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의 중심지는 베뢰아입니다. 베뢰아는 마게도냐 평원 남쪽 올림푸스 산맥 기슭의 조그마한 언덕에 있는 도시로 데살로니가에서 남서쪽으로 90여km 지점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베뢰아는 '많은 물줄기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로 베뢰아 주위에 천연적인 샘들도 많았고 경관 역시 매주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바울과 실라는 데살로니가에서 생명의 위협에 놓여있었고 이를 걱정한 형제들이 그 밤으로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냈습니다.베뢰아에서도 두사람은 유대회당으로 들어가 말씀을 통해 예수가 구세주인 것을 증거합니다. 바울일행이 전하는 성경말씀을 듣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단지 '그들 가운데 몇 명만이 믿었으나'(4절) 베뢰아에서는 헬라인 중에서도 많은 귀부인들과 남자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깁니다.
13절을 함께 봅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일행을 핍박하던 유대인들이 90여km떨어진 베뢰아까지 좇아와 베뢰아에서도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하나 유의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사람들은 바른 얘기, 정당한 이야기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도 선동하는 얘기에는 쉽게 동요하는 것을 봅니다. 바울일행을 향한 유대인들의 박해 - 대단하지 않습니까?
끈질기지 않습니까?
일찍이 유대인들은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지였던 안디옥과 이고니온, 루스드라까지 좇아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바울을 돌로쳐 실신시켰지 않습니까?
반대하면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나 못하게 하면 되는데 왜 수십km 떨어진 곳까지 따라다니며 반대합니까? 우리 생각 특별히 춘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쉽게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갖은 핍박과 위협 속에 처했던 바울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기 전에 그랫지 않습니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로 맞아 죽어갈 때 뒤에서 돌 던지는 사람 옷지키고 있던 사람이 바울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죽는 모습이 너무나 평화로우니까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일주일 걸리는 다메섹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일주일이나 걸리는, 생각해 보면 참 대단합니다. 반대를 해도 그렇게 철저하게 반대를 합니다.
대단한 것은 바울일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차전도여행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습니까? 이고니온에서는 돌에 맞아 실신했다가 깨어난 후 다시 자신을 돌로쳤던 사람들이 머무는 성을 향하여 걸어들어가지 않습니까? 2차 전도 여행에서는 빌립보에서 그렇게 두드려 맞고 감옥에 갇혀서도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도 몰래 도망을 나와야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게 당하고서도 다시 회당으로 가서 말씀을 전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좇아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시끄러워지자 베뢰아의 신도들이 실라와 디모데는 남겨두고 바울만 피신시켜 아덴으로 보냅니다. 재밌는 것은 바울일행이 끊임없이 생명의 위협을 당했지만 그렇다고 은밀하고, 소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당당하게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를 전했습니다.
핍박하는 유대인이나 핍박을 당하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 일행 모두 - 생각해 보면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유대인 박해자나 바울 모두가 그토록 끈질기게 옥신각신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신앙입니다. 유대인들도 자신의 신앙때문이고, 바울도 자신의 신앙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나 바울은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떳떳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믿음의 확신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잘못되면 사람이 얼마나 잘못될 수 있나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이왕 믿으려면 철저하게 믿읍시다. 제대로 믿읍시다. 잘못된 것을 믿으면 외양은 같아 보이지만 결말은 엄청난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본문 전체가운데서 11절 한 절만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이 다른 곳 사람들보다 더 많이 믿고, 더 잘 믿었습니다. 12절입니다.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헬라귀부인들과 남자들도 많았습니다. 바울이 유독 베뢰아에서만 열심히 전도한 것은 아니었는데 왜 베뢰아에서의 결신자들이 다른곳보다 많았을까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11절에 있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紳士的)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여기서 몇가지 의미를 찾아 생각하며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신사적(紳士的)이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니 신사란 '예절이나 품행이 바르고 교양이 있어 젊잖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원어를 보면 '신사적인' 「유게네스테로이(ευγενεστεροι)」는 '출신이 좋은', '가문이 좋은' '고귀한' 의 의미로 상류층 사람들이 보여주는 고상하고 우아한 태도를 가리킵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더 신사적' 이라는 단어가 새번역 성경에는 '보다 마음이 넓어'로 번역되었고 공동번역에는 '마음이 트인'으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영어성경에도 'open-minded'(J.B)로 표현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사적인'이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몇가지 의미를 생각합니다.
