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속한 생명 창조의 연속 2002-05-15 10:41:22 read : 2075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출 20:12 // 2002.5.12
어떤 분이 암으로 죽어가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살 수 있다면, 이제는 조금 적게 말하고, 더 많이 듣고 싶고, 모든 것을 나 중심적으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생각하며 살고 싶고, 아내의 짐을 더 나눠서 지고, 자녀들에게는 "사랑한다!"고 더 말하고 싶고,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신다면 참으로 더 잘해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을 보면 사람에게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은 짧습니다. 미운 사람들을 다 미워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짧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매사에 아주 작은 일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과 금방 등을 돌리고 살면 언제쯤이나 존경받는 삶을 살고, 언제쯤이나 행복을 맛보며 살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되, 특별히 가족을 행복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가족에게 좋은 추억을 많이 남긴 사람입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죽는다면, 가장 후회되는 일이 가족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 일일 것입니다.
욕망과 소망의 차이
우리 안에는 많은 바람이 있습니다. 수많은 욕망이 우리 안에서 들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욕망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사람이 가장 비참할 때는, 욕망에 집착할 때입니다. 또한 욕망이 고통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것은 욕망을 소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욕망과 소망, 이는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은 대단히 큰 차이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욕망과 소망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욕망은 '가지려는 마음'이고, 소망은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욕망은 내가 주체가 되고, 소망은 상대가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가지려는 마음은 자기 스스로 취하려는 것이고, 받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시면 받는 것입니다. 곧 가지려는 마음은 자신을 통하는 것이고, 받으려는 마음은 하나님을 통하는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욕망과 소망의 차이가 있습니다. 꿈이 욕망이 될 수도 있고, 소망이 될 수도 있습니다. 꿈을 자신을 통해 이루려 하면 욕망이 됩니다. 그것은 가지려는 마음입니다. 또한 거기에는 집착이 있습니다. 자기 집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꽉 죄는 마음 상태입니다. 그러나 꿈을 하나님을 통해 이루려 하면 소망이 됩니다. 그것은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이뤄주시면 받으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내맡김입니다. 하나님께 내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헐렁한 마음 상태입니다. 넉넉한 여백이 있는 것입니다.
욕망과 소망의 차이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가지려는 마음과 받으려는 마음입니다. 자신을 통한 길과 하나님을 통한 길입니다. 자기 집착이고, 하나님께 내맡김입니다. 꽉 죄는 마음이고, 헐렁한 마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어버이의 마음은 받으려는 마음이지만 자식의 마음은 가지려는 마음인 것입니다.
'집으로' 라는 한국영화 이야기
최근에 다시 한국 영화의 바람몰이를 하는 "집으로"라는 영화가 요즘 상영되고 있습니다. 한번도 영화에 출연해본 적이 없는 충청북도 영동의 어느 산골 77세의 순수한 할머니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금년 대종상 여우 조연상으로 노미네이트 된 영화인데 너무나 감동적이고 무척이나 신선합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정향 감독은 여성인데 이 작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어린 외손자와 외할머니의 이야기인데 외손자는 도시 문명에 찌든 마음을 나타내주고 있고 외할머니는 시골마을의 순박한 마음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외손자는 욕망을, 외할머니는 욕망이 비어있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저는 보았습니다. 외손자가 벙어리인 외할머니에게 바보, 병신이라고 말합니다만, 외할머니는 담담하게 외손자를 사랑해 줍니다. 느릿느릿한 몸짓, 외손자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더라도 바보처럼 은근한 사랑을 베푸는 모습이 바로 외할머니입니다.
어떤 분이 그 영화에 대한 평을 하면서 그 할머니가 산 속에서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가여워 많이 울었다는 겁니다. 저도 많이 울었습니다만, 정반대의 시각에서였습니다. 저는 그 할머니가 전혀 외롭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 할머니가 오히려 도인으로 느껴졌고 아무런 욕망이 없이, 바보처럼 순하게 살아가는 모습, 그 모습에 대한 감동으로 울었습니다.
