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구원 그 이후 2002-05-31 23:43:59 read : 169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 성경구절 : 요한1서 5: 1~12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가져야 될 삶의 두 번째 자세는 구원의 즐거움을 누리고 회복하는 것입니다. 4절, 5절 말씀 “대저 하나님께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하고도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즐거움 가운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은 감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십니다. 실패와 어둠 앞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넘쳐나는 것은 구원의 즐거움입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면서도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모함을 받으면서 괴로움을 당하면서 그 구원의 즐거움 때문에 살았다고 성경 속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셔야 됩니다. 늘 진지하게 머리를 싸매고 고통스럽고 괴로운 모습으로서가 아니라 기쁨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즐거움과 기쁨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할 때, 하나님과 아름다운 사귐을 가질 때 옵니다.
여행 갈 때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무리 좋아하던 사람이라도 같이 가는 사람과의 관계가 흐트러지면 좋은 경치가 하나도 안보입니다.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볼 것도 별로 없는 곳일지라도 나와 함께 가는 사람이 즐겁고 대화가 즐거우면 기쁨을 누리고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어디서 옵니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눌 때에 우리들 속에 기쁨이 옵니다.
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이유는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고 구원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것과 구원에 대한 기쁨은 다른 것입니다. 자녀가 집에서 잘못했을 때 "야 너 호적 파가지고 나가. 내 자식이 아니야." 그런다고 해서 내 자녀가 아닙니까? 관계는 변치 않습니다. 그러나 자녀가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편하면 자녀도 재미가 없지만 부모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녀가 내 자녀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교제를 나눌 때는 기쁨의 교제를 나누고 즐거움이 있는데 하나님과 관계가 멀어지면 하나님의 자녀, 구원의 자녀임에는 틀림없지만 재미가 없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내 삶 속에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막는 것은 죄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마음에 기쁨이 없고 확신이 없고 무겁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죄의 문제를 빨리 점검해 보시길 바랍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두렵게 만듭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우리의 즐거움을 즐거움으로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릴 적에 집에 돌아오면 저의 어머님이 부흥회에 잘 가셨습니다. 귀퉁이 날아간 상에다가 식은 시래깃국과 밥에 옛날 어른들이 쓰던 글씨로 '형준아 밥 먹고 열심히 공부해라' 하면서 10원을 두고 가셨습니다. 지금은 10원이 별거 아니지만 그때는 거액이었습니다. 10원 가지고 제가 만화가게를 갑니다. 지금 만화는 위험하지만 그때는 꿈을 심어 주기도 했지요. 만화를 보다가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그런데 연재 만화는 꼭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한 권이 끊납니다. 그럼 집에 돌아와서 걱정이 돼서 저녁에 잘 때 기도하고 잡니다. ‘하나님 주인공을 꼭 구원해 주세요. 꼭 만나게 해주세요. 그 악당에게 이겨야 되요.’ 참 순진했지요? 얼마나 성실히 만화가게를 갔는지 만화가게 주인이 저에게 맡겨놓고 시장 갔다 오곤 했습니다. 시장 갔다 오시는 그 사이에 보는 만화는 공짜였습니다. 만화를 공짜로 보기 위해 만화 속독법을 연구해서, 지금도 만화는 굉장히 빨리 봅니다.
어느 날 학교 갔다 오면서 만화가게에 제가 꼭 봐야 될 만화가 나온 것입니다. '야 이걸 봐야 되는데' 그러나 그날따라 어머니가 부흥회에 안가셨습니다. 부흥회에 안 가셨다는 건 용돈이 없다는 뜻이지요. 고민을 하다 드디어 마음에 한 가지 결단을 했습니다. 돈을 훔치기로. 찬장에 있는 10원을 훔쳤습니다. 장차 받을 고난은 지금의 기쁨과 결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만화가게로 달려갔습니다. 만화를 열심히 봤습니다. 끝나고 나니 겁이 덜컥 나지 않겠습니까? ‘이제 어떻게 하나......’ 집에 들어갔는데 "형준아" 부르시면 가슴이 덜컥합니다. "여기 고구마 삶아놨으니까 와서 먹어라." 고구마를 그렇게 좋아하는데도 귀찮습니다. "바지 사왔다 봐라" 선물 줘도 귀찮고 가까이 오는 것도 귀찮고 부르는 게 전부다 '너 훔쳐갔지' 묻는 거 같아서 점점 어머니와 멀어집니다. 가능하면 대화도 않고 밥 먹는 시간 내내 고개도 떨구고 있는 것이지요. "너 왜 그러니?" "괜찮아요. 별 일 없어요." 드디어 들켰습니다. 실컷 얻어터졌습니다. 어머님이 때리셔 놓고 제가 불쌍했는지 10원을 주셨습니다. 흥부가 주걱으로 맞으면서도 밥풀을 떼먹는 심정을 이해했습니다. 그때부터 용돈이 없으면 "엄마 나 때려라 그리고 10원 도."
