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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흥하여야겠고
    2002-05-21 10:18:04   read : 17547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3:22-30절 // 02/05/19

    전통혼례에 따르면 결혼식 일주일을 전후로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함을 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는 함을 보낼 때 근친 중 한 사람을 골라 집사로 삼고 혼서지를 주어 다른 사람에게 함을 메게 했습니다. 옛날 있는 집에서는 이런 경우 대개는 머슴이 함을 졌습니다. 그리고 혼주는 이들이 예의를 갖추도록 주의를 주고 출발시켰습니다. 그러므로 함진아비가 신부집에 도착하였을 때 함부로 행패를 부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랑집 집사가 신부집 집사에게 혼서지를 전달하면 그 혼서지를 먼저 읽는 의식을 가졌기 때문에 분위기가 사뭇 엄숙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함을 지는 일이 전통과 너무도 다르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개 신랑친구들이 결혼식 하루전날 함을 지고 갑니다. 이때 함진아비는 자신의 얼굴을 마른 오징어 하나로 가리고 신부집 동네 초입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온 동네가 떠나가도록 고함을 지르며 '함을 사라'며 한바탕 소란을 피웁니다. 신부집에서는 함을 집으로 들이기 위해 황급히 나가서 함진아비를 맞이하게 되는데 함진아비가 고분고분 들어갈리 없습니다. 그래서 발을 한발짝 떼게 할 때마다 바닥에 돈을 깔게 됩니다. 돈 봉투를 보고 마음에 들면 한발짝 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 봉투는 챙기고 발은 여전히 떼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 시간동안 밀고 당기고 한 끝에 신부집에 들어가서 함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종 듣는 얘기 가운데 이런 함진아비들의 행패로 인해서 결혼이 깨어져 버리는 사태도 종종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마부와 함진아비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신부집에 신랑집의 기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즉 며느리를 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고 감사인사의 뜻으로 약간의 예물을 담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러리들은 들러리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합니다. 만약 함 들어가는 날, 자신들이 대접을 소홀하게 받았다며 신부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리거나 신부가 나와서 인사하고 반기지 않는다하여 소란을 피운다면 그것은 예의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친구의 얼굴에 똥칠을 하는 것과 진배없습니다. 들러리는 끝까지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함으로 결혼식의 주인공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이 이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주시더라"고 했습니다. '이후에'라는 것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이후'라는 말입니다.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 고민하던 니고데모가 돌아갔습니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그 밤에 예수를 찾아간 일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이 주를 만나면 결코 헛됨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고민과 문제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분을 만나면 그 안에서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나아오지 않고 홀로 고민하면서 긴 밤을 지새운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고 지새우는 밤은 의미가 없습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만약 니고데모가 그 밤에 고민만 하다가 긴 밤을 지새워 버렸다면 그는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여전히 방황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렇게 밤을 지새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되었고 자기 안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해답을 가지고 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민만 해서는 안됩니다. 생각만 해서도 안됩니다. 중요한 것은 주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고민되는 문제를 안고 잠 못 이루며 잠자리에서 뒤척일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박차고 주께 나올 때 우리 안에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 밤에 주를 만나 그렇게 문제를 해결했던 것입니다. 이제 니고데모는 잠시 물러가고 스포트라이트가 세례요한에게로 맞춰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세례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23절을 보면 "요한도 살렘 가까운 에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고 했습니다. 즉 요한이 에논이라는 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가 왜 에논이라는 지역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는지는 본문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그곳에 물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물이 많았기 때문에 세례주기 적합한 장소로 생각하여 그곳에서 세례를 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건의 발단은 당대 가장 유명한 요한만 세례를 주었던 것이 아니라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유대 땅에 거하시면서 요한처럼 세례를 베푸는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농구'하면 '마이클 조단'입니다. 또 홈런왕 하면 '베이브 루드'를 생각합니다. '축구'하면 '펠레'입니다. 마찬가지로 '세례'하면 누굽니까? 요한입니다. 그 당시 수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사람은 요한입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 앞에 '세례'라는 닉네임이 붙은 것입니다. 그만큼 세례에 관한 한 요한은 독보적일 뿐만 아니라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닉네임은 무엇입니까? '나사렛 목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사람들에게 목수의 아들로 기억되는 분입니다. 그런데 목수의 아들 예수가 요한과 똑 같이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비록 전매특허를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누가 보아도 그 사람의 전매특허로 여겨지고 있는 것을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이 똑같이 사용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물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세례를 주었다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들이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세례를 주었다는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문제시 된 것은 '도대체 요한의 세례와 예수의 세례는 어떤 차이가 있고 왜 예수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의 숫자보다 더 많은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굳이 설명 드린다면 이렇습니다. 