이 영화는 일곱 살 먹은 꼬마 상우, 도시에서 살았고 버릇없고 투정이나 하는 아이와 벽촌 산골에 사시면서 말을 못하시는 일흔 일곱 외할머니, 그 노인간의 말없는 사랑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외할머니의 사랑이 관계를 통해서 손자에게 '전염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벌써 전국 관객 삼백만 명이 훌쩍 넘어선 이 영화의 잔잔한 힘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픔은 전염됩니다. 마음이 아프면 가슴도, 머리도, 온 몸이 아픕니다. 반대로 기쁨, 사랑, 희망도 금방 전염됩니다. 맑은 물방울 하나가 천리를 가고, 촛불 하나가 백리 길 산야(山野)를 밝히는 것입니다.
말 못하는 외할머니와 개구쟁이 손자 상우가 산골 마을에서 한달 간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막돼먹은 상우의 패악으로 할머니가 속을 무던히도 썩게 됩니다. 할머니에게 "벙어리, 병신"이라고 욕을 하지 않나, 요강을 발로 차서 깨버리지 않나, 바늘로 기워 신으시는 할머니의 검정 고무신을 감춰버려 할머니가 맨발로 다니시게 하지 않나, 게임기 밧데리가 다 닳았는데 그걸 못 갈아주는 할머니에게 온갖 강짜를 부리면서 못되게 구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 못 하시는 할머니는 처음 보는 손자에게 계속해서 사랑을 베푸십니다. 깡통에 든 햄만 먹으려는 아이의 밥에 김치를 얹어주고 잠든 상우가 누운 옆으로만 조심조심 비질을 하면서 청소를 하는 모습 속에서도 할머니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상우가 밥을 안 먹자 뭘 먹고 싶은가 물어보신 할머니가 몸짓 언어로 겨우 의사 소통을 하셨습니다. 나물 말린 것을 장에 들고 나가 팔아서 어렵게 닭을 사 와서 백숙을 했는데 상우는 프라이드 치킨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왜 닭을 물에 빠뜨렸냐면서(?) 생떼를 쓰고 안 먹어요. 할머니는 비를 맞으며 닭을 사오시느라 몸살이 나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없는 사랑, 그 사랑은 전염될 수 있음을 여러 장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중간 중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다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눈물이 펑펑 나게 만듭니다. 서서히 할머니의 사랑을 깨달아 변한 상우는 할머니가 게임기 밧데리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버스도 타지 않고 읍내에서 그 먼 길을 걸어서 온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할머니가 말을 하지 못하니 아파도 전화를 할 수 없다면서 할머니에게 '아프다, 보고싶다' 라는 단어를 연습시킵니다. 할머니의 말없는 사랑이 손주를 어떻게 감동시켰고 그 사랑이 두 사람간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보여주는 장면인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짓게 됩니다. 엄마가 와서 상우를 데려갈 때 상우는 자신이 아끼던 로봇 카드를 할머니에게 선물하는데 그 뒷면에는 할머니가 우체통에 넣기만 하면 상우가 받을 수 있는 우편 엽서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아프다"와 "보고십다"(=보고싶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가 알도록 아파서 누운 그림, 보고싶은 그림을 그려 넣은 엽서였습니다.
