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필요한 광야의 시간 2002-05-21 14:34:48 read : 16790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성경구절 마가복음 1:12~13
설교날짜 2002/02/03
역사의 위대한 인물 가운데 고난의 날을 경험하지 않은 자는 없습니다. 그래서
苦盡甘來(고진감래)라는 말이 명구가 됩니다. 고진감래의 반대어는 興盡悲來(흥
진비래), 곧 즐거운 일이 다하면 슬픈 일이 닥쳐온다는 뜻으로 세상이 돌고 돌
아 순환됨을 이르는 말입니다.
제가 부흥회를 인도할 때마다 성도들에게 "제가 고생한 사람같이 보입니까?"라
고 물어보면 거의 하나같이 그렇지 않고 아주 귀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해보지
않고 자란 사람 같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둘째 날 저녁에 저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같이 "아이구 세상에, 아
이구 세상에"를 연발하면서 저의 고생의 날을 함께 아파하면서 예수님 때문에 이
렇게 복받고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음에 박수를 보내주곤 합니다.
목회자 세미나에서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포항중앙교회의 목회의 행복함을 부러
워하면서 "나는 왜 이렇게 고생하는 목회를 해야 하는가?"라고 넋두리를 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그럴 때마다 제가 들려주는 단골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쌀이 없어 라면으로 끼니를 잇고 그러다가 그 또한 여의치 못해 허기진 배를
쓸어안고 두 내외가 그렇게 서러워 울었던 때를 이야기하면 반신반의하는 동역자
들이 많습니다.
소호리 교회를 시무할 때 항상 심방은 내외가 함께 다녔었는데 큰아이 훈이가
여섯 살, 작은 아이 현이가 세 살 때의 어느 날 급한 심방 요청을 받고 두 아이
에게 과자와 장난감을 내놓고 여섯 살 된 큰 아이에게 "심방 다녀 올게. 동생
잘 보고 있어라"고 하고 행여나 싶어 밖으로 문을 잠그고 심방 갔다가 이래저래
눈물겨운 상담을 하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세 시간이 지나서야 아이들 생각
이 나서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본 순간 억장 무너진 상황에 눈이 붓도록 울었
던 때도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울다가 잠이 들었고 큰 아이는 얼마나 울었던지 목이 다 쉬어 그
냥 흐느끼면서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가 엄마가 들어가도 무감각한 상태로 울고
만 있어 그 아이를 품에 안고 "하나님 이것이 목회자가 가야 하는 길입니까?"라
고 통곡을 했던 것은 잊을 수 없는 아픔의 한 세월이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목사에게는 내 집이 없이 교회에서 마련한 사택생활을 하게
되는데 비가 오면 연탄 부엌마다 물이 차 들어 냉방에서 밤을 지새우는 날이 하
루 이틀이 아니었고, 그럴 때마다 교인들은 좋은 집에서 따뜻하게 잘 지내고 있
는 것에 야속한 생각이 들다가도 그것이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인 줄 알고 말없이
목양의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한국교회의 이상하리만큼 이해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목사 생활을 어떻
게 하면 힘들게 할까?"라는 것을 마치 연구라도 하는 듯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
면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얼마든지 행복하고 아름답게 일생을 목양할 수 있음에
도 욕심과 세상적인 일에 마음을 빼앗겨 목회가 힘든 목회자도 있음을 봅니다.
광야의 의미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인류 구원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 성령께
서 광야로 몰아내어 고난의 시간을 경험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에도 교훈적인 메시지가 됩니다.
그것은 인생에 있어서 광야생활은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曠野)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 또는 귀신들의 활동
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역으로 이해합니다.