어떤 집에서 설렁탕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은 이 집 설렁탕이 맛있다하여 모두 이 집에 와서 설렁탕을 먹었습니다. 장사가 너무도 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이 장사가 잘 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그 옆에 여러 사람이 설렁탕집을 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집은 얼마 전까지 그 소문난 설렁탕집에서 월급을 받고 일을 했던 종업원 출신입니다. 그런데 뒤에 설렁탕집을 차린 음식점 가운데 이 집이 너무도 장사가 잘 됩니다. 장사가 어찌나 잘되든지 이제는 소문난 설렁탕집보다 훨씬 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골목에 있는 대부분의 설렁탕집은 파리를 날리고 있는데 유독 이 집만 장사가 잘 됩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도대체 똑 같은 설렁탕집인데 왜 저 집만 유독 장사가 잘된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길래 처음 맛있다고 소문난 집보다도 장사가 잘 된단 말인가?'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25절과 26절을 보면 그와 같은 질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으로 더불어 결례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저희가 요한에게 와서 가로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자 곧 선생님이 증거하시던 자가 세례를 주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원래 '결례'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 용서함을 받고, 용서함 받았다는 증거로 몸에 물을 뿌리거나 씻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제사장들에 의해 행하여졌는데 이 당시 요한은 이런 의식 대신 세례를 통해 회개와 죄 씻음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한의 제자들이 볼 때, 이런 일은 자기의 스승인 세례요한의 전매특허인데 예수가 똑같이 세례를 주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혼란이겠습니까? 도대체 죄 씻음을 받기 위해 누구에게 가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가서 세례를 받아야 하는지 아니면 예수에게 가서 세례를 받아야하는지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더구나 이런 문제로 인해 혼란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세례에 관한 한, 후발주자에 지나지 않는 예수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한의 제자들은 도대체 누구의 세례를 쫓아야 하는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자신들의 마음을 감추기 위한 핑계인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들로 하여금 화가 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더 많이 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실 그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것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느냐?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요한의 제자들이 결례에 대해 변론하게 된 동기는 다른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것 때문입니까? '왜 예수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과 예수님의 세례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설명 드린다면 우리가 장사하고 있는데 그 옆집에서 누군가가 세를 얻어서 개업을 했습니다. 그런데 적어도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같은 메뉴의 가게는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유명한 수필가이며 소설가인 미우라 아야코가 자기 동네에서 가게를 차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집은 장사가 되지 않고 자기 집만 잘됩니다. 별로 다를 것이 없는데 사람들이 미우라 아야코가 경영하는 가게에만 몰렸습니다. 그때 그녀가 생각해낸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게에서 파는 물건의 품목을 제한한 것입니다. 즉 몇 가지의 품목만 갖다 놓고 그 외에 자신들의 가게에 없는 물건들은 이웃에 있는 가게에 가서 사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가게도 장사가 잘 되고 이웃에 있는 가게도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기본적인 윤리라는 것이 있는데 적어도 미우라 아야코 정도는 못되어도 똑같은 품목을 가지고 그 옆에 가게를 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생각해보아도 별로 옳은일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이 안산에 교회가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많다는 것을 가지고 나쁘게 표현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인데 교회가 많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교회가 많다는 것에 대해 별로 좋은 인식을 가지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너무 따닥 따닥 붙어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같은 건물 안에 2층, 3층, 4층으로 한 교회씩 나란히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두고 교회가 너무 사이가 좋다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상식이나 예의가 없다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이렇게 교단이 다르면 억지로라도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장로교끼리 한 건물에 세 들어 있습니다. 그럴 때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한 마디씩 다 합니다. "요즘 교회는 윤리도 없고, 도덕도 없는 것 같다"라고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은 요한의 세례나 예수의 세례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요한도 세례를 위해 외칠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고 예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실 요한의 세례나 예수의 세례가 다를 바가 없는데 굳이 서로 각기 세례를 주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이 무엇이겠습니까? 늦게 시작한 예수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가 세례를 주는데 사람들이 거의 가지 않거나, 가더라도 한 두명 정도의 적은 숫자였라면 아예 예수가 세례 주고 있는 사실에 대해 무시를 하거나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런 변론을 시작한 이유는 예수에게 사람들이 더 많이 몰리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요한의 제자들에게 시기심과 질투의 마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들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굉장히 못마땅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예수님에 대해 어떻게 호칭을 하고 있습니까? 26절에 보면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 편에 있던 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런 표현을 통해 우리는 갑자기 급부상하고 있는 예수의 실체에 대해 그들이 별로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가진 것일까요? 