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의 신앙 2002-04-29 11:58:16 read : 12958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평양 이전의 생애를 중심으로
1944년 4월 21일 주기철 목사는 오정모 사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후 밤 9시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순교하였다.
주기철 목사의 순교의 삶을 되새기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이만열 교수(숙명여대)가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고 정리했다.
소양(蘇羊)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는 한국 기독교회사가 남긴 가장 위대한 신앙인 중 한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즉위식을 거행한 직후에 태어났다. 광무(光武) 원년이었다. 조선이 형식적이지만 중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임을 내외에 선포하고 국가 중흥의 의미를 띤 연호 광무를 사용한 그 첫해에, 일찍부터 일본과 악연을 맺어온 곳에서 일제의 천황신숭배에 반대하여 순교한 주기철이 태어났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매우 흥미로운 점이라고 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는 을사조약 후 통감정치가 시작되던 첫해(1906)에 고향의 개통학교에 입학, 초등교육을 받기 시작하여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2년 뒤에 그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가 졸업한 1912년은 한국교회로서는 뒷날 그가 그 교단의 목사로 임직되는 조선예수교 장로회의 총회가 조직되던 해였다.
졸업 후 그가 가까운 곳에 있는 상급학교를 마다하고 정주 오산(五山)학교를 택하여 진학한 것은, 당시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던 이광수(李光洙)의 웅천 방문과 학교 소개, 진학권유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 하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나 그에 대한 학부형의 기대가 어우러져 결정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오산 진학의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가 오산과 관련을 맺지 않고 오산에서 배웠던 신앙적 민족적인 기초가 없었다면, 뒷날 과연 그렇게 위대한 신앙인 주기철로 다듬어 질 수 있었을지에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기에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게 된다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주기철은 대한제국이 일제 강점기로 바뀌고 일제의 조선 지배체제가 착착 정비되던 시기, 그 자신으로서는 망국의 설음을 느낄 수도 있는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를, 고향을 떠나 배움의 터전인 정주 오산학교에서 아마도 예민한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젖어들면서 보내었을 것이다.
그가 오산에 입학하기 직전에 불었던 소위 '105인사건'의 한파는 한국의 기독교계와 애국계몽운동계 및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들을 얼어붙게 만들어 많은 지도자들이 무고하게 옥살이를 해야 했다. 그러한 한파의 한 가운데에서 주기철은 청소년기를 마치게 된다.
오산을 졸업한 주기철은 스승들의 권유에 따라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진학하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장래 우리 나라에 필요한 인재들의 충원을 고려하여 졸업생들의 진학방향을 조언하고, 졸업생들은 그 조언에 거의 순종하였다고 한다.
연전은 재한북장로회 선교사들의 오랜 동안의 논란을 거쳐 이 해에 서울의 YMCA 건물을 빌려 개학했던 학교였다. 따라서 주기철은 연전의 제1회 입학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를 지도한 오산의 스승들과 그 자신이 안고 있던 서북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숭실전문을 선택하지 않고 갓 태어난, 그래서 그 분위기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는 연전을 택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의 연전 선택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좌절당하고 만다.
주기철은 1916년 여름부터 학업을 중단하고 귀향하여 몇년간 뚜렷한 방향이 없이 방황하는 듯한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의 학업중단과 귀향이 이복형들에 의해 야기된 유산 분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의 생애에서 뚜렷한 목표가 보이지 않는 이 기간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까지 5년 이상 계속되었다.
귀향한 이듬해 그는 이기선 목사의 중매로 1917년 김해교회 출신으로 신교육을 받은 안갑수와 결혼하여 이 방황의 기간에 위로를 받는다. 불확실한 자료들은, 그가 이 기간에 고향에서 청년운동을 주도하면서 계몽운동을 벌이고 <민족자결주의>의 세계풍조에 따라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한다. 특히 그는 3 1운동 때 그 지방 만세운동의 행동책으로 활동하다 1개월 동안 구류를 살았다. 주기철은 그만한
나이의 의식있는 청년이라면 걸을 수 있는, 민족을 향한 정열을 불태우기도 하였다. 주기철은 고향에서 열심히 교회를 봉사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집사의 직분을 맡기도 하였고 교회의 회계를 맡기도 하였다.
