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김대중 대통령의 세 아들 이야기가 온 국민의 가슴에 슬픔을 더해 줍니
다. 오죽하면 세간에 ‘弘3’ 시리즈가 회자되겠습니까?
요즈음 정치의 현장을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라고 언론은 꼬집습니
다. ‘도둑 정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권력을 이용해 사복(私腹)을 채우는 도둑들의, 도둑들을 위한 정치를
말합니다.
곧 아들들과 처남과 처조카와 비서들이 연루된 비리의 망망대해를 맥없이 표류
하는 김대중 대통령 모습을 일깨우는 보도였습니다.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라는 말이 있습니다. “과거를 잊
지 않고 미래의 교훈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은 이 말
의 교훈을 잊어버렸고 결국 오늘의 弘3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현철 씨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었을 때 당시 김대
중 총재는 대통령이 아들 단속을 잘못한 탓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오늘 김대중 대통령은 세 아들로 인해 자괴지심에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현철 씨 사건을 몰아붙일 때의 그 심정으로 ’‘전사불
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의 아들 관리가 되었어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지
금은 그 아들들로 인해 아버지의 노벨 평화상의 영광도 퇴색되고 준비된 대통령
이라는 그 아름다운 닉네임도 부끄럽게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슬픈 일입니다.
그것은 자식을 향한 부모의 가정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깨우는 이
야기입니다.
실패한 자녀 교육
성경에 자식으로 말미암아 가문이 멸망한 예는 엘리 제사장의 경우입니다.
엘리 제사장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였는데 엘리는 그
두 아들의 성전생활에서의 경거망동을 방치했습니다.
사무엘상 2:12절에는 엘리의 아들에 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그리고 17절에는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
더라.”
그리고 사무엘상 4장에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
하스가 죽임을 당하고, 엘리 제사장은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넘어
져 목이 부러져 죽고,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는 이 비보를 듣고 만삭 중
에 놀라 해산을 하고 죽었는데 그 아들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 하였습
니다.
한 마디로 자식 교육을 잘못한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교
훈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다양하게 교육을 합니
다. 그러나 그 교육 방법의 문제로 인하여 오히려 자녀 교육이 실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고,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나머지 정작 주어야 할 것은 주
지 못하고, 주지 않아도 될 것을 주다가 결국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습
니다.
통계적으로 보면 훌륭한 부모 교육 아래서 훌륭한 자녀가 성장한다는 것은 속
일 수 없는 현실입니다. 즉 훌륭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그 배후에는 부모의 훌륭
한 교육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바르게 양육하고자 하지 않겠습니까만 옛 어른들 말씀에
자식 농사만큼은 부모도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이 맞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다양하게 자녀 교육에 관해 지혜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있습니
다.
올바른 자녀 교육
훌륭한 자녀 교육방법은 다양하지만 성경에서 몇 가지를 찾아 정리해 봅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느
니라.”
이 말씀은 자녀 교육은 어려서 가능하지 자라서는 어렵다는 말씀이기도 합니
다.
그것은 어린 나뭇가지는 구부릴 수 있으나 큰 나무 가지는 구부러지지 않는 이
치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자녀 교육 방법입니다.
첫째는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다는 것을 부모는 수용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의 ‘미련한 것’이란 의미는 발달 심리적으로 볼 때 악습에 빠지기 쉬운
아이들의 기질, 혹은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성질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
다.
즉 아이는 사리분별력이 약합니다.
그러니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합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분별력이 약합니다. 선한 것과 악한 것의 분별력이 부족합니다.
따라서 옳고 그름을 분별할지라도 잘못된 것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알더라도
그것을 자제할 수 있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른 교육이 시행되어
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징계하는 채찍이 아이의 미련한 것을 멀리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
다.
곧 채찍은 올바른 양육방법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채찍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훈계의 수단입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양육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채찍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은 감정을 수반한 채찍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
고 있습니다.
채찍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는 물론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채찍질은 아이들을 위축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채찍
은 어려서부터 무례와 방종을 방지하는 교육의 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에 채찍이 사용되는 것은 사랑의 방법이며 최후 수단이 아니라 최
초 응답인 것입니다.
우리 교육 현장에서는 체벌에 관한 찬반론이 지금도 팽팽한 것을 우리는 잘 알
고 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서 매를 맞고 왔을 때 부모의 반응은 두 가지로 분류되고 있습니
다.
하나는 “어떻게 아이에게 매를 칠 수 있느냐?”는 것이고 하나는 “때려서라
도 우리 아이 훌륭한 사람 만들어 달라”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자녀 양육에 유익한 것인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럼
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입장은 일단 아이가 매를 맞았다는 것에 대한 반응이 우선
되어 자제력을 잃어버리고 아이의 교육에 악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흔히 언론에
보도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교육 현장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체벌 불가론자와 체벌 옹호론자
로 나뉘어집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열띤 논쟁을 벌인다 해도 결과는 양자 입장만 확인하
고 이 문제는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로 결론을 내게 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왜 아이를 때리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학교에서의 체벌은 미안한 표현이지만 교사의 교직 수행을 보다
원활하게 이루기 위한 체벌이 정직하게 표현하면 더 많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육현장에서는 체벌 금지가 공식 내용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의 체벌은 부모가 감정에 치우쳐 아이를 채찍질하는 경우는 거
의 없다는 것이 옳은 견해일 것입니다.
저의 큰 아이가 지금은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대학원에서 훈련받고 있지만 이
아이가 5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동생과 함께 장난감 놀이를 하다가 갑자기 “이 새끼야”라고 소리치는 것입니
다. 아이에게서 처음 들어본 말이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훈아 지금 너 뭐라고 했지?”
