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도(大盜) 조세형 씨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잊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대도(大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아가 그가 대도(大盜)에서 좀도둑이 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그분은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재벌회장과 고위관료 등 부유
층과 권력층만을 대상으로 물방울 다이아몬드와 수 억대의 현금 등 전대미문의
절도행각을 벌여 이중 일부를 고아원이나 거지 등에게 나누어 주어 한때 '의적
(義賊)'으로 불리는 등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본인입니다.
그런 그가 징역 15년 보호감호 10년을 받고 복역하던 중 98년 11월에 출소한
후 신앙인으로 거듭남을 천명하고 목회자가 되겠다고 서원했으며 에스원 범죄예
방자문위원으로 위촉받아 활동을 하면서 전국 교회의 초청을 받고 신앙 간증집회
를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출감 2년이 안 되어 다시 일본에서 좀도둑 행세를 하다가 교도소
로 갔습니다.
기독교계에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정말 거듭남의 의미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 하는 자괴지심에 한때 침울한 영적 흐름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거듭남을 강조하고 그렇게 새로운 삶을 역설했던 조세형 씨를 초청하
고 간증 집회를 가졌던 교회는 물론 많은 교회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도 사실입니
다.
그렇다면 새롭게 거듭남의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는 새 포도주 새 부대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의 '새'(new)라는
단어는 두 가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첫 번째 '새'의 '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새'의 '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뜻합니다.
이 두 단어가 신학적으로 갖는 의미는 차이가 있습니다.
네오스는 종말론적 내용을 갖지 않지만 카이노스는 구원의 날이 가져다 주는
새롭고 기적적인 것을 갖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포도주, 새 예루살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사람 등 본
질적으로 변화된 의미로 카이노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지만 저의 얼굴 미간은 그리 아름답지 못합니다.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있습니다.
흔히들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했는데 저는 농
담 삼아 제 얼굴은 기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말합니다.
성형외과 전문의 집사님이 이미 주름살을 펴 주시겠다 했지만 저는 그냥 이대
로가 좋다고 오늘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겉모양이 아무리 변해도 내 속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무 의
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내용은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지만 중요한 것은 외적인
변화가 아니라 내적인 변화입니다.
내적인 변화는 정신적인 변화, 의식의 변화, 더 나아가 본성적인 영적인 변화
입니다.
교회에서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거룩한 것처럼 살아가던 사람이 어느 날 추
하고 더러운 삶으로 연루된 것을 보면서 우리는 종종 자괴지심에 마음이 아플 때
가 있습니다.
그것은 카이노스적 변화가 없는 외적인 변화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로마서 1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
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여기의 '새롭게'가 바로 '카이노스'입니다.
지난 주일의 여러분이 오늘의 여러분이 되어 있는 것은 '네오스' 곧 시간적 변
화입니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변화되어 입교인이 서리집사가 되고, 항존직분자
가 되고, 10년, 30년 믿음 생활을 하면서 외적인 변화가 있다 할지라도 내적인
변화, 본질적인 변화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카이노스' 적 삶이란 본질적으로 변화된 삶으로서 육에 속한 사람이 영에 속
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죽을 사람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조세형 씨는 '네오스'적인 변화는 있었을지 몰라도 '카이노스'적 변화는 없었
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바로 예수님께서 '카이노스'의 삶을 가르치는 교훈입니다.
전통(Tradition)과 정통(Orthodoxy)
오늘 본문의 문제가 된 사건의 첫 번째가 금식에 관한 논쟁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유전과 전통을 앞세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저하게 금
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경건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금식을 해야 하는데 예수와
제자들이 금식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힐난을 한 것입니다.
즉 전통에 사로잡힌 사고의 모델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사고로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 메시아 시
대가 도래한 새로운 시대의 사고를 수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금식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전통에 사로잡혀 정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리석
음이 안타깝다는 말입니다.
정통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지속되어야 할 사도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복
음적인 교리와 신학입니다.