물론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스승의 인기가 추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 합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스승의 인기가 떨어지고 사람들의 발길이 예수에게로 옮겨가게 되면 결국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불안감이 결국 예수에 대해 시기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어떤 특단의 조치를 취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요한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27절에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요한 자신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하늘에서 하라고 주신 것이지 세상의 사업이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이것이 세상사업이고, 자신이 어떤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경계를 하고,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똑같은 품목으로 경쟁하는 사람보다 더 뛰어난 마케팅을 통해 경쟁력 있게 해야되겠지만 이것은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하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 세상에서 내가 잘 되기 위해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요한이 지금까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주의 일이었고 하나님께서 힘을 주셔서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모든 교회가 다 한결같이 교회는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각 교회들마다 경쟁이 치열합니다. 그것은 하나되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교회의 세(勢)를 불리기 위한 경쟁입니다. 허기야 우리 안에서조차도 하나라는 생각이 얼마나 부족한지 모릅니다. 서로 경쟁의식을 갖고, 견제하고, 시기하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이것은 세상의 일도 아니고, 이윤을 남기고자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하나됨을 이루지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 협력이 되지 않고 각자가 다 따로 따로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요한은 무능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욕심도 없고, 야망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버젓이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을 빼앗기고 있는데 가만히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달려들어서 "왜 내 전매특허를 도용하느냐?"고 따지든지 아니면 머리끄댕이 잡아당기며 한바탕 싸워보기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한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요한이 무능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르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인기도 다 떨어져 버렸기 때문에 요한은 구제불능의 스승으로 낙인 찍혀야 하는 것입니까?

    요한은 자신의 일이 하늘이 주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께서 행하시는 일도 궁극적으로 하늘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따르던 무리들이 예수를 따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경쟁의식을 갖고 미워하며 비협조적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안에서 선의의 경쟁은 필요합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고,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한 경쟁이나 성도들 사이에 하나됨을 이루는데 유익을 주는 경쟁이 아니라면 한시라도 빨리 그런 경쟁의식은 버려야 합니다. 미워하거나 비교의식에서 시작되는 경쟁이나 시기심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들 중 누구라도 인간적인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있다면 그것은 세상적인 이윤을 남기는 장사를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4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뇨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은 어리석게도 자기가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를 자랑하며 경쟁하지만 그러나 그런 경쟁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 받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은근히 자신의 스승을 예수님과 경쟁하는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주는 일은 하늘에서 주신 것이며 만일 그러하지 않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이지 나의 일이 아니며 그러므로 경쟁할 필요도 없고 그것 때문에 시기하는 마음이나 질투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2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거할 자는 너희니라" 무슨 말입니까? 세례요한은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며 단지 그리스도 앞에서 그분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너희들이 해야할 일은 나로 하여금 너희의 스승인 나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증거해야 할 자들이지, 그분과 나를 비교와 경쟁의 대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는데 우리들 중에는 오히려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말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괜히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 비교하고 경쟁의식을 갖게 해서 결국 싸움으로 비화하게 만들고 자신은 쏙 빠져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괜히 출근하는 남편 앞에서 '누구네 집 남편은 그렇게 돈을 잘 벌어온다는데 당신은 도대체 뭐냐?'고 쏘아 붙입니다.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됩니다. '그러는 당신 뭐가 그리 잘 났느냐?'고 남편이 한마디합니다. '옆집에 아무개네 엄마를 보라고 어쩌면 그렇게 상냥하고 교양 있는지 당신이 그 반에 반만 따라가도 내가 매일 업고 다니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내가 뭐라고 합니까? '아니 이 사람이, 어디 넘 볼때가 없어서 남의 집 여편네를 넘보냐?'며 이상하게 얘기가 오갑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심각한 부부싸움으로 발전해서 결국은 원수 아닌 원수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누구는 100점 받았다는데 너는 허구한날 이게 뭐냐?' 빵공장 차려도 당장 굶어죽지는 않겠다'라고 말하면서 비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우리의 가정에서만 일어나겠습니까? 교회 내에서도 얼마나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비교하고 경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의 위치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받은 목적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그 사실을 망각했다면 아마 경쟁의식에 사로잡혀 결국 예수님과 한판 승부를 벌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교하고 경쟁으로 몰아가고 있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알아듣기 쉬운 예를 들어서 다시 설명합니다.