① 먼저는 천성적으로, 태어날 때부터 성품, 심성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의 성격이 후천적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대개는 천성적입니다. 어떤 사람보면 술 잘먹는 사람있지요? 말술먹고도 끄떡없어요. 타고난 체질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기 좋아보이는 온화한 성품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거칠고 세상낙 좋아하고 예수 믿기 어려운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 믿고 거듭나는 경험을 하려면 시련도 겪고 매도 맞고 더 아파야 합니다. '신사적'이란 태어날때부터 바탕이 좋고 인간성이 좋은 사람을 말합니다.
② '열린 마음' '넓은 마음'을 뜻합니다. 'open-minded라는 말 많이 쓰지요? 열려있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입니까? 상대방의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상대방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이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세상 사는 것 참 쉽지 않아요. 때때로 사람이 얘기하는 것 듣고나서 한참후에 왜 그 사람이 그 얘기를 내게 햇나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형광등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 피곤합니다. 본문에 '신사적'이란 말의 의미는 편견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받는 마음입니다. 내 경험, 내 지식, 내 주장이 강한 사람일수록 추진력은 잇는지 모르지만 새로운 진리에 대하여 마음문을 열지 못하는 편견에 사로잡힌 불쌍한 사람입니다. 누가 무슨 얘기를 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열린 마음아닙니까? 특별히 말씀을 들을 때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목사가 왜 저런 설교를 할까? 머리 아프게 생각하지 마세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잣대가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고 판단합니다. 자신은 구태의연한 모습을 고집하면서도 언제나 남을 비판하고 판단합니다. 함께 축구경기를 보면 금방 티가 납니다. 열린마음을 가진 사람은 쉽게 우리편과 상대편의 전력이나 장·단점을 어설프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지켜봅니다. 우리편을 일방적으로 응원하지도 않습니다. 상대편 공격수의 수준높은 플레이를 칭찬하는 여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은 피곤합니다. 선수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감놔라, 대추놔라, 혼자 북치고 장구칩니다. 이런 사람과 함께 축구를 보면 이길 경기도 집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러쿵 저러쿵 떠드는데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들 귀가 따갑지 않겠습니까? 따가운 귀를 긁느라고 경기에 전념하지 못하니 질수 밖에요! (결혼을 앞둔 미스들은 결혼하기 전에 남자친구와 꼭 축구경기를 보세요. 그 남자가 열린마음인지 닫힌 마음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있는 사람은 대화해 보면 압니다. 진솔하게, 있는대로, 느낀대로 대화할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말 하면 이런 오해, 저말하면 저런 오해가 걱정되서 이말 저말 다 빼버리고 쓸데없는 얘기, 생명력 없는 농담이나 하다 헤어지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관계란 아무말이라도 다 할 수 잇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사람보면 상대방의 말을 정직하게 받지 못해요. 일단 의심부터 합니다. 나쁘게만 봅니다. 어두운면만 봅니다. -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도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신사적인 사람은 상대방에 대하여 긍정적을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좋은점, 좋은 기억만 생각합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아도 참고 끝까지 들을 줄 압니다.
춘천중앙의 성도 여러분.
열린 마음, 있는 그대로 듣고 받을 줄 아는 성도가 됩시다. 너무 재지 맙시다. 너무 따지지 맙시다. 편견을 접으세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열린 마음, 있는 그대로 듣고 받을 수 있을 때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잇습니다. 신사적인 성도가 됩시다.
