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목사로 임직을 하던 날 아침, 아버지는 저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몇 가
지 들려주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뒤늦게 예수님 영접하고 집사로 봉직하시던 아버지가 아들이 목사가 되는 날
그렇게 좋아하실 수 없어하셨습니다.
그러나 좋아하시는 만큼 목사로서의 사명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신학적으로서가 아니라 보편적 삶의 윤리적 측면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있었습니
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의 사자(使者)이니라.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임을 잊지 말라.
하나님의 심부름을 맡았으면 성실하게 심부름을 잘 해야 한다.
부디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돈을 사랑하거나 세상적인 것에 마음을 두어서는 하나님
의 사자가 아니니라."
80을 바라보시는 노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그 당부를 듣는 아들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습니다. 그 당부는 신학교 재학시절 어느 교수님의 가르침보다도 진
하게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사자(使者)!
그것은 이 땅의 모든 목사의 이름이지만 오늘은 굳이 목사에 국한하지 않고 우
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의미를 두어 말씀을 받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목사만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
도인이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하면서 세상을 복음으로 새롭게 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복음의 삶입니다.
세례요한의 출현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마가는 먼저 2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소개하면서 세례요한의 출현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요 섭리라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사야의 글을 먼저 인용하기 전에 마가는 출애굽기 23:20절 말
씀과 말라기 3:1절 말씀을 인용하고 난 후에 3절에서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였습
니다.
출애굽기 23:20절 말씀입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
르게 하리니"
그리고 말라기 3:1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
을 예비할 것이요 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
의 사모하는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세례요한의 출현을 예언을 통해 마가는 먼저 생각하고 그리고 이사의 40:3절
을 인용하였습니다.
이사야 40:3절입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
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내용 한 가지를 우리가 알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출애굽기와 말라기에 나타난 '使者'가 세례요한의 예수에 대한 임무를 의미한다
면 3절에 나타난 '소리'는 세례요한의 메시지의 강조점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자(使者)로서의 세례요한을 먼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오늘 우리의 모습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에 관해서는 누가복음 1:11절 이하에서 보편적으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장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요한을 허락하셨
습니다.
요한은 부모는 물론 모든 사람이 기뻐할 아들로서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
을 입고 출생과 동시에 나실인으로서의 사명, 곧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이스
라엘 자손을 주께로 돌아오게 할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천사의 예고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출생과 함께 천사의 예고대로 자라서 광야에 살면서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주의 길을 예비
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아들로서의 그는 전통적 학문을 통달하고, 특히 성경을 숙지하고 있
었을 것입니다.
광야에서 고독하게 시대의 문제를 명상하며 보편적으로 추구하던 계급 의식이
없었으며 구약 예언의 준엄한 견해로 자기의 영혼을 길렀습니다.
그것이 사자(使者)로서의 세례요한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使者
막 1:2 사자(使者)라는 말은 히브리어 '말라크'(&a;l]m')
인데 이 단어가 헬라어로 번역될 때는 a[ggelo"(앙겔로스)로서 영어의
Messenger, 즉 소식을 전하는 자, 곧 개인은 물론, 국가의 사절로서의 파견된 사
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천사로도, 선지자로도, 제사장에 대해서도 사용되었습니
다.
풀어 말씀드리면 본문의 세례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
로서의 신분이었으며 그 신분에 맞는 삶을 통하여 사자로서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주제입니다.
오늘도 전국 각처의 신학대학교에 많은 목사 후보생들이 입학을 합니다.
특히 우리 교단 장로회 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은 한국의 하버드라는 말이 있
을 정도로 신학대학으로서 명문대학이 되었습니다.
하나같이 훌륭한 대학을 졸업하고 목사가 되기 위하여 신학대학교로 몰려드는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보고 선배 목회자들의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는 소위 엘리트 청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목사가 되기 위하여 선
지동산으로 몰리는 것은 내일의 한국교회와 세계복음 사역에 한국이 차지하는 몫
이 엄청 클 것이라는 기대감입니다.
