는데 즐거움으로 메어 올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즐거움으로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간단하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 법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기 전에 아비나답의 집에 먼저 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법궤를 빼앗겼었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돌려보낼 때 아비나답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20년 동안 있었습니다. 20년 동안 법궤를 모신 그 집은 전혀 축복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큰아들이 죽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20년 동안 섬긴 아비나답이 하나님의 법궤를 집구석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입니다. 관심도 없었기 까닭에 만약 섬겼다면 제 멋대로 했을 뿐입니다. 웃사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20년 동안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면서도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을 집 어느 구석에 방치해 두고 있는 분들은 계시지 않습니까? 관심도 별로 없이 20년 동안 믿었다고 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자랑거리가 됩니까?
다윗이 성막을 짓고 처음에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겨올 때 소달구지에 싣고 옮겼습니다. 본래는 소달구지에 실어 법궤를 옮기라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들 멋대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봉사할 때 내 멋대로 하면 하나님과 충돌하게 됩니다. 소가 뛰므로 인하여 소달구지가 넘어갈 듯이 되고 법궤가 나가떨어지게 생겼습니다. 그 때 당시 제사장이 아니고서는 벱궤를 잡을 수 있게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왜 합니까? 거기서 하나님과 충돌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사는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법궤를 집구석에 처박아 두듯이 여러분들 집에 하나님을 방치해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봉사한다고 하면서 제멋대로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로 하나님과 충돌해서 잘 되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충돌한다고 한들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결국은 웃사는 죽음을 당하는 일을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쯤되자 다윗이 다윗 성의 성막으로 그 법궤를 모시기를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 있는 오벧에돔의 집으로 모셨습니다. 자기는 무섭다고 모시지 않으면서 왜 남의 집으로 모셔갑니까? 그러나 오벧에돔은 '이미 하나님의 법궤가 우리 집에 왔으니 잘 모시자'고 하여 석달 동안을 지극 정성으로 모셨습니다. 그랬더니 20년을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한 아비나답의 집에 비해서 오벧에돔의 집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내려 주시는데 왕궁까지 소문이 들어갈 정도로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오벧에돔이 그 법궤를 모시고 복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은 그 법궤를 다시 모시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들 그리고 백성의 장로들, 천부장들, 레위인들 또 모든 백성을 동원해서 이제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모셔 올리는데 '즐거이 메고'올리게 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법궤는 사람이 메고 옮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메고 옮기되 반드시 레위 사람인 제사장들이 메고 옮기게 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번에는 왜 소달구지에 싣고 옮기려 했습니까? 제 멋대로 쉽게 일하려고 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절대로 쉽게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좋을 대로 한번 하십시오. 주일날 설악산에 가고 싶으면 가시고, 대천 해수욕장에 가고 싶으면 가시고 급한 사정이 있어서 일을 보려면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그런 식으로 해도 좋다고 한다면 나는 인기를 끌런지 모르나 그것이 믿음 생활입니까? 쉽게 믿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소달구지에 끌고 간 것이 쉽게 믿으려고 한 것이 아니면 무엇입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제사장들이 즐거이 메고 앞에서는 나팔을 불고 뒤에서 따르는 레위인들이 노래하고 온 백성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거기에 동참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즐겁게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즐겁게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시고 도우시는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 26절을 보면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으로 제사를 드렸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빠진 기록이 많습니다.
사무엘하 6장 13절을 보면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여섯 걸음을 행한 후에 법궤를 내려놓고 그 앞에서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내용을 생략하고 간단히 기록하였습니다.
왜 여섯 걸음을 간 후에 제사를 드렸는지 아십니까? 그 전에 소달구지에 실어 가지고 올 때 얼마 안 가서 그 난리를 겪었는데 이번에는 메어 올릴 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또 난리가 날 것 같아서 먼저 여섯 걸음을 가 본 것입니다. 여섯 걸음을 가 보았으나 아무 탈이 없자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요, 뜻이구나 하여 그 앞에서 즐거움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첫째로는 즐겁게 메고 즉 즐거움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고 두 번째로는 즐거운 마음으로 제사를 드릴 때 하나님이 돕는다는 말입니다. 이 제사를 오늘날의 예배로 보시면 됩니다. 마지못해 끌려 나와서 예배드릴 수 있지만 그럴 바에는 차라리 즐거운 마음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으시고 도우신다는 뜻입니다.
