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기회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 2002-05-31 18:58:06 read : 17172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15:36-41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은혜받고 힘을 얻는 성경구절 중 하나가 로마서8: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合力)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도 - 우리가 좋게 느꼈던 상황은 물론 우리가 최악이라고 느꼈던 상황까지도 -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아름답게 사용하셨습니다.
사도행전만 보아도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사건이 있을때-불어닥칠 핍박을 내다보며 얼마나 암울 했겠습니까? 그러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은 비극으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모습을 본 바울이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저 사람은 마땅히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고 확신하며 돌로 치는데 맞는 사람의 얼굴 표정은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됩니다.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사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기의 때에 교회의 커다란 지도자 야고보가 죽고 다시 베드로가 옥에 갇히자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은 낙심천만의 상황이었지만 그러나 베드로가 옥에 갇힌 사건은 오히려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이 뜨겁게 기도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의 역사를 위해 아름답게 쓰십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이 어떤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 언제나 하나님께서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실 줄 믿게 됩니다. 당장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을 만난다 하더라도 인생의 여정이 순탄치 않아 힘이 든다해도 내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기만 하면,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으면 마침내 하나님의 선하심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을 꼭 만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오늘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다시 전도를 떠나는 내용입니다. 흔히 제2차 전도 여행이라고 합니다. 본문을 살펴보면서 여러분과 함께 의미와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1. 성도를 돌보려고 안디옥을 떠나는 바울과 바나바
"36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안디옥 교회에서 열심히 말씀을 가르치고 전파하던 바울과 바나바는 어느날 자기들이 눈물흘리며 복음의 씨를 뿌리며 결신한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율법도 지키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억압에 못이겨 혹시 신앙을 포기하고 주저앉지나 않았는지 세상유혹에 못이겨 교회를 등지고 다시 옛날 생활로 돌아가지는 않았는지 죽음의 고비에서도 굴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하여 기적을 체험했던 그들이 과연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퍽이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이끌어 주었던 바나바에게 아직도 믿음을 대적하는 무리가 사방에 퍼져있지만 다시 그곳으로 가서 그들을 돌보아 주자고 제안을 합니다.
36절에 "형제들이 어떠한가?"라는 말이 있지요? 자기들이 전도했던 성도을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무척 궁금했다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형제들이 어떠한가?"궁금해 하는 마음 - 누구의 마음이겠습니까? 주님의 마음입니다. 목자의 마음입니다. 지도자의 마음입니다. 속회인도자, 속장의 마음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으니까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잘 살고 있을까? 시련과 고난 중에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닐까? 다시 시험에 들지는 않았을까? - 누구의 마음입니까?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씨를 뿌려놓고 잘 자라도록 돌보지 않는다면 뿌린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습니까? 열달동안 고생해서 세상에 태어난 아기를 스스로 자라도록 그냥 내버려 둔다면 무책임한 부모가 아니겠습니까? 누군가가 돌보아 주지 않으면 자라지 못하는 지진아가 되든지 아니면 경우에 따라서는 생명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새신자의 양육문제를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회만 해도 우리가 전도한 결과이든 아니면 스스로 찾아오는 경우든 1년에 200명 이상이 등록을 하는데 그 가운데 정착하는 경우가 120명 정도입니다. 문제는 정착하지 못하는 경우와 함께 기존 성도들 가운데도 빠져나가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바로 양육에 관한 문제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가 전도한 사람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으로 살고 있거나 나아가서는 교회를 반대하는 위치에 서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에 꾸준히 참석은 하고 있지만 체계적인 신앙양육을 받지 못해서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세상가치관과 신앙의 원리가운데 갈등하는 사람이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여 사이비신앙에 솔깃해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전도하는 것 못지않게 양육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바른 신앙성장을 위하여 교회도, 전도한 사람도, 본인도 다함께 힘써야 합니다.
지난주 일대일양육지도자반이 다시 시작했습니다. 장로님들도 10분이 시작했습니다. 새신자 양육 참 중요합니다. 중요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알아서 자라주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서 때로 먹여주고, 감싸주고, 재워주고... 양육입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존경받고, 사랑받고, 인정받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었습니다. 아니 지장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안정되게 행복을 맛보는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잘 살수 있고, 누리고 살 수 있는데 그냥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자기가 뿌린 복음의 씨앗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입니다. 험하고 힘든 길이 었지만 눈으로 보고 가서 돌보지 않으면 결코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춘천중앙의 성도 여러분.
