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사도행전 18장 1절에서 4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바울의 기쁨, 나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한번은 펜실바니아 주립 대학교 심리학자가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보기 위해서 상자에 구멍 두개를 뚫고 두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그림을 두개 그려서 놓았습니다. 한 쪽에 있는 그림은 아주 비참한 그림이었고 다른 한 쪽에는 아름다운 그림을 놓아두었습니다. 그 그림은 양쪽 눈으로 서로 다른 구멍으로 들여다 볼 때 한쪽이 한쪽 그림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즉 오른쪽 눈은 오른쪽 그림만 볼 수 있고 왼쪽 눈은 왼쪽그림만 볼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오른쪽 눈으로는 비참한 그림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왼쪽 눈으로는 아름다운 그림만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고 난 사람들의 반응은 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너무 비참하다'라고 하면서 이마를 찌푸리고 기분이 얹잖아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너무 아름답다,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다'라고 하면서 기뻐합니다. 그 그림을 본 사람들이 똑 같이 한쪽 눈으로는 비참한 그림을 보았고 또 한쪽 눈으로는 아름다운 그림을 보지 않았습니까? 똑같은 그림을 봤는데 사람들의 반응이 왜 이렇게 다릅니까? 심리학자는 반응이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이마를 찌푸리고 기분 나빠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비참한 그림을 본 사람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지 않고 비참한 그림만 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뻐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그림을 본 사람은 비참한 그림을 보지 않고 아름다운 그림만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한 사람에게 100%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축복을 주시는가하면 한편에는 어딘가는 비어 있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비어 있는 구석을 보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축복해 주신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것을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으로 바울사도가 등장을 합니다. 이 이야기가 전개되는 무대는 고린도라고 하는 곳입니다. 고린도에서는 아주 비참하고 괴로운 일을 당하기도 했고, 아주 즐겁고 기쁜 일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오늘 즐겁고 기뻤던 일이 무엇인지 본문의 말씀을 따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만남의 기쁨 (1-2중)
사람들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밖으로 나가 친구들을 만나고, 배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도 만나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생은 만남에서 시작되어 만남이 끝날 때 끝이 납니다. 그런데 그 만남에는 행복한 만남이 있고 불행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아주 보람 있는 만남이 있고 전혀 보람이 없는 만남이 있습니다. 또 깊은 만남이 있는가하면 한번 만나고 끝이 나는 얕은 만남이 있습니다. 이처럼 만남을 생각해 보자면 끝이 없습니다. 만남 중에는 행복한 만남, 깊은 만남, 보람 있는 만남이 참으로 복된 것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만남은 행복한 만남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얼마나 불행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못 만났다면 불행한 것입니다.
성인 중에서 상상 먼저 꼽는 소크라테스가 제자 플라동을 만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만남입니까? 제자 플라통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만나서 아주 행복했습니다.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가르치기는 기가 막히게 잘 가르치는데 글자 하나를 남겨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났다면 소크라테스가 언제 살던 사람이요, 무슨 일을 하다가 어떻게 죽었는지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 플라통이 전부 스승에 대해서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소크라테스가 된 것은 전부 그 제자 플라통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자 플라통이 그렇게 유명해 진 것은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잘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복된 만남입니까? 그럼으로 우리에게 만남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절에서 2절 중반절을 보면 '이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하나를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고 하였습니다.