다른 하나는 요즈음처럼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고 목사가 되면 속된 표현
으로 생활문제는 일차적으로 해결되니 사명의식 없이 직업의식으로 오는 경우의
걱정스러운 불안감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아멘 하면 감사할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잠언 16: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
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복음 사역은 사람이 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우리가 믿어
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얼마 후 아주 속된 표현이지만 "대학교 예비고사 떨어지
면 신학교에나 가라"는 말이 통용되었던 한 때를 생각하면 오늘의 신학대학교에
엘리트 젊은이들이 몰려오는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자의 삶
이제 세례요한을 통하여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자의 삶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
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을 세상에 보내실 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먼저 알
아야 세례요한의 사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절 하반 절과 3절의 말씀이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습니다.
즉 "주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의 사역은 곧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실 예수의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이와 같은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본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것
은 마치 베드로가 마태복음 16:16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고백 못지 않은 마가의 신앙이며 삶인 것을 알 수 있습
니다.
이와 같은 메시아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세례요한은 세상의 구주로 오시는
예수를 영접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길 닦는 거룩한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내용이어야 하며 궁극적 신앙의 목
적이기도 합니다. 곧 복음 사역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
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는 데는 빈부 귀천의 차이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
을 믿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교회의 거룩한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시작했던 시골교회에서의 한 사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의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날마다 술로 지새우는 K 청년은 온 동리 사
람들이 다 싫어하는 밉살스러운 대상이었는데 그 날도 술에 만취되어 11시 주일
예배 시간에 예배당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이미 예배가 시작되었고 뒷자리에 앉자마자 술에 취한 그는 혼자 중얼거리면
서 뒷자리에 앉은 교인들의 신경을 건드리게 되었습니다.
설교가 한참 진행되는 시간에 장로님이 뒤를 보면서 손짓을 하는 순간 기다렸
다는 듯이 집사님 두 사람이 그 청년에게로 다가가 양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 예
배당 밖으로 끌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내 눈에 불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교회를 여기 세우신 것은 바로 K선생님을 구원하시기 위함인 것
을 모르십니까? 그냥 두십시오."
벽력같은 소리에 집사님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이미 의자에서 일어나 뒷문
까지 간 그를 그대로 놓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술에 취해 얼굴이 벌겋게 된 그는 강단을 향하여 알아듣지 못할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그냥 예배당 밖으로 비틀거리면서 나갔습니다.
그 날 오후 저는 그 청년의 집으로 가서 정중하게 사죄를 했습니다. 저에게 들
려준 그의 말은 주님의 준엄한 책망으로 들렸습니다.
"전도사님, 나도 교회에 가고 싶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었습니다. 왜 교회는 나 같은 놈은 못 갑니까?"
오늘의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오늘의 그리스도인은 무엇 때문에 교회를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는 세례요한이 당시에 회개의 대상으로 외
쳤던 오늘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의 만민들이 예수를 믿고 그분을 영접
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빈부귀천의 차이가 있
는 것이 아닙니다.
4-5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
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기 죄를 자복하고 세례를 받
아 예수를 영접하는 거룩한 사역을 수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 뜻이, 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순종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사자의 사역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때의 세례요한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나 같은 것
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적 의미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요한은 약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하나님의 사자는 세상에 살면서 의식주 문제를 1순위에 두지 않습니다.
세례요한은 우리가 알거니와 제사장의 아들로서 얼마든지 호화롭게 평안하게
잘 살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삶을 살았
기에 의식주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세례요한의 의식주 생활은 단순, 소박, 청빈 이었습니다.