미개척의 인적 없는 넓은 들판으로서 거친 땅, 거친들, 빈들, 사막,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된 광야의 원문은 rB;d]mi(미드바르)인데 헬라어로는 e[rhmo"(에레
모스)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미드바르는 불모의 땅으로 불리는데 그곳은 들나귀, 시랑, 승냥이와 이리, 독
수리, 타조 등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또는 '씨뿌리지 못하는 땅'(렘 2:2), '사람 없는 땅'(욥 38:26), '짐승이 부
르짖는 광야'인 황무지(신 32:10) 등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광야는 성경에 비유로 사용되었는데 예레미야 22:6절과 호세아 2:3
절을 보면 황폐한 것으로 비유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무인적의 광야는 선지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뵈옵
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광야는 히브리서 11:38절을 보면 광야 같은 이 세상은 하나님
의 나라 백성이 영원히 거할 곳은 되지 못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에 이것을 적용하면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간이 우리의 삶의 광야가 됨
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광야의 시간을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 모두에게 결코 피할
것만이 아니라 필요한 곳이 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나아가 시험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왜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셔야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 한 일종의 훈련입니다. 그것은 세례 요한에
게 세례를 받으신 후 이제 공식적으로 메시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면서 하
나님은 그 사역의 시작에 앞서서 한 가지 시험을 주셨습니다.
그 시험은 곧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일 간의 금식기도와 마
귀의 시험을 통하여 메시아의 사역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시험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입니다.
12절 말씀은 그 질문에 의미 있는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낸지라."
이 말씀은 예수가 시험을 받으신 것은 성령에 의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의 의지에 순응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메시지가 됩니다.
풀어 말씀드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어떤 고난이 있을지라도 성령의 인
도하심으로 인함을 깨닫고 그 고난에 순응하면서 시험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를 무론하고 광야에서의 시험은 이겨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
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쫓기고 있을 때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하고 비
루한 자라고 하면서 돌을 던지고 티끌을 날렸습니다.
너무나 기막힌 상황에 아비새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단번에 목을 베려고 할
때 다윗이 한 말은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습니다.
사무엘하 16:10-12절 말씀입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
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
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
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
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다윗은 자기 자신이 당하고 있는 수모와 아픔의 광야의 시간에도 그 모든 상황
을 하나님의 뜻으로 수용하고 극복하였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어떤 상황에서도 성령님의 역사에 반응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고집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뜻에 순응할 수
있는 지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6-18절 말씀은 그래서 진리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
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그리하면 어떻게 됩니까?
로마서 8:26-28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
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
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
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제 분명한 것은 오늘의 고난이 광야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자신을 힘들게 하
고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이 아니라 광야의 시간은 성숙
을 위한 필요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필요한 광야의 시간
예수님이 광야에서의 생활은 40일이었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복음사역의 기간에 비하면 광야의 기간은 얼마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깐의 고난을 받는 광야의 시간에 들어가면 모
든 것을 다 포기해 버리고 스스로 무너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광야의 필요
한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은혜 없는 사람들이 몫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 가운데서도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고난의 시간
에서도 그것을 필요한 광야의 시간으로 이해하고 극복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믿음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나아오셔서 세례를 받으신 것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
하셨고 광야로 나아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은 것도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인류의 첫 사람인 아담은 마귀의 시험에서 실패했으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
리스도께서는 마귀의 시험에서 이기셨습니다. 그리고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
로서의 사역을 능히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1:13절을 보면 예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
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베드로전서 2:22절 말씀을 보면 "저는 죄
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히브리서 2:18절 말씀을 보면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
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고 기록되었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는 인간의 모든 시험을 다 당하시고 그 시험을 이기심으로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
들이 시험을 당할 때 친히 도우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분명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 어떤 경우든 시험으로 인하여 어려움과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시험을 맡기고 감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5: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
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시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우리를 더욱 성숙케 하는 긍정적인 의미의
시험(Test)과 사람을 유혹하여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시험
(Temptation)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험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아주 특별한 시험이었습니다.
즉 메시아성을 파괴하려는 사단의 시험과, 어떤 유혹도 극복하고 인류를 구원
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의 진면목을 갖게 하는 하나님의 test 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시험을 동시에 다 극복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받으신 광야의 시험은 오늘 우리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항상
계속되는 시험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의 삶에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내용이 지속적으로 일어나
고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먹는 시험, 곧 물질의 문제입니다.
둘째는 명예 시험, 곧 허영의 문제입니다.