2.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베뢰아 사람이 신사적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모습을 설명하면서 먼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새번역과 공동번역에는 '열심히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표현했습니다. 희랍어 '간절한 마음'은 파세스 프로뒤미아스(πασησ προθυμιασ) 인데 프로뒤미아스(προθυμιασ)는 '열심히' '자신해서' '준비된'의 뜻이고 앞의 파세스(πασησ) 는 '모든'이란 뜻으로 '모든 준비된 마음과 할 수 있는 모든 열심을 다하여"라는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집중적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란 full attention- 집중해서- concentration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받되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지난주 수요일(15일)에 수학능력고사가 잇었습니다. 한달후면 발표가 있고 발표와 함께 전체 수석합격자, 남,녀수석합격자,계열별 수석합격자가 발표되고 또 반드시 수석합격자의 인터뷰기사가 TV와 신문에 떠들썩 할 것입니다. 수석합격자들이 하는 말 가운데 꼭 들어 있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특별히 과외공부하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 그리고 꼭하는 소리가 "공부시간에 집중해서 공부했다, 수업시간에 집중해서 선생님 말씀 들었다" 아닙니까? 수년동안 신문 뒤져보십시오. 틀림없습니다. 공부잘하는 것 별것아닙니다. 얼마나 집중해서 공부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시험을 앞두고 허둥대는 학생들의 공통적인 모습은 영어공부했다, 수학공부했다. 국사공부했다 일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공부잘하는 사람은 맥을 잡고 일관성잇게 공부하지만 못하는 사람은 시험에 이것도 나올 것 같고, 저것보면 저것도 중요해 보이고, 그래서 이 책 저 책을 메뚜기 옮겨다니듯 이동하며 공부합니다. 이런 공부가 얼마나 기억에 남겠습니까? 많이 공부한 것 같은데 막상 시험문제를 딱허니 받아놓고 보면 이 문제가 국사책에서 나온 것인지, 국어책에서 나온 것인지 마구 헷갈립니다. 집중하는 것이 비결입니다. 큰아이가 중학교 3학년때 속초에서 세계잼버리 대회가 열렷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진학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만 다른 경험도 필요하다 싶어서 보냇습니다. 그러나 이 녀석이 돌아와서 쉽사리 공부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며칠 놀고나서 마음잡고 공부하겠다' '휴가 다녀와서 본격적으로 일하겠다' - 마음대로 됩디까? 안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을 듣던 사람이 집중해서 들을 수가 있습니다. 설교를 준비할때도 언제나 설교 생각뿐입니다. 신문을 보아도 대화를 나누어도 머릿속에는 언제나 말씀전할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여러편의 설교를 준비해야 할때가 있는데 마찬가지입니다. 때로 외부강사가 설교하는 주간에 한주 쉬고나면 다시 warming-up하는데 여간 힘들고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는 입장에서만 아니라 듣는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월에 부산제일교회(감리교)와 서울 평강장로교회의 부흥회를 인도햇습니다. 두 교회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말씀을 빨아들일 듯 듣더라구요. 집중해서 들어요. 조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어요. 하품하는 사람 물론 없구요. 집중해서 들으니까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은혜가 돼요. 은혜받아요. 때로 어떤 교회는 그렇게 산만할 수가 없어요. 말씀 전하기도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땅만 좋으면 무슨 씨를 뿌리든지 다 잘자라요. 열매도 풍성하게 열립니다.
성도 여러분.
때로 설교들으면서 딴 생각할때가 있지요?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는 말있지요. 예배후 친구만날 생각, 운동할 생각, 또는 설교자와 논쟁하려는 생각으로 듣는다면 믿음이 생길 수가 없어요. 설교들을 때 집중해야 합니다. 마치 배고픈 아이가 엄마젖 빨 듯 갈증난 사람이 한모금의 물을 마시듯 사모하며 갈급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참 좋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부흥회한다고 하면 몇시간 거리에서도 교파와 교회를 가리지 않고 모였는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설교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라디오방송, 케이블TV에서 언제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을 들을 수있다는 사실이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사라지게 합니다. 오히려 홍수속에서 진짜 마실 물이 없어서 고통당한 것처럼 수많은 말씀들 속에서 정작 영혼은 메마르고 텅텅비어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내가 문제입니다. 말씀을 듣는 내가 나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한 말씀 들어도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니 아무리 말씀이 넘쳐나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고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겟습니까? 성경읽는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제게 말씀하여 주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사모하는 마음, 집중해서 읽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잠이 안와 불면증의 고통을 호소하니까 믿음 좋은 권사님이 뭐라 대답한 줄 아십니까? "잠이 안오면 성경을 보세요, 성경보면 잠이 잘 옵니다" 성경을 수면제 정도로 아는 사람에게 말씀이 무슨 은혜가 되고 무슨 능력이 되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신사적인 베뢰아 교인들이 어떻게 했다구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 - 꼭 명심하셔야 할 것이 있어요. 예배시간에 늦지 말아야 합니다. 