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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지도력의 재고와 회복 / 농촌목회 전문화 시급
    2002-05-16 23:07:36   read : 1367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이영희 목사 (뉴욕장로교회)

    이 영적지도력의 문제는 지금까지 많이 다루어지고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여서 식상하게 여겨질 수 있는 주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300만명 이상이나 됐던 이스라엘 회중의 출애굽사건 전체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것이 인도자 모세의 영적지도력이었던 것처럼 영적 출애굽의 회중인 교회를 목회하고 섬겨야 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영적 리더십의 과제는 참으로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그 질서가 나타났고 그의 섭리와 다스림에서도 이 질서가 나타난다. 더구나 하나님은 지도력의 핵심인 모든 권세의 근원이시고 주인이시다. “권세는 하나님께로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의 근원이요 주인이시다”(롬 13:1) 이러한 하나님께서 그가 정하신 한 인물에게 권세를 주셔서 그가 원하시는 질서를 유지코자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의도가 있으시다. 애굽과 바로의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셔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셨듯이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여 멸망에 처한 인생들을 구원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시는 선하시고 위대한 뜻이 계신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 둘이 아닌 무리요 집단이기 때문에 그 무리와 집단을 각개 약진케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우신 인물의 지도력을 통해서 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란 한 영적 집단을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세의 통로요 도구이다. 그러므로 그 통로요 도구인 지도자가 어떤 지도력을 가진 자이냐에 따라 그 집단의 유익과 존재, 순리와 패배, 전진과 후퇴가 결정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명확히 보게 된다. 모세의 지도력과 아론의 지도력의 차이를 보자. 한마디로 출 32장에 나타난 아론의 지도력은 중죄를 짓게 만든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우상화한 죄, 백성을 방자하게 만든 죄, 그리고 백성 3000명이 죽임을 당하게 만든 죄 등, 아론은 모세와 동일한 여건에서 단시간 동안 그들의 지도자가 됐지만 참담한 실패를 맛보아야만 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마찬가지로 한 교회의 영적지도자로 세워진 나로 인해 교회와 그 양들의 처지가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의 지도자는 어찌되었건, 모든 교회의 책임이 지도자 자신에게 있음을 깨닫고 통회자복해야 한다.

    진정한 지도력이란 하나님이 주신 것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데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 없는 인간적인 지도력을 행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지도력의 타락으로서 무서운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없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는 지도력인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도력은 자기 개인의 인간적인 야심, 야망을 이루기 위한 형편없는 지도력이 되고 만다. 이것은 바로 사탄이 가졌던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행하셨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 목적과 동기로 지도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자기를 위하여 무엇인가를 도모하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 없는 지도력은 위험한 것이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길이다.

    진정한 리더쉽은 지위가 아니라 영향력의 행사요, 명령으로 권위를 세움이 아니라 솔선수범으로 행하는 것이다. 인본주의적인 지도력의 열매는 권위주의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과 섬김으로 온다. 한국 교회와 목회자들의 반성할 점 중의 하나는 목사가 교인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는 것이다. 기업의 사장처럼, 군대의 상관처럼 평신도를 무시하고 명령조로 대하는 이들이 있다. 군림자 가 있다면 오직 예수님 뿐, 목사와 장로는 결코 군림하는 자가 아니다. 오히려 교인을 섬기고 그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되는 자이다. 교인을 예수님처럼 섬길 때 비로소 목회자의 지도력은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목회를 하다보면 교인들로 인해 속상할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를 탓하고 양을 탓하지 말라. 내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설교도, 행정도, 심방도, 대인관계도 다 잘해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명하시는 어떤 방향과 수준에까지 성도들을 인도해 갈 수 있도록 영적지도력이라는 하나의 줄에 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 목사와 장로들은 이 영적지도력 문제에 대하여 늘 부단히 노력하고 진력해야 함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2-05-10 print this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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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촌목회 전문화 시급


    농촌목회는 전문화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농촌목회를 도회지 교회로 진출하기 위한 실습목회 정도로 생각하거나, 사명감도 없으면서 농촌목회를 목회자 자신의 피안의 장소로 생각하고 안주해 버리는 사례가 많았다. 결과적으로 농촌목회의 비전이나 전문성 성공사례 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농촌 무시한 결과
    이제 농촌목회는 전문성을 갖춘 목회자를 필요로 하고 있다. 아무나 목회하고 싶다고 농어촌으로 사명없이 보내져서는 안된다. 농촌목회를 더 이상 시험무대가 되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한국교회가 농촌 교회와 농촌목회를 그만큼 무시해 온 결과가 오늘에 나타나고 있지 않는가?

    지난주 기독공보(5월4일자) 2면에 우리교단 총회 농어촌부에서 조사한 '농어촌부 정책자료 발표'가 실린 것을 읽어 보았다. 이 기사를 대한 농어촌지역 목회자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 기사를 읽어 본 독자들이 '이제 생활비 염려없이 목회할 수 있겠다'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을까? 농어촌 미자립교회들의 재정지원 평준화의 원칙이 세워져 '더 이상 연말에 보조요청하는데 신경을 꺼도 되겠다'고 박수라도 쳤을까? 지금에 와서 고마운 일이지만 총회 농어촌부의 정책이 농어촌 교회의 현실과 미래를 보지못하고 있음에 안타까울 뿐이다.