바울과 같은 심정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나 혼자만 잘 살고 잘 먹고 잘 지내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새신자, 내가 전도한 성도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눈에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서 견딜 수 없이 달려가 살펴보고, 목마르면 물떠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 언제까지? 제구실하도록 성장할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바울과 같은 목자의 마음으로. 각별하게 사랑으로 돌보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 잘해야 합니다. 누가? 우리 모두가! 오늘 말씀에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바울의 마음을 새겨 그렇게 사시기 바랍니다.
2.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
"37바나바는 미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하여 39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40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이 본문을 보면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다'는 말이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같은 초대교회의 존경받던 두 지도자가 심히 싸우고 갈라섰다는 사실이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만 그러나 사실이엇습니다. 살펴봅니다. 바울의 '형제들이 어떠한가?' 살펴보자는 제안에 바나바가 동의한데까지는 좋았는데 바나바가 마가를 데려가자 하자 바울은 반대하고 서로 자기들의 고집을 꺽지 않고 심하게 다툰 끝에 서로 갈라섰다는 말이지요. 왜 그랬을까요?
먼저 마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마가는 어떤 사람입니까? 사도행전 13장에서 제1차 전도 여행은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마가가 함께 출발했는데 버가에서 마가 요한은 혼자서 일행과 떨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세사람이 함께 출발했는데 도중에 한 사람이 되돌아 갔다면 남은 두 사람에게도 힘 빠지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 마가가 중간에 되돌아 갔을까요?여러가지 추측이 많이 있는데 추측일 뿐입니다. 성경에는 마가가 왜 중간에서 되돌아 갔는지에 대해서 뚜렷하게 설명하고 잇지 않습니다. 몇가지 추측중에 마가가 병에 걸렸다가 낫긴 나았는데, 비시디아 안디옥이 1100mile 고원지대에 있는 도시로 그곳에 가기위해서는 험준한 계곡을 통과 해야 하기 때문에 위험과고생을 알고는 포기하고 중간에 돌아갔다는 추측입니다. 글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가고있는 선교여행을 동행하고는 있지만 바울과 바나바처럼 이방선교에 대한 투철한 사명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되돌아 갔다는 것입니다. 삼촌 바나바가 간다고 하니까 구경삼아, 경험삼아 따라 나서기는 했는데 이게 장난이 아니었어요. 때로는 생명조차 위험했어요. 그러니 사명감도 부족한터에 생명걸고 따라갔겠어요? 도중에 그냥 돌아와 버렸습니다. 후에 마가가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보고 하는 것을 들으면서 무슨 생각했을까요? '나도 끝까지 같이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후회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까 바나바가 다시 가자고 했을 때 기다렸다는 듯 선뜻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문제는 바울이 반대했습니다.
"자기들을 따라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자"(38절) 는 결코 다시 함께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일군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성격대로 '시작햇으면 끝장을 보아야지 도중하차해? 안된다"하며 반대했을 것입니다.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입니다. 셋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한 사람이 너무 힘들다고,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다음부터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힘든일만 만나면 '나도 돌아갈까?' 그 친구는 집에서 이 고생안하고 잘 지낼텐데.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어떻든 최초의 이탈자가 책임이 큰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한 대열에서 결코 결코 이탈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꼭 새기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나바와 바울의 성격적인 차이를 분명하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개척자적인 정신, 철저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처음에 예수믿는 사람을 핍박할때도 얼마나 극성스럽게 핍박했습니까? 돈 생기는 일도 아닌데 예루살렘에서 다메섹까지 1주일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가지 않습니까? 예수를 전할때에도 돌에 얻어 맞아 실신까지 했으면서도 다시 깨어나서는 자기를 돌로쳤던 사람들이 머무는 성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속된 말로 독하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마가를 다시 데려가자고 하는데 동의할 수 없어요. 본래 바나바에게 대단한 신세를 진 처지였지만 바나바의 뜻을 거부합니다. 한번 되돌아온 사람 -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느냐? 강경했습니다. 바나바는 달랐습니다. 마가가 조카였으니 마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일차 선교여행에서 되돌아온 것을 깊이 뉘우치고 있으니 용서하고 다시한번 기회를 주자는 것이 바나바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어쨋든 후에 좋은 일군이 된 마가에게는 실수를 책망하는 바울과 실수를 용서하고 감싸안아주는 바나바가 함께 곁에 있었다는 것이 대단한 행운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찌되었습니까?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니" 앞서 말씀 드렸듯이 바울과 바나바와 같이 대단한 지도자들도 심히 다투었습니다. 갈라섰습니다. 충분히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 저런분들도 싸우나? 생각이 들지요? 이해는 하면서도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구나! 새삼 생각이 듭니다. 심하게 다투고 갈라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에게도 바나바에게도 약점은 있었습니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고 양보도 하고 참기도 해야하는데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왜 때로 갈등이 나타납니까? 교회는 온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사같은 목사나 온전한 장로들만 모인 곳이 아닙니다. 다 모자란 것이 있으니까 하나님 도움없이는 살지 못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모자란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신앙생활도 힘써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나바는 '바울이 싫어하면 그만두고 나와 가자' 하고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라고 하는 좋은 파트너를 데리고 수리기아와 길리기아로 갑니다. 여기서 하나 꼭 보고 지나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서는 바람에 선교팀이 한팀이 될 것이 두팀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다투고 갈라서는 일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바람직인 일은 아닙니다. 퍽이나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선교팀은 두팀이 되어서 더 많은 선교를 하게되었습니다.