    29절에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요한은 이 짧은 예화 속에서 예수님을 신랑으로, 그리고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 묘사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신랑친구의 역할은 신랑과 신부가 상면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기뻐할 때 들러리는 그것으로 들러리의 역할은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맞선을 보는 자리에 가장 꼴볼견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중매장이가 분위기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끝까지 그 자리에 앉아서 저녁까지 얻어먹는 경우입니다. 중매한 사람은 두 사람을 소개시켜주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분위기만 조성해 주고 나오면 됩니다. 그런데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만났다고 해서 자리를 비켜주지도 않고 주접스레 그 자리에 앉아 비싼 요리까지 얻어먹는 중매장이가 있다면 이런 사람은 중매장이로서 자격이 부족합니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결혼식을 끝내고 나면 서둘러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을 떠나지만 과거엔 피로연을 여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피로연에는 주로 신랑신부 친구들이 모이게 됩니다. 이 피로연에서 신랑신부 친구들이 속된 말로 눈이 맞아 결혼으로 골인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피로연에 참석하는 친구들의 경우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한번 잘 엵어볼 수 없을까 하여서 말입니다.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이 피로연의 주인공도 역시 신랑 신부입니다.

    그런데 피로연 사회를 맡은 친구가 그 날 자신에게 있는 개인기 버전을 모두 발휘해서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서 모든 인기를 독차지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케 해 버렸다면 이 친구의 역할은 빵점입니다. 그런 피로연은 차라리 없었던 것보다 못합니다. 친구들의 역할은 신랑이 그날의 주인공으로서 가장 빛이 나게 해주는 것입니다. 또 신랑이 기뻐하는 것으로 자신의 기쁨을 삼아야 합니다. 좀 더 심한 표현으로 신부가 너무 마음에 들어 그렇게 개인기 버전을 가지고 신부의 마음을 신랑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는 것으로 인해 마음 상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결혼식에서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신부를 취하는 것은 신랑이지 신랑의 친구가 아니란 말입니다. 자기야 어떠하든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여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요한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결국 자신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요한의 역할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고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모든 영광을 받는 것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설령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이 가장 크고 위대한 인물이었다 할지라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온 사람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그는 흥하여야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에게도 요한과 같은 정신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동안 어떤 상업적인 이윤을 남기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신랑대신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도 결국은 그분의 영광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합니다. 즉 오직 예수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고 우리는 쇠하여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여러분의 삶을 살고 계십니까? 나는 쇠하여져도 오직 그리스도께서 흥하신다면 기꺼이 나를 희생하실 각오가 되어 있으십니까? 유기남 선교사가 오랫동안 일본에서 선교활동을 하시면서 쓴 책이 있습니다. '일본을 알자'하는 제목의 책입니다. 유기남 선교사는 일본인의 의식구조를 설명하는 부분에서 일본인의 성격에는 동조성이 짙다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즉 집단의 한 사람이라는 의식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취미 이상 행동을 집단의 그것과 일치시키려 한다는 것입니다. 일본에서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는 것도 그런 경향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전체를 위해서라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민족이 일본인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전체를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줄 아는 자세는 우리들이 본 받아야 할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떤이들은 전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흥하는 일이라면 나는 쇠하여진다 하여도 그것을 기쁨을 받아들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 사실 안타까울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부담없이 교회를 다니려 하고 내 삶이 희생되지 않는 선에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주를 위해 기꺼이 내가 희생하겠노라는 생각이 너무도 희박한 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참된 삶의 태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겠습니다. 우리가 이땅에 존재하는 목적은 그분이 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흥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쇠하여질 수 도 있다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잔치집에서 신랑친구의 기쁨은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부모의 기쁨은 자녀가 바르게 성장하는 것을 보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요한의 기쁨은 그분이 흥하는데서 찾았습니다. 그러기에 비록 자신은 쇠하여져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자기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에게 더 많은 사람이 몰려가도 오히려 그분이 흥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도구로 사용되는 한가족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 그분이 흥하는 일이면 우리모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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