    지역사회 품으라
    조사내용을 보면 연 결산 2천만원 이하인 교회가 47.3퍼센트나 되고 2천만원 이상 결산을 내는 교회중에도 자립하지 못하는 교회까지 합하면 60퍼센트의 농어촌 교회가 자립하지 못하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물론 농어촌 교회(2천8백65개)의 약 5퍼센트 정도는 예수님 오실 때 까지 자립할 수 없는 교회로 치부하더라도, 그 외의 농어촌 교회는 자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농어촌 교회의 자립에로의 의지와 총회 농어촌부의 시대에 맞는 지원정책이 관건이다.

    현재 우리나라 농어촌의 현실을 볼 때 앞으로 농어촌 교회를 활성화 하고 자립시키려면 지금과 같은 재정지원으로는 요원하다. 말 그대로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것이다. 앞으로 농어촌 교회가 활성화 되려면 첫째, 총회가 농어촌 교회 '복지목회'를 지원해야 한다. 농촌 교회가 '사회사업'을 통해 농촌 지역사회를 위한 열린목회를 할 수 있어야 농촌 교회는 활성화 될 수 있다. 특히 고령화사회에 이른 농어촌의 현실은 '노인복지'의 기능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농어촌 교회의 경제구조가 미약하여 복지시설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총회 농어촌부가 이러한 농어촌 교회의 실태를 파악하고 가능성이 있고 준비된 교회들에게 도회지교회나 외국의 자원을 지원해 줄수있다면 우리나라 전국의 농어촌 교회가 사회사업 모델링을 통해 활성화 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윈-윈 전략 마련
    둘째는 도·농 교회간의 직거래 사업을 활성화 시켜야한다. 지금 농촌에선 '친환경 생명농법'으로 참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을 알아주는 이가 없으므로 힘을 잃고 있는 것이다. 도회지 교회들이 교회에 농어촌 직거래센터를 운영해 주면, 농어촌 교회들이 보조를 받지 않고 자립할 수 있게 됨으로 서로간 '윈 윈(win-win)' 전략으로 대등한 위치에서 공생할 수 있고, 농어촌 교회에 자생력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게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총회 농어촌부에서 장학재단을 세워야 한다. 농어촌 교회 목회가 어려운 것은 자녀들의 교육문제 때문인 것이다. 농어촌지역에서 목회하는 교역자 자녀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줄 수 있다면, 거의 모든 농어촌 교회들은 보조를 받지 않고 농촌의 실정에 맞게 자립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농어촌지역 목회자들 역시 지금까지의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농어촌목회에 목숨을 걸고 순교할 각오로 열심히 일한다면 농어촌 교회의 앞날은 밝을 것이다.

    지리산과 섬진강 그리고 피아골 왕시루봉이 보이는 통나무집에서…. pyoungdo'kornet.net

    손영기 / 평도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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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직된 성경 해석, 올바른 복음메시지 왜곡 시대상황 정확히 전달할 ‘포괄적’ 선포중요

    문제들(막 1:15, 16)



    보수교회가 처한 이 시대의 문제들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개혁교회의 후손들인 우리가 어떻게 세대주의적이고 귀신론적인 신학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는가? 알레고리적 해석, 자기 멋대로 식의 성경이해, 성경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성경에 대한 무지의 모습이 현재 보수교회가 안고 있는 치명적인 문제이다.

    보수 교회가 지양해야 할 것 중에 일부의 교리로 성경을 조합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있다. 교리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교리에 꿰 맞추려는 위험한 행태들로 인해 왜곡된 성경해석이 이루어지고 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고 많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의 핵심으로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했다’는 내용과 같은 형법적 해석범주로만 선포하다보면 현재의 나 자신의 판단과 생각은 없어져 버리는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

    ‘그렇다면 과연 구원의 현재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생겨지게 되고 현재 속의 윤리는 없게 되는 것이다. 유대교적 이원론, 영혼과 육신을 이원화하려는 헬라적 해석. ‘내 영혼이 내세에 안락을 누린다’에만 만족하는 개념도 왜곡된 형태의 복음의 모습이다.

    오직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바르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포괄적’으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복음에만 신경 써야지, 인권이 뭐고 정치가 뭐냐? 우리는 오로지 전도해서 구원사업만 해야한다.’ 는 논란으로 얼마나 많은 보수의 대립이 있었는가?

    이것은 정말 쓸데없고 그릇된 논쟁이다. 성경을 있는 그대로 읽고 해석하려 하지 않고 성경을 단편적이고 부분적으로 보려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보수교회일수록 성경의 메시지가 온전히 살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가 ‘복론’이다. 번영신학. 돈을 신으로 섬기는 모습. 예수님 잘 믿으면 일류대가고 아파트 산다는 식의 급속한 미신화. 도리어 목회자들이 설교를 통해 이를 권장하고 조장하는 풍토는 그릇된 성경해석이 주는 부작용 중의 하나이다.