다시 깨닫게 되는 말씀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든지 만남이 있다면 반드시 언제인가는 헤어짐도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자라온 환경, 문화가 다르면 생각이나 주장이 다를 수 있습니다. 인정해야 합니다. 같은 예수를 믿어도 생각이 다 같지 않습니다. 세상 사는 방법조차 같지가 않습니다. 목적이야 같겠지만 목적을 이루는 방법에 있어서는 서로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투기도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러나 성도 여러분. 지금 꼭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두가지를 잘해야 하는데 만나기도 잘해야 하고 헤어지기도 잘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뜻이 맞아 동업을 시작했습니다. 동업은 잘 되도 문제이고 잘못되도 문제입니다. 잘되면 이익이 많이 남기에 문제고 잘못되면 이익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처음에 시작은 좋았는데 본의아니게 헤어지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어떻게 헤어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좋게 시작했다가 평생원수처럼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헤어질 때, 얼굴 붉히고, 상처주고,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자기 합리화, 자기 정당화를 하기 위해 상대방을 비난하고 욕해서야 되겠습니까? 성도라면 이 점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격차이, 취향의 차이 때문에 서로를 비난해서는 곤란합니다. 조용한 것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시끄러운 것 좋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말 많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일을 벌려놓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평생 개척교회 20개 한다 - 개척만 하는 사람이 있고 일을 마무리 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는 아니지요. 관점의 차이입니다. 관점의 차이에 대해서는 서로 비난을 삼가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에게 맞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기도해 주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논쟁하며 불평하며 시간과 정력을 다 쏟을 필요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쨌든 성도들은 만남과 헤어짐을 잘 해야 하는데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만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때로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헤어지게 되더라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과 바나바의 다툼과 헤어짐에서도 자신을 돌아보며 많은 깨달음과 함께 성숙의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3. 교회를 굳게 하니라
바울과 실라는 다시 안디옥교회의 환송을 받으며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갑니다. 바울과 실라의 2차 전도여행 초기에는 이미 세워진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여기서 '굳게 한다'는 의미는 비행기 탈 때 예약한 다음 72시간 전에 다시 확인(confirm)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미 전도받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어떻게 신앙생활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재확인하고 다져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필요했습니까? 이방지역이라 우상숭배가 심했기에 신앙을 제대로 지킨다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도자가 제대로 없었기에 자주 돌보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처음 신앙생활할 때 다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부목사 할 때 지난 6월에 왔던 김영헌 목사님 군대동료가 교회다니기 시작해서 처음 추도예배 드린다고 해서 갔더니 쌀 담아놓고 준비해 놓은 모습이 참 어색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이니까.
그러니까 지도자의 지도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정리>
본격적인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됩니다.
● 안정된 목회를 접어두고 땀흘려 뿌린 복음의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이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있었습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 목자의 심정입니다. 우리에게도 새로 믿는 성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를 동행하는 문제로 갈라섭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다투는 바울과 바나바를 귀하게 쓰셔서 두팀으로 나뉘어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문제가 기회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교회를 굳게 세웠습니다. 만남도 헤어짐도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 성도의 만남과 헤어짐의 원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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