이런 사랑이 할머니에게서 상우에게 만이 아니라 상우의 엄마에게도 전염되어 할머니의 사랑이 이렇게 손자에서 딸에게로 전염되어 두 사람의 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상우도 할머니가 처음에 하던 대로 가슴을 쓰다듬으며 사랑한다는 할머니의 말을 하며 집으로 가고, 할머니도 자기가 살던 오두막집으로 갑니다. 그렇게 각자 자기 집으로 가지만 그들은 이제 외할머니와 외손자라는 분명한 관계의 끈이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 영화 보면서 할머니가 보여주는 이 사랑이 모성애라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더욱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우와도 같은 철없는 우리 인간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말없이 그러나 강력하게 임하는 것이지요. 할머니의 말 없는 사랑 속에서 그 두 가지 사랑을 다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랜만에 밝은 마음으로 좋은 우리 한국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여러분에게 소개합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이 노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뒤돌아보며 남긴 세 마디 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내 마음대로 안 되더라"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당신 마음대로 하시더라"입니다. 세 번째는 "그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만큼의 성공과 행복이 있더라"입니다. 참 귀한 통찰입니다. 우리 인생을 이렇게 간결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니요. 순명하는 사람에게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따르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대한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녀에게 진정한 성공과 행복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께 내맡기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자신의 욕망에 집착하여 그걸 이뤄보겠다고 아등바등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소망으로 바꿔 하나님께 내맡기고, 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받을 수 없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면 못 받을 수 없다"는 진리를 늘 마음에 새깁니다. 그 전제 위에서 내 꿈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 꿈의 성취는 하나님께 내맡기고, 지금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할까? 왜 교회와 성도들은 효를 실천해야 될까요? 몇 개로 나눠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명령
첫째로 왜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까? 하나님의 명령이니까요. 성경은 그 어떤 종교나 철학에서 강조하는 것보다 부모에게 효도할 것을 더 많이 강조하고 있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이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성경에서 "공경하라"는 이 말은 명령어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공경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과 부모님에게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라." 이렇게 말씀했고, "부모를 공경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불효자와 하나님께 범죄한 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내려지는 징벌이나, 불효자에게 내려지는 징벌이나 그 징벌이 같다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모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이시다." 또 부모공경은 부모님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불효는 무서운 겁니다. 불효는 부정 부패의 근원입니다. 이 사회가 이 나라가 언제 부정 부패합니까? 불효자가 많을 때, 이 사회와 정부가 부정 부패가 일어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불효는 불순종과 부도덕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효가 많은 자의 세상은 불순종과 부도덕이 판치는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전수자
부모님은 나에게 생명을 전해 준 생명의 전수자가 되지 않습니까? 왜 하나님은 많고 많은 인간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척관계, 이웃관계가 있는데 그 중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만을 따로 떼어서 십계명에 언급하셨을까요? 부모와 자녀 관계는 하나님께 속한 생명 창조의 연속인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의 완성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를 통해서 우리가 받은 생명은 천하보다 귀한 생명인 것입니다. 이 생명이 누구를 통해서 왔습니까? 부모를 통해서 왔습니다. 부모가 아니면, 나의 아버지 나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잘 났던 못 났던 나 같은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거룩한 생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모는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고 우리 부모는 나에게 상처밖에 준 것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가 나를 안 낳아 주었으면, 생명체가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지금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되었고, 사람되었기에 예수를 믿었고, 예수를 믿어서 하나님 아들 되었고, 하나님 아들 되었기 때문에 천국 가게 되었고, 영생을 얻게 된 것 아닙니까?
부모가 나를 낳아 주셨기 때문에, 부모님은 나에게 생명의 전수자 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부모님 앞에 우리는 감사해야 될 것입니다. 또 부모님을 우리가 공경해야 될 것이고, 그 부모님에게 효를 하는 삶으로 살아가야, 이것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길인 것입니다.
셋째, 부모님의 은혜 때문에
우리는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피로 낳으셨고 눈물로 기르셨고, 땀흘려 교육시키셨습니다. 진자리는 당신이 누우시고, 마른 자리 골라서 우리를 뉘어주셨습니다. 먹을만한 것 자식 주시고, 물만 마시고, 부모님이 허리띠 졸라매시면서 배가 출렁 출렁 고생하시면서 사신 것 아닙니까? 부모님을 우리를 피로 낳아주시고, 눈물로 가르치시고, 땀흘려 교육시켜 주셨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그런 말합니다. "가정은 최초의 학교요, 부모는 최초의 교사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은 자녀에게 좋은 기억, 좋은 습관, 좋은 이상을 심어주기 위해서 얼마나 애쓰시고, 얼마나 애타시는지 얼마나 노력하시는지 모릅니다.