또 로마서 16장 3절에서 4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바울이 전혀 예수를 모르는 고린도라고하는 곳에 전도를 하러 갔습니다. 전도하러 가서 훌륭한 부부를 만났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아굴라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에 대해서 처음 등장할 때만 남편의 이름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부터는 뒤바뀌어서 아내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성경에는 이름 순서가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열 두 제자 가운데 베드로가 꼴지로 나오는 법이 없습니다. 그 반대로 가롯 유다가 먼저 나오는 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름순서를 보면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가정에는 남편보다 아내가 훨씬 더 잘 믿는 집안입니다. 남편보다 아내가 더 잘 믿는 가정은 평안합니다. 그 반대로 아내는 믿음이 형편없는데 남편이 아주 잘 믿는 집안은 항상 시끄럽습니다. 남편이 어떤 봉사를 하겠다, 혹은 무엇을 받치겠다 하게되면 아내가 뒤에 앉아서 얼마나 앙탈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면 남자들은 대범하기 때문에 자기 믿음이 워낙 별것이 아니기에 자기 믿음으로는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하겠다고 하면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넘어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것입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이때 바울을 만나서 나중에는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다녔습니다. 바울이 있는 곳에는 항상 이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부부가 있는 곳에 가 보면 꼭 바울이 있습니다. 또 바울이 가고 싶은 곳에 먼저 가라 하면 먼저 가서 길을 닦았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한번은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영락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이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고 달려들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바울사도를 죽이려고 하느냐? 너희에게 돈을 달라고 했느냐? 너희들에게 하룻밤을 재워 달라고 했느냐? 무엇 때문에 죽이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런 사이에 바울이 빠져서 도망을 하여 살았습니다. 바울사도가 그 사실을 기억하고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문안을 합니다. "내 목숨을 위해서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이방인의 모든 교회가 그 소식을 듣고 감사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이렇게 읽고 끝내면 안됩니다. 바울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브리스길라 부부가 목을 내놓았다고 만 이해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게만 알고 끝내면 이 성경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광성교회로 말하자면 김창인 목사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여러분들입니다. 가령 김창인 목사를 위해서 시온성가대 대원 아무개가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라는 뜻입니다. 김창인 목사 위해서 목 내 놓을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바울에게 두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의 가정을 만났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복된 만남인지 모릅니다.
저에게는 외삼촌 세분이 계십니다. 첫째와 둘째 외삼촌은 저의 외삼촌이요 저는 그 분들의 생질이라는 것 밖에는 별로 의미가 없습니다. 이것은 육적인 만남 즉 혈육의 만남일 뿐입니다. 그러나 셋째 외삼촌은 다릅니다. 셋째 외삼촌은 벌써 예수를 믿고 젊디젊은 나이에 집사의 직분을 받아 열심히 봉사하였습니다. 왜정 하에서 해방이 되고 보니 완고한 것이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8·15 해방되던 해 가을에 저의 집에 자주 와서 열심히 전도하여 그 셋째 외삼촌의 인도를 받아서 저희 가정이 예수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의 일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를 믿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믿어 왔고 제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저에게 있어서 셋째 외삼촌은 혈육의 만남 즉 친척관계 이상입니다. 외삼촌이라는 그 이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만남이요, 아주 행복한 만남이요, 깊은 만남입니다. 그 분은 지금 김포에 살고 계십니다. 나이 90이 가까웠지만 두 달에 한번은 저를 보고 싶다고 찾아오십니다. 저와 외삼촌이 만남이 얼마나 복된 만남입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누구와 복된 만남을 하고 있습니다.
브리스길라 아굴라는 바울사도와의 만남에서 뭐가 그렇게 복된 것입니까? 바울사도를 만났다는 것에서 끝이 났다면 그렇게 복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을 통해서 예수를 만났기에 최고의 만남이요, 행복한 만남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항상 예수님 만난 그 기쁨과 즐거움 그리고 이웃과 좋은 만남이 날마다 새롭기를 바랍니다. 좋은 사람 만난 기쁨과 즐거움이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둘째, 동역의 기쁨 (2하-3)
동역이라고 하는 말은 함께 일한다는 뜻입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함께 일을 안 해준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또 함께 일할 사람이 협력을 해 주지 않는다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러나 함께 일해줄 사람이 함께 자기 일처럼 해 준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겁고 복된 일이겠습니까?
