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믿을 수밖에 없는 사건 2002-05-31 18:42:21 read : 15554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요한복음 20장 24-29절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믿겨지지 않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새 엄마가 자기 아이가 아니라고 해서 젓가락을 불에 달궈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지져 화상을 입히는 일이 일어납니다. 학원비 때문에 엄마를 죽이는 사건도 일어납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해서 아내를 죽이고 남편을 죽이는 일은 이제 깜짝 놀랄만한 일이 못됩니다. 안타깝고도, 슬픈, 정말 믿기지 않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입니다. 또 세포를 배양해서 인간복제가 가능해졌습니다. 한 달 전 신문에는 중국에서도 인간복제가 시작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의심도 하지 않고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부활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부활은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벌써, 이 천년 전의 사건이라 믿지 않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1.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수밖에 없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먼저 믿어야 합니다. 신약 성경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믿을 수밖에 없는 명확한 이유를 네 가지 정도로 말합니다.
첫째,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뒤 아리마대 요셉에 의해 무덤에 장사되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무덤의 위치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과 로마인에게 공히 알려졌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당시 산헤드린 공의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회 회원인 요셉이 예수의 죽음에 개입되었다는 사실을 꾸며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록에 의하면,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 공의회의 일원으로써, 예수를 자신의 무덤에 묻어주었습니다. 그러자 이 이야기를 들은 불순한 유대인들은 그를 붙잡아 창문이 없는 석굴에 가두었다고 합니다.
둘째, 십자가 처형 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이 빈 무덤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당시에는 여자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취급해서 법정에서조차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먼저 빈무덤을 발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렇게 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예수의 부활 사건이 실제적으로 일어났던 사건임을 밝히려고 했던 것입니다.
셋째, 각기 다양한 처지와 상황에서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죽음에서 살아난 예수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목록을 밝히는데, 이는 실제로 일어났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이 사실이 그토록 빠른 시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는 것 역시 예수님의 부활이 전설로 일축해버릴 수 없는 엄연한 사실임을 말해줍니다.
넷째,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는 것을 갑자기, 또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유대교는 말세에 있을 전체적 부활 전에는 인간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죽음까지 불사하고 하나님이 예수를 살리셨다는 것을 어느 순간에 확고히 믿게 되었습니다. 만약, 어떤 획기적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제자들이 갑자기 변화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신약 학자 루크 존스(Luke Johnson)는 '초기 기독교 같은 운동이 생겨날 수 있으려면 사람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 모종의 강력한 체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좀 난해하셨죠? 제가 오늘 이토록 어려운 이야기를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이 사실들을 말씀드릴 때, 여러분의 마음 속에 부활에 대한 믿음이 생기셨습니까? 아니지요. 지식적으로는 동의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신앙적으로 받아드린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제가 아무리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삶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참된 부활신앙을 간직할 수 있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으십니까? 정말 믿으십니까? 옆 사람 눈치 보지 모시고 마음속으로 말해보세요. 제가 볼 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부활신앙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부활절을 되었는데, 기쁘지 않습니다. 지옥에 가야 할 나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셔서 천국 가게 해주셨는데, 그 기쁨이 삶 속에 넘쳐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 가운데도 '에이, 부활절이 되었으니, 헌금이나 많이 해야겠군!'하는 분도 정~말~ 어쩌면 있을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어? 오늘이 부활절이야!'하는 분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Godpeople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약 만 오천명정도가 설문조사에 응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죽어서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약 82%가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느냐의 질문에는 36%가 '행사를 따라 형식적으로 보내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으며, '특별히 다르게 보내지는 않는다'고 대답한 사람이 28.3%였으며, '진정 기쁜 마음으로 부활절을 보낸다'라고 대답한 사람은 불과 28.4%였습니다. 이어 부활절 문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는 '형식적으로 치러진다'고 말한 사람이 64.5%, '점차 세속 문화를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한 사람이 13.4%, '관심없다'는 사람이 13.4%나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설문조사 결과를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여러분도 부활 신앙을 믿는 것과 부활절을 지킨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우리에게 부활신앙이 퇴색되고 있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게 부활신앙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활절을 지킬 때, 형식적이고 무덤덤하게 지낼 수 있습니까?