한번은 영국에서 크게 성전을 짓고 있었습니다. 돌로 예배당을 짓다 보니 많은 석수들이 일을 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이 나가 처음에 있는 석수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여기에 와서 일하게 되었습니까?" 그랬더니 그 분은 아주 퉁명스럽게 "죽지 못해 이 짓을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자기의 가족이 다섯 사람이기에 먹여 살리려고 하다보니 별 수 없이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자기는 다른 곳에서 석수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돌로 예배당을 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좀 써주십시오'라고 부탁을 했더니 써주는데 거기에서 받는 돈보다는 적게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평생 예배당을 두 번 짓겠는가? 내 기술을 가지고 수입은 적더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었으니 즉 나를 써주었으니 참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같은 예배당을 짓는 사람인데 여러분 같으면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복을 주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즐겁게 하시고, 예배를 해도 즐겁게 하시고, 즐거움으로 살고, 즐거움으로 믿고, 즐거움으로 봉사생활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우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 함께 협력하는 사람(27-28)
성가대가 지금 몇 파트로 찬양을 하고 있습니까? 네 파트에서 하고 있습니다. 소프라노는 죽어라 하고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알토는 그 뒷받침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알토가 소프라노에게 너희만 다하라 우리는 안 하겠다고 한다면 찬양이 되겠습니까? 알토가 없이 소프라노만은 찬양으로서는 어렵습니다. 또 테너가 얼마나 소리를 지릅니까? 그러면 베이스는 낮은음으로 받쳐 주어야 하는데 테너 파트에게 너희가 다 하라고 한다면 찬양이 되겠습니까? 4파트가 함께 협력하고 어우러질 때 참 좋은 화음이 되고 그렇게 부르는 찬양이 나도 좋고 듣는 성도들도 좋고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협력한다는 것이 이렇게 좋은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큰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큰 포도원을 가진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맏아들은 아주 시원스럽게 "예"하고 대답하더니 가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말을 잘합니까? 말에 따르는 행동은 왜 없습니까? 오늘날 이런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말은 기가막히게 잘 합니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서 예수를 다 믿고 혼자서 봉사는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실제적인 봉사나 행동은 없습니다. 이런 말만 잘하는 교인들은 맏아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본래 이 사람은 유대인을 가리키지만 우리들도 들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둘째 아들에게 "너는 가서 오늘 포도원에서 일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첫 마디로 "아니오"라고 잘라서 말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잘 못된지라 뉘우치고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맏아들의 경우 "예"라고 했으면 가서 일하는 것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둘째 아들은 이왕 갈 것이면 "예"하고 갈 일이지 왜 "아니오"하고 갑니까? 둘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이런 사람은 무슨 일이든지 "하자"고 하면 "아니오"라는 말부터 먼저 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항상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장을 담그자고 하면 담그지 말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장을 담그면 뭐가 생깁니까? 구더기가 생깁니다. 구더기가 생겨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그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든지 100% 좋은 일은 없습니다. 좋은 면이 많으면 일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의 경우 좋지 않은 것이 조금만 있어도 그것을 보고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니오"부터 하고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당회에서, 제직회에서, 각종 회의에서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나중에 다 들어보게 되면 좋아 보이는지 "합시다"라고 따릅니다. 같은 값이면 "하자"하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사람은 이방인들을 가리키지만 우리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형제가 함께 어울려 협력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포도원에서 일하는 것이 누구를 위하는 것입니까? 아버지를 위한 것이지만 결과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 협력하는 것이 이렇게 좋습니다. 같은 형제가 협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렇게 괴로운 일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에서 28절을 보면 '다윗과 궤를 멘 레위 사람과 노래하는 자와 그 두목 그나냐와 모든 노래하는 자도 다 세마포 겉옷을 입었으며 다윗은 또 베 에봇을 입었고 이스라엘 무리는 크게 부르며 각과 나팔을 불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힘있게 타며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어 올렸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각계 각층의 사람들이 하나로 함께 힘을 모아 일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함께 협력할 때 하나님이 도우셔서 할 일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왕이 앞장을 서고 그 뒤에 레위인들이 따르고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그 뒤에 노래하는 자들이 함께 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천부장이 함께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자기 일처럼 생각하고 하나 같이 협력했습니다. 하나 같이 협력해서 일하는데 거기에 하나님의 도움까지 있으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그 전에 못했던 일을 이제는 하지 않았습니까? 다 같이 협력해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 위에 하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손발을 거둬 붙이고 함께 참여하고 협력해야 합니다. 운동장에는 구경꾼이 필요합니다. 영화관에도 구경꾼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 일에 하나 같이 협력한 것처럼 교회는 하나 같이 협력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몽골 사람으로 대 제국을 건설했던 징기스칸은 중국 대륙을 다 점령하고 유럽 헝가리까지 갔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지금도 헝가리에는 몽고인 들의 피가 많이 섞여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 국가들 중에서 헝가리는 조금 다릅니다. 