한번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서 북왕국 이스라엘의 장군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바알신을 섬기는데 열심히 앞장서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드는 아합 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의 꼴을 더 이상 못 보겠으니 그 집안을 진멸시켜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사명을 받고 예후가 왕이 되었습니다. 예후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아합의 집안을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서 나오는 길에 그렇게 덕망이 있고 존경을 받는 여호나답을 만납니다.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내가 당신을 향해서 내 마음이 진실한 것처럼 당신의 마음도 진실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여호나답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나와 함께 손을 잡고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합시다"하고는 여호나답의 손을 잡더니 병거에 태웠습니다. 예후가 바알의 신당으로 가서 "지금의 왕 아합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바알신을 조금 섬겼지만 나는 많이 섬기겠으니 바알의 선지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그 자리가 어떤 자리라고 빠지겠습니까?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다 모였습니다. 그러자 바알의 신당에 바알신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다 들여보낸 다음에 군대를 동원시켜 그 주위를 둘러쌌습니다. 그리고는 한 명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고 전부 진멸해 버렸습니다. 바알 우상을 완전히 타파해 버렸습니다. 바알 우상의 씨를 완전히 말려 버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을 철저히 단행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호나답이 함께 일해 주었고 여호나답이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이 이렇게 복된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동역한 것은 "내가 너를 향해 진실한 것처럼 네가 나를 향해 진실하냐"고 물었을 때 "그렇습니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진실과 진실이 함께 일한 것입니다. 믿음과 믿음이 함께 일한 것입니다. 열심과 열심히 함께 일한 것입니다. 그들의 동역은 성공했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절 하반절에서 3절을 보면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업이 같으므로 함께 거하여 일을 하니 그 업은 장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사람들은 자기의 자녀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기술을 하나씩 가르쳐 줍니다. 그 이유는 본업이 있을지라도 부업을 위해서입니다. 평화스러울 때는 자기의 본업 즉 주업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전쟁이 나거나 그 밖의 어떤 극한상황이 벌어져 본업을 버리고 주업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어떻게 살아갈 것입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기술하나를 꼭 가르쳐 줍니다. 자녀 교육을 잘 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이 배운 것이 장막을 꿰매기도 하고 만드는 기술입니다. 고린도에 가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 보았더니 자기와 똑 같은 장막을 만드는 업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날로 짐을 싸 가지고 가서 그 집에 유하면서 함께 일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것이 뭐가 그렇게 복되고 즐겁고 기쁜 일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세계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지만 선교비를 지원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장막을 꿰매주고 일당을 받던가 아니면 장막을 만들어 팔던가 해서 얻어지는 수입으로 자기의 생활비와 자기와 함께 전도하러 다니는 일행의 생활비와 선교비를 충당한 것입니다. 얼마나 고된 일이었겠습니까? 그렇게 하여 자급자족했습니다. 그런데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 함께 일하고 함께 벌어서 함께 생활을 책임을 지게 되었으니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일을 하면서도 참 즐겁고 기뻤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났습니까? 아니었습니다. 전도를 해도 함께 합니다. 장막을 만들 때에도 함께 일을 했습니다. 교회를 세울 때도 함께 세웠습니다. 이렇게 동역 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너와 내가 동업을 하는 것 이상으로 너의 일을 꼭 나의 일처럼 손과 발이 되어 일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부지간입니다. 남편과 아내사이입니다. 남편이 망하기를 바라는 아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기에 남편의 일이라면 꼭 내 일처럼 손을 걷어 부치고 일을 하지 않습니까? 남편이 하는 일을 아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동역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아내는 당신 하는 일은 내가 알 바 아니다 하고 골프나 치러 다니는 아내도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예외일 뿐입니다. 동역은 즐거운 것입니다. 기쁜 것입니다.