그러나 전통은 수시로 성경 말씀으로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형식과
잘못된 사고방식의 틀에 얽매어 새로운 변화를 하지 못하면 그것은 엄청난 잘못
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원래 천주교와 러시아 정교회는 하나였지만 분열이 된 것은 어떤 방식으로 성
호(聖號)를 그리느냐 때문에 아직도 하나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성호를 그릴 때 천주교인들은 이마에서 가슴으로 먼저 그리고 오
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는데 러시아 정교회 교인들은 이마에서 가슴으로 그리고
다음에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는 것의 차이입니다.
이로 인해 1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전통 때문이지 정통
때문이 아닙니다.
제가 본 교회에 부임했을 때 주보 내용을 바꾸는 데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모
릅니다. 저를 아끼시는 분이 말씀하시기를 "지금 주보내용이 좋지 않더라도 얼마
동안은 그냥 지금처럼 하면 좋겠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내용인즉 교회의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꾸면 목회에 큰 지장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타고난 성품도 그랬지만 목회에 대해서는 사람중심으로 하지 않고, 사람을 즐
겁게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미 몇 번 죽었던 생명인
데 생명 바쳐 일하겠다는 서원으로 인해 저는 바로 주보 내용을 복음적으로 목회
적 입장에서 전 교인들에게 유익하도록 내용을 바꾸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전 당회원들이 함께 동의해 주시고 새로운 내용으로 알차게 엮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만 어떤 교회에서는 주보 바꾼 일로 인해 목사가 교회를
사임해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복음송을 부르면 안 된다, 찬송할 때 손뼉 치면 안 된다, 기도는 반드시 3분
안에 마쳐야 한다 등 이런 것은 하나의 전통이지 정통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때나 지금이나 대부분 교회는 전통을 고수하지 정통을 지키려 하지
않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금식에 대한 질문에 '혼인집의 신랑의 비유'를 통해 대답을 하시면
서 전통과 정통의 의미를 새롭게 깨우치셨습니다.
적 삶의 교훈
본문의 두 번째 주제는 생베조각을 낡은 베조각에 붙일 수 없고,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을 수 없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한 마디로 이 말씀은 '카이노스'적 삶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시작된 새로운 진리, 새로운 교훈, 새로운 삶
의 자세는 결코 옛 형식의 틀 안에 국한될 수 없음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복음, 곧 새로운 교훈과 생명의 진리는 바리새주의적인 옛 율
법주의와는 절대 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삶의 형식이 요
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카이노스적 삶의 내용입니다.
낡은 베조각과 낡은 부대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생명력을 상실한 유대교의 낡은 전통과 유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리고 생베 조각과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 교훈, 곧 복음입니다.
어제 중등학교 선생님과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선생님이 이런 말씀
을 했습니다.
"목사님, 요즘 학교 실상이 어떤지 아십니까?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선생님
이 21세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그런 것 아닌가?
교회 환경은 19세기에, 교회 지도자들은 20세기 사고의 소유자들이고, 교인들
은 21세기의 사람들이라면 이미 교회는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과 다를 바 있겠습
니까?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지도자는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야 합니
다. 50년 전의 포항중앙교회의 100여 명의 교회 상황에 집착된 사고로 7천여 명
에 이르는 21세기의 오늘의 교회를 이끌어 가는 지도자라면 거기에서 무슨 탁월
한 지도력이 발휘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기회만 되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라"고 강조했고, 역사를 보는
눈을 열어야 함을 역설했던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주님의 교훈인 생베조각과 낡은 베조각, 새 포도주와 새 부대
의 교훈은“진리 자체는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진리를 담는 그릇은 늘 새로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 제목을 "고정관념의 물동이를 버리십시오"라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공통점은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
하기 때문이며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될 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불행한 것입니
다.
얼마 전 국무총리를 지내시고 지금 한동대학교 재단 이사장으로 봉사하시는 이
영덕 장로님 이야기가 TV에 방영되었는데 시청하면서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
지 모릅니다.
제목이 '일흔 일곱의 청년'이었는데 연로하신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을 위하여 청년처럼 일하시는 장로님의 이야기였습니다.
몸은 젊어도 생각이 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은 늙었는데 생각이 젊은 사람
이 있습니다.