그리고 소련의 일부까지 점령했습니다. 얼마나 어마 어마한 대 제국을 건설했습니까? 그 때 징기스칸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습니다. 하루를 징기스칸이 아들 다섯을 불렀습니다. 화살을 한 개씩 가지고 오라고 한 뒤 "각자가 화살을 한번 꺾어 보라"고 하였습니다. 화살은 그렇게 꺾기 쉬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러나 장수들인지라 쉽게 꺾어 버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살을 하나씩 더 가지고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섯을 한꺼번에 모아서 놓고 꺾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꺾지 못했습니다. 징기스칸은 "너희 오형제가 하나 같이 협력하고 함께 하면 누가 너희를 깔보고 무시하며 누가 너희를 당하겠느냐. 그러나 각자 흩어지면 다 꺾어지는 것 아니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오형제가 협력하여 몽골 대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협력하여 뭉친 그 위에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기적 같은 일도 일어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못한 일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다윗이 앞장서고 온 백성들이 하나같이 협력하다 보니 지금까지 못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함께 협력할 때 하나님이 도우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열심을 다하는 사람(29-)
열심과 열심은 통합니다. 부지런한 사람과 게으른 사람은 통하지 않습니다. 참과 참이 통합니다. 참과 거짓이 함께 하지 못합니다. 진실과 진실이 함께 하는 법입니다. 하나님은 열심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열심과 열심이 통하고 만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유대나라 히스기야왕 때 앗수르왕 산헤립이 18만 5천 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물밀듯이 유대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모두 함락 당하고 참외 밭의 원두막처럼 예루살렘만 남았습니다. 그 때 앗수르왕 산헤립이 히스기야왕에게 항복을 권고하는 권고문을 보냅니다. 그것을 받아든 히스기야왕은 난감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놓았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이래도 좋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은 뭐가 됩니까?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오늘로 끝내 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왕이 "하나님께서 어떻게 끝내실 것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알고 믿으면 되겠습니까?"라고 묻자 "나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 날 밤에 천사가 나타나서 18만 5천 명을 다 물리쳤습니다. 아침에 나가 보았더니 전부 송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앗수르왕 산헤립은 낯이 뜨거워 자기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자기 본국으로 돌아간 산헤립왕은 자기 나라의 국신 신전에 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처럼 돕는데 우리 신은 무엇입니까?"그렇게 하소연을 하고 있을 때 제 몸에서 난 아들이 와서 찌르고 도망을 가 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열심이 그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열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냉냉하고 게으름을 피우면 하나님이 도우실 리가 있겠습니까? 열심과 열심이 통하고 열심과 열심히 하나가 됩니다. 여러분들도 열심으로 기도하고 열심으로 찬송하고 열심으로 주를 봉사할 때 열심 있는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9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 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사무엘하서 6장 20절에서 23절을 보면 세밀하게 그리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법궤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모든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다윗왕이 앞에서 춤을 추며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집안에만 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창으로 내려다보다가 다윗왕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는 '왕이 채신머리없이 뭐하는 것인가'하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집으로 들어오자 야단을 치고 비방을 하면서 "방탕한 자식이 술 주정을 하는 듯이 노는데 그게 뭐냐"고 대들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데 하나님 앞에 내가 체면이 있으면 얼마나 있느냐? 네 아비의 나라를 빼앗아서 나에게 주신 하나님 앞에 내가 춤추며 기뻐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된 것이란 말이냐. 이 보다 더 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고 뛰놀겠다"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다윗을 돕고 그렇게 훼방하고 앙탈하는 미갈에게는 하나님의 저주가 임해서 평생 혼자 살다가 죽었습니다. 다윗이 춤을 추고 뛰논 것은 종교적인 열심, 신앙적인 열심이었습니다. 열심이 그로 하여금 춤추고 뛰놀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뜨뜻미지근하게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열심을 가지고 기도를 해도 뜨겁게 하고 찬송을 해도 뜨겁게 하고 믿어도 뜨겁게 믿고 봉사를 해도 뜨겁게 봉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열심 있는 자를 도우십니다. 절대 열심 있는 자를 비방하지 마십시오. 비방했던 미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열심이 있기 까닭에 열심 있는 자기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사실 믿으시고 믿음 생활에 열심 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도우시는 하나님은 첫째, 즐겁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억지로 하면 안 하는 것보다는 좋지만 억지로 할 바에는 즐거움으로 봉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돕기 때문입니다. 둘째, 함께 협력하는 자를 돕습니다. 교회는 구경꾼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열심을 다하는 자를 하나님은 돕습니다. 열심 있는 다윗을 열심 있는 하나님이 도우신 것처럼 여러분들도 열심히 믿어 그 하나님의 도움 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Copyright by 본 설교신문 자료를 다른사이트로 무단복사 절대금합니다(추적장치가동)/설교신문//이새롬/사업자번호220-09-65954/서울시강남구도곡로1길14삼일BD1121호/통판:서울강남01470/문자로 질문바람010-3761-0691/E-mail:v91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