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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에서 환영받는 사람
    2002-05-21 10:23:42   read : 2286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2002. 4. 21 // 행 7:54-60

    여러분은 이 땅에 살면서 환영을 받아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마 우리 모두는 누군가로부터 몇 번 정도는 환영을 받은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적게는 친지나 부모님 집을 방문했을 때 앉아서 기다리지 않고 집 앞에 마중 나와 있으면 얼마나 반가우셨습니까? 환영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중 앞에서 열렬한 박수를 받기도 합니다. 신문이나 TV를 통해 보면 가끔 대단한 환영의 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탤런트나 축구선수, 그들이 이기고 돌아왔을 때 그 나라 국민들의 환영은 대단합니다. 외국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우리는 김포공항 좌우로 학생들을 동원해서 양 나라의 국기를 들고 그를 열렬히 환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의 환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환영을 받고 난 이후에 그 환영이 크면 클수록 허전함을 느낀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이런 극진한 환영들이 때로는 야유와 저주로 바뀌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미국에서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한 축구선수가 자살골을 넣어서 그 나라가 축구에서 졌어요. 그 선수가 공항에 귀국했을 때 그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 권총을 쏴서 그 선수를 죽인 사건, 그것이 미국 신문에 얼마나 크게 보도되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한 ·일전 참패 후 우리 한국 선수들도 공항에 나오면서 굉장히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귀국했으리라고 저는 생각됩니다.

    이렇듯 이 세상의 환영은 일시적이요 변화적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오늘 나를 환영하던 사람들이 내일 나를 향해 칼을 들이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완벽한 환영이 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환영은 허전하지도 않습니다. 변하지도 않습니다. 정말 완벽한 환영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에 나타난 천국에서의 환영입니다.

    이 본문은 스데반이 순교 당하는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인데, 달리 말하면 스데반의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는 모습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의 영혼이 이 땅을 떠나 천국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이것에 관하여 하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해 자세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56절 말씀에 학자들은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이 56절이 주목을 받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자'라는 단어입니다. '인자'란 무엇인가? 사람의 아들입니다. 신약성경을 볼 때 예수님을 두 가지 명칭으로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다른 하나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인자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은 신자라고 하지 않는가? 아마 번역하는 사람들이 이상해서 안한 것 같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은 자신의 명칭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자(사람의 아들)로 소개했건만, 제자들은 단 한번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아!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러나 단 한번 어느 제자도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늘 유독 스데반이 예수님을 향해 '인자'라고 불렀습니다.

    왜 인자라고 불렀을까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스데반이 발견한 예수님은 완벽한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완벽한 인간이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이 땅을 창조하셨으며,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을 다스리실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이 그 앞에서 그를 향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뿐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동시에 인자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늘 보좌 영광을 다 버리시고 저와 여러분의 모습으로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어요.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 병자들, 죄인들과 함께 하시고 약한 자들과 동고동락하신 분입니다.

    스데반이 마지막 죽는 순간에 발견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인가? 부활 승천하셔서 인간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인간을 그저 통치하시기만 하는 통치의 왕이실 뿐만 아니라, 저 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지만 오늘도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하나님! 인자였습니다. 내가 지금 고난받는 것, 내가 곧 돌에 맞아 죽을 터인데 저 돌을 맞는 고통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친히 남김없이 다 아셔서 나를 이해해 주시는 인자 되신 하나님! 스데반은 마지막 죽는 순간에 그 인자를 발견했습니다. 인자! 그래서 스데반은 유일하게 제자들 가운데 예수님을 인자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단어가 등장하는데, 그 인자 되신 예수님께서 '서 계셨다'고 얘기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종종 보는 바로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여기에 '앉으셨다'는 것은 속죄의 사역을 다 마치셨다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하늘을 열어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목도하였는데, 예수님이 일어서 계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 계셨어요!.