아이는 순간 얼굴이 붉어지더니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
습니다.
“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그럴게요.”
“그래 잘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아빠가 용서한다. 그러나 아빠가 훈이
를 너무 너무 사랑하는 마음으로 훈이가 말을 잘못한 것을 기억하여 다시는 그
런 말을 하지 않게 하려고 종아리 다섯 대를 회초리로 치려고 하는데 훈이 잘 맞
을 수 있지?”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파리채를 회초리로 하여 다섯 대를 쳤습니다. 아이는 이
를 악물고 눈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다섯 대 매를 맞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날 이후 오늘까지 장성하도록 두 아이는 세상 그 어느 형제보다
사랑하고 위해 주는 형제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그 이후부터 아이들에게서 속된 언어구사를 정말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
하였습니다.
잠언 23:13-14절에는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
중요한 것은 채찍질할 때의 기본자세입니다.
첫째는 사랑의 채찍질이어야 합니다.
잠언 13:24절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
히 징계하느니라.”
여기의 ‘초달’은 ‘쉬브토’로서 문자적으로는 ‘어린 가지’란 문자적 의미
에서 파생된 ‘매’ ‘막대기’를 의미하고 ‘근실히’는 ‘쉐헤로’인데 원어
상 ‘때를 맞추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로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어
릴 때부터 시의 적절하게 자녀의 죄악된 생활을 징계하고 견책하면서 양육해야
함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자식을 진실로 사랑한다면 자녀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하여 잘
못될 때 채찍질을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 가정이 파멸한 것은 바로 이 교훈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채찍보다 더 귀한 사랑
마틴 루터의 부모님은 엄격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리하여 루터의 자서전에서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부모님 곁에는 항상 채찍을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채찍 곁에는 반드시
사과도 놓아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잘못했을 때는 채찍질이 당연하지만 잘했을 때는 반드시 칭찬 또한 아
끼지 말아야 하는 것을 일깨우는 말입니다.
채찍도 필요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십자가 사랑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강한 교훈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가정의 부모는 다음 몇 가지를 자녀 교육에 투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 십자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녀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한 기도는 그 어떤 보약보다 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음식
좋은 옷을 사 주는 것보다 기도하는 것이 비교할 수 없는 존귀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목사로서 아무 것도 넉넉하게 해 준 것이 없었습니
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어느 부모가 그렇지 않겠습니까만 매일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것과 1년
에 하루, 아이들 생일날을 맞아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두 아이를 받으셨고 오늘까지 정말 자랑 같지만 너무 너무 잘 성장했
습니다.
둘째는 자녀를 위해 훈계하는 시간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6:4절은 그래서 자녀 양육의 최고의 교훈입니다. 훈계하는 시간은
곧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가정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입니까?
부모와 자녀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부
모는 부모대로 각자 생활에 분주합니다.
부끄럽기도 한 이야기지만 지금도 저희 가정은 아이들과 입맞춤을 보통으로 합
니다. 그것은 항상 ‘함께’라는 삶의 패턴에서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가정의 행
복입니다.
셋째는 신앙적 교훈이 삶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의 가정의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부모는 참 신앙생활을 잘 했는데 다음 세대에서 그 신앙이 이어지지 못하는 아
픔입니다.
부모의 신앙생활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의 신앙교육은 무엇보다 우선됨을 잊어
서는 안됩니다.
“공부해라”는 소리는 오늘의 가정에 많지만 “예배드려라”는 소리는 듣기 어
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무섭고 놀라운 것은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항존직분자의 가정에서도 “야 이
녀석아 수요일쯤이야 빠지면 어떠니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교 가겠니?”라는 말입
니다.
부모의 언행심사가 신앙적이지 못할 때 그 자녀는 자연스럽게 불신앙인으로 성
장하게 되는 무서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가정에서의 부모의 생활이 신앙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귀한 자녀 교육은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채찍을 들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하는 것입니
다.
교회정보센터 자료의 하나입니다.
백혈병으로 학업을 중단한 중학교 2학년 소년이 머리를 깎았습니다. 그리고 그
는 베개로 입을 막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그리고 모자로 머리를 감추고 사람을
기피하며 말까지 잃었고 음식을 멀리하는 병까지 들었습니다.
아들이 대머리가 된 사흘이 지난 후 아버지가 삭발을 하고 아들의 병실로 들어
섰습니다. 아버지의 삭발을 본 아들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회사원인 큰형이 삭발을 하고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동생은 그 때
부터 입을 열었습니다.
다음날에는 고3인 둘째형이 삭발을 하고 왔습니다. 소년은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었습니다.
다음날에는 어머니가 삭발을 하고 병실에 들어왔습니다. 아들은 얼굴에 미소
를 되찾았습니다.
1999년 9월 13일, KBS-TV 뉴스 시간의 보도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위대한 교훈은 없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인 사
랑은 물론 아닙니다.
다시 한번 요즈음 김대중 대통령의 세 분의 아들 생각을 해 봅니다.
준비된 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의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세 분의 아들
로 인해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언론이 한결같이 변호해 주는 것을 읽었습니다.
민주화 투쟁으로 인하여 자녀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했던 대통령의 지난날
을 들먹이면서 국민들에게 이해를 구하는 청와대 대변인의 말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변명이 될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귀하다고, 안쓰럽다고, 가련하다고 해서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면 그
것은 가문의 패망을 예약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 가정이 그랬습니다.
그러기에 어린이 주일에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가정에 징계의 채찍이 있는
지 돌아보면서 무너져 가고 있는 오늘의 가정을 더욱 든든히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자녀를 위한 징계의 채찍이 있습니까?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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