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2002-05-31 18:56:48 read : 1799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사도행전 16:6-10
오늘 본문은 다섯절 밖에 되지 않는 적은 분량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세계역사를 바꾸어놓는 엄청난 사건이 있습니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이 말씀은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 싶어 했는데 성령께서 막으셨다는 말씀이지요. 6절에 나오는 부루기아와 갈라디아땅은 , 루스드라에서 소아시아 반도 서북쪽 끝에 있는 무시아에 이르는 도중에 있는 지역입니다. 무시아에 가기전에, 소아시아 반도 북쪽에 동서로 길게 뻗은 지역인 비두니아로 가려했지만 예수의 영이 역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갔습니다. 드로아에서 밤을 지내는 중 바울에게 환상이 나타났는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바울 앞에 서서 간청하는 환상이었습니다. "마게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바울은 그 환상을 본 후에 곧 마게도니아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환상의 의미가 마게도니아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몇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7절에 보면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으셨어요. 바울은 애썼지만 성령께서 허락지를 않으셨어요. 무슨 말씀입니까? 말씀은 바울이 전하지만,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울일지라도 그 주체는, 전도의 주체는 바울이 아니라 성령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위대하다고하는 바울도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일뿐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아셔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바울은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바울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사람이 보기에 좋은 것과 하나님이 보기에 좋은 것이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이사야55:9) 바울 일행은 부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을 지나 무시아 앞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비두니아 쪽으로 가려고 애썼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길을 막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스팔트 길과 비포장도로는 같은 차를 운전해도 운전하는 방법이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 살면서 무엇인가 열심히 해 보려고하는데 자꾸만 길이 막히고 장애물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럴 때 지혜로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이라면 주의깊게 살피셔서 다른 길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길이 막혔는데, '믿는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는 말씀믿고 '믿습니다'하고 소양강 물위를 걸어보세요. 퐁당빠집니다. 믿음이 만능이 아니라 하나님 뜻을 분별하여 순종하는 지혜가 더 낫습니다. 무턱대고 믿는 것보다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살펴드리는 것이 성숙한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길을 막으시면 사랑하는 자에게 반드시 다른길을 예비해 놓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의 문이 막힐 때 반드시 다른쪽에 열린 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나 모든 장애물이 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마귀가 우리 앞을 막아 설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반드시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에 나가지 말아라"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구나, 하고 주저앉는다면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과 마귀의 역사를 분별해 내는 지혜야 말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둘을 신중하게 잘 분별해야 합니다.
1.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습니까?
6,7절을 보면 '성령이 못하게 하시고'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다'했습니다. 성령이 막으셨다 - 여러분 궁금하시지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막았다는 겁니까?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바울에게 '당신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말랍니다' 말해 주었는지, 꿈에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는지. 바울이 어떤 환상을 보았는지, 아니면 마음 속에 어떤 확신이 왔는지 - 성경의 내용만을 가지고서는 그 내역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를 분별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몇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⑴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는 이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시편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밤길을 밝혀 주는 횃불이나 등불같다는 말씀입니다. 횃불이나 등불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지거나 구르는 것을 막아 줄 뿐만아니라 위험한 길로 가지 않도록 보호해 준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내게 지시하는대로 가기만 하면 그길이 곧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볼 수 있는 눈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 때로는 설교를 듣다가 '아, 이 길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구나' 깨닫고 인도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어떤 문제로 고민하면서 말씀듣다가 '아 이것이구나'깨닫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설교는 일주일에 한번, 두 번 혹은 세 번듣는다해도 말씀은 매일 읽으셔야 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나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⑵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많은 경우 성령충만함은 기도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성령은 120문도가 뜨겁게 기도할 때 임하셨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충만'함을 입은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게됩니다. 요한복음 14:26입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 고요한 중에 깊이 기도하며 교제할 때 우리가 행할 것,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어떻게 하십니까? 당황하거나 방황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께 무릎꿇고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세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비우는 것입니다. 상식 이하의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까?' 제 경우는 기도하면서 '마음에 평안', '확신'이 오는 것을 경험하는데 그럴 때 '아! 이것이구나!하고 결정합니다. 그러면 대개 후회하지 않습니다. 마음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깊은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⑶ 때로는 하나님의 뜻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의 충고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좋은 믿음가진 이웃, 성숙한 믿음을 가진 선배를 만나는 일은 중요합니다. 좋은 충고가 바른 결정을 내리게 합니다. 잠언 23:19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너는 듣고 지혜를 얻어 네 마음을 정로(正路)로 인도할지니라." 어떤 결정은 내리기가 내게 힘들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도 확실치가 않아요. 그럴 때는 신실한 믿음의 선배나 목회자를 만나세요. 신령한 사람 만나려다 문제가 커질 경우 있어요. 아무 사람의 충고라고 다 받아들이지 말시라는 얘기입니다. 충고나 조언은 점쟁이의 점괘하고는 다른 것입니다. 신실하게 믿음 생활하는 선배, 믿음직스러운 이웃이 좋습니다. 모르는 사람은 금하시기 바랍니다. 부흥회도 아무데나 가지 마세요. 엉뚱한데 가서 응답받았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특별히 중·고등학생들. - 자신의 문제를 누구에게 얘기 합니까? 부모도 아닐 것이고 선생님도 아닐 것이고 대부분 친구에게 털어놓습니다. 경험없는 친구 얘기듣다 보면 소경의 인도를 받는 것과 다를바 없어요. 경험과 믿음을 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털어놓으세요. 때로 목회자의 말이, 선배의 충고가, 친구의 조언이 하나님의 음성이 될 수도 있습니다.