    벵겔이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일어서셨는가? 예수님은 스데반을 환영하기 위해 일어서셨다는 겁니다. 이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왜 서셨다고 표현합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스데반아, 어서 올라오너라!" 그의 순결을 보고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예수님은 앉아서 그를 맞이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그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예수님은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스데반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떠나는 날, 우리가 천국에 막 들어가는 그 순간 주님께서 앉으셨던 보좌에서 일어나 우리를 맞으신다면 그것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스데반이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도대체 주님께서 그의 고통을 어떻게 다 이해하셨기에 그가 마지막 천국 문에 들어서는 그 순간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단 말인가! 여러분, 이런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맞이하시는 천국에서의 대단한 환영을 받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은 이것에 대해서 침묵하시지 않습니다. 스데반만 환영받기를 원치 않으신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도 천국에서 동일한 환영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우리가 천국에서 주님으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을 수 있는가를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한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자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소위 말하는 가해자지요. 그들이 누구입니까? 산헤드린입니다. 좀더 알기 쉽게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교회의 지도자였어요. 구약성경을 줄줄 외우다시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쳤어요. 구약성경을 알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데반의 말씀을 들었던 자들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늘 본문에 보니까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이 찔렸다고 얘기합니다. 54절을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

    '찔렸다' 헬라어로 '디에프리온토'라는 이 말을 직역하면 '화살이 과녁에 꽂혔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몽골에 가면 역사 박물관은 꼭 보아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세계를 한때 지배했던 몽골족이 지금은 처참하게 2백만 밖에 남지 않았어요. 지금 그들이 얼마나 가난하게 사는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저는 궁금했어요. 박물관을 쭉 둘러보았습니다. 그 중에 징기스칸이 쓰던 활을 전시해 놓았어요. 그 활이 얼마나 큰지 화살 하나가 창만 했어요. 징기스칸이 대단한 거구였는데, 그 큰 화살을 활에 매겨서 장사가 힘껏 당겨 놓았을 때 그것이 과녁에 가서 깊이 꽂힙니다. 바로 이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렸어요. 꽂혔어요. 즉 정곡을 찔림 당한 겁니다. 오늘 여기에 모인 산헤드린 사람들은 스데반이 설교할 때 이 설교를 남의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한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겁니다. 말씀이 빗나간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이것은 내게 말씀하신 것이다. 아! 저 사람은 나한테 얘기하고 있구나!'하고 과녁에 화살이 꽂히듯 그들의 마음에 찔렸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찔렸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성경은 가르치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 받기 위해 온 사람들입니다. 무슨 말씀이든 '이것은 나를 두고 한 말씀이구나, 내게 주신 말씀이구나'하고 우리는 들어야 합니다. 가끔 설교를 마치고 나가다보면 어떤 분이 저를 두고 핀잔하는 투로 얘기합니다. "목사님, 오늘 왜 제 얘기를 꺼내셨어요?" 신기한 것은 저는 그 사람에게 지난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를 동시다발적으로 예닐곱 명, 많게는 열 명 정도가 같은 얘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찌 이 사람들을 다 알아서 그들의 얘기를 하겠습니까? 그러나 어쩌면 당연한 겁니다.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지요. 찔림을 당한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찔림을 받고 난 이후에, 그 이후에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찔림을 받은 다음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왜 내 얘기를 하냐고 쓸데없이 다른 데 신경을 씁니다.

    오늘 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54절을 다시 한번 보세요.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박혔습니다. 주의 말씀이 화살같이 그 마음에 꽂혔는데, 이 사람들의 반응은 놀랍게도 이를 갈았어요. 이를 갈 뿐만 아니라 그 다음절에 보니까 귀를 막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문제입니다. 싸울 때 보면 왜 싸우는가? 이유는 간단합니다. 귀를 막으니까 싸웁니다. 대부분의 싸움을 보십시오. 귀만 열면 싸울 일이 없어요. 남의 얘기를 좀 들으면 안 싸워요. 그런데 왜 싸웁니까? 내 얘기만 하려는 거예요. '니 얘기 들어봐야 아무 소용없다'하고 악을 쓰고 남의 얘기는 듣지 않으니까 거기서 싸움이 나고 살인이 발생하는 겁니다. 듣는 마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의 귀를 열면 이해가 가요. 감동이 오는 겁니다. 악의에 찬 사람은 막바지에 이르러 귀를 막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천국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오늘 이 산헤드린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 성경의 박사들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귀를 막아버렸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맥락인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설교를 하는데 똑같이 찔렸다는 단어가 나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찔렸어요. 그 사람들은 유대인들 일반 사람들인데 삼천 명이나 되었어요.