깊은 방황은 때때로 창조적인 출구를 기약해 준다. 섭리 가운데 마련될 새로운 길은 본격적인 경제운동이나 민족운동을 통한 길이 아니었다. 그가 뒷날 강조했듯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뛰어날 수 있다고 평가한 영적인 분야가 마련되고 있었다.
그는 1920년 두 차례에 걸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 참석하고 자신의 진로를 목회자의 길로 굳힌다. 즉 그 헤 9월의 마산 문창교회와 11월 웅천읍 교회에서 개최된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는 몇년간 방황하던 주기철의 앞날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이 사경회를 통해 그는 평양신학교에 진학하기로 결심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그를 쓰기 위해 몇년간의 방황의 때와 김익두와 같은 부흥사를 준비하셨던 것이다. 아마도 오산과 연전에서 가졌던 이상과 지성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면 그는 김익두를 통해 그렇게 큰 은혜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에 그의 5년간의 방황의 의미가 있다.
주기철은 1921년 경남노회에서 목사후보생 시취에 합격하고 그 이듬해 3월 평양신학교에 입학, 공부하는 한편 졸업할 때까지 경남 양산읍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그의 신학교 수련은 모세의 40년 광야생활에 비교될 만큼 그의 사역을 위해서는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는 오산과 연전, 그 후 몇년간의 방황기간동안, 모세가 애굽의 궁중에서 히브리민족을 안타까워 하였듯이,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자신이 처한 시대와 민족의 문제를 두고 고민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공사판의 애굽의 감독관을 쳐죽일 정도로 민족의식이 충일했듯이, 그역시 아마도 오산의 스승들로부터 전수받은 민족에 대한 고민을 가꾸고 있었을 것이다.
모세의 광야도피는 바로 스스로 민족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한, 인간적인 민족애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 모세의 광야행이 인간에 대한 가능성과 자기신뢰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듯이, 주기철의 평양신학교행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자기를 신뢰하고 자신을 사로잡아온 문제들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였다.
이것은 민족문제를 포함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겨버리는, 신앙적 승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호렙산 가시떨기 앞에 선 모세가 40년 전의 도도한 자기신뢰와 인간적인 자신감을 다 비우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뼈저리게 고백하였듯이, 주기철도 이제 자신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철저히 깨닫는 수행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를 비우고 자신의 무력을 철저히 깨닫는 자를 세워 지도자로 그리고 승리자로 만들어준다. 이것이 신앙인의 승리의 비결이다.
1925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던 그 해 목사안수를 받은 주기철은 1931년 7월까지 초량교회 담임목사로, 1936년 7월까지는 마산(문창)교회 담임목사로 봉사하였다. 그는, 김익두 목사의 사경회에서 큰 은혜를 받아 인생의 큰 전기를 맞았던 마산 문창교회의 목회자로 부임하여 그의 목회사역의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으나 그는 인생의 첫 반려자 안갑수를 잃고 오정모를 새로 맞아야 하는 등 곡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그가 노회장으로 있는 기간(1932-33)에 야기되었던 경남노회 안의 신앙적 갈등의 문제는 어쩌면 그가 앞으로 신사참배와의 대결에 앞서 겪어야 했던 신앙노선상의 한 시련이었을런지도 모른다. 경남노회가 겪었던 그 사건은 한국 교회가 희년(1934-35)을 맞던 때에 일어났던 여권문제 창세기의 모세저작부인 문제 단권주석 사건과 같은 새로운 신학사조와의 갈등이 있기 전에 나타난 시련이었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사상 중요한 의미를 던져 주었다.
경남에서 교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큰 시련을 겪은 주기철은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한국의 예루살렘 평양에서 일제 태양신에 대결하기 위한 한국 교회 최후의 보루로서 그는 한국 교회의 전면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이 그를 밀어넣고 있었다. 한국 교회가 겪어야 할 십자가의 고난의 길, 그는 그 길을 회피하지 않고 묵묵히 골고다로 향했다. 일제의 거듭되는 신사참배강요를 거부하면서 여러 차례에 걸쳐 검속, 투옥되어 옥고를 치루다가, 1944년 4월 21일 한국 기독교사에 찬란히 빛나는 순교의 길을 걸으니 47세였다.
그는 갔지만, 지금도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를 늘 우리와 함께 하는 존재로 기억하고 있으며, 한국 기독교사의 아름다운 전통이 계속되는 한 그는 그 역사와 함께 살아있을 것이다.
김봉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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