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 배우는 고난극복의 비결 2002-05-31 18:41:42 read : 17101 내용넓게보기. 프린트하기
마태복음 16:21-28
인간이 겪는 고난 가운데 가장 큰 고난이라고 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겪는 고난일 것입니다. 사실,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두렵기는 하지만,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죽음이라는 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사는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기 위해 힘써 살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언제 죽을지, 또 어떻게 죽을지 안다면 어떻겠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삶의 모든 낙을 잃고, 하루 하루 살면서 남은 인생의 시간만을 계산하며 불안한 생활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주위에서 한두 번쯤은 시한부 인생으로 사는 분들을 목격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을 보면,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깝지 않습니까? 제가 존경하며 사랑하는 한 목사님이 있습니다. 이분 역시 지난 해 간암으로 앞으로 삼 개월-7월 4일에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슬프고 안타까운지 그분을 뵙고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사형선고를 받고 의사에게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왕 죽을꺼, 왜 하필 미국 독립 기념일에 죽습니까? 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서 독립하게 된 광복절에 죽으면 어디가 뒤틀립니까?"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하던 이 목사님은 아직까지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서 두 종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죽음을 담대하게 맞아드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죽음까지도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에게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것일까요? 오늘은 죽음이라는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고난 앞에서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지 오늘 읽은 마태복음 16장 21-28절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은 예수님의 생애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15장까지의 삶이 예수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작업에 해당된다면, 이제 이 16장 말씀 이후부터는 본격적인 사명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끊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킴으로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셨습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난데없이 제자들에게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분명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 그리고 장로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나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지금 예수님은 당신이 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서 알고 계셨습니다. 그 고난은 죽음이라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죽음이라는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향해 "나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던 제자들은 매우 안타까워했으며,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담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은 인생 "전체"를 그리며, 그것을 준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비록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겪게 될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하긴 했어도, 이 모든 것은 이전부터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광야에 나가 40일간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시험을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이곳 저곳 다니시며 복음을 전파하셨으며, 병든 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제자들을 직접 파송하셔서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마침내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당하게 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것들을 말해주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하나 하나의 사건들은 한 가지를 목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아시겠습니까?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께 주어진 사명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준비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평생토록 이 사명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 기도를 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마귀는 먼저 돌들로 떡을 만들라고 시험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돌들로 떡을 만들 수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두 번째 마귀는 성전 꼭대기로 예수님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떨어져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과연 예수님께서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을 수밖에 없었기에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거센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으며, 물위를 걷기도 하셨습니다. 그뿐입니까? 마귀가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유혹했을 때,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시면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었지만, 그러나 그러한 기회들이 당신의 사명과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 전체를 바라보면서 준비된 삶을 사는 사람은 사명을 잊지 않습니다. 어떠한 고난이 닥쳐오고 유혹이 몰려와도 준비된 사람은 사명 하나만을 붙잡고 앞으로 나아감으로 진정한 인생의 성공을 이룹니다. 그래서 고난이 닥쳐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많은 고난과 삶의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들을 사명을 위해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 전체를 그리셨고, 그렇기 때문에 사명을 깨달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하시는 모든 일마다 그 사명과 연관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당신과 같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를 그려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순간 결단하세요. 어떤 고난이 닥쳐와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고 말겠노라 다짐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 의해서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자, 나서기 좋아하던 베드로가 "예수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베드로에게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고난당할 때 어떻습니까? "내가 왜 이리 힘든 생활을 하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것일까? 하나님은 내게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 것이지?" 의아해 하면서, 하나님을 향해 온통 불평과 원망을 털어놓습니다. 평생 신앙생활하면서도 때때로 고난의 한복판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 본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난을 하나님의 일로써 생각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도 시각을 바꾸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보면서, 이것 가지고는 한 사람도 제대로 식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풍랑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는 거센 풍랑이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예수님에게는 그것은 그저 자연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풍랑을 명하여 잔잔하게 하실 수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문제 앞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그 문제를 바라보심으로써,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문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벗어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과 같은 시각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생각해보세요. 죽은 사람보고 '죽었다'하지 않고 '잔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베드로의 모습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뭔지 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했는데, 베드로는 고난과 죽음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무엇을 보았다고요? 고난과 죽음만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실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못하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겪게 되면, 문제만 바라봅니다. 문제만 바라보니 문제가 점점 더 커져 보입니다. 