    도대체 베드로가 무슨 설교를 할 때 찔렸는가? 이런 설교를 했어요.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여러분! 정말인가요? 실제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로마 군병이 박았어요. 조금 더 책임이 있다면 아마 빌라도가 책임이 있을 것이고, 바라바가 책임이 있을 것이고, 아마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배반자인 가롯 유다가 책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삼천 명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너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얘기합니까? 제가 그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그랬을 겁니다. "말 조심하시오! 우리가 언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단 말이요? 로마 군병이 박았지 않았소. 당신이 보지 않았소!"

    그러나 성경 말씀은 무엇이라고 얘기합니까? 그들은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옳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에 찔릴 때에, 화살이 되어 꽂힐 때에 그들은 반항하지 않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똑같은 말씀이 선포되었으나 한 무리의 사람들은 이를 갈았고,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은 가슴을 열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삼천 명은 그 날에 성령의 충만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누가 천국에서 환영받을 것인가? 이 땅에서 존경받는 사람일까? 지위가 높은 사람일까, 호화로운 집을 가졌던 사람일까? 이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 내 마음에 찾아온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하는 자를 주님은 보좌에서 일어나,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릴 때 귀를 여는 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여십시오. 들으십시오.

    탈무드에 보면 사람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항아리에 비유했어요. 어떤 사람은 거꾸로 된 항아리와 같은 사람이 있어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데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아무리 소낙비가 쏟아지면 뭐합니까? 거꾸로 놓으면 소용없는 겁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은 똑바로 놓여 있긴 있는데, 그 안에 오물이 가득 찬 사람이 있어요. 더러움이 가득 찬 것이지요. 여기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한 종류의 사람은 비어 있는 항아리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비우십시다. 주님을 향해 우리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에 찔릴 때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2.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자가 되어라

    사람이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는 것에 따라 그대로 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날마다 삼류 연속극만 보면 묻지 않아도 삼류 인생이 되는 겁니다. 얼마 전 우리 교인을 만나서 텔레비전 얘기가 나왔어요. TV 연속극을 얼마나 봅니까 하고 물었더니 별로 안 본다고 합니다. 자기는 월 ·화 드라마 하나 보고, 수 ·목 드라마 하나 보고, 주말 드라마 하나 본다고 하더군요. 정말 별로 안 보더군요. 여기에 혹시 그런 분이 계십니까? 그쯤 보면 여러분은 10년 후에 묻지 않아도 삼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음란물을 보면 음란하게 되어 있어요. 틀림없습니다. 심은 대로 거두니까요.

    우리가 날마다 돈만 생각하고, 돈만 바라보고 살면 돈 신(神)의 노예가 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돈입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우리나라 말에는 재물로 번역되었지만, 이 단어는 사실 매먼(mammon), 돈 신(神)입니다. 예수님은 아예 돈을 돈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신으로 표현해 주었어요. 얼마나 우리의 마음이 이것에 빼앗기기 쉬웠으면 말입니다. 날마다 미운 것만 보고 살면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산 괘법동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 사람이 이혼했는데,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기의 두 아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장인과 장모를 칼로 찔렀어요. 장인은 죽고 장모는 중태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요? 짐승도 아닌데... 그러나 가능합니다. 어떻게요? 날마다 미운 것만 바라보고 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사는가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위에 것을 찾으라!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의 관심을 일시적인 것에 두지 말고 영원한 하늘 나라에 집중시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본문을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왜 우리가 위에 것을 찾아야 합니까? 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하늘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계속 얘기합니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멀쩡히 살아있는 우리보고 죽었다니요? 우리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니 무슨 얘기일까요? 오늘 사도는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죽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치관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수를 참으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서 세상에 대해서 내가 죽는 것입니다. 세상의 쾌락, 세상의 돈, 이런 것에 대해서 내가 죽는 겁니다.

    죽은 사람을 보셨습니까? 죽은 사람 앞에 재미있는 연속극을 갖다대면 그 사람이 "허허허"하고 웃으면서 벌떡 일어납니까? 진수성찬을 차려놓은들 그 사람이 일어나 먹습디까? 여러분, 우리는 죽었습니다. 예수 믿는 그 순간, 세상 것은 다 죽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어요. 그리고 우리의 생명이 이제 다른 데 있어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 안에 감취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감취었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어요. 하나는 안전함입니다. '오! 나의 예수는 반석이시니 우리의 생명이요' 이 세상에 상관없이, 환경에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 딱 보호되어 있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귀중한 어떤 것은 감추어 놓잖아요. 안전한 곳에 말입니다. 가장 안전한 금고, 하나님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춰져 있어요.