어머니가 정한 법칙을 깨트리니까 어머니와 멀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을 깨트리니까 그 법칙을 어긴 나는 법칙을 주신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즐거움과 기쁨을 내가 누리지 못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즐거움이 없으니 기도해도 재미없고, 교회가도 재미없고, 하나님이 은혜 준다 해도 싫고, 교회와서 봉사하래도 싫고, 하나님 축복 주신다 해도 다 귀찮은 것입니다. “건들지만 말아다오!” 우리를 무감각하게 무감동하게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이 죄의 영향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더 적극적으로 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말씀, 사랑의 말씀을 읽을 때에 더 깊은 교제가 일어납니다. 또한 주님과 대화를 할 때에, 동행하고자 할 때에 더 큰 사랑이 일어납니다. 바로 기도 생활과 말씀 보는 생활입니다. 말씀 보고 기도하는 생활을 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구원의 즐거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 즐거움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제의 기쁨이 없으면 병이 듭니다. 병이 들면 제일 먼저 찾아오는 것은 입맛이 없어집니다. 내 영이 병들면 성경이 지루해지지요. 설교가 지루 하고 기도하는 생활이 얼마나 귀찮은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다가 기도 안 해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는 왜 나오는가 보면, 주일날 하루라도 안나오면 벼락 맞을 것 같으니 할 수 없이 나오는 분들이 적지 아니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요한복음 15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의 응답이 옵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아뢸 때 용서함을 주십니다. 문제를 맡길 때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 즐거움이 우리들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큰 구원을 받은 우리가 가져야 될 삶의 세 번째 모습은 구원에 확신에 찬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1절에서 3절 말씀 우리가 읽으십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소유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고 살 때 우리 생활 속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달라집니다. 확신에 찬 삶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할 수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할 수 있는데 할 수 없다고 하는 두 방향의 교만이 있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능력과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데 이 권세를 못 누립니다. 그러니 고난 앞에 주저앉습니다. 낙담 앞에 주저앉습니다. 괴로움 앞에 주저앉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어떤 시골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하니까 "어머니 제가 도시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께요. 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아들은 어머니 곁을 떠났습니다. 두 달 후에 아들에게서 편지가 왔습니다. ‘어머니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 제가 돈을 보내드릴 테니 편안하게 사세요.’ 그런데 돈은 없고 종이 쪼가리만 있는 것입니다. ‘이 녀석이 나를 놀리는구나.’ 편지와 함께 들어있는 종이로 문에 난 구멍을 막습니다. 수표였지요. 그것으로 문풍지로도 쓰고, 때로는 낙서하는데도 쓰고, 코도 풀고...... 한 2년 뒤에 아들이 어머니를 모시러왔습니다. 어머니가 잘 살고 있겠지 생각하고 왔는데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보니 방문에 수표가 더덕더덕 붙어있고, 쓰레기통을 보니 수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 이게 뭐예요?” “이 녀석 어미를 놀리다니. 돈을 보낸다더니 돈은 없고 종이 조각만 보내가지고......”
수표라는 사실을 모를 때는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를 가졌다면 그것을 가지고 삶의 현장에서 누리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주셨습니다.
요한일서 3장 6절에 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9절에 보면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한다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죄를 짓기는 지으나, 죄가 마음 속에 내 삶 속에 습관으로 자리 잡도록 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은 죄를 질 때 ‘죄를 졌는데도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실까’ 하는 죄책감을 다 느낍니다. 그러나 이 확신이 있는 사람은 내가 죄를 지었다 해도 나로 하여금 용서하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밝음과 기쁨을 다시금 회복하는 놀라운 탄력성을 갖고 확신 속에 살아갑니다.
제가 미국 병원에서 근무할 때 죽어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어떤 두려움으로 다가옵니까.” 서툰 영어로 물어봤을 때 이 사람이 대답하기를 “사람들이 나를 잊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서 가장 두렵습니다.” 죽음은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죽는 그 순간에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로마서 8장 38절부터 39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는 삶의 현장에서 담대했습니다. 감옥에서도 찬양을 부를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끝까지 함께 하시는 주님, 나를 포기치 아니하시는 그 주님. 이 믿음 가지고 우리의 삶에 다가오는 문제들 앞에 담대하고 당당하고 힘차게 살아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사람의 삶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구원받은 백성입니다. 구원받은 이후의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구원의 확신을 다시 확증하십시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가르쳐 주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이 사실에 근거하는 믿음이여야 되지 환경이나 나의 감정에 근거하는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누리는 기쁨을 다시 확인하시고 회개하시고 더 나가서 하나님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금 시작하십시오. 그 믿음을 가진 자의 모습처럼, 삶에서 담대하게 승리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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