    공의와 정의가 확대돼 인권이 신장되고 성령은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은혜를 계시되게 해서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끔 9개의 열매(도덕적인 것)를 맺게 하신다. 신학을 급속히 미신화 시키므로 신비스럽게 만들어서 많은 사람들을 패망의 길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의 시급한 과제는 각 세대가 새롭게 적용하고 정립할 이 시대의 신학을 세우는 일이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윤리적인 부재가 온다. 복음이 우리 삶 전체에서 요구하는 윤리적인 부분을 생각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온전한 복음 선포가 절실하다. 중요한 것은 혼신을 다한 하나님의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전해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절대적인 요구에 따를 수 있도록 해야한다. 예를 들어 술, 담배의 문제도 먹으면 죄고 죽는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라 사랑의 이중계명의 관점에서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 주일성수개념도 주일에 음식을 사먹었느냐 안 사먹었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도 주께서 주실 양식으로 살겠습니다. 하나님에 뜻에 순종해 살겠습니다’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적극적인 제자의 개념)으로 접근해야 진정한 주일성수의 기쁨과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율법적으로 자꾸만 하나님과 따지려들고 계산하려 하기 때문에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주일에 버스를 타야하나 말아야 하나? 버스는 되도 택시는 안됩니까?’라는 식에 아직도 머물러있다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것을 따르고 있는 셈이 된다.

    우리 신자들의 삶은 모든 곳에서 ‘샬롬(구원의 현재성)’을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근래의 개신교는 다시 중세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있는 듯하다. 인구의 1/4이 주일에 교회에 가는 나라는 우리 한국 밖에 없다. 성경권위의 강조는 한국 개신교의 좋은 전통이다. 그러나 어느새 사제주의와 권위주의가 만연돼 목사를 구약의 제사장쯤으로 여기는 모습이 만인제사설을 주장하던 이들의 후예들 속에서 나타나고 있다.



    원인(고전 10:25∼11:1)



    중세교회의 현실이 다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다. 개혁주의자들은 스콜라 방법을 배격하고 오직 성령에 의한 개혁, ‘Sola scriptura!’(오직성경)를 추구했다. 그러나 한 두 세대가 지나면서 교리에 성경을 맞춰 넣으려는 스콜라 철학식으로 다시 변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삼위일체론과 같은 중요한 교리를 자꾸 숫자적인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우리 교단에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3위 일체론은 초월과 현실 속에서의 내재개념으로 봐야한다.

    요즘 총신 교수들이 연구를 못하겠다고 한다. 뭐 좀 하려고 하면 무시무시한 말로 공격을 해대서 발표는커녕, 아예 연구조차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총신의 신학은 발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개혁주의를 한다는 이들이 가톨릭적인 신학을 자꾸만 하려고 든다. 그리스도의 은혜론, 삼위일체, 강림 하나님, 내주 하나님. 타종교와 매우 크게 다른 이 훌륭한 점이 있으면서도 제대로 된 신학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신학의 갱신이 없으면 미래는 없다. 형식적인 성경권위만 얘기하니까 미래가 어두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유주의신학자들의 정서는 거의 복음주의적 조직신학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왜 복음주의 신학자들은 오히려 스콜라 철학을 지향하고 있는 것인가? 이제라도 ‘오직 성경’을 재확립하고 포괄적이고 깊이있는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한민족에게 닥친 가장 큰 숙명적 문제가 무엇인가? 화해가 아닐까? 바울은 엡1, 2장 이방사역을 되돌아보면서 ‘화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복음을 오늘날의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맞게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모습을 우리는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 교단의 하나님 절대주의는 표어로만 그치고 있다. 신학의 화석화에 머무르려는 모습이 다분하다. 신학자들에게 역사비평의 허용성을 제공해야 한다. 시대적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달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마태, 마가, 요한이 추구하는 복음이 서로 달랐던 것처럼, 상황화된 복음은 복음을 가장 효과있게 전달하려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한복음은 헬라인들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었지 않은가? 바울이 예수님의 복음을 어떻게 적용해 이방인들에게 전했는가? 이혼문제, 제사음식 등 쉽지 않은 문제를 그는 어떻게 다루었는가? 제사음식의 경우, ‘우상숭배는 안된다.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제사지낸 것인가 아닌가 묻지 말고 그냥 사라. 불신자가 초대하면 가서 음식을 먹되 주인이 제사음식이라고 얘기하기 전에는 그냥 먹고, 먼저 얘기해 주면 이웃을 위하는 관점에서 먹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복음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다.

    복음이 회복되고 성경이 더 이상 스콜라적인 해석에 묶이지 않도록 바람직한 해석학에 의한 포괄적인 성경해석과 연구, 그 신학화와 정립화가 절실하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 우리 교단의 미래가 있고 한국 교회의 내일이 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2-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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