2. 그렇다면, 부활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은 적어도 부활신앙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말해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무덤에 온 여인들에게 나타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으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자신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도마는 주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는지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자신의 두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믿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엄청난 사건 앞에서 이를 뒷받침해줄 만한 확실한 그 무엇을 원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도마는 부활을 알려고 했지, 믿으려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제자들이 환상을 보고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해도,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한 것 아닙니까? 그런데,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지 팔 일째 되는 날, 주님은 도마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로 하여금 못 박힌 손을 만져보게 하시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도 넣어보게 하셨습니다. 도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도마는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그때 주님은 도마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성도 여러분,
도마와 다른 제자들의 믿음을 비교해 봅시다. 누구의 믿음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습니까? 도마일까요? 아니면 다른 제자들일까요? 마치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왠지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세요. 지금 도마를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모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얘기로 듣기는 했지만, 그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던 사고의 틀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습니다. 오히려, 도마의 입장에서는 어떤 소외감이 느껴질 수도 있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 내가 없을 때 찾아오셨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는 그런 황홀한 순간에 자기만 빠져 있었다는 사실에 거부 반응이 생길 수도 있었습니다. 사람이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으로는 동의하지만 자기가 좀 소외를 당했다 싶으면 거부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도마가 믿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도마를 향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는 말씀은 어떤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을 도마를 향한 말씀으로 생각하지 말고, 나를 향한 말씀으로 받아들여보세요. 무엇보다도 부활이 지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쓴다면, 애를 쓰는 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부활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졸도설을 말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피를 너무 많이 흘렸기 때문에 졸도했다는 것입니다. 잠시 졸도했었는데 서늘한 동굴 속에 들어가니까 정신이 나서 동굴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몸을 칭칭 감은 채로 돌문을 옮겨 무덤에서 나올 수 있습니까? 또 어떤 사람은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허깨비를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성도 여러분, 너무 사랑해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며 도망해 버립니까? 또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제자들이 무덤을 잘못 찾아갔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무덤이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이자,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무덤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 같아서는 예수님의 부활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되면, 과연 누가 믿을까요? 아니, 믿기는커녕 누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걸면서 살아갈까요? 성도 여러분,
부활은 과학이 아닙니다. 부활은 사실입니다. 사실은 몸소 체험되어질 때 그것의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부활을 몸소 체험할 때야만 그 가치에 맞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진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능력이 없습니다. 부활은 믿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아멘?
둘째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는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이 말씀은 정말 축복된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도마처럼 손으로 만져보셨습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까? "복"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고 있는 삶은 과연 어떠한 삶일까요? 불신자에게 부활이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있게끔 보다 많은 합리적인 지식을 쌓아가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아니면, 정말로 부활을 믿고 간직함으로써, 말 그대로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답게 살기를 원하고 계실까요? 두말 할 필요 없겠지요. 하나님은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을 통해서 죄의 사슬이 끊겼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통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3. 그렇다면, 부활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요?
많은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지만,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1) 첫째, 부활신앙을 소유한 성도에게는 한계가 없습니다.
어쩌면 도마는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그 누구보다도 더 깊은 불안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할 때,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도마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인생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도마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려고 합니까? 손으로 만져봄으로써. 우리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뭔가 가시적인 것을 요구하는 도마의 모습이 우리와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요즘 우리 사회는 각종 비리 사건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 이토록 많은 비리가 있었습니까? 문제를 만나면, 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뒷돈을 댔기 때문 아닙니까? 우리는 문제만 생기면, 무작정 빨리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돈이면 다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결과 요즘 어떻게 되었는지 아십니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그 문제가 발생한 바로 그 지점이 자신의 한계인양 생각하고 뭔가 눈에 보이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만 합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은 한계를 뛰어넘는 신앙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보여주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을 굳게 닫고 집안에 있을 때, 노크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았습니다. 문이 잠겨 있는데 그냥 들어오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도마가 "손"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긋고 부활을 확인하고 싶어 할 때, 직접 만져보게 하심으로써, "손"이라는 그 한계마저 뛰어넘지 않으셨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재물이나, 능력에 대해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까? 육신의 연약함으로 한계를 그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져 있습니까? 잠언 24장 16절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그렇습니다. 상황 때문에 우리가 넘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을 주님을 만나기만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간절한 소원을 가지고 여러분의 손을 뻗으세요. 우리 주님이 그 손을 잡아주셔서, 나는 여기가 한계라고 말할 때, 우리 주님은 내게 힘을 주셔서 그 한계를 뛰어넘게 하십니다.