셋째는 권세 시험, 곧 교만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를 잘 이기셨습니다. 40일을 주리셨지만 육신의 양식보다
는 영의 양식이 우선이라는 확고부동한 신앙을 보여 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과신하지 않았고 위치질서
와 역할질서의 개념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천하 만국을 줄지라도 진정한 축복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먹는 문제로, 명예문제로, 권세 문제로 광야에 들어
가면 하나 같이 이기지 못하고 마귀에게 KO패 당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
니다.
어떤 경우도 우리는 광야에서 패하는 자가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말씀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김의 노래와 영광
13절 하반 절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하는 말씀입니다.
"천사들이 수종 들더라."
굶주리고 들짐승과 함께 계시면서도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사명 수행을 위한
능력을 받아 감당하기 위해 광야에서 생활하신 예수님이 그 시험을 이기고 나니
천사들이 수종을 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한 것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천사들이 수종드는
것은 반드시 시험을 이기고 난 후였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광야의 시험에서도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
혜임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고난의 세월을 살아가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에게는 영광의 날이 있지만 그
고난가운데서 스스로 무너지고 극복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실패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뱀에게 시험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이기지 못하여 저주와 죽음
을 가져왔지만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가져
온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다양한 광양의 시간을 만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광야의 시간에 들어갈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하나
도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 말씀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
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야보고서 1:2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리고 야고보서 1:12절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
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그리고 베드로전서 4:12-13절 말씀에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
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때로는 광야의 생활을 하면서 지칠 때가 있어도 결코 우리는 넘어질 수 없습니
다.
긴 인생 여정을 승리하려면 광야의 시간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 존슨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고난과 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인간 최고의 기쁨이 있다."
살아가노라면 힘든 시간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와 신
앙을 가지고 오늘의 광야의 시간은 필요한 것임을 깨달아 더욱 승리하는 삶이 되
기를 축복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수는 발칸 산맥의 장미에서 나오는데 반드시 한밤중에
장미를 따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인격과 신앙의 향기도 극한 고난의
밤, 절망과 아픔의 광야의 시간에 발산되는 것입니다.
같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어두운
벽을 바라봅니다. 광야의 시간에서도 밝은 면을 생각하는 사람이 성공자가 됩니
다.
보리 이삭이 잘 자라면 한 포기에 450알이나 열립니다. 그러나 처음 돋아난 줄
기는 그렇게 많은 낱알을 떠받칠 수 없고 겨우 80알 내지 90알 정도밖에 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농부는 보리가 싹을 내면 발로 밟습니다. 이 때 허약
한 싹은 꺾여집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게 되는데 전보다 더 강한 줄기가 됩니
다. 그래서 몇 100알이 열려도 문제없습니다.
보리 싹을 밟는 것을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그릇된
생각입니다.
요셉은 13년의 광야의 시간 때문에 위대한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축복의 반열
에 섰습니다.
탈무드의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을 가고 있었습니다. 날씨는 타는 듯 뜨거웠고 길은 지루
하기 한이 없었습니다.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아버지, 저는 힘이 다 빠진 데다가 목이 타서 죽겠어요."
"아들아 용기를 내라. 우리의 선조들도 이 고통의 길을 다 걸어갔단다. 이제
곧 마을이 나타날 것이야"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때 그들의 눈에 공동묘지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본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것 보세요, 우리 선조들도 여기서 모두 죽어갔지 않아요. 도저히
더 이상 못 가겠어요."
"아들아 공동묘지가 있다는 것은 이 근방에 동네가 있다는 표시이다."
사람이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은 거기에 희망도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
하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겨울에 제비가 보이지 않는다고 제비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면
제비는 다시 돌아옵니다.
한 겨울 앙상한 가로수를 보고 그 나무가 죽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봄이 오
면 다시 싹이 나서 푸른 나무가 됩니다.
안개 짙은 섬은 에메랄드가 생성되기에 좋은 섬이란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을 때 태양이 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얼마후면 구름은 걷히고 태양은 변함없이 대지에 빛을 뿌립니다.
살아가노라면 광야에 들어가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절망해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생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광야에서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어떤 광야도 성령님이 나를 그곳
으로 몰아내셨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여호와닛시 깃발을 흔들 수 있습니다.
주의 은혜로 또 한 주간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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