⑷ 하나님 뜻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환경의 변화에도 민감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예수의 영이 비두니아로 가는 것을 허락지 않은 것'을 바울이 어떻게 알았을까에 대한 대답으로 그때마다 '아팠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안질, 말라리아, 간질병으로 고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데, 그때마다 병이 재발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얘기는 아니지만 학자들의 추측이니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환경이 막을 때,- 장애가 생겼든지, 병이 났던지,- 억지로 믿고 나가는 것이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업을 하려 한다거나, 어느 직장에 취직을 하려고 하는데 계속해서 일이 틀려지고 할 때는 물러 서는 것도 방법입니다. 하나님 일이라면 길도 놓고 담도 넘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라면 기다리는 것도 한 방법이고 돌아가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속상해 하거나 주저 않지 마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성도 여러분.
걷지 않고 뛸 수 있습니까? 한번도 넘어지지 않고 잘 것을 수 없지 않습니까? 말씀을 보고 듣는 중에,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기도하면서, 때로 좋은 신앙 선배의 믿음의 조언을 통해, 환경 변화에 민감해짐으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분별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거스리지 않고 아름답게 순종하여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지경을 넓히시는 하나님.
성령께서는 왜 소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려고 한 바울의 계획을 중단시켰을까요? 바울이 가려고 했던 비두니아는 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지방으로서 당시 소아시아에서는 수준 높은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찍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왜 갑자기 바울 일행의 발걸음을 돌려 지금의 유럽인 마게도니아로 옮기게 하셨습니까? 어떤 사람은 바울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이야 말로 세계 역사를 바꾸어 놓는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합니다. 아시아는 문명이 낙후된 지역이 되었고 유럽은 선진국으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유럽은 기독교를 접하기 시작하면서 지난 1900여년 동안 세계를 주도하는 시구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바울과 그 일행이 드로아에서 마게도니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지나고 보니깐 대단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사랑한 것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였습니까? 그렇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두니아로 가고자하는 바울 일행을 성령께서 막으셨을 때 바울 자신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드로아에서 환상을 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 하나가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우리를 도우라'는 것은 소아시아를 버리라고 한 뜻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울의 뜻은 소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소아시아에 머물지 말고 좀더 세상을 넓게 보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작은 산위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큰 산위에서 세상을 보는 것의 차이는 무엇이겠습니까?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네 지경을 넓히라', '네 시야를 넓히라', '네 생각을 넓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장 문제가 되는 태도는 무엇입니까? 대부분 나 중심적인 태도입니다. 가족 중심, 내 자녀, 내 형제가 전부입니다. 조금 나은 사람은 교회를 생각합니다. 교회안에서도 다른 사람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내 생각, 내 경험이 전부입니다. '교회는 이래야 합니다'라고 열심히 침튀기면서 이야기 합니다. 어떻게 그런 확신이 가능합니까? 세상에 태어나서 자기가 본 것이 그게 전부입니다. 경험한 것이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해도 내 가정, 내 교회가 전부입니다. 우리 지경이 바로 거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우리 가족 우리 교회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온 인류, 온 민족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을 살펴봅시다. 바나바와 함께 했던 제1차 전도여행에서는 소아시아까지가 끝이었습니다. 그런데 실라와 디모데와 함께 한 제2차 전도 여행에서는 유럽까지 갔고 제 3차 전도여행에서는 로마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환상을 통해 바울 일행을 유럽으로 가게 한 것은 소아시아 보다 유럽이 더 중요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세계로 확장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 내 나라에도 제대로 복음을 전하지 못하면서 해외에 나가 전도할 필요가 있느냐? 내 날보다 그 나라가 더 중요 하다는 얘기는 아니지요. 내 나라 다 복음전하고 해외에 눈을 돌려야 한다면 불가능한 얘기지요. 그렇기로 하면 이 나라에 복음을 전하러 왔던 선교사들도 자기 나라를 완전히 복음화 할 때까지 기다렸다면 지금까지도 우리는 복음을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우리의 관심, 우리의 생각, 우리의 지경을 넓혀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탕자의 비유아시지요? 돌아온 탕자 동생에 대하여 첫째 아들, 형의 생각은 어떠했습니까? 환영했습니까? 아버지에 대하여도 못 마땅했습니다. 말 잘 듣고 성실하게 일한 자기에게는 국물도 없었는데 방탕하다 돌아온 동생에게는 소잡아 잔치를 해줍니다. 동생도 미웠습니다. 방탕한 생활하다가 무슨 낯으로 와서는 아버지 사랑을 독차지해? 미웠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아버지 마음을 먼저 이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눈에 눈물이 마를 날 없이 기다리던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 이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이 문제에 대해 바른 판단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어느 쪽이라 생각하십니까? '나는 이미 구원받았으니 남이야 어찌되었든 저네들 심는대로 거두는데 내버려두자' 이런 생각으로 살고있지는 않습니까? 영혼 구원에 대한 관심의 지경을 넓히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 곧 순종하여 떠나는 바울