허겁지겁 겨우 와서 '말씀을 간절히 받더라' 그렇게 되겠습니까? 여유있게 조용히 앉아 하나님 앞에 "제가 여기 있나이다 말씀하옵소서"말씀을 받을 준비하는 사람이 바로 간절히 말씀을 받는 사람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더라"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신사적인 베뢰아 사람은 말씀이 사실인가 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詳考)하므로" 먼저 주목해야할 단어는 '날마다'입니다. 마음 내킬 때 한번 보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봐요. 날마다 들어요. 매일같이 반복해서 성경을 상고합니다. 상고(詳考)란 무슨뜻입니까? 새번역 성경에서는 '자세히 공부했다'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에서는 '연구했다'고 했습니다. 헬라어로 '상고하다'는 말 '아나크리노(ανακρινω)라는 뜻은 '자세하게 골라내다' '체를 쳐서 가려내다' '탐색하다' '조사하다'는 의미로 영어의 'examine'에 해당합니다. 베뢰아 교인들이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는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먼저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과 실제 성경이 어떻게 연관되어져 있는지를 자세하게 연구했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말씀 듣고 성경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먼저는 하나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주일예배에서 설교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듣고 나서 '오늘 설교가 괜찮았어' 라든지 '은혜가 됐다' 라든지 하는 정도로 끝이 아니라 집에 가서는 반드시 주보사이에 있는 속회공과와 성경본문을 펴놓고, 가능하다면 교회 homepage에 올라있는 그날의 설교 본문을 눈으로 보면서 하나 하나 집어 가며 확인하는 과정을 거칩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말씀이구나' '아 이런 뜻이 있었구나' 운동선수들 있지요? Golf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골프를 다 치고 나서 목욕하고 기분좋다하고끝내는 것이 아니라 다시 indoor연습장에 가서 그날 잘 되지 않은 것을 연습하고 확인합니다. 운동 잘하는 사람과 열심히 해도 잘 안되는 사람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끝이 예배끝이고 한주간 말씀끝이고 성경도 한 주간 던져 두었다가 주일 아침에 먼지털어서 들고나와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설교듣고 다시 집에 와서 직접 찾아보고 확인해 보고 나아가서 같은 본문이라도 매일 읽고 반복해서 의미를 되새기면 신앙이 분명해지고 튼튼하게 자라게 된다는 말슴입니다.
옛말에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編意自現)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난해한 책이라도 백번을 읽으면 그 뜻이 확연해 진다는 말입니다. 일주일에 한번 설교듣는 것으로 신앙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면 큰일입니다. 설교와 성경을 읽고 읽고 계속적으로 내 삶의 일부분으로 함께 나눌 때 신앙의 깊은 경지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읽고 읽다 보면, 묵상하고 연구하다보면 누구나가 성경의 진리와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오늘 말씀을, 성경의 본문을 내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적용입니다.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경공부를 통해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삶에 적용해서 내 삶과 인품이 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박사면 뭐합니까? 인품이 변해야지요. 생활이 변해야지요. 성경의 말씀을 내가 전적으로 믿는다면 오늘 내가 내 집에서, 내 직장에서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묻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을 날마다 상고했다는 말은 단순하게 연구했다는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이 맞는다면 구체적으로 말씀대로 살았다는 뜻입니다. 신사적이란 단순히 젊잖다는, 지적(知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믿는대로 행하며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듣고 읽으면서 무슨 생각하십니까? 말씀을 - 듣고 - 깨닫고 - 행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아닙니까?
11절에 비교급을 사용했지요?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 이라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아주 못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도의 결과 많은 사람들이 믿었습니다.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믿었습니다.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좇아와서 소동을 하자 신도들은 다시 바울을 아덴으로 보냅니다. 핍박도 끊임이 없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쉬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마치면서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타고난 성품도 좋았고 열린 마음이어서 어떤 말씀이든 그대로 받앗고 열등의식으로 비비꼬지 않았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집중해서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날마다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이 아닙니다. 날마다입니다. 들은 말씀과 성경을 대조해가며 어떻게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그대로 살것인가를 매일같이 생각하며 행했다는 것입니다.
춘천중앙의 성도들이 베뢰아 성도처럼 신사적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신사적인 성도이다" 열린마음 /집중해서 /날마다 연구하며 말씀대로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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