    그러나 동시에 한 가지 더 얘기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아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차이가 없어요. 아니 오히려 못할 때가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업을 일으키는데,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해요. 돈도 사랑하지 않아요. 쾌락도 사랑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냐고 사도는 얘기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이 세상 사람들이 꿈도 꿀 수 없는 놀라운 영생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을 생각지 말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할 이유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하늘나라를 얼마나 바라보십니까? 오늘 본문에 보니까 스데반은 이 극한 상황, 사람들이 하나 하나 손에 몇 개의 돌을 들었습니다. 이제 곧 명령이 떨어지면 자기를 칠 그 찰나에 스데반은 환상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갑자기 하늘이 열리더니 앉으셨던 예수님이 아니라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 나의 고통을 이해하시는 그 주님을 보았다고 스데반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 위기가 닥치면 평소 생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극한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늘 나라가 열림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가 평소에 하늘나라를 바라보고 산 줄 믿습니다.

    천국에서 환영받기를 원하십니까?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천국에 갔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를 열어보세요. 물론 수박 쪼개듯이 열어보지는 않겠지요. 여기에 슬라이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빛을 비추자 내가 일생동안 했던 머리의 생각들이 저기에 전시물처럼 사진이 되어 쫙 나타납니다. 그 나타난 첫 번째 장면이 하나님의 말씀, 하늘나라, 예수님, 사랑, 용서, 성결, 찬양... 거기에 모였던 뭇성도들과 예수님이 무엇을 할까요? 김일성(?) 박수를 칠 줄 믿습니다. 우뢰와 같은 박수! 또 다른 사진이 펼쳐지고 평생 어떻게 살았는가가 보여졌습니다. 그런데 첫 번째 나오는 것이 세종대왕 지폐, 달러, 섹스, 수많은 음란한 것들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교회에서는 그렇게 거룩했는데... 사도 바울은 이것을 향해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환영받지 못할 구원!

    여러분, 천국에서 환영받기 원하십니까? 그 날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심판하실 때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우리를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의 생각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늘나라를 바라보십시오. 이 땅에 대해서 우리는 죽었습니다. 하늘나라를 사모하십시오.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서 환영받을 자가 될 수 있는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올바로 반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시시때때로 나에게 말씀할 때 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날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3. 늘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야 한다

    늘 기도하는 자세!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뜻에 대해 언급하시며 세 가지를 얘기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16,17,18절의 짧은 구절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니요? 운전할 때도 밥할 때도 기도해야 하는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 말은 늘 기도할 자세가 되어 있으라는 겁니다. 옆구리만 쳐도 기도가 튀어나오도록 그런 마음가짐으로 살라는 얘기입니다.

    이미 제가 말씀드렸지만, '쉬지 말고'라는 단어를 올바로 번역하면 hacking cough, 우리 나라 말로 '잔기침'이라고 합니다. "요즘 잔기침 병에 걸렸어!" 목에 잔기침 병이 걸린 사람은 조금 호흡만 잘못 해도 콜록거립니다. 기침이 항상 목에 붙어 있어 늘 나올 준비가 되어 있는 겁니다. 참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여기에 이 단어를 썼어요. 쉬지 말고 기도하라. 내 환경이 어렵든지, 슬프든지, 좋든 나쁘든 간에 항상 기도하는 자세로 살아가라는 겁니다.
    60절을 보세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무릎을 꿇었다고 본문은 얘기하지 않습니다. 언제 꿇은 겁니까? 뭇돌에 맞았어요. 이미 육신은 깨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정신은 혼미해집니다. 이제 이대로 죽는구나 싶은 순간에, 끝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무릎을 꿇었다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남의 얘기로 읽지 마시고 상상해 보세요. 수많은 그 동안 알아왔던 여러분의 친구들이, 같이 교회 생활하던 유대교의 친구들이 돌을 들고 갑자기 원수가 되어서 자기를 내려칩니다. 돌이 날아와 머리를 쳐서 피가 흘러내립니다. 그리고 온 갈빗대를 치고 다리를 칩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은 무릎을 꿇었다고 얘기합니다.