여기 '입고'라는 단어 '엔데뒤메노스'(ejndedumevno")
는 아직도 그 옷을 입고 있는 상태(having been clothed
with)를 의미하는 것으로 일상의 생활이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고 약대털옷을 의복으로 하여 광야생활을 한 세례
요한의 삶 그 자체는 한 마디로 철저한 자기 절제와 금욕을 지향하는 나실인의
특징으로서 오늘의 모든 사역자들이 배워야 할 의식주 생활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사역에 앞선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오늘 우리의 삶의 본질
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빈들이라는 의미는 삶의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것이며, 약대털옷을 입었다는
것은 의복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며, 메뚜기와 석청을 음식으로 삼았다는 것
은 음식 문제에 메이지 않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의식주 문제로 교회마다 목회자와 교회와의 갈등이 빚어지고 얼마 되
지 않은 사례비 문제로 목회자도 교회도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로 인해 하나
님의 거룩한 복음 사역이 파괴되는 현상이 도처에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세례요
한을 통해 오늘의 사명자들과 교회들이 각성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사자는 삶 자체가 메시지가 되어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소리'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그 내용이 7-8절 말
씀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의 존재는 전혀 나타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나
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주의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자기는 앞세우고,
자기는 높이고 예수님을 높이지 않는 것입니다.
7절 말씀을 보면 세례요한은 소리로서의 자세, 곧 자신을 얼마나 낮추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 말은 보통 말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을 낮춘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자의 삶의 내용입니다.
소리만 요란하고 그 삶의 내용이 부실하면 소리는 소리로서의 의미를 잃어버리
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보다는 삶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며 삶 자체가 메
시지가 되어야 그 소리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국무총리를 지내신 박태준 성도님이 해외에서 김해공항으로 귀국할
때 공항 환영행사에 함께 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검정 바바리 코트를 입고 지팡이를 들고, 검은 중절모자를 쓰고 비행기에서 내
린 박태준 성도님은 마중 나온 정부 관리 및 정치인들을 향해 미소를 띠고 귀빈
실로 들어오시다가 귀빈실 앞에 서 있는 저를 보시고는 곧 바로 모자를 벗어 왼
쪽 옆구리에 끼고 짚고 오던 지팡이를 옆으로 들면서 곧바로 저에게로 다가와 허
리 굽혀 인사를 하셨습니다.
많은 분들이 놀란 표정이었고 "저 사람이 누구냐?"고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귀빈실에서도 총리께서는 목사에게 성도의 모습으로 깍듯이 대해 주면서 예의를
갖추셨던 것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인격이며 신앙입니다.
그분은 목사라는 직에 관해서 하나님의 사자라는 개념이 분명했고 목사의 직
은 이 세상 그 어떤 직과 비교할 수 없는 성직이라는 것을 평소에도 강조하신 신
앙인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목사를 자기 회사 직원처럼 대하면서 존경심도 없을 뿐 아니라 기본
예의도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인격과 신앙을 바르게 갖춘 신앙인이라면 결코 그
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섬기고 낮아지고 대접하는 것이 높아지고 섬김 받는 원리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8절 말씀에서는 소리로서의 사명의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
라."
이 말씀은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권위의 본질적인 차이를 의미하는 말씀입니
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자기의 할 일에 대하여 분명하게 정의를 하는 것으로써 결
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음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요한의 사역은 곧 소리로서의 사명 수행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하나님의 나팔이어야 합니다. 자기 소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이 말씀하시는 것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몫뿐입니다. 그것이 소리로서의 사명입
니다.
소리로서의 세례요한은 거룩한 사명을 수행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
는 것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몇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선구자로서의 사역을 의미합니다.
즉 광야 길을 행군할 때 앞서 선발대가 길을 내는 것처럼 세례요한은 사람들
의 광야 같은 완악한 마음을 일깨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순조롭게 하는 선구
자 역할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둘째는 선지자로서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거친 들판에서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가감없이 그
대로 선포하는 것은 백성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사명 수행을 하다 보면 완악한 백성들에게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세례요한 불의의 세력에 항거하면서 소리로서의 충실한
사명을 수행하다가 결국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사자의 삶이며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기에 선견하고 선지하는
자로서의 삶은 당연히 고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삶의 내용임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사자로서의 사명을 거룩하게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함을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몇 가지 내용을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신앙생활의 모습은 어떤가?
둘째, 예수 때문에 살고 예수만을 높여야 하는 나의 오늘의 삶은 과연 세례요
한처럼 살고 있는가?
셋째 나의 모습에서 세례요한 같은 겸손함이 있는가?
넷째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나는 그 사명을 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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