멋진 동역자 부부가 있습니다. 루터라고 하는 종교개혁자 부부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참 하다가 신부들만 있는 수도원, 수녀들만 있는 수녀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마음 맞는 사람끼리 결혼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전부 마음에 드는 사람끼리 결혼해 버렸습니다. 다 결혼하고 수녀원에 수녀 하나만 남았습니다. 누가 데려가야 결혼하지 않습니까? 루터는 다른 신부들에게 먼저 결혼하라 해야지 자기가 먼저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은 것은 자기뿐입니다. 그리고 수녀 한 분과 단둘이만 남았습니다. 그 수녀를 보니까 사실은 생긴 모습이 별로였습니다. 루터가 나와 결혼하자 하여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얼마나 믿음이 좋고 덕이 많은지 모릅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머리를 싸매고 누웠습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못하겠다, 안되겠다"하고 낙심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부인이 상복을 입고 곡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루터가 가만히 보더니 "누가 죽었습니까?" "예, 아버지가 죽어서 그럽니다" "친정 아버지가 죽었습니까?" "아니요" "그럼 누가 죽었단 말이오?" "하나님 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루터가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단 말이오" 그러자 아내가 "당신이 하는 꼴을 보니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죽지 않았으면 당신이 왜 머리를 싸매고 눕습니까? 종교개혁을 당신이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는 것인데 왜 머리를 싸매고 눕습니까?" 그 때 루터가 얼마나 큰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힘을 내어 나가서 종교개혁을 승리하고 성공했습니다. 함께 일해 줄 사람이 잘 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동역의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여러분들도 부부지간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서로 서로가 자기 일처럼 손발이 되어 주님의 일을 함께 일하는 동역의 기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직장에서도 동역의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동역의 기쁨이 없으면 직장생활 그리고 교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셋째, 개척의 기쁨 (4)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을 보면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고 하였습니다.
8절을 보면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으로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다한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사도에게는 교회를 개척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도 없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안식일마다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예수를 믿으라고 권면을 합니다. 믿을 바에는 더 잘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랬더니 고린도의 많은 사람들이 믿고 돌아오는데 수다한 고린도 사람이 듣고 믿고 세례를 받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일년 반 사이에 되어진 일입니다. 일년 반 사이에 큰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개척해서 일년 반 사이에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이 모였으니 개척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제가 우리 교회에 와서 시무한지 36입니다. 우리 교회 처음 오는 날 새로 강도사가 온다고 하여 안나오던 교인들까지 끌어 모아 놓은 것이 첫 주일에 30명이었습니다. 전부 끌어 모아 30명이었으니 평상시에 주일에는 얼마가 모였겠습니까? 사실이 그러다 보니 내가 개척한 것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제가 시작한 것은 아니기에 개척교회를 한번 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왜 우리 부목사님들만 개척해서 내 보냅니까? 저에게도 개척교회를 하나 해 보라고 그러지요? "얼마나 잘 하나"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개척교회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살림을 별로 장만하지 못한 신랑 신부가 살림을 시작하고 가장집물이 늘어나듯이 교회가 계속 커진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것이 개척의 기쁨입니다.
새문안 교회가 대한민국에서는 제일 오래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를 개척한 분이 바로 언더우드 선교사입니다. 그 언더우드 선교사가 연세대학교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언더우드 선교사는 연세대학교를 창설하고 새문안 교회를 개척한 분입니다. 그 아들 원한경씨 또 그 손자 원일한씨는 대를 이어서 연세대학에서 교수로 있었고 새문안교회에 그 손자 원일한씨가 장로로 있습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개척한 교회라 하여 얼마나 보람과 자부심을 가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개척자의 기쁨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여러분들이 "그럼 우리도 교회 개척하러 나가야 되겠네" 라고 생각하실 분들이 계실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꼭 교회를 개척해야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령 학문을 연구하시는 분들이 새로운 학문의 분야를 개척할 때 느끼는 기쁨은 개척자만이 느끼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사업을 하는 분들은 사업을 하는 분들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개척자가 되어진다면 그 기쁨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여러분들도 남이 개척한 것을 따라가지만 마시고 새로운 일들을 시작하셔서 개척자의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에서 느꼈던 기쁨은 첫째 만남의 기쁨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목이라도 내어놓는 그런 동역자를 만났다고 하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그런 만남의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동역이 기쁨입니다. 함께 일할 사람이 함께 일한 결과는 열 배가 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함께 일할 사람이 함께 일하는 기쁨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개척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개척의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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