몸도 늙고 생각도 늙었으면 이미 그는 이 세상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은퇴하시고 연로하신 성도님들이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
할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이 청년처럼 젊어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여 하되 최고의 일은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몸이 늙었기 때문에, 돈이 없기 때문에,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하는 것이 아
니라 늙었으면 늙은 대로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
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카이노스'적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
이를 일으키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소경을 보게 하시고, 세리에게 복음을 주
신 것은 본질적인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생명사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새생명을 얻은 사람이 시간적으로 변화된 듯 하다가 다시 옛 사
람으로 돌아간다면 그것이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에베소서 4:22~2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
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
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옛사람의 특징이 어떻습니까?
로마서 1:18-32절에는 옛사람의 모습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사람의 특징이 어떻습니까?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
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여기의 '새것'이 바로 '카이노스'적 존재입니다.
즉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존재입니다.
거기서부터 이해와 관용과 용서와 사랑이 실천됩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충만하
고 감사함이 노래됩니다. 모든 것이 예수로 말미암아 새롭습니다. 생명입니다.
감격입니다.
그것이 '카이노스'적 삶입니다.
거짓된 자아가 아닙니다.
형식적 삶이 아닙니다.
본질적인 변화의 삶입니다.
바울의 삶에서 카이노스적 삶의 내용을 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기 전의 사울은 네오스적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 그의 삶은 카이노스적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온갖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감사함을 잃지 않고 오직 주님을 위해
일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저의 목회단상의 글 가운데 한 편입니다.
지혜롭지 못한 곰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극에 사는 순박한 백곰이 어느 날 시
베리아에 있는 호전적이고 당돌한 흑곰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저녁 식사 후에 시
베리아 곰이 남극 백곰에게 말했습니다.
"남극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추운 지방이 아닙니까? 이런 곳에서는 햇볕을 다
흡수하여 따뜻하게 해 주는 검정 털이어야 하는데 남극 곰님의 털은 이게 뭡니
까? 하얀 백색이니 이 추운 지방에서 더욱 춥겠습니다."
유식한 척, 거만하게 그리고 딱하다는 듯 흑곰이 말했습니다. 순박하여 미련하
게 생긴 남극 곰은 흰털을 갖고 있다는 것이 부끄럽다는 듯이 두 눈을 껌벅거리
면서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이런 털을 갖고 태어났으니 어쩌겠습니까?"
"남극 곰님도 참 딱하십니다. 변화가 없는 자는 발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검
정 물을 들이면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남극 곰은 자기의 아름다운 흰털을 검정색으로 염색을 하고 나니 북극
곰처럼 참 따뜻하고 좋았습니다. 검정색으로 염색을 한 얼마 후에 총소리가 나면
서 사냥꾼이 남극 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남극 곰은 평소처럼 잽싸게
하얀 눈과 얼음 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검정색으로 물들어진 남극 곰
이 자기는 얼음과 흰 눈 사이에 숨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자신의 몸은 흰눈과
얼음 사이에 검정색으로 드러나 있었고 결국 남극 곰은 사냥꾼에게 잡히는 불행
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단은 종종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입은 흰옷을 세속적인 검
은 옷으로 다시 염색하라고 종용할 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축복인줄 모르고 세속적인 색깔로 물들이면
좋을 것같아 우리들의 삶을 세속적으로 물들이지만 결국은 사냥꾼에게 잡히게
된 백곰처럼 우리의 삶을 사단이 얽어매어 버리고 맙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참 많은 변화를 시도합니다. 디자인이 변하고, 새
물건, 새 바람이 부는 세상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여인들의 헤어스타일은 70년대로 돌아가고, 여인들의 치마
길이도 짧아지고 길어지고, 남자들의 넥타이도 넓어지고 좁아지고 그렇게 우리들
의 세상살이는 여러 모양으로 변합니다.
그렇게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해 가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오
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하고 돌아서서 미워하고, 믿는다
고 확신을 주고 돌아서서 불신하는 마음들!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고 극찬을 하다가도 조금만 싫어지면 모든 것이
나쁜 것으로 보여지고 느껴지는 사람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온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함없으신 주님과 함께 유행 따
라 세상 따라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모두가 가룟유다처럼 변해 가는 것 같으니
주님은 지금 얼마나 슬퍼하실까 다시금 생각해 보면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
랑이 충만하여 변치 않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
니다.
그것이 카이노스적 삶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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