여러분, 고난과 축복은 항상 우리 앞에 나란히 놓여져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왕 바라볼 것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축복을 바라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문제를 극복하는 것을 꿈꾸는 것이 훨씬 유익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존스 그룹 창업자인 로리 베스 존스(Laurie Beth Jones)는 그의 책, "예수의 오메가 리더십(JESUS CEO)"에서 "예수님은 천국의 관점을 유지함으로써 모든 것을 극복하셨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면서 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몸소 그 죄 값을 치루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 천국의 소망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한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온 인류의 죄악을 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몸소 당할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한 것 역시 제자들에게 영혼을 구원하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미리 미리 준비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나 혼자 고난을 극복하고 나오면 그만이지!"하는 생각을 버리세요. "나만 행복하면 되지!"라는 생각 버리세요. 나 혼자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고자 했던 대표적인 경우가 누구입니까? 요나였습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기만을 바라면서 언덕 너머에서 니느웨 성을 멀끔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니느웨 성 사람들이 회개해서 망하지 않게 되자, 하나님께 "아니,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모두들 멸망시켜야 되지 않습니까?" 따졌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그늘을 제공해주고 있던 박 넝쿨을 죽게 함으로써, 찌는 듯한 더위에 노출시키셨습니다. 그러자 요나는 또 다시 원망합니다. "하나님, 니느웨는 멸망시키지 않고 왜 죄없는 박 넝쿨만 죽이십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하찮은 박 넝쿨은 아끼면서, 니느웨 성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는데, 내가 이것을 아끼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빌립을 광야로 보내어 에디오피아의 간다게 여왕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에게 복음을 증거하게 하셨던 것 아닙니까? 그뿐입니까? 예수님은 몸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필사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 성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깨끗케 하신 일입니다. 그때 주님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라고 혼내면서도, 그 성을 보시면서 얼마나 안타까워했는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23장 37절 말씀입니다. "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영적으로 비틀거리는 도시를 바라보시며 펑펑 눈물을 쏟으시며 울부짖으셨습니다. 왜 우셔야만 했습니까? 멸망할 예루살렘의 미래를 내다보시면서 우셨던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시길 원하는데, 이 세상이 그 영광을 누리기에 너무나도 타락했기에 안타까워 우셨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사나 죽으나, 밤이나 낮이나 하나님의 일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함을 깊이 마음속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사는 삶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제자의 삶입니다. 24-27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얼마나 제자답게 살기를 원하시고 계신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제자의 삶은 무엇입니까?
첫째,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24절 말씀을 함께 봅니다. "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을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부패한 옛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고, 철두철미하게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에는 이기적인 생각과 주장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조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드러내기보다 진실을 감추는데 우리 혀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노골적으로 사실을 위조하지는 않지만 은연중 자기 자신에게 스포트라이트가 돌아오게 만들며, 업적은 부풀리고 문제는 이렇게 저렇게 은폐하기 일쑤이지 않습니까? 이 모두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성도가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한다면, 진실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를 부인함으로써, 진실을 드러내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본을 좇아, 직장이나 가정에서 반드시 진실을 말하고 솔직하게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윤색과 속임수를 버리고, 정직을 편안히 여기는 버릇을 들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여러 면에서 위험이 오리라는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긴 안목으로 본다면, 자기를 부인하면서 진실을 이야기하며 사는 것이야말로 현명한 일임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8절에서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분들은 개인의 고통, 희생, 수난들을 가리켜 '자기의 십자가'라고 말하지만,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서 정치적인 야욕에 사로 잡혀서 정치 활동을 하다가 감옥에 간 것을, 예수님이 의미하신 '자기 십자가'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내가 노름하다가 거지가 된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 십자가'라고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자기의 실수로 비난을 받고, 자기의 실수로 욕을 먹게 되었을 때, "야, 나는 지금 십자가를 진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소욕을 따르다가 받는 고난은 절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내 것을 포기하고, 내 것을 손해보고, 내 것을 잃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희생하는 것을 말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듯이, 우리도 이웃의 짐을 대신해 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이웃들 중에 불신자가 있다면,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과연, 얼마만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혹은 이웃을 위해서 잃은 것이 무엇입니까? 또한 포기한 것은 무엇입니까? 희생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제가 정말 중요한 것을 알려드립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해도, 그 짐은 모두 주님께서 감당해주십니다. 믿으십니까?
셋째, 제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5-26절 말씀입니다. "25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26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세상욕심을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면서, 자신이 율법의 계명들을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그 청년에게 네게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시자, 청년은 뜨끔했습니다. 아마도 그 청년은 순간 "과연,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청년에게 말합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며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이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았던 관계로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천국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여전히 현세에서의 풍요로움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가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하기를 원하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라는 귀한 선물을 준비해 놓으시고 이것을 언제쯤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십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이 선물은 영원한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사람만이 쟁취할 수 있습니다. 세상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고 제자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정 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고난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 위험을 무릎 쓰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던 날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을 아셨습니다. 당신께서 감당하셔야 사명이 무엇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사명을 분명히 아셨기에 그분은 제자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며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 가운데 계십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먼저 발견하시고자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과연 나를 통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실까 늘 생각하면서 고난을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제자로써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부디 바라기는 우리 춘천중앙교회의 성도들은 그 무엇보다도 세상 욕심 버리고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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