    돌무더기 속에서 지금 엉망이 된 육신, 정신은 오락가락 합니다. 한 가닥 남은 정신마저 가물가물 사라져 갑니다. 이러한 순간에 무릎을 꿇은 겁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기도 없이 내 인생을 끝낼 수는 없다!' 그래서 넘어져 가는 몸을 가누면서 한사코 마지막으로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군중의 고함소리와 온갖 저주, 그 수많은 돌 세례 속에서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얼마나 귀한 모습입니까!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이것이 하루 아침에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한번도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자기 친구들이 돌을 던질 때에, 마지막 죽어 가는 순간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가지 때문에 가능했던 줄 믿습니다. 스데반은 늘 기도했습니다. 늘 언제 어디서든 기도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쁠 때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슬플 때도 그는 기도할 줄 알았습니다. 내 몸에 병이 찾아올 때, 누가 나를 저주할 때... 무슨 일을 당하든지 그는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는 그 순간에도 그는 평소에 기도하던 모습대로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다가 죽는 것이 여러분의 소원입니까? 오늘부터 소원을 바꾸십시오. 저는 이 본문을 연구하다가 어제 책을 덮어놓고 1,20분간 기도했어요. 제 죽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가 돌에 맞아 죽는 순교는 못할지언정 저도 기도하다가 무릎 꿇고 죽게 도와주세요.' 기도하다가 죽는 자! 하나님이 환영 안 하시겠습니까?
    그는 마지막 죽으면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리고 한 가지 더 기도를 덧붙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러한 스데반을 주님께서 보시고 보좌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맞이하신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했는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오늘 만일 이 예배당 문을 나가서 여러분의 영혼이 천국 문에 이르게 된다면,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 영혼을 부르셔서 천국에 입장해야 된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천국에서 어떤 환영을 받을 것 같습니까? 과연 주님이 여러분을 벌떡 일어나 맞이하시겠습니까? 혹 들려진 말씀에 귀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게 화살이 박히듯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꽂히는데도 일심으로 귀를 막고 자기의 생각대로만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매주일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의 가슴에 화살처럼 꽂힘에도 불구하고 무반응하게 닫아놓은 항아리, 썩은 물이 고인 항아리, 돌짝밭, 길가, 가시밭처럼 찾아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멸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며 사십니까? 당신의 진정한 소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오늘 하나님이 와서 여러분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시겠다고 하면 여러분은 솔직하게 무엇을 1,2,3위로 내어놓으시겠습니까? 혹 이 세상의 것은 아닙니까? 썩어질 돈은 아닙니까? 쾌락입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을 더 드립니다.
    당신은 기도하시나요? "예! 목사님, 저는 새벽기도 합니다." 이런 얘기가 아닙니다. "예! 목사님, 저는 철야기도 합니다." 저는 지금 이것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옆 사람이 나를 치기만 해도, 내가 조금만 조용한 생각에 사로잡히기만 해도 정말 살아 계신 주님과 대화하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채널이 열려 있으신가요?

    스데반은 가장 비참하게 죽어간 사람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 돌아 맞아 죽는 것은 너무 흔한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죄를 지으면 돌로 치라고 했어요.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돌로 쳐 죽으라고 하면 죽을 사람 하나도 없어요. 돌을 찾다가 보면 다 도망갔거든요. 그러나 이스라엘에 가면 걸리는 것이 돌입니다. 제주도입니다. 늘린 것이 돌입니다. 스데반은 그 당시 가장 저주스러운 방법으로 그것도 친구들에 의해서 돌에 맞아 죽었어요. 그 주동자가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그러나 훗날 사도 바울의 전기를 잘 읽어보면, 그가 언제부터 하나님의 복음을 받을 준비가 되었는가? 바로 이 날이었습니다. 스데반의 겉옷을 맡아서 그 사건을 다 지휘하고 돌로 치라고 명령한 자가 사울이었을 것입니다. 그 스데반이 죽으면서 천사의 얼굴이 되어 "주여,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죽어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본 사울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보좌에서 일어나 맞이하셨습니다. 그는 천국에서 위대한 환영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서 좀 고생스럽더라도, 이 땅에서 좀 불편하시더라도 우리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 갑시다. 주님과 교제하며 살고, 주의 말씀에 반응하며 살아 천국에 갔을 때 주님이 우리 모두를 벌떡 일어나 맞으시는 천국에서 환영받는 자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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