영어에 가장 엄숙한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Mother), 가정(Home), 하늘(Heaven)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좋은 선물이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은 부모와 가정입니다. 경쟁의 몸부림 속에서 피곤한 육신을 끌고 사람들은 가정을 찾아갑니다. 가정은 휴식처이고 안식처입니다. 또 용기를 주는 곳이고 안식처입니다. 인생의 배신과 패배와 쓰라림을 당했을 때 부모를 찾아갑니다. 부모님은 따뜻한 손길로 아픔을 쓰다듬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거기는 우리가 낳고 자란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사랑의 산물, 희망의 산물, 정성의 산물
부모의 깊은 사랑 속에서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 태어납니다. 부모는 그 어린 생명에게 전 희망을 겁니다. 훌륭하고 좋은 자녀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부모는 그 어린 생명을 정성을 다해 키웁니다. 여기에는 철저한 자기 희생이 있습니다. 인간사회는 이해 타산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주고받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본법칙입니다. 이 원칙이 깨질 때 우정도 사제애도 부부애도 금이 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을 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태양과 같고 어머니의 사랑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태양은 사방에서 빛과 열을 발산합니다. 샘터에서는 샘물이 철철 넘쳐흐릅니다. 우리는 사랑의 태양 아래서 사랑의 맑은 샘물을 마셔가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키웁니다.
어머니가 쏟아 주는 사랑은 순수한 것입니다. 받기 위해 준 것이 아니고 아깝다고 생각하는 후회가 추호도 없이 일방적으로 쏟아주는 진짜 사랑입니다. 샘내지도 않고 섭섭함도 없이 그저 기쁘기 때문에 주는 고귀한 사랑입니다. 우리의 몸은 밥을 먹어 자랐지만 우리의 정신과 인격은 부모님의 사랑을 먹고 자라는 것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진실하고 티가 없으며 깊은데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숭고하기 때문에 그 자녀가 철이 들기 전에는 도저히 부모님의 높은 사랑과 은공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슬픈 것은 우리가 철이 들 그때에는 부모님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효도를 별로 해보지 못하고 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행복은 돈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만남 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한 인간의 미래를 그 어머니가 결정한다는 말은 어머니의 사랑이 인간의 행복과 얼마나 긴밀한 연관 관계에 놓여 있는지를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아기를 안은 어머니의 눈동자보다 맑은 것이 없으며 아이들에게 둘러 쌓인 어머니보다 더 경애스러운 모습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지만 어머니의 사랑의 우물은 마르는 법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어머니는 부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가난한 어머니는 하나도 없고, 보기 흉한 어머니도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어머니는 아름답습니다. 그 넓은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르지 않고 영원히 솟는 샘이라고 표현하신 것처럼 어머니도 영원히 솟는 샘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포기가 없습니다. 반딧불만한 희망만 있어도 참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제는 아버지에 대한 가치를 말하려고 합니다. 아버지란 아이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존재입니다. 아버지의 미소 속에는 아이를 위한 장래의 걱정이 있고, 아버지의 주머니 속에는 아이를 위한 희생적 준비가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속에는 아이에게 훌륭한 모범이 못되고 있다는 가책이 있고, 아버지의 심장 속에는 좀 더 좋은 아버지가 되려는 결심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일터로 나가지만 그 머릿 속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울고 겉으로 위로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속으로 사랑하고 겉으로 책망하는 자입니다. 아버지는 엄한 얼굴을 가졌으나 부드러운 심장을 가진 자입니다. 아버지는 최후까지 존재하는 아이의 고향이며, 배신하지 않는 아이의 친구입니다.