"10바울이 이 환상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0절에서 우리가 두 가지 관심을 가져봅니다. 하나는 바울이 환상을 본 후에 어떻게 했습니까?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환상을 본 후에 곧, 바로 떠나려고 힘썼습니다. 곧 바로 순종했다는 말씀입니다. 환상 본후에, 하나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서 준비하고 제 할 일 마칠 때까지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곧 바로 떠났습니다. 때때로 성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은퇴 후에 이런 저런 교회일 좀 하고 싶다'는 얘기 종종 듣습니다. 목사로서야 반가운 소리지요. 그러나 성도 여러분. 정말 주의 일 하는 것은 은퇴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 있을 때, 기회가 왔을 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내 마음에 감동이 왔을 때 그 때 순종하지 않으면 불순종내지 비효과적인 순종이 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나는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을 섬기겠다' 감동도 왔고 자신도 동의했는데, 결단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하는 일 마다 안되니까 그제서야 신학해서 목사되겠다 -아름다와 보일 수도 있지만, 즉각 순종했다면 공부하기 편했고 많은 시간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하나님 편에서 좋으셨겠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하나님께서 감동주시면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수성이 사라져요. 오늘 우리는 힘든 중에도 3차 건축헌금을 했습니다. 건축헌금할 때 첫 번 생각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 두 번째 생각은 내 생각 세 번째 생각은 마귀 생각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권목사도 첫 번째와 세 번째 사이를 왔다갔다 했어요. 결국 첫 번째 생각으로 결정했습니다. 즉각 순종하는 것 쉽지 않지만 즉각 순종할 때 하나님이 함께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했습니다. 안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은 계속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안주하지 않고, 기득권을 포기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 중요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바로 안주 아닙니까? 춘천중앙 교회와 성도들 - '본토·친척·아비집을 떠나라'는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떠나야 합니다. 성전건축은 바로 옥천동을 떠나는, 기본의 모든 것을 떠나는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과거의 고정관념을 떠나세요. 과거의 경험을 기초로 새 인생·새 신앙의 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바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에 대하여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해석했습니다. 마게도냐가 지금 어디인지 아십니까? 내전과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한창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유고지역입니다. 아마 당시의 마게도냐 역시 이와 버금가는 영적인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생명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기껏이 마게도냐에 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도 마게도냐와 크게 다를바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 믿는 성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세상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십니까? 때로는 경제적으로 때로는 영적인 외로움을 호소합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예수가 필요해서 "우리를 도우라"고 소리지르며 손짓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도우라"는 음성이 들리십니까? 세계도처에서 인도네시아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몽고에서도 '와서 우리를 도우라'합니다. 순종할 때 역사는 일어납니다. 나가면서
오늘의 사건은 복음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건너가는 선교의 전환점입니다. 바울은 전도하면서 자기중심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성령의 역사하심을 좇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기도중에, 주위의 충고에서, 환경이 변화하는 모습 속에서 주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왜 소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라 하셨습니까? 유럽이 소아시아보다 더 중요하거나 더 사랑하기 때문이었습니까? 아니지요? 우리 믿음의 지경을 넓혀야 합니다.
하나님 명령에는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와서 우리를 도우라"이 음성이 들리십니까? 아버지의 안타까운 심정으로 돌아온 탕자를 품듯 그 마음으로 도움을 청하는 사람에게도 나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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