2) 부활신앙을 가진 성도는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섭니다.
약 두 달 전쯤에 TV에서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소연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납니다. 이 사람은 평소 성실하게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며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기 집 앞 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교통사고를 목격한 이 사람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증인으로 나섰습니다. 본 것을 말함으로써, 어떤 사람이 가해자이며, 어떤 사람이 피해자인지를 밝히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증인으로 나섰다가 어처구니없게 자신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슨, 증인으로써 거짓 진술, 즉 위증을 했다는 것입니다. 본 것 그대로 말했는데도 위증했다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통사고 전문가들이 봐도 이 사람이 증언한 것이 모두 진실인데도, 이 사건을 맡은 경찰만은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오점을 남기게 될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우리 시대는 함부로 "나는 분명히 그 사실을 목격했다"고 당당하게 나서서 증명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도마에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다"- 이 말은 사명입니다. 보지 못했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라는 명령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을 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도 세상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가족조차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집 사람도 믿지 않을 수도 있어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보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한 불쌍한 영혼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전해야지요. 듣게 해야 하지요. "이봐요. 주님 믿어보세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보세요. 힘이 솟아요. 기쁨이 넘쳐요. 답답했던 마음이 얼마나 시원해졌는지 몰라요."
성도 여러분,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부활하신 주님은 만나야 합니다. 내 삶 속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식적으로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삶에는 능력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언젠가 [뉴스위크(Newsweek)]지에 하나님의 존재를 끝까지 부인한 어느 과학자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 박사입니다. 그는 골수암에 걸려서 투병하다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하나님의 존재,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 그리고 그가 주는 영생에 대해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증거가 없는 한 확실히 알 수 없는 일이요, 확실히 알 수 없는 한 믿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자신의 기본입장만을 철저히 밝혔습니다.
어느 날 그는 미국의 큰 기독교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어떤 목사님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서로 옥신각신 이야기하다가 목사님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사랑을 믿습니까?" 그러자, 칼 세이건 박사가 "사랑을 믿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이 또 다시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까?" 칼 세이건 박사는 처음에는 사랑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해서 별의별 설명을 다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그는 사랑에는 그것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에도 이처럼 입증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믿기를 거부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믿음을 가지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알려고 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아마도 칼 세이건 박사는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논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아는 것만큼 믿지 못했습니다. 만약, 칼 세이건 박사가 자신이 아는 것만큼 믿었더라면 수많은 사람이 구원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류 역사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보세요. 그는 하찮은 어부였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께 택함을 받고 제자가 되었지만, 그는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는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예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증거하면 당장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에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라고 담대하게 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보이는 사람의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고 증거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돈은 사랑하지만, 사람은 귀하게 여기지 않지 않습니까? 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희생하면서 정말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생명 받쳐 일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대가 없이 한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을 시간 낭비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는 부활신앙이 있습니까? 그러면,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한 생명 살리는 일이 그 어떤 일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정리>
시간이 흐를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의 수도 줄어들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해도 그 믿음의 깊이가 매우 낮아, 정말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지 분간이 안갈 때가 더 많습니다. 성도 여러분, 부활신앙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더욱 악해져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부활사건을 증거해도 믿지 않을 것만 같아도, 이 길만이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유일한 길임을 증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부활신앙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더 이상 우리에게는 극복하지 못할 문제가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넘지 못할 한계가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증거하지 못할 곳이 없음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부디 바라기는 오늘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우리 춘천중앙교회 온 성도들이 부활신앙을 회복함으로 말미암아, 크게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작게는 자신이 처한 삶의 현장을 변화시키는데 쓰임받는 축복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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