아이들은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두려움과 자비, 위엄과 사랑의 양면을 동시에 가진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사랑의 아름다움은 그 깊이에 있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나타내 보이는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깊은 곳으로부터 출발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깊이란 누구를 위하여 고통을 대신 당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그 자녀를 위하여 넉넉한 고통을 지불하며 양육하기에 깊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이나 시간 등을 쓸 수 있지만 생명을 주기까지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은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깊이를 가진 것입니다.
깊은 사랑의 열기와 감동과 생명력
깊은 사랑의 열기와 감동과 생명력을 말하여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된 두 쌍둥이가 있는데 한 아이는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인큐베이터 속에서 혼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아이를 불쌍히 여긴 한 간호사는 병원의 수칙을 어기며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러자 건강한 오른쪽 아이가 자신의 팔을 뻗어 아파하는 아이를 포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왼쪽아이의 심장 박동도, 체온도, 모두 정상으로 돌아오고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우리의 부모님들의 사랑이 이와 같은 것이며 우리는 모두가 이와 같은 사랑을 먹고 살아온 자들임을 고백하며 그 은혜에 크게 보답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랑을 가지고 우리 자손들을 위해 생명 창조의 연속이 이어져야 하겠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몇 가지 제안을 말하려고 합니다.
부모효도 10계
1. 부모님과 가능한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부모는 자식과 대화의 시간을 가장 즐거워하십니다. 가능한 한 형제들과 같이 모여 대화를 나누십시오.
2. 부모님께 일감을 드리십시오. 효란 부모님을 방구석에 가만히 모셔만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일은 삶의 보람을 느끼게 합니다.
3. 부모님도 취미를 가지시도록 도와 드리십시오. 사회에서나 교회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즐길 수 있도록 하십시오.
4. 여행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노인은 새로운 분위기와 경험을 즐기십시오. 집 안에만 머물게 하지 마시고 때때로 멀리 떨어져 사는 친척집을 방문케 하십시오. 노인은 친척들을 연결시켜 주는 끈이 됩니다.
5.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연세가 드시면 기억력도 쇠약해지고, 마음도 소심해 지고, 잔소리도 좀 늘게 되고, 공연한 고집도 부릴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파악하십시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미리 알아 해드리십시오.
6. 가족끼리 외출할 때 노부모님도 종종 모시고 가도록 노력하십시오. 어린 자녀들만 데리고 나가는 아들과 며느리에 대해 섭섭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7. 집에 손님이 오면 부모님께 먼저 인사드리도록 한 후 대화를 나누십시오. 이런 예법을 어린 손자 손녀들에게 가르치십시오.
8. 사소한 병이라도 나시면 꼭 병원으로 가십시오. 연세가 드실수록 생명에 대한 애착, 건강에 대한 근심이 더 많아집니다.
9. 매월 일정한 용돈을 드리십시오. 부모님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드리시면 더욱 좋아하실 것입니다.
10.부모님께 신앙의 기회를 드리십시오. 천국의 안내자가 될 때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 돌아가시고 나서 후회하지 마시고, 살아 계실 때 관심 가지시고, 살아 계실 때 자주 뵈시고, 살아 계실 때 용돈이라도 더 드리시고, 살아 계실 때 말씀이라도 더 들어드리고, 살아 계실 때 말씀이라도 들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부모 돌아가시고 난 후에, "그 때 좀 더 효도할 걸", "좀 더 공경할 걸", 하며 후회하지 마십시다. 오늘 하나님 명령하십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효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또 인생의 본분입니다. 또 약속 있는 첫 계명으로 말미암아 축복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전달자이고, 양육의 책임자이시며, 신앙생활의 전수자인 부모님에게 효를 행하는, 그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는, 그 부모를 공경하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이것이 개인이 잘 되고, 가정이 잘 되고, 학교가 잘 되고, 사회가 잘 되고, 경제가 살고, 나라가 사는 길인 것 아시기를 바랍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하신 말씀이 여러분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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